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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2월 6일(金)
[1967년] 미군, 베트남전에서 대량의 고엽제 살포 개시
← 미군 비행기가 남북베트남 경계지점 비무장지대에 대량의 고엽제를 살포하고 있다.
1967년 2월 6일 미국 공군기가 남북베트남 경계지점 비무장지대 삼림지역에 대량의 고엽제(枯葉劑)를 살포했다. ‘오렌지작전’ 또는 ‘고엽작전’이라 불리우는 이 작전은 비행기와 헬리콥터에서 대량의 화학약품을 투하해 남베트남 정글을 벌거숭이로 만들어 이들 삼림지대를 거점으로 하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부대 발견을 쉽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원래, 고엽제란 농약의 용도상 분류에서 낙엽제(落葉劑)에 해당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날 사용된 고엽제는 2ㆍ4ㆍ5-T계 제초제였다. ‘고엽작전’은 이미 1962년부터 일부에서 행해졌지만 이것은 주로 해방전선의 식량공급을 차단하기 위해 논밭을 말라죽게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날처럼 대량의 고엽제가 살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후 1969년 동물실험결과 이 고엽제에서 발견된 초미량의 불순물인 디옥신이 기형과 암 발생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미국을 비난하는 세계의 여론이 들끓었고, 결국 미국은 같은 해 고엽제 사용을 중지했다. 그러나, 이미 이 ‘고엽작전’으로 베트남 산림의 20%가 파괴된 상태였고, 장애아 출산도 잇달았다. 또한 ‘고엽작전’에 참가했던 미군 병사들마저도 후유증으로 고생해야 했다.
[1952년] 영국왕 조지6세 사망
← 영국왕 조지6세.
영국왕 조지6세가 1952년 2월 6일 사망했다. 56세였다. 그는 조지5세의 차남으로 태어났지만 형 에드워드 8세가 심프슨 부인과의 극적인 사랑으로 제위를 포기함에 따라 1936년 즉위했다. 조지6세가 사망하자 딸인 엘리자베스2세가 여왕으로 즉위했다.
조지6세는 1895년 태어나 해군사관생도로서 제1차 세계대전 때 함대에 근무하였고, 전쟁후에는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수학했다. 그는 생전에 프랑스-캐나다-미국 등을 순방하여 국제 친선에 힘을 기울였고,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런던을 떠나지 않고 시민과 위험을 함께 하면서 때때로 군대-공장-공습피해지역 등을 시찰하여 사기 앙양에 힘썼다.
책임감이 강하고 중후하며, 왕실의 규범을 준수하여 국왕으로서의 중책을 훌륭히 수행하여 국민의 신뢰를 받았다.
[1952년] 엘리자베스 2세 즉위
← 엘리자베스 2세(1985)
1952년 2월 6일 엘리자베스 2세가 2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엘리자베스의 아버지 조지 6세는 그의 형인 에드워드 8세가 왕위를 양도함으로써 1936년 조지 5세의 뒤를 이어 국왕의 자리에 올랐다. 1947년 11월 20일 엘리자베스 공주는 그리스의 왕자였던 영국 해군 중위 필립 마운트 배튼과 결혼했다. 1951년 여름 조지 6세의 건강이 악화되자 엘리자베스 공주는 군기분열식 및 다양한 국가행사에 참여하여 아버지를 대행했다. 여왕의 대관식은 1953년 6월 2일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에서 거행되었다. 그녀는 찰스 왕자와 앤 공주를 비롯해 4명의 자녀를 두었다.
