한국교회의 신앙고백과 이단시비
김영재 교수 / 합동신학교
========
각 교파는 각자의 신앙고백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단적인 위험성이 내포된 교리가 강조된다면 그것이
자파 교회이든 아니든 논의하며 규명해야 한다.
묵과하는 것은 묵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당면한 문제들에 대해서도
교회는 공동의 논의와 공동의 신앙고백을 늘어놓는
해산의 수고가 있어야 한다.
========
이단이라면 기독교의 진리를 왜곡하는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이나 그를 따르는 무리를 일컫는 말이다. 이단은 사도 시대부터 교회 역사상에 늘 있어 왔다. 구약 시대에는 거짓 선지자가 있어서 사람을 미혹하였다. 그때는 선지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아 말씀을 전하는 시대였으므로 거짓 선지자를 분별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거짓 선지자들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은 것으로 주장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거짓됨은 주로 역사의 과정에서 사건의 진행을 통하여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사도 시대와 그 이후의 초기 교회 시대 역시 그런 점에서는 구약 시대와 비슷하였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서신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훼방하며 미혹하는 무리에 대하여 경계하였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 바울이 전한 복음 외에는 다른 복음이 없음을 역설한다(갈 1:8). 초대 교회에는 복음에 유사한 여러 문서들이 있었으나 사도와 선지자들이 증언하고 기록한 말씀을 가려서 정경(正經)으로 받아들였으며, 정경은 성령의 감동을 통하여 기록된 말씀으로 믿었다. 누구든지 성경 말씀을 왜곡하거나 성경 말씀 이외에 무슨 특별 계시를 받은 것으로 주장하는 자는 거짓 선지자요 이단임이 분명하게 되었다.
교회 역사 하에서는 시초부터 예수께서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부인하는 이단들이 있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유대교적 에비온주의는 예수께서는 그를 양자로 삼으시고 그리스도로 세우셨다는 것이라고 하는데 반하여, 영지주의적 신령주의에서는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사람되심을 소홀히 하거나 부인하는, 소위 가현설을 말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셔서 고난을 당하시고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그 모든 역사적인 사실을 이론화하고 신비화하는 것이었다.
이단으로 정죄하는 기준은 분명해야 한다.
교회의 신앙고백은 성경이 가르치는 기독교 진리를 밝힘으로써 미혹하는 이단의 가르침으로부터 교회를 보존하기 위하여 교회가 작성하고 채택한 것이다. 초대 교회의 신앙고백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하나님으로 영원 전에 나셔서 아버지와 성령과 함께 영광과 찬송과 존귀를 받으시는 분이시라는 삼위일체 교리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 하나님이시요 동시에 참 사람이시라는 것을 시인하는 신앙고백이다. 초대 교회의 신앙고백, 즉 사도신경과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경(325, 381년) 및 아타나시우스신경(약 500년)은 종교개혁 이후에도 로마 카톨릭 교회나 개신교의 교회가 다같이 공유하는 신앙고백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이나 사람되심을 부인하거나 그 진리를 저해하는 자는 적그리스도요 이단이다. 예를 들면 몰몬교, 통일교, 여호와의 증인 등은 성경 이외의 경전과 특별 계시를 주장하는 점에서 출발점에서부터 벌써 이단이며, 삼위일체 하나님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부인하므로 적그리스도적인 이단이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는 합리주의자나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인하는 유니테리안도 예외일 수는 없다.
교회사에 드러난 이단 사조와 신앙고백
그러나 교회 역사상 삼위일체 교리와 기독론 교리를 부인하는 자를 정죄하는 경우와 같이 교회가 잘못 가르치는 자를 이단으로 정죄함에 있어서 그 이유가 분명한 경우가 있었는가 하면, 또한 신학적인 견지에 따라서는 유동적으로 볼 수 있는 모호한 경우도 있었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적인 몸이요 교회의 역사는 그 유기적인 발전이요 성장으로 보기 때문에 교회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종교 개혁자들은 초대 교회의 신앙고백을 교회가 결정한 것이라고 하여 무조건 받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비추어 보아서 옳은 것이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종교개혁의 교회는 중세 교회가 허용하기로 결정한 성상 숭배와 성찬의 화체설은 잘못이라고 규정하였다. 로마 카톨릭의 신앙고백과 개신교 신앙고백의 중요한 차이는 곧 성례론과 교회의 제도와 교직자에 대한 이해를 포괄하는 교회론의 차이다. 그래서 중세 교회로부터 성례론 때문에 이단으로 정죄당한 사람의 견해를 개신교에서는 옳은 것으로 보게 된 것이었다. 중세 말기에 이르러서는 교회가 이단으로 처형한 사람들 가운데는 종교개혁의 선구자들도 있었으니, 개신교의 견지에서 볼 때 기독교 진리에 대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중세 교회의 규범은 전도(顚倒)된 것이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러한 전도된 규범의 많은 것을 그대로 견지하고 있는 점에서 개신교와 다르다.
