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천 황현의 광양 생가와 순절지인 구례 매천사
광양 매화마을에 매화가 만발해 있다
산수유, 매화, 벚꽃이 구례(求禮), 광양(光陽), 하동(河東) 줄기를 타고 대열을 맞추듯 피어난다.
지금으로부터 106년 전 엄동(嚴冬)을 뚫고 핀 매화처럼 고결한 선비가 구례에서 숨을 거뒀다.
지리산 노고단이 보이는 월곡마을에서 그는 네 수(首)의 절명시(絶命詩)를 남긴 뒤 아편을 입에 털어넣었다.
‘어지러운 세상 부대끼면서 흰머리가 되기까지 (亂離滾到白頭年)
몇 번이나 목숨 버리려 했지만 그리하지 못했구나 (幾合捐生却未然)
오늘은 정말로 어쩔 수 없게 되어 (今日眞成無可奈)
가물대는 촛불만 푸른 하늘을 비추네 (輝輝風燭照蒼天)
매천 황현의 모습이다. 황현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절명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시를 쓴 황현(黃玹·1855~1910)은 전남 광양군 봉강면 서석촌에서 태어났다. 호는 매천(梅泉)이라 썼다. 그가 사망한 구례에는 매천을 기리는 매천사와 그가 세웠던 호양(壺陽)학교 터가 남아 있다.
매천은 어릴 때부터 스승 왕석보로부터 “앞날이 촉망된다”는 평을 들었다. 스물네 살 때 서울로 올라와선 이건창과 교유하며 ‘한말 삼재(三才)’로 불릴 정도였다. 스물아홉 때 과거에 급제했으니 시골 출신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장원에서 2등으로 밀렸다.
환멸을 느낀 매천은 칩거에 들어갔지만 과거에 재응시하라는 부모의 성화에 못 이겨 서른네 살 때 다시 과거에 합격했지만 이미 그의 조선은 민씨(閔氏)들이 활개치는, 무너져 가는 나라였다. 그때 그가 낙향하며 남긴 말이 있다. “도깨비 나라의 미치광이들!”
광양과 구례를 오가며 학문에만 정진했던 매천은 6권7책의 《매천야록》을 남겼다. 《매천야록》은 1894년, 갑오개혁이 일어나기 전 고종의 탄생과 즉위에 대한 신기로운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지금의 종로 운현궁(雲峴宮)에 왕기(王氣)가 서렸다는 것이다.
〈… 철종 초에 장안에는 ‘관상감 터에서 성인이 나온다’는 동요가 떠돌았고 ‘운현궁에 왕기가 서려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얼마 안 되어 금상이 태어났다.〉 여기서 관상감은 일명 서운관(書雲觀)으로 천문지리를 맡아 보는 관청을 가리키고 있다.
정권을 잡은 대원군은 개혁정치를 펴지만 장동김씨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나는 천리를 끌어 지척을 삼을 것이며 태산을 깎아 평지를 만들 것이며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고 싶은데 여러분은 어떠시오?”
이런 대원군의 물음에 김병기가 다음과 같이 답하고 물러났다. “천리도 지척이라면 지척이 되는 것이고 남대문도 3층으로 만들면 3층이 되는 것입니다. 대감이 무슨 일인들 못하겠소이까. 다만 태산은 스스로 태산이니 어찌 평지로 바꾸겠습니까?”
대원군은 픽 웃고 말았다. 천지를 지척으로 삼겠다는 것은 종친(宗親)을 대접하며, 남대문을 높이는 것은 남인(南人)을 중용하겠다는 것이며, 태산을 평지로 깎는 것은 김씨의 노론을 억누르겠다는 것인데, 김병기가 이를 알고 ‘한 방’ 먹인 것이었다.
저무는 왕조(王朝)에는 우울한 징조들이 잇따른다. 첫 번째가 위계질서가 뒤집히는 것으로, 일찍부터 대원군은 이렇게 말했다고 매천은 기록했다. “조선에는 세 가지 커다란 폐단이 있으니 충청도 사대부와 평안도 기생과 전주 아전(衙前)이 그것이다!”
여기서 충청도 사대부는 우암 송시열을 태두로 한 노론 세력을 말하는 것 같고, 평안도 기생은 관리들의 넋을 앗아가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을 경계하는 것인데, 전주 아전에 대해선 전라감사 정봉조 시절, 한 아전이 선비를 매질한 사건이 나온다.
감사는 그 아전을 죽이라고 했는데 아전이 오히려 정봉조의 아버지 정기세에게 뇌물을 줘 무마하려 했다는 것이다. “삼 대에 걸쳐 이 감영에서 벼슬을 했으니 어찌 소자가 직책도 다하지 않고 녹봉만 먹겠느냐”며 정봉조가 버텨 결국 아전은 처형되고 말았다.
