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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형 金基瀅(1887 ~ 1943)】 "주비단의 별동대, 한용단(韓勇團) 단원으로도 활약"
1887년 9월 8일경 황해도 안악군(安岳郡) 용순면(龍順面) 장산리(長山里)에서 출생하였다. 1914년 만주로 이주하여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김창환(金昌煥) 등과 활동하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문신소학교를 설립하는 등 육영사업에 헌신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3월과 4월 안악지방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안악읍에서는 3월 28일 장날을 기하여 대규모 만세 운동이 있었고, 4월 7일 용순면에서는 읍내와 연락하여 400여 명이 만세를 불렀다.
1919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임시지방연통제를 실시할 때 황해도 독판부의 경무사(警務司) 요원으로 활동하였다. 연통제는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의 비밀 국내 통치제도로 국내를 연결, 상호간의 행정·통신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설치한 것이다. 경무사에는 기밀과와 경호과의 2개 과를 설치하였다. 기밀과에서는 경호원·범죄수사 등에 관한 사무를 비롯하여 일제의 경찰업무 전반을 탐지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경호과에서는 경호구역 배치·인구조사·신문잡지·집회결사·친일행위자 조사 등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였다.
1920년 초부터 황해도 지역에서는 임시군사주비단(臨時軍事籌備團)이 설치되었다. 여기에서 통신원 겸 분단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주비단의 별동대인 한용단(韓勇團)의 단원으로도 활약하였다. 주비단은 임시정부 군무부의 ‘임시군사주비단제’를 근거로 조직된 것으로, 국내에서 단원 모집과 군수품 확보 및 모험 공작을 벌이는 데 목적을 두었다. 황해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주비단 단원들과 한용단 단원 50여 명이 1921년 1월 29일 사리원경찰서에 붙잡혔고, 5월 13일 붙잡혔으나 옥고를 겪은 후 진남포에서 소금배를 타고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상하이 망명 이후 주로 김현구(金玄九, 또는 金鉉九)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1922년 2월 8일 개원된 제10회 대한민국임시의정원 회의에 참여하였고, 같은 해 6월 6일 임시의정원 황해도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임시의정원에서는 국민대표회의 지원을 내용하는 인민청원안을 통과시켰고, 각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도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하였다. 임시의정원에서는 동년 6월 16일 「임시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불신임안」에 대해 찬성을 표하기도 하였다.
임시정부는 국민대표회의 개최 요구, 임시대통령 불신임안, 임시정부 각료 총사퇴 등 복잡한 국면에 처하게 되었다. 임시정부 전·현직 각료와 임시의정원 의원 등 30여 명이 시국 수습 방안으로 1922년 7월 13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발족하였을 때 이에 참여하였다.
1922년 10월 7일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발기 사전 모임에 박은식(朴殷植) 등 16명과 함께 참여하였으며, 10월 28일 김구(金九)·조상섭(趙尙燮)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한국노병회 창립식을 가졌다. 1924년 4월 1일과 1926년 4월 1일에는 한국노병회의 회계 검사원으로, 1930년 2월 1일에는 이사(理事)로 활약하였다. 한국노병회는 결성 초기 다수의 청년을 중국 관내의 여러 무관학교에 파견하여 군사간부로 육성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김구가 이사장을 사임한 1926년부터 한국노병회는 점차 약화되었다. 이에 따라 처음 10년 예정으로 군사간부를 기르고 자금을 축적하여 독립전쟁을 준비하겠다던 방략도 변경되지 않을 수 없었다.
김현구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당선증 [판형3] |
제13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1925년 3월 13일자로 최석순(崔碩淳)·문일민(文一民) 등과 함께 연서(連書) 형태로 「임시대통령 이승만 탄핵안」이 제출되었다. 대통령 탄핵안은 3월 18일 통과되었고, 채원개(蔡元凱)·최석순 등과 같이 이승만 면직을 최종 심판하였다. 3월 23일 이승만 대통령 면직안이 임시의정원의 결의로 통과되었다.
1925년 6월 6일 상하이 대한교민단의 제6회 의사원 선거에서 의사원으로 선출되었고, 1928년 10월 20일에는 인성학교(仁成學校)의 상무위원으로 선출되는 등 임시정부 외곽단체에서도 활동을 이어갔다. 또한 1932년 11월 제24회 임시의정원 정기의회에서는 김붕준(金朋濬)을 대신하여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상임위원은 회계검사와 함께 새로 도착한 의원에 대한 자격 심사 등을 담당하는 직책이다.