종교개혁 당시의 루터파와 개혁파는 성찬에 대한 이해의 차이를 좁히지 못하여서 개신교의 연합을 이루지 못하고 각자는 다른 교회로 발전하였다. 성찬의 이해가 기독론의 이해와 상관 관계에 있기 때문에 성찬에 대한 논의를 중요한 교리 문제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초기에 루터파 교회에서는 오랫동안 성찬식에 개혁파 신자가 참여하는 것을 금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성찬과 관련된 기독론의 논의는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에 대한 사변적이며 현학적인 논의이기 때문에 결국은 서로를 용인하게 된 것이다.
중세 교회가 이단으로 정죄한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종교개혁의 교회도 함께 정죄할 수밖에 없는 이단의 무리였다. 12세기부터 있게 된 천년왕국 운동자들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왕국을 주창하는 수도사가 빈한한 농민층의 환심을 사고 지지를 받으면서 처음에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겸손한 설교자로 시작하여 그 다음에는 교주형의 지도자로, 나중에는 재림한 예수 자신으로 변신하여 호사스런 생활을 하는 한편, 열광적인 지지자들로 하여금 폭력집단으로 전락하게 만든 일들이 있었다. 1110년경에 일어난 탄셀름(Tanshelm), 1140년경에 일어난 유드 드 레토아(Eude de l'Etoile)가 그러한 대표적인 이단이었다.
종교개혁 당시에 신령주의(Spiritualism)와 교회 밖의 천년왕국 운동의 전통을 이어받은 제세례파는 개신교 교회와 로마 카톨릭 교회 양측이 다 이단시하였다.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분립하게 된 개신교 교회는 각기 자기 나라 말로 예배하는 민족 단위의 교회로 발전하였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인 각자가 성경을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는 자유를 구가하면서부터는 신학적인 견해의 차이를 가지는 그룹들이 많이 일어나 나름대로 신앙고백을 가진 다양한 교파 교회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16세기 중엽부터 일어난 영국의 청교도 운동, 17세기 말경부터 일어난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 18세기와 19세기의 부흥 운동과 그 여파로 인하여 많은 교파 교회가 생기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유럽에서 이주해 온 민족 단위의 그룹에다가 이러한 요소들이 곱해져서 수많은 교파 교회가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교파 교회들의 대부분은 자기들이 속해 있는 현실 교회를 개혁하며 성경대로 교회를 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루터교나 장로교회등 전통적인 개신교의 교파 교회에서 볼 때에는 이단적인 교파도 있으며, 또한 이단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수긍할 수 없거나 묵과할 수 없는 교리를 가르치는 교파들도 생겨난 것이었다.
이 시대의 문제에 대한 한국 교회의 신학적 대답은 준비되고 있는가
우리나라에는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이 먼저 왔었으며, 그들이 이식한 양 교회가 개신교 교회를 주도하는 교파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다. 1907년을 전후로 하여 일어난 대부흥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으로 한국 신자들의 경건 생활에 변화를 가져다주었으며 교회의 성장에 활력을 공급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 교회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부흥 운동의 여파에서 불건전한 이단 운동도 일어났다. 1920년대부터 한국 교회에 있게 된 이단들은 주로 종말론에서와 무속적인 접신주의에서 빚어진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경건주의적 부흥 운동이 천년왕국 신앙을 강조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한국적인 메시아주의와 접합이 되어 메시아를 사칭하는 자들이 일어났었다. 유명화는 예수가 자기에게 강림하였다고 하는가 하면, 황국주는 자신이 육신을 입은 예수라고 자칭하였다. 열렬한 설교로 사람들을 열광케 한 이용도는 이를 분별하지 못하고 자신이 잘못된 메시아주의에 미혹을 받았고 장로교와 감리교로부터 정죄를 받았다.
우리나라는 출발서부터 주로 미국의 교파 교회에서 온 선교사들을 통하여 선교를 받아 다양한 교파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의 신앙고백이라고 할 때 그것은 단일한 획일적인 신앙고백이 아니고 교파마다 나름대로 가지는 신앙고백을 말하는 것이다. 가령 장로교회 혹은 감리교회의 경우 각 교회는 각자의 신앙고백을 가져야 하고 거기에 충실해야 한다. 그리고 다른 교파의 신앙을 자파 교회의 신앙과 비교하여 비평을 하거나 평가를 하되 독선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상대방의 신앙고백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것이 전통적인 삼위일체 교리와 기독론 교리 또는 구원론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면 남의 신앙고백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단에 가깝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거나, 그럴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자파 교회 내에서 일어난 것이든, 아니면 다른 교파 교회가 근거하고 있는 신앙고백이든 간에 얼마든지 논의할 수 있으며, 또한 논의해야 한다.