[1840년] 영국, 마오리족과 와이탕기 조약 체결(뉴질랜드, 영국의 식민지화)
← 뉴질랜드 오클랜드의 시민 광장에 있는 시청
1840년 2월 6일 영국은 뉴질랜드 노스 섬의 오클랜드 지역에 사는 마오리족과 와이탕기 조약을 맺었다. 영국이 마오리족의 통치권을 가지며 토지를 독점 매입할 수 있다는 불평등 조약을 근거로 뉴질랜드 전체를 합병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마오리 전쟁이 시작되었고, 마오리 민족주의를 고취시킨 마오리 왕 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가장 열정적으로 싸운 마오리족은 하우하우교 전사들이었다. 결국 이 조약에서 토지판매 조항이 폐지되었고 1862년에는 원주민 토지법이 통과되었다. 1960년 이래 뉴질랜드는 2월 6일을 와이탕기의 날로 지정해 경축하고 있다.
[1932년] '누벨 바그'(새 물결)로 알려진 영화운동의 서막을 연 프랑스의 영화 평론가·제작자 트뤼포(François Truffaut)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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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2월 6일 태어남 / 1984년 10월 21일 죽음
"영화를 사랑하는 첫번째 단계는 영화를 반복해 보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영화에 관한 평을 쓰는 것이고, 세 번째 단계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그 이상은 없다." - 프랑수아 트뤼포
트뤼포는 프랑스의 영화 제작자이자 감독이다. 새로운 감수성과 전통적 형식의 변화를 통해 '작가주의 영화'를 강력히 주장하는 도발적인 글을 <카이에 뒤 시네마 Cahiers du Cinéma>에 발표함으로써 작가주의적 비평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비평적 입장을 토대로 1950년대말 누벨 바그를 이끌었다. 영화의 표현양식은 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감독의 감수성을 자유롭게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 당시 누벨 바그의 미학이었다. 누벨 바그의 신호탄이 된 <400번의 구타 Les Quatre Cents Coups>(1959)는 트뤼포의 소년시절의 체험을 연상시키는 반자전적 장편영화로, 트뤼포는 이 영화로 1959년 칸 영화제에서 최우수 감독상을 받았다./브리태니커
[2007년] 코카콜라 브랜드 가치 430억달러 세계 1위
‘세계 최고의 가치를 가진 브랜드’에 코카콜라가 선정됐다고 인도 PTI 통신이 6일 보도했다. 영국 브랜드 가치 평가기관 ‘브랜드 파이낸스’(BF)가 발표한 ‘2006 세계 최고 가치 브랜드’ 보고서에 따르면 코카콜라 브랜드 가치가 430억 달러로 세계 1위에 올랐고, 마이크로소프트(370억 달러)와 시티뱅크(350억 달러) 등이 뒤를 이었다. 이 밖에 월마트와 IBM, HSBC, GE, 뱅크 오브 아메리카, 휴렛 패커드, 말보로 등이 세계 10위에 이름을 올렸다. /조선
[2003년] 난치병 치료를 위해 체세포 복제를 허용한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안’ 확정
2003년 2월 6일, 난치병 치료 목적의 체세포 복제를 허용한다고 명시한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안’이 정부안으로 확정됐다. 이는 체세포 복제 허용을 요구해온 의ㆍ과학계의 의견을 일부 받아들인 것으로, 이로써 2년여간 끌어온 보건복지부와 과학기술부간의 이견이 해소됐다.
새 법안이 과거 복지부 법안과 다른 점은 "난치병 치료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한 누구도 체세포 복제를 할 수 없다"는 문구를 넣었다는 것이다. 기존 법안은 "체세포 복제를 금지하며 다만 국가생명윤리자문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허용할 경우 예외로 한다" 고 규정했었다. 이로 인해 의ㆍ과학계에서는 국가생명윤리자문위원회에 종교단체와 시민단체 대표들도 포함시키도록 되어 있어 이들에게 체세포 복제 허용 여부 판단을 맡긴다는 것은 아예 금지하는 것과 같다고 반발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진통 후 복지부와 과기부가 서로 호응하여 새로운 법안이 나오게 됐다. /조선
[1996년] 민자당, 신한국당으로 출범
그동안 ‘가칭 신한국당’으로만 불려왔던 신한국당이 1996년 2월 6일 당 총재인 김영삼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제1차 전당대회에서 당헌개정을 통해 신한국당으로 공식 출범했다.
