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구황동 황복사터 인근 유적에 얽힌 학계의 오랜 미스터리가 풀렸다. 현재 논 경작지인 이곳은 왕릉급 석재들이 나뒹굴고 있어 왕릉 자리였을 것이란 추정이 있었지만 누구의 왕릉인지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신문왕릉이라는 설, 성덕왕비인 소덕왕후, 혹은 효성왕비인 해명부인 김씨의 능이라는 설, 황복사의 목탑터라는 주장도 있었다. 그런데 발굴 조사 결과, 통일신라 때인 8세기에 5년만 재위하고 병으로 숨진 효성왕을 위해 조성했던 미완성 무덤이라는 발표가 나왔다.
◇"왕의 유언으로 조성이 중단된 왕릉"
9일 오후 황복사터 삼층석탑(국보 제37호)에서 남쪽으로 약 135m 떨어져 있는 논 경작지. 칼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발굴 현장 설명회가 열렸다. 성림문화재연구원(원장 박광열)은 지난해 9월부터 이곳을 발굴 조사한 결과 효성왕 무덤으로 만들려다 중단한 것으로 보이는 미완성 왕릉의 석재와 이후 무덤 자리에 조성된 통일신라 시대 건물터, 담장, 배수로, 도로 등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신라 관청 이름으로 추정되는 '습부정정(習部井井)' '습부정정(習府井井)'이 적힌 기와, 막새와 전돌, 도깨비 기와(귀면와·鬼面瓦) 등 유물 300점도 출토됐다.
"여기 석재들을 보세요. 이게 왕릉에 쓰려고 다듬은 지대석, 갑석, 탱석입니다."
박광열 원장은 발굴된 석재들을 가리키며 "조사 결과 신라 성덕왕(재위 702~737) 이후부터 왕릉에 쓰인 석재와 동일한 형식이고, 크기나 제작 방식이 기존 왕릉과 거의 같았다"고 했다. 왕릉의 지름은 약 22m로 전(傳) 경덕왕릉과 비슷한 규모다. 십이지상을 새기기 위해 돌을 다듬은 조형 양식과 석재의 크기 등으로 볼 때 성덕왕릉(737년)과 경덕왕릉(765년) 사이의 8세기 초, 즉 효성왕의 무덤용 부재로 추정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효성왕은 성덕왕의 둘째 아들이자 경덕왕의 형으로 불과 5년 재위하고 병으로 숨졌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효성왕은 "무덤에 묻지 말고 화장해 동해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조사단은 "왕이 병석에 있을 때 묻힐 능침을 준비하다 유언 때문에 무덤 조성을 중단했고, 후대에 이 석재를 황복사터 금당터의 기단과 능지탑 등에 재활용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현재 석재가 널려 있던 자리는 원래 왕릉터가 아니라 이 석재를 재활용해 지은 후대의 통일신라 시대 건물터이며, 발굴지의 북동쪽이 왕릉 자리로 추정된다고 조사단은 덧붙였다.
◇"노세가 발굴한 십이지상은 효성왕릉에서 옮겨왔다"
박광열 원장은 "무엇보다 이번 발굴로 일제강점기 노세 우시조가 발굴 조사한 황복사터 십이지상에 대한 의문까지 풀렸다"고 했다. 최근 경주학연구원은 일본인 건축·고고학자 노세 우시조(能勢丑三·1889~1954)가 1928년 황복사 건물지 동쪽 금당터에서 십이지상을 발굴하는 사진을 공개했다〈본지 1월 31일자 A19면〉. 보통 십이지상은 왕릉 둘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