6.25 동란 이후 박태선은 자신이 말세의 대환란기에 나타날 '감람나무'(계11:4)요 '동방의 의인'(사41:2)으로 자처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가산을 정리하여 신앙촌으로 들어오도록 유인하였다. 문선명은 자신을 문예수로 자칭하며 적그리스도적 메시아 운동가로서 활동하고 있다. 신자들로 하여금 교주와 종교를 위하여 재산을 바치고 노동을 제공하게 하여 대단한 경제력을 가진 집단을 형성하였다는 점에서는 양자가 다 중세의 천년왕국 운동의 이단과 비슷하다. 나운몽은 영지주의형의 이단이다. 그는 1960년대에 여러 교파의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낙인이 찍혔으나 기도원을 중심한 운동, 입신, 방언, 신유, 진동 등 신비주의 운동과 은사 운동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현재도 이런 유의 이단적인 가르침이 난무하다.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장로교 교인들도 이런 은사운동에 참여하는가 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건전하지 못한 것임을 분별조차 못하는 불감증에 걸린 것으로 보아야 할는지 모르겠다.
오순절 교회로 말미암아 시작된 방언의 은사운동이나 치유의 은사운동은 20세기 후반에 와서 급작스럽게 유행하게 된 운동이다. 성령 세례를 성도가 경험하는 제2의 축복이라는 견해는 성도들로 하여금 방언과 같은 은사를 받는 일을 절박한 과제로 생각하게 만들며, 이를 추구하게 만든다. 이러한 견해는 본래 육신적인 축복과 안녕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기복적인 종교심을 순화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더 자극하거나 조장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현세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신자로 머물게 한다. 여하튼 은사운동은 소위 삼박자 축복과 함께 오순절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에 속한다. 그러나 장로교회로서는 그러한 가르침의 시비를 가려야 한다. 치유의 은사운동에 대하여서도 그것을 그냥 묵과해서는 안된다. 묵과하는 것은 묵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방언과 치유의 은사에 관하여 말씀한다. 그러나 그러한 은사운동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아니다. 여하튼 이런 문제를 두고 교회적인 신학적 천명이 있어야 한다. 어떤 교회는 담임 목사의 가르침에 대한 비판을 용납하지 않고 절대시하며, 지교회의 예배에서 비디오나 테이프를 통하여 그 목사의 설교를 듣게 한다. 이런 일은 교리의 건전함과 불건전함을 막론하고 위험한 일이다.
이단의 미혹을 이길 수 있는 역사적인 신앙고백의 교육이 시급하다.
한국 교회가 대체로 신앙고백에는 관심이 소홀한 편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선교를 받아 이제 자라기 시작하는 교회는 신앙고백에는 관심이 적고 문제가 있으면 성경을 먼저 상고한다는 것을 관찰한 선교학자의 말과 같이, 그것은 아직 연륜이 얕은 교회의 일반적인 경향이기도 하지만, 교리 없는 기독교를 내세우는 경건주의적 부흥 운동의 영향을 크게 입은 까닭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한국 기독교 장로교회는 나름대로 토착화 신학과 세속화 신학의 신학적인 논의가 있고 난 이후, 1972년에 그들의 신학에 맞는 신앙 선언서를 내어놓았다. 통합측 장로교회는 1987년에 새로운 신앙 고백서를 내어놓았다. 그러나 보수적인 장로교회는 당면한 현실 문제와는 먼 거리에 있는 그래서 늘 덮어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새삼스럽게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받았을 뿐이었다. 교회는 마땅히 당면한 여러 가지 문제들을 의식해야 하며, 그것을 어떤 형식을 이용해서든지 거기에 대처하는 신앙과 신학을 천명해야 한다. 즉 한국의 재래 종교에 대한 언급이나, 한국적인 이단에 대한 경계나 기독교 윤리 문제 등에 대하여 신학적인 논의를 해야 하고 공동의 고백을 내어놓는 해산의 수고가 있어야 한다. 신앙 고백서에서 교회가 당면하는 문제들을 일일이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다룰 수는 없다. 그러나 신앙 고백서에는 당면한 문제들에 대한 답변을 얻을 수 있는 포괄적인 서술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의 교회 교육은 제자훈련이나 성경공부 일색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장로교회라면 교회 교육을 위하여 개혁주의적 신앙고백과 신앙 교육서(요리 문답)를 가르쳐 교인들로 하여금 기독교의 전통적인 교리를 이해하고 체계 있는 신앙을 갖도록 교육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제자훈련을 위한 교재나 선교단체에서 사용하는 성경공부 교재를 사용하거나 직접 성경을 교재로 사용하여 성경공부에만 열중하게 만든다. 이것이 한국 교회의 전체적인 분위기이다. 그러나 그런 교육만으로는 성도들로 하여금 성숙한 분별력 있는 신자가 되도록 하는데 충분하지 못하다. 모든 이단들도 그들의 주장을 성경에 호소하므로, 성경공부를 좋아하고 거기에 익숙해 있으며 체계 없는 성경 지식을 가진 신자들에게 그들의 가르침은 동등한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는 아니, 교회의 역사와 전통을 존중하는 교회는 교리 없는 기독교를 주창하는 경건주의적 부흥주의에만 머물지 말고 신자들로 하여금 역사적이며 전통적인 교회의 신앙고백에 근거한, 기독교 교리를 갖춘 뼈대있는 신앙으로 이단과 이단적인 잘못된 가르침에 미혹을 받지 않고 경건한, 윤리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도록 가르쳐야 한다.