대회에서 당명 개명을 추인받고 ‘역사 바로세우기’와 ‘안정속의 개혁’을 당의 목적에 추가함으로써 민자당에서 신한국당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신한국당의 공식출범에는 구 민자당 당명에 함축돼 있던 3당 합당 구도를 청산하고 새로운 집권세력으로 출발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었다. 이날의 잠실체육관에서 열린 전당대회는 대의원과 참관인 등 1만2천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2시간30분동안 진행됐으며 시종 박수와 환호로 일관 축제 분위기를 연출했다. /조선
[198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의 예능보유자 정권진(鄭權鎭) 사망
1927. 10. 29 전남 보성~1986. 2. 6 서울.
할아버지 재근(在根)이 국창 박유전의 문하생이었으며, 아버지 응민(應珉)은 할아버지의 악재(樂才)를 물려받아 박유전의 강산제 〈심청가〉를 익혔다.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명창(名唱)을 세상에 내세우지 않고 후진을 지도하여 여러 악재들을 이수시킨 데 그쳤다 한다. 자연히 정권진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소리를 귀동냥으로 익혔다. 얼마 후에 정권진의 소리와 음악적 재능을 짐작한 아버지가 직접 가르쳐주었다는 후문도 있다. 8·15해방 후 본격적으로 판소리를 부르기 시작했으며, 1961년 이후에는 창극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판소리를 고집하며 살았던 외골수 광대였다. 국악고등학교의 창악을 맡아 가르치기도 했으며, 전남대학교 국악과에서 판소리를 가르쳤다. 후진양성에 힘쓰다 지병(持病)으로 죽었다.
1970년에 판소리 심청가로 중요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로 지정받았다. 문화재 관리국에서 발행된 "한국의 음악" 음반을 통해 심청가를, 그리고 뿌리깊은 나무에서 낸 음반을 통해 적벽가를 감상할 수 있다.
[192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병창 예능보유자 박귀희(朴貴姬) 출생
1921. 2. 6 대구~1993. 7. 14 서울.
본명은 오계화(吳桂花). 16세에 유성준(劉成俊) 문하에서 〈춘향가〉·〈수궁가〉·〈심청가〉·〈흥보가〉 등을 익혔다. 임방울(林芳蔚)·이화중선(李花中仙)·오태석(吳太石)·강태홍(姜太弘)·김소희 등과 함께 활약했다. 1940년 가야금의 거장 강태흥에게 가야금을, 1941년 오태석에게 가야금병창을 배웠다. 창극·민속무용에도 조예가 깊고, 독자적인 더늠을 개발하여 음반도 취입했다. 1955년 한국민속예술학원을 설립해 후진 양성에 힘썼고, 1960년 한국국악예술학교를 설립·운영했다. 1961년 도쿄[東京]에 무용학원을 설립해 재일교포에게 한국전통예술을 가르쳤다. 1962년 파리에서 열린 국제민속예술제에 참가했고, 그후 여러 차례 유럽과 미국·일본 등 해외공연을 참가했다.
[1979년] 파키스탄 최고재판소, 부토(Zulfikar Ali Bhutto) 전 수상의 사형판결 확정
1979년 오늘! 부토 전 파키스탄 수상에게 사형확정 판결이 내려진다.
파키스탄 대법원은 수상으로 재직하던 당시 정적을 살해한 부토에게 1,2심에서 사형판결을 내린 것은 법리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판시했다.
1973년 8월 총리에 취임한 부토는 1977년 3월 다시 총리로 선출됐지만 같은 해 7월 군부 쿠데타와 함께 구속됐다.
부토는 군정에 종지부를 찍고 내정을 충실히 다져 국민의 신뢰를 얻은 인물이다.
미국의 카터 대통령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부토의 사면을 요구했다.
