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숨은벽능선 산행기
미적거리다 오후 12시 30분이 되어서야 북한산을 향했다. 당초 주말에 숨은벽 능선을 가려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틀 전 서울건축사등산동호회 관악산 산행 소식을 듣고 그 곳에 참석했다. 오전에 어제 다녀온 관악산 산행기를 올리고 난후 산을 갈까 말까 망설임이 생겼다. 며칠째 매서운 한파가 가시지 않고 눈도 쌓여서 험준한 숨은벽 능선을 올라 그림을 그리기가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연일 악천후 산행으로 무리가 생길 염려도 있었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마주치는 수많은 일 앞에서 늘 망설임이 생겼던 것 같다. 포기 할 때도 있었고 어떤 때는 마음을 굳게 다지며 실천에 옮기기도 했다. 그런데 주저하기보다 앞으로 나아갈 때 어떤 결실이라도 생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 생각을 되뇌며 길을 나섰다.
구파발역에서 37번 버스를 타고 효자 2동 정류장에 하차하니 1시 50분이 되었다. 오후로 접어들어 좀 더 서두를 걸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밤골탐방안내소 입구 표지를 찾다 보이지 않아서 사기막골 정류장까지 갔다 되돌아와서 밤골마을 가는 길에 접어들었다. 전에 숨은벽을 오를 때는 사기막골 안으로 깊숙이 들어간 다음 우측 산길로 접어들 때가 많았다. 이쪽에서 오를 때는 밤골 표지판이 있었던 것 같았다.
조금 가다보니 국사당 표지판이 가리키던 길과 만났다. 바로 정면에 밤골탐방안내소가 보였다. 북사면 쪽이라 산길 바닥에 눈이 녹지 않고 다져져 있었다. 탐방 안내소에 설치된 전광판에는 ‘아이젠 착용 필수’라는 문자가 나타났다. 탐방안내소로 내려온 다른 남자분이 숨은벽 능선을 가려면 험하니 빨리 다녀와야 된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한동안 완만한 길을 묵묵히 지났다. 오르는 동안 두어 번 내려오는 사람과 조우했을 뿐 오르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개울 옆으로 지나가는 바위 앞에서 미끄러울 것 같아 아이젠을 찼다. 조금씩 길이 가팔라지고 너덜바위에 쌓인 눈길도 지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가다보니 길 우측에 계곡 물 웅덩이가 꽁꽁 언 모습이 보였다. 점점 산이 깊어지는 것 같았다. 잠시 멈춰 바라보니 얼음장 밑으로 물이 흐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겨울이 지나가면 얼음이 녹아 자취를 감추고 맑게 흐르는 개울 물살만 보일 것 같았다. 그 곳을 지나다 보니 백운대가 2.7km 남은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다. 지나온 밤골탐방안내소는 1.4km가 지나 있었다.
조금씩 가팔라지는 산길을 오르며 걷다보니 소나무 숲 사이로 북한산 정상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앞에 놓인 봉우리 뒤로 좌측부터 인수봉 숨은벽 백운대가 나란히 펼쳐보였다. 전에 이 길을 지날 때도 그 모습을 대하며 반가움을 느꼈었다. 지나갈 길이 머릿속에 확연히 그려졌다. 목표지점을 눈으로 확인하며 걸을 때는 그렇지 않을 때보다 산행의 기운이 솟아나는 것 같다.
잠시 후 능선에 오르니 전에 사기막골에서 올라올 때 지났던 이정표가 보였다. 백운대 2.8km, 지나온 밤골공원지킴터는 2.2km가 지나 있었다. 사기막골공원지킴터는 2.1km로 쓰여 있었다. 사기막골 입구에서 공원지킴터가 좀 더 깊숙이 위치해 있어 전체 거리는 그 곳이 더 멀다.
숨은벽을 향해 능선을 지나 오름길을 오르다 보니 우측의 긴 바위 경사면 뒤로 숨은벽의 절경이 나타났다. 그 경관도 매우 빼어나서 거기서도 그림을 그렸었다. 하지만 오늘은 앞을 가로막고 있는 봉우리 위에 올라서서 그릴 생각을 하며 나아갔다.