한국노병회 창립 1주년기념 축하상황에 관한 건(1923.11.03) [판형3] |
1933년 3월 제25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출석 위원 3분의 2로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1934년 제26회 임시의정원 회의록에 따르면, 박진(朴震)·민병길(閔丙吉)·홍재형(洪在衡)과 함께 4인에 대하여 “의원의 직무를 이행하지 아니하며 또한 직무 이행이 불능한 사정이 있다”라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의원직에서 해임되었다.
1930년 1월 25일 상하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민족주의 계열의 인사들을 중심으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이 창당되었다. 한국독립당은 이사장에 이동녕, 이사에 조완구(趙琬九)·김철(金澈)·안창호·이시영·김구·조소앙(趙素昻) 등 임시정부의 우익 진영 인사들이 참여하였다. 한국독립당 창당 당시 당원 73명의 명단에 올라 있다. 1933년 1월 15일 상하이 화가(華街) 소년선강단(少年宣講團)에서 ‘재호(在滬)한국독립당대회’가 개최되었을 때, 문일민·이동녕과 함께 감사로 선출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930년대 중반 이래 민족주의 세력은 크게 김구를 중심으로 한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 조소앙과 홍진(洪震)이 주도하던 한국독립당(재건), 지청천(池靑天)을 비롯하여 만주에서 이동해 온 독립군 출신들이 주축이 된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들 3당은 정치적 이념이 크게 다르지 않았고, 임시정부를 옹호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도 같았다. 이들 3당이 통합을 추진하여 1940년 5월 9일 한국독립당을 창립대회를 개최하였다.
통합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장에 김구, 중앙집행위원에는 홍진을 비롯하여 조소앙·지청천·유동열(柳東說)·송병조(宋秉祚)·조완구(趙琬九) 등이 선출되었고, 감찰위원장에는 이동녕이 선임되었다. 한국독립당 제1차 전당대표대회에 토교(土橋) 지역의 대표로 참가하였고, 이 대회에서 법규수개안(法規修改案) 심사위원으로 선출되어 한국독립당의 당규와 당책, 당강의 수개안을 심의·결정하는 역할을 맡았다.
1942년 10월 25일 제34회 임시의정원 의회에서 신도의원(新到議員) 자격 심사에 통과한 21명 가운데 1인으로 선출되었고, 임시의정원 회의에 참석하여 각종 위원회의 분과 설치를 조정하는 주장을 펼쳤다. 1943년 6월 중국 충칭(重慶)에서 향년 57세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887년 9월 8일경 황해도 안악군(安岳郡) 용순면(龍順面) 장산리(長山里)에서 출생하였다. 1914년 만주로 이주하여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김창환(金昌煥) 등과 활동하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문신소학교를 설립하는 등 육영사업에 헌신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3월과 4월 안악지방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안악읍에서는 3월 28일 장날을 기하여 대규모 만세 운동이 있었고, 4월 7일 용순면에서는 읍내와 연락하여 400여 명이 만세를 불렀다.
1919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임시지방연통제를 실시할 때 황해도 독판부의 경무사(警務司) 요원으로 활동하였다. 연통제는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의 비밀 국내 통치제도로 국내를 연결, 상호간의 행정·통신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설치한 것이다. 경무사에는 기밀과와 경호과의 2개 과를 설치하였다. 기밀과에서는 경호원·범죄수사 등에 관한 사무를 비롯하여 일제의 경찰업무 전반을 탐지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경호과에서는 경호구역 배치·인구조사·신문잡지·집회결사·친일행위자 조사 등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였다.
1920년 초부터 황해도 지역에서는 임시군사주비단(臨時軍事籌備團)이 설치되었다. 여기에서 통신원 겸 분단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주비단의 별동대인 한용단(韓勇團)의 단원으로도 활약하였다. 주비단은 임시정부 군무부의 ‘임시군사주비단제’를 근거로 조직된 것으로, 국내에서 단원 모집과 군수품 확보 및 모험 공작을 벌이는 데 목적을 두었다. 황해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주비단 단원들과 한용단 단원 50여 명이 1921년 1월 29일 사리원경찰서에 붙잡혔고, 5월 13일 붙잡혔으나 옥고를 겪은 후 진남포에서 소금배를 타고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상하이 망명 이후 주로 김현구(金玄九, 또는 金鉉九)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1922년 2월 8일 개원된 제10회 대한민국임시의정원 회의에 참여하였고, 같은 해 6월 6일 임시의정원 황해도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임시의정원에서는 국민대표회의 지원을 내용하는 인민청원안을 통과시켰고, 각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도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하였다. 임시의정원에서는 동년 6월 16일 「임시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불신임안」에 대해 찬성을 표하기도 하였다.