그러나 부토는 두 달 뒤인 1979년 4월 4일 비밀리에 교수형에 처해지고 만다. /YTN
[1895년] 미국 프로야구 선수 베이브 루스(Ruth, Babe) 출생
루스
1895. 2. 6 ~ 1948. 8. 16
1895년 2월 6일 미국 메릴랜드주(Maryland) 볼티모어(Baltimore)에서 태어났으며, 미국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프로야구 선수이다.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홈런 타자로, 본명은 조지 허먼 루스(George Herman Ruth)이다. 1914년 마이너리그에 소속된 볼티모어팀에서 프로선수생활을 시작하여, 보스턴 레드삭스(Boston Redsox)의 투수로 스카우트되었다.
1916년과 1918년 투수로서 월드시리즈에 진출하여 29와 2/3이닝 연속 무실점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왼손잡이 투수로서 통산 94승 46패, 방어율 2.25를 기록하였으며, 1918년부터는 타격자질을 인정받아 외야수이자 타자로 전향하였다.
1920년 1월 보스턴 구단주가 펜웨이 파크(Fenway Park) 건설자금 융자조건을 붙여 12만 5000달러라는 헐값으로 뉴욕 양키스(New York Yankees) 팀에 팔았는데, 보스턴 레드삭스는 이후 단 한번도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루지 못해 '밤비노의 저주'란 말이 생겨났다. 양키스에서는 1930년과 1931년에 당시 사상 최고 액수인 8만 달러의 연봉을 받았다.
185㎝의 키에 몸무게 95㎏인 왼손잡이 타자로서 1918∼1931년(1922년과 1925년 제외)까지 아메리칸리그에서 12회 홈런왕이 되었다. 1919∼1921년까지 3년 연속 메이저리그 최다홈런기록을 세웠고, 1919년에는 29개의 홈런으로, 1927년에는 60개의 홈런으로 최다홈런기록을 수립하였다. 메이저리그에서 22시즌을 뛰는 동안 통산 714개의 홈런을 기록했는데, 이 기록은 1974년에 행크 아론(Hank Aaron)에 의해 깨질 때까지 최고의 기록이었다.
월드시리즈에 10차례 출전하여 41경기를 치르는 동안 3할 2푼 6리의 타율과 15개의 홈런, 장타율 7할 4푼 4리의 기록을 세웠다. 1928년 월드시리즈에서는 4경기에 출전하여 6할 2푼 5리의 타율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메이저리그 정규시즌에서는 통산 2,503게임에 출전하여 714개의 홈런, 2,056개의 포볼, 2,211개의 타점, 2,056개의 4구, 1,130개의 삼진, 2,873개의 안타, 506개의 2루타, 136개의 3루타, 장타율 6할 9푼, 통산타율 3할 4푼 2리를 기록하였다.
1935년 보스턴 브레이브스(Boston Braves)에서 은퇴하였고, 브루클린 다저스(Brooklyn Dodgers:지금의 LA 다저스)의 코치를 지냈지만, 무책임하다는 평판 때문에 감독에는 오르지 못한 채 1938년 야구계를 떠났다. 그가 타격에서 이룩한 위업은 다른 모든 홈런타자들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으며, 1936년 야구전당에 들어간 최초의 5명의 선수 가운데 1명이다.
1948년 8월 16일 뉴욕에서 암으로 사망하였다. 로버트 크리머(Robert Creamer)가 쓴 전기 《베이브 Babe》가 1974년에 출판되는 등 많은 관련서적이 나왔다. /naver
[1858년] 미국 감리교 목사, 교육자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Gerhard) 출생
← 아펜젤러
1858. 2. 6 ~ 1902. 6. 11
펜실베이니아주(州) 손더튼 출생. 원래는 장로교 신자였는데, 1876년 감리교로 옮겼다. 1882년 펜실베이니아주 랭카스터의 프랭클린 마샬대학(Franklin and Marshall College)을 거쳐 뉴저지주 매디슨의 드류대학 신학부를 졸업하였다. 1884년(고종 21) 미국감리교 선교회에서 한국 선교사 임명을 받고 갓 결혼한 아내 D.엘라와 함께 1885년 초 한국에 와 한국선교회를 창설하고,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설립하였다.