아랫물이 흐린데 윗물이 맑을 리 없다. 고종 역시 뇌물을 극히 좋아했는데 고종의 생일인 1887년 만수절(萬壽節) 때의 일이다. 경상감사 김명진이 상감에게 왜국 비단 오십 필과 황저포 오십 필을 바치자 고종은 얼굴색이 변하면서 용상 아래로 내던져 버렸다.
광양에 있는 매천 선생의 생가다. 생가 뒤편에도 매화가 만발해 있다
뒤이어 전라감사 김규홍이 춘주(春紬)와 갑초 각 오백 필, 백동 오 합, 바리 오십 개 등을 바치자 고종이 말했다. “감사들이 이렇게 예를 차려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러자 김명진의 사위였던 충정공 민영환이 자기 돈 이만 냥을 장인의 선물에 더해 고종께 바쳤다.
어디 그뿐이랴 좌초한 배처럼 표류하는 조선의 황혼기에는 첩과 무당의 횡포도 빠지지 않고 나온다. 첫째는 김좌근의 첩 나합(羅閤)이다. 나주 기생 출신인 나합은 지략과 술수에 능해 김좌근은 곧 나합이라는 ‘독’에 빠져 국정을 더불어 논했다.
많은 벼슬이 나합을 통해 나왔는데 그중 나합과 간통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한번은 관상을 잘 보는 참판 조연창이 나합과 정을 통하려다 갑자기 김좌근이 등장하자 놀라고 말았다. 당황하는 조연창을 대신해 나합은 “저도 관상을 보고 있었다”고 둘러댔다.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가 군인들을 피해 충주로 피난갔을 때였다. 한 무당이 나타나 환궁(還宮) 날짜를 점쳐 줬는데 신기하게도 적중했다. 황후가 무당을 데리고 궁으로 돌아왔는데 몸이 좋지 않을 때면 무당이 묘하게도 아픈 곳만 골라 만져 줬다. 황후의 총애가 깊어지자 무당은 자신을 관성제군(關聖帝君) 딸이라 칭했다.
관성제군은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관우다. 중전은 방약무인한 무당의 말에 현혹돼 그를 진령군(眞靈君)으로 봉했다. 진령군은 이제 아무 때고 대궐로 가 임금과 중전을 만났다. 임금과 중전은 그를 가리키며 이런 말도 했다. “군이 되니 믿음직하도다.”
황현은 <매천야록>을 통해 흥선선대원군의 집권부터 경술국치까지 보수주의자로서 근왕파로서 유학자로서 자기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충실하게 기록했다. 조선이 어떤 과정을 통해 멸망했는지 백성들과 관료들의 행동이 어떠했는지 기록했다. 조선왕조는 멸망에 합의 한 뒤 기녀들을 불러 하루종일 잔치를 벌였던 정신없는 사람들이 팔아먹은 나라로 남았다.
황현은 자신을 매장시킨 왕조에 대해 사대부로서 마지막까지 의리를 다한 선비였다.나라가 망했는데 5백년 종사와 목숨을 같이 하는 선비 하나 없다면 이 나라가 얼마나 비참한가라고 탄식하며아래와 같은 <절명시>를 남기고 1910년 9월 7일 자결했다.
亂離袞道白頭年 난리를 겪다보니 머리만 백발의 나이가 되었구나
幾合捐生却末然 몇 번이고 목숨을 끊으려다 이루지 못했도다
今日眞成無可奈 오늘날 참으로 어찌할 수 없고 보니
輝輝風燭照蒼天 가물거리는 촛불이 푸른 하늘을 비추네
妖氣掩翳帝星移 요망한 기운에 가려서 임금 별자리 옮겨지니
九闕沉沉晝漏遲 구중궁궐은 침침하여 햇살도 더디구나
詔勅從今無復有 이제부터 조칙을 받을 길이 없으니,
琳琅一紙淚千絲 구슬 같은 눈물이 종이 올을 모두 적시네
鳥獸哀鳴海岳嚬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槿花世界已沈淪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구나
秋燈掩卷懷千古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 날 생각하니,
難作人間識字人 인간세상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구나
曾無支厦半椽功 일찍이 나라를 지탱하는데 조그마한 공도 없었으니
只是成仁不是忠 다만 인(仁)을 이룰 뿐이요, 충(忠)은 아닌 것이로다
止竟僅能追尹穀 끝맺음이 겨우 윤곡(尹穀)처럼 자결할 뿐이요
當時愧不躡陳東 당시의 진동(陳東)처럼 의병을 일으키지 못함이 부끄럽구나
<출처 : 매천 황현 선생 생가, 절명시 현판>
(주)윤곡운 중국 송나라 사람으로 몽고군이 침입하여 담성이 포위되어 함락지경에 이르자 처자와 작별하고 분신 자살하였다.
진동은 중국 송나라 사람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 마다 간신을 물리치고 국가의 기강응 세우라는 상소를 목숨을 걸고 하게 되나 결국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시장에서 참수를 당하고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