임시정부는 국민대표회의 개최 요구, 임시대통령 불신임안, 임시정부 각료 총사퇴 등 복잡한 국면에 처하게 되었다. 임시정부 전·현직 각료와 임시의정원 의원 등 30여 명이 시국 수습 방안으로 1922년 7월 13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발족하였을 때 이에 참여하였다.
1922년 10월 7일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발기 사전 모임에 박은식(朴殷植) 등 16명과 함께 참여하였으며, 10월 28일 김구(金九)·조상섭(趙尙燮)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한국노병회 창립식을 가졌다. 1924년 4월 1일과 1926년 4월 1일에는 한국노병회의 회계 검사원으로, 1930년 2월 1일에는 이사(理事)로 활약하였다. 한국노병회는 결성 초기 다수의 청년을 중국 관내의 여러 무관학교에 파견하여 군사간부로 육성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김구가 이사장을 사임한 1926년부터 한국노병회는 점차 약화되었다. 이에 따라 처음 10년 예정으로 군사간부를 기르고 자금을 축적하여 독립전쟁을 준비하겠다던 방략도 변경되지 않을 수 없었다.
김현구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당선증 [판형3] |
제13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1925년 3월 13일자로 최석순(崔碩淳)·문일민(文一民) 등과 함께 연서(連書) 형태로 「임시대통령 이승만 탄핵안」이 제출되었다. 대통령 탄핵안은 3월 18일 통과되었고, 채원개(蔡元凱)·최석순 등과 같이 이승만 면직을 최종 심판하였다. 3월 23일 이승만 대통령 면직안이 임시의정원의 결의로 통과되었다.
1925년 6월 6일 상하이 대한교민단의 제6회 의사원 선거에서 의사원으로 선출되었고, 1928년 10월 20일에는 인성학교(仁成學校)의 상무위원으로 선출되는 등 임시정부 외곽단체에서도 활동을 이어갔다. 또한 1932년 11월 제24회 임시의정원 정기의회에서는 김붕준(金朋濬)을 대신하여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상임위원은 회계검사와 함께 새로 도착한 의원에 대한 자격 심사 등을 담당하는 직책이다.
한국노병회 창립 1주년기념 축하상황에 관한 건(1923.11.03) [판형3] |
1933년 3월 제25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출석 위원 3분의 2로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1934년 제26회 임시의정원 회의록에 따르면, 박진(朴震)·민병길(閔丙吉)·홍재형(洪在衡)과 함께 4인에 대하여 “의원의 직무를 이행하지 아니하며 또한 직무 이행이 불능한 사정이 있다”라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의원직에서 해임되었다.
1930년 1월 25일 상하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민족주의 계열의 인사들을 중심으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이 창당되었다. 한국독립당은 이사장에 이동녕, 이사에 조완구(趙琬九)·김철(金澈)·안창호·이시영·김구·조소앙(趙素昻) 등 임시정부의 우익 진영 인사들이 참여하였다. 한국독립당 창당 당시 당원 73명의 명단에 올라 있다. 1933년 1월 15일 상하이 화가(華街) 소년선강단(少年宣講團)에서 ‘재호(在滬)한국독립당대회’가 개최되었을 때, 문일민·이동녕과 함께 감사로 선출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930년대 중반 이래 민족주의 세력은 크게 김구를 중심으로 한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 조소앙과 홍진(洪震)이 주도하던 한국독립당(재건), 지청천(池靑天)을 비롯하여 만주에서 이동해 온 독립군 출신들이 주축이 된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들 3당은 정치적 이념이 크게 다르지 않았고, 임시정부를 옹호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도 같았다. 이들 3당이 통합을 추진하여 1940년 5월 9일 한국독립당을 창립대회를 개최하였다.
통합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장에 김구, 중앙집행위원에는 홍진을 비롯하여 조소앙·지청천·유동열(柳東說)·송병조(宋秉祚)·조완구(趙琬九) 등이 선출되었고, 감찰위원장에는 이동녕이 선임되었다. 한국독립당 제1차 전당대표대회에 토교(土橋) 지역의 대표로 참가하였고, 이 대회에서 법규수개안(法規修改案) 심사위원으로 선출되어 한국독립당의 당규와 당책, 당강의 수개안을 심의·결정하는 역할을 맡았다.
1942년 10월 25일 제34회 임시의정원 의회에서 신도의원(新到議員) 자격 심사에 통과한 21명 가운데 1인으로 선출되었고, 임시의정원 회의에 참석하여 각종 위원회의 분과 설치를 조정하는 주장을 펼쳤다. 1943년 6월 중국 충칭(重慶)에서 향년 57세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