1887년 한국 성경번역부가 생기자 H.G.언더우드, J.S.게일 등과 함께 성경 국역사업에 참여, 《마태오의 복음서》 《마르코의 복음서》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I ·II)의 번역을 마쳤다. 한편 1895년 월간잡지 《한국휘보:The Korean Repository》를 복간, 그 편집을 맡았다. 그는 암기 위주인 한국의 교육방식을 이해중심적인 교육방식으로 고치는 데도 크게 공헌하였다. 1902년(광무 6) 목포(木浦)에서 열리는 성경번역자회의에 참석차 배를 타고 가다가 목포 앞바다에서 충돌사고로 익사하였다. 큰아들은 배재학교 교장을, 큰딸은 이화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마포구 양화진외인묘지에 묻혔다.
[1665년] 영국 여왕 앤(Anne, Queen) 출생
← 앤
1665. 2. 6 런던 ~ 1714. 8. 1 런던
스튜어트 왕가의 마지막 군주로서, 독자적으로 통치하기를 원했지만 지적인 한계와 만성적인 허약 체질 때문에 각료들에게 크게 의존할 수 밖에 없었으며 각료들은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1701~14)에서 영국을 이끌어갔다. 앤 여왕 통치기의 특징은 한마디로 휘그당과 토리당의 극심한 대결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갈등은 불확실한 앤의 후계자 문제를 놓고 더욱 심화되었다.
요크 공작(제임스 2세[1685~88 재위]) 제임스와 앤 하이드의 둘째딸인 앤은 아버지가 로마 가톨릭교도였음에도 큰아버지인 찰스 2세의 뜻에 따라 프로테스탄트로 양육되었다. 1683년 앤은 따분한 성격이긴 하지만 준수한 용모를 지닌 덴마크의 게오르 공(1653~1708)과 결혼했으며 남편에게 헌신적으로 정성을 쏟았다. 앤의 어린시절 절친한 친구인 새러 제닝스 처칠(나중에 말버러 공작 1세가 된 존 처칠의 부인)과의 친밀한 관계는 훗날 정치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미모와 재능을 갖춘 새러는 앤의 사실(私室) 시녀가 되었으며 앤을 자신의 손아귀에 움켜쥐고 있었다. 1688년 네덜란드의 총독이며 프로테스탄트 통치자인 오라녜의 빌렘편에 서도록 설득한 사람도 바로 새러였다. 권리장전(1689)에 따라 윌리엄(빌렘)과 그의 아내이며 앤의 언니인 메리가 영국의 왕과 여왕으로 즉위함으로써 앤도 왕위 계승 서열에 들게 되었다. 앤과 메리의 사이는 매우 나빠졌다. 1694년에 메리가 죽은 후 윌리엄은 앤과 호의적인 관계가 되도록 노력했지만 자신이 영국을 떠나 있는 동안 앤을 섭정으로 임명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1683~1700년 사이에 앤은 무려 18번이나 임신을 했었지만 다섯 아이만이 살아서 태어났고 그중에서도 아들 1명만이 유아기를 살아넘겼다. 그러나 하나 남은 그 아들마저 1700년에 죽었고 이로써 앤은 자신의 후계자로 왕위를 잇게 할 희망이 사라졌다. 이렇게 해서 앤은 1701년 영국 왕 제임스 1세의 하노버계 후손들을 자신의 후계자로 정한 왕위계승법을 받아들였다. 앤은 1702년 3월 윌리엄이 죽은 직후 여왕으로 즉위했다. 처음부터 성공회에 대한 강렬한 신앙심이 행동의 밑받침이 되었다. 그녀는 가톨릭교도와 국교 반대파를 몹시 싫어했으며 고교회파 토리당에 동조하고 있었다. 동시에 정당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첫 내각은 거의 토리당이 지배적이었지만 중립적인 입장의 시드니 고돌핀과 말버러 공작이 이끌어갔다. 앤에 대한 새러 처칠(말버러 공작 부인)의 영향력은 비록 남편이 영국 군대의 지휘관이었지만 1703년 이후에는 보잘것없어졌다.