이단, 사이비 어떻게 막을 것인가
임한창 기자 / 국민일보
국제종교문제연구소 탁명환 소장 피살 이후 한국 교회는 이단.사이비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이단.사이비와의 싸움은 곧 악한 영과의 전투이다. 이제 한국 교회는 이 문제를 어떤 개인에게 위탁함으로써 과중한 짐과 위험부담을 안겨 주기보다는 연합 전선을 구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비등해지고 있다.
한 개인이 이단.사이비 문제를 연구하고 그 대책을 강구하는 데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연구 과정에서 편견이나 개인적 감정이 작용할 소지가 많고 그만큼 위험도 따른다.
탁소장이 그 동안 72차례에 걸쳐 테러를 당했다는 사실이 이를 잘 증명하고 있다. 실제로 탁소장은 지난 91년 교계 인사들에게 보낸 양심 선언서에서 {누군가가 나를 죽이겠다는 협박과 정보가 계속 들어오고 있다. 최근 시시각각으로 죄어 오는 이단들의 총공격에 위험을 예감한다}고 밝혔다.
탁소장은 {어쩌면 이 글이 내가 쓰는 마지막 유서가 될지 모르며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나는 자살을 할 나약한 사람이 아니다}며 엄습해 오는 공포감을 솔직하게 고백했었다.
한국 교회의 총체적 지원과 관심을 등에 업지 못하고 탁소장이 고군분투하다 보니 그 과정에서 감정적 대립과 오류가 뒤따르게 마련이었다.
기독교계에서는 이제 범교단적 [이단.사이비문제연구소]를 발족시킬 때가 왔다고 주장한다.
각 교단에는 [이단.사이비 상담소] 등 나름대로 이 문제를 연구하는 기관이나 조직이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이것도 몇 사람에 의해 운영될 뿐 신학자나 목회자들의 총의를 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어느 교단의 한 노신학자는 {총회가 어느 교회를 사이비로 규정하는 과정에서 단 한번도 내게 자문을 구해 온 적이 없었다}며 과연 누가, 어떤 자료와 신학 지식을 토대로 이단.사이비를 규정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현재 한국 교회 내에서 이단.사이비 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은 20여명 정도. 그러나 이들 중에는 △신앙 △도덕성 △객관성에 있어 확고한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 한 예로 통일교 문제를 다룬 연구 위원들이 개인의 의견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감정 대립으로만 치달았던 것을 제시할 수 있다.
이제 [개인 병원 차원]의 [이단.사이비문제연구소] 보다 [종합병원]의 성격을 띤 모임의 출범을 한국 교회는 요구하고 있다.
이단.사이비의 연구와 규정은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다. 한국 교회 정서상 일단 이단이나 사이비로 규정이 되면 그 무서운 주홍 글씨를 좀처럼 지울 수가 없다. 일단 그 교회나 단체는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다. 그러므로 종합적인 진단이 선행돼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이단.사이비문제연구소]는 목회자 조직 신학자 기독교 윤리학자 교회사가 등이 모두 참여하는 연합체가 돼야 한다는 것이 교계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이단.사이비의 경우 윤리적으로도 약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각 방면의 권위자들이 냉철하게 문제점을 찾아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국 교회의 장래를 위해서도 교회는 옥석이 가려져야 한다.
그러나 교단이 크다고 해서 기득권을 행사하거나 새로운 연구소가 [힘의 각축장]으로 돌변해선 안된다. 한국 교회의 풍토에서는 사업의 목적보다는 누가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 이제는 환골탈태의 자세로 한국 교회가 연합해 이단.사이비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한기총 사이비집단대책분과위원회는 이미 92년 7월 14일 성명을 내고 영생교 승리 재단의 사이비성을 경고한 바 있었다. 한기총은 여야가 합동 조사단을 구성해 각계 각층에 침투한 영생교 비호 세력을 가려내 의법조치할 것을 촉구한 바 있었다. 영생교가 종교를 가장한 범죄 집단이라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을 정부에서 가볍게 여겼던 것도 한국 교회의 응집된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성교회는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한다]는 사도신경을 고백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 교회는 이단.사이비에 공동으로 대처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고려신학대학의 오병세교수는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17장에서 아덴의 아성에 들어가 사이비에 현혹된 사람들에게 예수의 부활을 전하면서 [여러분을 보니 종교성이 많도소이다]라고 말했다}면서 {탁소장 사건을 계기로 한국 교회가 배타성을 버리고 연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영탁목사(합신)는 {수준 높은 신학교육을 위해 한국 교회 전체가 노력하는 것도 이단.사이비를 막는 길이 될 것}이라면서 교육의 강화를 주장했다.