가파른 봉우리를 오르다 보니 좌측으로 상장능선과 도봉산이 훤칠히 바라보였다. 거기서 감싸 안듯 봉오리 위로 오르는 길은 매우 가파르고 급경사지에 잔도처럼 걸쳐 있는데 눈이 쌓여 더 험해 보였다.
잠시 후 막바지 급경사 길을 지나 봉우리에 올랐다. 위에서 목청소리가 들려 궁금해 하며 오르다 보니 한 여성분이 숨은벽을 향해 ‘야호’ 소리를 지르다 멈췄다. 그 곳에 오르자 세찬 찬바람이 몸에 몰아닥쳤다. 그 분 사진을 찍어준 후 자리를 잡고 앉아 그림을 그리려니 너무 추워서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맘먹고 온 건데 참고 그려야지 생각하면서 화판을 꺼내 종이를 붙였다. 그런데 잠시도 앉아 있기 어려워 준비한 여벌옷을 껴입은 다음 그리기 시작했다.
손이 시려웠지만 감각이 둔해질까봐 장갑은 끼지 않았다. 전에도 몇 번 그린 장면이라 풍경이 명확히 포착되어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지 않았다. 그리는 사이 한 남자분이 반팔 차림으로 올라와 눈이 휘둥그레졌다. 괜찮으냐고 물어보니 빨리 오르느라 땀이 나서 웃옷을 벗었다고 했다. 그가 잠시 주변을 돌아보다 숨은벽으로 향했다.
여기서 정면으로 보이는 풍광이 새삼 감탄스레 보였다. 북한산을 많이 다닌 사람들도 이 장면을 손꼽아 예기할 때가 많다. 북한산의 여기저기 풍광을 아는 사람들에게 비경으로 통한다. 숨은벽이라는 명칭에서 연상되듯 신비스런 뉘앙스가 풍긴다.
숨은벽이라는 명칭은 잘 눈에 띠지 않는데서 유래되었을 것이다. 백운대와 인수봉 사이에 숨은 듯이 놓여있는데 다른 데서는 눈에 띠지 않고 북한산 북사면을 올라 가까이 다가가야 만날 수 있다. 남쪽은 물론 동쪽과 서쪽에서도 보이지 않고 북한산 북쪽 풍광이 펼쳐 보이는 노고산에 올라가면 뚜렷이 보인다. 또한 감탄스러운 것은 숨은벽의 형상이다. 마치 거대한 소라기등처럼 조형미를 물씬 풍기며 솟아 있다.
올해 들어 맘먹고 원효봉능선, 비봉능선, 의상능선, 주능선, 칼바위능선, 진달래능선, 영봉능선 등 북한산의 주요 능선을 걸었다. 거기서 숨은벽능선을 빼놓을 수 없어 오늘은 추위를 무릅쓰고 올라왔다.
올해는 북한산의 설경을 만끽하게 되었다. 주말마다 여러 능선을 지나며 평소와 다른 멋을 대할 수 있었다. 북한산의 빼어난 풍광에다 눈이 쌓인 겨울 풍경의 특별함을 느낄 수 있었다.
입춘이 지난 후라 요새 겪고 있는 한파가 물러가면 이제 큰 추위가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눈이 깊이 쌓인 북한산의 정취도 따스한 봄바람에 녹아 사라질 것이다. 오늘은 문득 그 같은 세월의 변화와 지나감 속에 한파 속에서 느껴지는 설경의 정취를 대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림을 다 그리고 화구를 챙긴 다음 숨은벽 능선을 지나갔다. 그 능선은 원효 능선과 상장 능선 사이에 숨은 듯 도사리는 형국에 마치 낙타 등줄기처럼 솟은 암릉이 아슬아슬하게 이어진다. 그리고 막바지에 다가가면 경사가 매우 가파르게 솟아 있는 숨은벽이 올려보인다.