앤은 스페인 왕위계승전 전략면에서 토리당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앤과 말버러 및 휘그당은 영국군을 투입해서 유럽 대륙에서 싸우게 하려고 한 반면 토리당은 영국은 해전만 치러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결국 말버러가 대륙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자 앤에게 휘그당 출신 정치인을 입각시키라는 압력이 가해졌다. 앤은 완강히 거부했으며 휘그당 정치인들의 편을 드는 새러에게마저 더욱 냉담해졌다. 1707년 무렵 여왕의 총애는 새러를 떠나 애비게일 매섬에게로 옮겨갔는데 매섬은 토리당의 지도자 로버트 할리(나중에 옥스퍼드 백작 1세)의 측근이었다. 그러나 할리와 매섬의 계획은 앤을 너무나 당황하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 1708년 앤은 할리를 해임할 수밖에 없었으며 가장 저명한 휘그당원들을 정부에 등용했다. 전쟁이 장기화하자 민심은 휘그당에게서 멀어져갔다. 1710년 앤은 휘그당을 몰아내고 토리당 내각을 성립시킬 수 있게 되었다. 1711년에는 말버러 부부도 해임했다.
앤이 나이가 많아지고 허약해짐에 따라 후계자 문제가 결정적인 사안으로 떠올랐다. 집권 토리당은 추방되어 있는 앤의 동생이며 가톨릭교도인 이른바 '늙은 왕위요구자'(The Old Pretender) 제임스 에드워드(그의 왕위계승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음)와 지속적으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앤의 갑작스런 병세 악화와 죽음으로 토리당이 품고 있었을지도 모를 계획, 즉 에드워드를 위해 왕위를 찬탈하려는 계획은 좌절되었다. 앤은 마지막으로 유능한 온건주의자 슈루즈버리 공작 찰스 톨벗을 재무장관에 임명하고 프로테스탄트 후계자 확보 문제를 일임했다. 톨벗의 관장하에 하노버 가문의 게오르크 루트비히(조지 1세, 1714~27)가 평화롭게 즉위했다. 데이비드 그린이 쓴 전기 〈앤 여왕 Queen Anne〉이 1970년에 출간되었다.
[1804년] 영국의 신학자, 철학자, 화학자 프리스틀리(Priestley, Joseph) 사망
← 프리스틀리, E. Sharples가 초크로 그린 초상화(1795경)
1733. 3. 13 잉글랜드 요크셔 리즈 근처 버스탈필드헤드~1804. 2. 6 미국 펜실베이니아 노섬벌랜드.
영국의 성직자·정치이론가·물리학자.
자유주의적 정치사상과 종교사상, 그리고 실험과학의 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산소 발견자 중의 한 사람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교육과 초기생애
프리스틀리는 성공을 거둔 의상 장식가의 6명의 자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어린시절 수년 동안 병치레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공부에 몰두했다. 그의 양친은 칼뱅주의자였지만 다른 종교적 견해들에 대해 개방적이었으며, 그가 비국교도 교회의 성직자가 되기를 원했다. 장로교 또는 독립교회처럼 당시 비국교도 교회에 속한 여러 교회들은 영국 국교회에 순응하지 않았다. 그는 성직자가 되기 위해 한 비국교도 목사와 함께 '히브리어·칼데아어·시리아어·아랍어'를 공부했다. 건강이 좋아지자 1752년 노샘프턴셔 데번트리에 있는 비국교도 학교에 입학했는데, 이곳은 18세기에 비국교도들이 독자적으로 설립한 교육기관 중 하나였다. 이들 학교는 수준 높은 교육을 실시했기 때문에 최우수 교사들과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는 필수 교과과정 이외에 독자적으로 역사·철학·과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매일 20쪽 분량의 그리스어를 번역했는데, 이로 인해 그의 비정통적인 견해들은 더욱 심화되었다.