국제교회성장연구원장 이영훈목사도 {이제는 이단.사이비 문제와 그 해결을 개인에게 맡길 수는 없다}고 전제하고 연합기관에 의한 연구와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는데 인식을 같이했다.
한국 교회는 탁소장 사건을 계기로 이단.사이비에 대해서만큼은 힘을 결집시켜야 한다. 기독교는 다양성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이것은 기독교의 약점이면서 강점이 될 수도 있다.
범교단적인 [이단.사이비문제연구소]가 설립돼 나름대로 권위를 갖게 된다면 정부나 검.경찰도 이단.사이비를 발본색원해야 한다는 교회의 목소리를 관계법이 없다는 이유로 외면할 수만은 없다는 것이 교계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교회 반성부터 하자
김 영 재 교수 / 합동신학교 교수
탁명환 소장의 죽음을 애석하게 생각한다. 그의 피살 사건은 사회 각층의 모든 지각있는 사람에게 충격을 주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특히 기독교인들에게는 더욱 충격적인 것이다. 이단과 사이비 종교를 비판하고 경고하던 이가 피살되어서도 그러하지만 살해자가 교회라고 이름하는 종교 집단에 속한 사람이어서 더욱 그러하다.
매스컴의 보도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신흥 종교와 사이비 종교단체가 3백 50개나 되는데다가 거기 속한 사람들이 자그마치 2백만 명은 될 것이라고 한다. 신흥종교와 사이비 종교가 이렇게 득세하는 것은 사회의 불안을 대변하는 것이라고들 말한다. 그것은 사회학적인 견지에서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의식을 가진 기독교 신자나 교회를 섬기는 봉사자라면 그렇게만 말할 수 없다.
다수의 사이비 종교가 기독교의 이름을 띠고 있어서 그러하고 사이비 종교와 건전한 기독교 교회를 분간할 수 있는 한계선이 분명하지 않다고 말하기 때문에도 그러하다. 교회가 제사장의 임무를 다해야 하는 것이라면 기독교적 이단과 사이비 종교의 발호에 대하여 교회는 그 원인이 무엇이며 그것에 대하여 얼마나 책임을 지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당국은 사이비 종교를 법에 따라 철저히 척결하겠다고 말한다. 나라의 법을 어기는 개인이나 단체는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뚜렷이 법을 범하는 일 없이 종교라는 미명 하에 사람들을 현혹하며 눈에 뜨이지 않게 가정을 파괴하고 사회를 좀 먹어 가는 사이비 종교를 당국이 무슨 수로 규명하며 어떤 명분으로 다스릴 것인지 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기독교적 이단은 기독교 안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솔직히 인정하고 교회가 겪어야 하는 낭패요 아픔임을 감수하면서 대처해야 한다. 이단과 사이비 종교의 원인을 사회 탓으로만 돌리지 말고 건전하다고 자처하는 교회 자체가 사이비화 될 수 있는 요소를 지니고 있거나 온상의 소지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할 것이다. 이단은 교회 역사에 늘 있어 왔기 때문이다.
교회는 일찍이 금세기 초에 부흥 운동을 경험하였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고 윤리적인 새로운 삶을 지향하게 하는 성령의 역사였다. 그런데 1920-30년대에 이르러 이단 운동이 일어났다. 미국에서도 19세기 초에 있었던 각성 운동에 잇따라 불건전한 신앙 운동이 일어난 것과 비슷한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감격과 뜨거움을 바라는 나머지 사람들은 쉽게 열광에 도취하려 하기 때문이다. 6.25동란 이후에 박태선교를 위시한 여러 이단 운동이 일어났다. 이단 운동의 특징은 성경을 나름대로 믿고 해석한다면서 전통적인 교회의 교리를 왜곡하는 것이다. 종말론적인 신앙을 지나치게 강조하며 성령의 충만을 빙자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을 도피하게 하며 열광하게 한다.지도자는 교주가 되고 거짓 메시아가 된다.
성경 말씀으로 미혹하는 이단에게 교회가 민감하게 대처하려면 성경 말씀에 충실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역사적인 교회의 교리와 신앙고백을 존중해야 한다. 한국 교회는 교리 없는 기독교를 말하는 경건주의적 부흥 운동의 영향을 받아 교리를 중하게 여기는 면이 취약했음이 사실이다. 근래에 와서는 교리적 방향 없는 성경공부에만 치중하고 교리 교육은 소흘히 하고 있다. 여러 교파들이 선교와 복음 사역을 위하여 협동하더라도 교리적인 기치는 뚜렷해야 한다.
이단과 사이비 종교는 어지럽게 분열된 교회들 사이에 쉽게 은닉처와 서식처를 발견한다. 한국 교회가 선교와 교회 성장만을 미덕으로 알고 추구해 왔으며 윤리적인 삶과 교회의 사회에 대한 기여는 소흘히 한 것 역시 반성할 일이다. 열광적으로 예배하는 것이 열병처럼 번지고 있다. 창조주이시며 구원의 하나님께 우리는 감격과 뜨거운 감사로 예배하되 경외하는 가운데 차분히 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우리의 삶 전체로 하나님을 섬길 수가 있다.