능선에 올라설 때마다 세찬 바람이 불어 닥쳐 험한 암릉길을 지나기가 더욱 조심스러웠다. 좌측은 나무숲이 자라는 벼랑이고 우측은 알몸처럼 드러난 커다란 바위 경사면이다. 눈이 없을 때는 뛰어가듯 지난 적도 있지만 오늘은 길이 미끄러워 조심하며 천천히 능선을 지나갔다.
잠시 후 능선 막바지에 다다르니 높다란 숨은 벽이 앞을 가로막듯 서 있었다. 오래전 서울건축사등산동호회에서 그 코스를 지나갈 때 한번 그 숨은벽을 오른 때가 있었다. 그 아래 초소에서 지키는 사람이 있어 2인 1조를 이루어 장비를 갖춰야만 오르게 한다. 회원 한 사람과 조를 이루어 오르고 다른 일행은 우리가 오르는 것을 지켜보다 우회해 저 위쪽에 놓인 백운대 사이길 에서 다시 만났다.
숨은벽 아래 안부지점에서 우측으로 내려가는 초입에 대문처럼 서 있는 큰 바위 사이로 내려서 급경사진 암릉길을 내려갔다. 눈이 깊게 쌓인 길옆에 설치된 철난간을 잡으며 지나는 길이 매우 위험하게 느껴졌다. 작년에 아는 분이 그 곳을 지나다 사고를 당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더욱 조심스러웠다.
한동안 내려서다 다시 반전하듯 숨은벽과 백운대 사이 길로 오르기 시작했다. 그곳도 가파른 길에 눈이 쌓여 지나기가 조심스러웠다. 중간쯤 오르다 보니 전에 마셨던 샘이 보였다. 하지만 지반이 얼어 물은 고여 있지 않고 샘 긷는 그릇만 놓여있었다.
다시 조심조심 올라가 능선을 넘었다. 아까 숨은벽 안부에서 지났던 곳처럼 좌우에 높게 솟은 바위대문을 넘어서니 산 능성이 뒤로 멀리 서울 시내가 바라보였다. 이제 험한 구간을 다 지났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거기서 백운대 암봉 밑 언저리를 돌아갔다. 남사면이지만 거기도 눈이 많이 쌓여 있었다.
잠시 후 맞은편 위문에서 늘 오르던 계단 길에 들어섰다. 그야말로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거기서 백운대 정상에 오르는 길은 매우 험한 길인데도 많이 다녀서인지 위험부담이 생기지 않았다. 철난간을 잡으며 급경사진 바위를 오르다 보니 인수봉의 장엄한 자태가 다시 눈에 띠었다. 그 봉우리를 바라볼 때마다 기운이 솟아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늦은 시각이라 백운대를 오르내리는 사람이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백운대에 오르니 사방이 드넓게 펼쳐보였다. 정상에 설치된 태극기가 바람에 세차게 나부끼고 있었다. 감동스런 풍광 앞에서 다시금 산세를 음미하듯 천천히 돌아보는 동안 오후의 적막함이 감돌았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가고 있었다. 내가 북한산을 만난 건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건강과 정서 순화를 얻고 부족한 글과 그림을 남겼다.
잠시 바위 뒤로 가서 바람을 피해 간식을 먹다보니 한 사람이 올라오고 있었다. 아주 젊고 활달한 모습이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번갈아 정상 사진을 찍어 주었다. 그가 금세 뒤돌아 내려섰다.
해가 금세 서산 너머로 넘어가고 땅거미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백운대에서 하루재를 넘어 도선사 입구까지 가는 하산길을 자주 다녀서 내려갈 염려는 들지 않았다. 백운산장을 지나 인수봉 안부까지 내려서는 길이 평소보다 더 짧게 느껴졌다. 하루재에 다가가다 보니 하늘에 반달보다 조금 더 부푼 달이 떠 있었다. 그 고개를 넘어 잠시 후 도선사 탐방 안내소에 도착해 산행을 마쳤다.
20250209
김석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