1755년 데번트리의 학교를 떠나 서퍽의 니덤 시장에 있는 장로교 독립교회 부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광적인 자유사상가'가 되어 있었고 그의 비정통적이고 심지어 이단적이기까지 한 견해로 인해 점점 정통주의 교인들로부터 신임을 잃게 되었다. 많은 고통과 번민 끝에 그는 속죄의 교리를 부정했으며, 더 나아가 〈신약성서〉의 바울로 서신을 검토한 후 사도의 판단은 "여러 군데서 결코 최종적인 결론을 내린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기뻐했다. 프리스틀리의 지적 발전과정은 그의 가문에서 신봉해온 칼뱅주의에서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안주의를 거쳐 삼위일체를 완전히 부정하는 합리적 유니테리언주의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진실한 신앙적 확신과 삶의 참된 경건성에서 한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1758년 그는 체셔의 낸트위치에 있는, 그의 견해에 호의적인 교회로 임지를 옮기고 그곳에서 36명의 학생들이 다니는 주간학교를 개설했다. 이무렵 과학에 흥미를 갖게 된 그는 학생들에게 전기 실험용으로 공기 펌프와 정전기 발생기 같은 '철학적 도구들'을 나누어주었다. 그의 교수법이 성공을 거두자 그는 1761년 랭커셔의 워링턴 아카데미의 어학과 문학 튜터로 임명되었다. 비국교도들에게는 대학과 학문적 직업의 길이 닫혀 있었기 때문에, 공업과 상업의 길로 가고자 준비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적합한 새로운 과정들을 개발했다. 기존의 교과서들을 사용할 수 없어서 그는 손수 교과서를 집필했다. 1761년 그는 사용하지 않는 고전어에 근거를 둔 어법과는 상반된 실제 영어 용법에 철저하게 의거한 책인 〈영어 문법의 원리 Rudiments of English Grammar〉를 발표했는데, 그 책은 그후 50년간 사용되었다. 1762년 워링턴에서 비국교파 목사로 임명된 그는 같은 해에 웨일스의 버샴에 있는 제철업자의 외동딸인 18세의 메리 윌킨슨과 결혼해 딸 하나와 아들 셋을 두었다.
그는 자신이 쓴 〈언어 이론과 보편적 문법 Theory of Language and Universal Grammar〉(1762)·〈전기 Chart of Biography〉(1765)·〈서민적이고 적극적인 생활을 위한 자유교육 과정 소론 Essay on a Course of Liberal Education for Civil and Active Life〉(1765)·〈역사와 일반 정치 강론 Lectures on History and General Policy〉(1765, 1788) 등을 활용함으로써 교과과정의 내용을 풍부하게 했다. 대학교 교과과정의 고전적인 내용보다는 역사·과학·예술을 강조하여 학생들에게 실생활을 위한 준비를 하도록 했다. 그의 교육 활동으로 인해 워링턴 아카데미는 그 분야에서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훌륭한 학교가 되었다(→ 교육사). 1765년 그는 에든버러대학교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과학 분야의 업적
그는 1763~65년 외과의사 M. 터너가 실시한 실용화학 강연과 실험실습에 참여하면서 과학에 한층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1765년초 그는 매년 런던에서 한 달씩 지냈는데, 그곳에서 미국의 정치인이자 발명가인 B. 프랭클린을 비롯한 주요 과학자들을 만났다. 전기 실험을 근거로 그는 1766년 런던 왕립학회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다음해에 프랭클린이 필요한 도서를 관대하게 대여해주고 용기를 북돋아주어 프리스틀리는 그때까지의 전기에 관한 지식을 요약하고 자신의 실험 내용을 설명하는 창의적인 저서인〈전기의 역사와 현 단계 The History and Present State of Electricity〉를 발표했다. 그는 속이 빈 구(球)에 전류를 흐르게 할 때 내부는 전하를 띠지 않는다는 것을 관찰하여 전기력의 역제곱법칙을 예측했다. 