따지고 보면 우리 교회 안에는 이단과 쉽게 구분할 수 없는 면이 한두 가지만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교회는 자체 안에 이단이 그 쓴 뿌리를 내리는 것을 극소화할 수 있도록 각성하여 곧 스스로를 개혁하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진력해야 할 것이다.
사이비, 이단 식별과 대책
임한창 기자 / 국민일보
이단.사이비 종교 집단을 어떻게 식별할 것인가.
한국 교회는 탁명환씨 피살 사건을 계기로 정통 교리와 이단.사이비를 구별하는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는 기독교인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헌법에 종교 자유가 보장돼 있고 기독교 불교 유교 민족 종교 등의 다종교사회로 발전해 왔다. 이 과정에서 일부 악덕 사이비 집단들이 종교의 탈을 쓰고 선량한 국민들을 미혹하는 사태가 속출하고 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는 최근 "이단.사이비 종교 집단 식별 방법"을 제시해 주목을 끌고 있다.
한기총은 이단.사이비 종교 집단의 특징으로서 △교주 신격화, △비민주적 독재 체제, △금품 강요, △가정 파괴, △종교의 탈을 쓴 범죄 행위, △축복.저주를 내세운 신자 미혹, △혹세무민 등을 제시하고 있다.
이단.사이비는 보통 범죄 집단과 같은 점조직을 가지며 비밀 유지를 강조한다. 희생이나 맹종을 강요하며 탈퇴 시에는 협박을 일삼기도 한다. 조직 내에는 반드시 해결사가 있으며 이 해결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주가 원하는 바를 행동으로 옮긴다.
성직자를 교주로 신격화하거나 축복, 저주를 앞세워 신자들의 인격을 학대하며 금품을 강요할 경우에는 속히 그 집단에서 탈퇴할 것을 기독교계 지도자들은 충고하고 있다.
한기총은 이단.사이비의 첫번째 식별 기준으로 윤리성을 들고 있다. 가정 파괴 성폭행 혼음 감금 노동력과 임금 착취 등을 일삼고 있다면 이는 명백한 이단.사이비라는 것이다.
두번째 기준은 사회성이다. 사기 횡령. 공갈 협박. 금품 갈취. 인권 탄압, 사회질서문란, 공공질서 파괴를 일삼는 것이 이들의 특징이다. 일단 이 집단에 오래 몸담으면 사람들은 사회에 대한 적응력을 잃어버린다. 결국 맹신자로 전락해 교주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단.사이비 여부를 비추어 보는 세번째 거울은 국가관이다. 교리를 내세워 반국가적 행위를 하거나 군 입대를 거부하기도 한다. 구성원들 간의 유대 강화와 신앙 무장을 이유로 집단생활을 권장한다.
네번째는 종교 집단이 어느 교단에 소속돼 있는가를 살펴 보아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교단 개념이 희박하다. '교회'라는 간판이 걸린 곳이면 의심 없이 찾아가기도 한다. 기독교인들은 반드시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가 어느 교단에 소속돼 있는가를 확인해야 한다. 교단으로부터 관리와 감독을 받는 교회는 한 개인에 의한 독선적 운영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이단.사이비 종교는 기성교회나 신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교회가 전혀 제 역할을 못하니 우리가 새로운 질서를 세워 나가자}는 등의 말로 사람들을 흥분시킨다.
다섯번째 기준은 경제권을 누가 쥐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단.사이비는 종경합체(宗經合體)를 이루면서 경제 이익을 추구한다. 재산은 교주가 사유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한기총은 일반인들이 교회를 선택할 때 최소한 윤리성 사회성 국가관 교단 소속 경제권 등 다섯 가지의 거울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다.
예수원 원장 대천덕 신부는 기독교에 있어서 반쪽 진리는 곧 비진리라고 주장한다. 성경 전체를 균형 있게 믿지 않으면 이는 '반마리의 코끼리'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한 마리의 코끼리는 유익을 주지만 반으로 잘린 죽은 코끼리는 파묻기 위해 구덩이를 파는데 많은 돈이 들 것이다. 죽은 코끼리의 썩는 냄새도 진동할 것이다. 반 마리의 코끼리는 없는 것보다 못하다. 반쪽의 기독교 진리란 악취를 풍기는 코끼리 반 마리와 같다는 것이 대천덕 신부의 설명이다.
사이비 종교 집단의 창궐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역시 기독교계이다. 일반인들로 하여금 기독교에 대한 강한 불신감을 조장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기총은 국민들이 종교를 택할 때 어떤 점을 유의해야 하는가를 밝히고 있다.
첫째, 성직자의 윤리 생활과 청렴도를 살피라.
둘째, 성직자가 정통 교육과정을 이수했는지의 여부를 확인하라.
셋째, 동산과 부동산 등의 재산이 공익을 위해 사용되고 있는가. 한국 교회는 지금 몸살을 앓고 있다. 90년대 초반부터 이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92년 10월 28일 휴거론', 범죄를 일삼는 이단.사이비의 창궐로 교회 성장이 어려운 실정이다.
우리나라의 이단.사이비는 무려 4백 9종이 있다. 불교계가 78종파로 가장 많고 기독교가 70종파, 증산계가 68종파에 이른다. 외래계도 40종파가 있다.
대부분의 한국 교회는 성경적이고 건전함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은 의심스런 눈빛으로 교회를 바라보고 있다.
이제 기독교인들이 먼저 이단.사이비를 식별하는 방법에 깊은 관심을 갖고 다시 한 번 영혼 구원의 전장에 뛰어들어야 한다. 지금이 바로 전도할 때이다. 어려움이 닥칠 때 움츠러드는 교회나 신자는 성장할 수 없다. 기독교의 진리는 결코 악취를 풍기는 '반 마리 코끼리'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기독교 문화 형성과 신자의 입
민정춘 간사 / 전 한국기독교 총연합회
{{그래도 한국 교회는 희망이 있습니다} (서울: 새한기획 출판부, 1983), pp.140-45. }}
문화 개념은 간단하게 언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화의 주체는 인간인데 문화를 이해하려면 인간이 무엇 때문에 문화적이어야 하는가를 분석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동물과 같이 먹고, 자고, 병들면 죽고, 한 세대가 가면 한 세대가 오는 것으로 외형적인 면에서 자연적 현상은 다름이 없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동물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지식의 확장, 지식으로의 자연 극복, 이성의 발달, 생활을 언어로 장식하며 자연을 넘어서는 경험으로 '인간의 우주'를 만들어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동물이면서 동물이 아니다.
이러한 '인간의 우주'의 성격을 문화라고 통칭을 한다.
그러므로 문화는 인간 삶의 총체적 개념이다. 인간의 삶을 종합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의도에서 서술한 것이 문화라고 정의함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할 수가 있다. 문화사를 살펴보면 전통 문화 대부분이 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다.
전통 문화는 종교 문화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종교 문화는 인간공통체에 새로운 사고(思考)와 삶의 정체를 형성하도록 모든 기회와 정신을 제공하여 왔다.
반면에 종교 문화 형성을 위하여서는 종교 자체에 '깨끗함'이 있어야 하고 '뜨거움'이 있어야만 '얼'이 담겨지고 모든 인간들에게 스며들 수 있는 영롱함이 비추게 된다.
언제나 문화에는 '동기'와 '분위기'와 '지향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종교 문화란 종교적인 동기와 분위기가 움직임을 갖는 지향성을 보이게 되어 비로소 형성된다.
종교 문화의 특징은 종교에 몸을 담고 잇는 개인의 독특한 종교적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증인이 되며 논리를 주장하고 종교 의례를 실천함과 동시에 공동체의 생활 규범을 거치는 과정에서 형성이 된다.
이를테면 종교 문화는 종교가 뜻하고 있는 본래의 목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비롯되는 삶의 형태이다.
그런데 종교가 사회에 존재하면서 펼치기를 원하는 종교 문화가 뜻한 바대로 되어지지만은 않는다. 종교의 교리적 특수성이 대중에게 전달될 때 부정적인 반응을 받게 될 수도 있고, 종교 문화의 전달자이자 창조해야 할 종교 공동체의 소속원의 삶에서 보여지는 이원론적 삶의 방식이 거부 반응을 갖게 하고 종교 문화를 형성하는 데 큰 장애 요인이 된다.
교리적 특수성으로 인한 거부 반응은 종교 스스로 종교 범위 내에서 빚어지는 체험이 대중화할 수가 없고 사회에 보편화될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에 앞으로 전달의 '묘'를 연구하면 되겠지만, 소속원들의 신앙과 생활의 이원화가 주는 충격은 삶의 궁극적 변화와 실천이 없이는 해결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 문화 형성에 부정적인 반응들에 대하여 지금까지 종교측에서는 걸맞지 않게 '어두운 세력의 발악', '구원과는 관계가 없는 못된 사람들'이라는 단정적인 말로 받아 드려지지 않고 있다.
만약에 이와 같이 종교가 자기 주장과 교리를 펴는 데만 골몰하여 자신들이 기반으로 해서 살아가야 할 사회의 반응과 형편을 무시하고 가볍게 여긴다면 아름다운 종교 문화 형성은 안되고 독선과 배타적인 문화가 형성되어 사회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종교 속의 종교로 존재할 뿐이고 사회와 인간들을 따스하게 깨우치며 새생명을 일깨워주고 이끌어주는 종교가 못되고 유치하고 말이 많으며 성가신 종교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가 자신의 주장을 어떻게 다른 사람과 사회에 내놓고 인정을 받느냐, 어떻게 깨우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사뭇 심각한 문제이다.
1990년 문화부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기독교계에 방송국이 두개이고 주간신문이 24개, 월간지가 62개, 격월간지 6개, 계간지 등 모두 합하여 105개의 정기간행물이 발행되고 있다.
여기에 개교회들과 단체들이 임의적으로 발행하는 단행본들과 정기간행물, 교회 지도자들의 자료집, 설교집 등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고 있고 승인받지 못한 가운데 발행되는 각종 간행물이 기독교의 교리와 자신이 믿는 바에 대한 당위성을 주장하고들 있다.
그러나 쉽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많은 종류와 부수가 쏟아져 나오는 기독교 출판물이 사회와 기독교계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제작자의 의도대로라면 어디서나 모든 사람의 눈에 띄어야 하고 읽혀져야만 한다.
하기야 기독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발행한 것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지만, 발행자는 꼭 기독교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만을 목적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읽고 보고 듣고 유익을 얻길 바라는 귀한 소식들을 실었기에 읽혀지지 않고 보여지지 않는다는 것은 태연스럽게 여길 수만은 없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종교 문화의 대변자'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 출판물들을 보면 사회를 설득시키기에는 '지식'과 '열정'이 부족한 감이 없지 않다.
언론이 갖춰야 할 '지식'은 기독교의 '왜'라는 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해 주며 설득시킬 수 있는 것이고, '열정'은 기독교의 신앙 자체가 특수한 것이고 보면 이를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단정적인 태도나 단순한 태도를 지양하고 기독교의 본질을 행동으로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런데도 기독교계의 언론과 잡지들을 보면 안타깝고 아쉽고 나가서는 아까운 생각마저 든다.
'지식'도 없고 '열정'도 없이 다듬어지지 않은 모습을 가지고 사회를 대하려고 하는가 하면 지금의 언론을 유지하기 위한 유치한 광고, 개인의 홍보를 위한 생명력 없는 기사들이 넉넉한 공간을 메울 때 짜증스럽기까지 하다.
옳고 당연한 내용을 전달할 때 그것을 좀더 효과 있게 전달하기 위하여 전달 받아야 할 사람들의 현대적 감각과 취향과 인격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독선이고 악담이 될 수가 있다.
아무런 내용과 노력과 덕(德)을 갖추지 않고 외치는 소리는 그저 '들을테면 들어라'는 오만한 태도가 아닐 수가 없다.
문화는 언어의 조건이고 동시에 언어의 산물이다. 지금과 같이 기독교 언론들이 듣기 거북하고 보기 역겨운 무성의한 목소리로 사회를 향하여 소리치기를 계속한다면 본래 기독교가 목적하는 바를 달성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기독교 문화의 확산도 기대할 수가 없게 된다.
지금도 기독교계의 한편 사람들은 '성령화'(聖靈化)를 부르짖으며 '성령으로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목적으로 많고 높은 목소리를 외치고 있고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주일 강단에서 한 소리를 아깝다고 하여 화려하게 출판하여 펼쳐 보이고 있다. 그리고 바쁘게 살아가는 사회인들을 향해 '귀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하고 있다.
또 전체는 아니지만 기독교 출판의 한구석에 엉망인 채로 심술스런 모습까지 있는데- 그것은 이단(異端) 대처하겠다고 하면서 행하는 횡포이다. 이단으로부터 자기 울타리 안의 사람들을 보호하고 진리를 사수하겠다는 의도로 자행되는 것은 출판물로 이단에 대한 규정, 규탄, 공격적인 언어와 표현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동정이나 동조함을 받을 수가 없는 것들로 차 있다.
이런 표현들이 해당되는 신도들이 당해야 하는 고통스러움이나 피해는 아랑곳하지 않고 맹렬히 자신의 것을 지킬 것만을 강조한다. 물론 이단으로 규정된 통일교나 여호와의 증인교 등은 자신들의 입장에서 다른 표현을 할 수가 없겠지만, 기독교계 내에서 감정적 대립으로 비롯된 베뢰아파 문제는 지금도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
베뢰아계로 인해 병고침을 받고 삶의 희망을 얻은 사람들의 기쁨과 소망은 어떤 입장이 되라고 이단이라고 우겨대며 목소리를 높이는지 알 수가 없다.
자신의 방법이 '지식적'이지 못하고 '정성과 열정'이 없이 그대로 질러 대는 소리라는 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고 듣는 이 없는 것인 것을, 생활에 결합할 수 없는 단순한 소리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그러기 전에 자신이 어떤 말을 해야 할 것인지를, 어떤 단어들을 선택해야 할 것인지를, 그리고 이 내용들을 어떻게 전해야만 할 것인지를 고뇌하며 성의를 갖는다면 기독교의 문화는 뿌리가 내리고 싹이 날 것이다. '하루 속히 기독교 문화 형성이 확산되어 기독교적 인간성 성숙의 계절이 와야 할 것이다.
이러기 위해서는 기독교계의 언론들은 정성스런 목소리로 '얼'이 담긴 사람과 옳은 소리를 지혜 있게 소리쳐야 할 것이다.
우선 기독교인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기독교가 되기 위해서이며 기독교 문화를 형성해 사회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숭고함을 전해 주기 위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