또한 숯에 전기가 통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전기와 화학적 변화 사이에서 어떻게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일으킬 수 있는가에 대해 주목했다. 이러한 업적을 통해 그는 전기 분야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던 독창적인 실험의 광대한 영역에 들어섰다. 화학에 점점 관심을 많이 갖게 되면서 그는 연소와 호흡과정 사이의 유사점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1767년 그는 요크셔의 리즈에 있는 밀힐 교회의 목사로 임명되었는데, 거기서 저술활동과 실험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보다 많이 가질 수 있었다. 비록 그가 과학에 접근하는 데 있어 이론에 주안점을 둔 것은 아니었지만, 어떻게 연구해야 가장 좋은 결과를 가져다줄지를 감지할 수 있었다. 그는 기체, 즉 그당시 '공기'라 불리던 것에 관해 연구했는데, 이로 인해 많은 중요한 실험들을 행하게 되었다. 그가 발견한 사실들은 화학의 이론적 발전에 중심적인 것이 되었다. 그는 리즈의 양조장 근처에서 살 때 기체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는데, 그곳에서 발효되고 있는 술이 담긴 큰 통에서 거품이 발생하는 것을 보았다. 그의 연구 이전에는 공기·이산화탄소·수소의 3가지 기체밖에 알려진 것이 없었다. 그는 열정적인 연구를 통해 10가지의 기체들을 발견했는데, 그중 4가지는 리즈에 있을 때인 1767~73년 발견한 것으로 산화질소·이산화질소·아산화질소(후에 '소기'[笑氣]라고 불림), 그리고 염화수소가 그것이다.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대체로 독창적인 실험 장치, 특히 향상된 가스 채취용 수조를 고안하고 그것을 능숙하게 조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물 속에서가 아니라 수조 안의 수은 위에서 기체들을 모으고, 시행착오를 반복한 끝에 수용성 기체들을 분리해낼 수 있었다. 〈철학회보 Philosophical Transactions〉에 실린 〈여러 종류의 기체에 관하여 On Different Kinds of Air〉(1772)라는 제목의 기체 실험에 관한 그의 논문은 즉시 프랑스의 화학자 앙투안 로랑 라부아지에의 관심을 끌었는데, 그는 프리스틀리의 작업에 대한 이론적 해석을 해주었다.
그는 이러한 실험들을 하면서 동시에 정치 이론가로서도 급속히 성장했다. 18세기의 자유주의 사상을 잘 대변하고 있는 그의 〈통치의 제1원리들과 정치적·시민적·종교적 자유의 본질에 관한 소론 Essay on the First Principles of Government, and on the Nature of Political, Civil, and Religious Liberty〉(1769)은 개인주의를 강조했는데 그는 인민은 자신들의 정부 안에서 발언권이 있으며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권리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영국의 경제학자 J. 벤담은 자신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어구를 프리스틀리의 이 책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는 평생을 통해 인류의 진보와 완전성에 대한 열렬한 신봉자였다.
1722년 그는 〈시각·빛·색과 관련된 발견들의 역사와 현 단계 History and Present State of Discoveries Relating to Vision, Light, and Colours〉를 발표했는데, 이 책은 광학에 새로운 기여를 했다. J. 쿡 선장은 자신의 2번째 탐험 항해(1773~75)에 천문학자로 자신과 동행해달라고 그를 초청했으나, 프리스틀리의 일체론적 견해에 대해 반대여론이 일어 그는 이 초청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항해 도중 식수의 맛을 좋게 하기 위해 '물에 탄산 가스를 스며들게 하는' 기술을 제안했는데, 후에 소다수 산업을 가능하게 만들기도 했다. 1772년 12월 셸번의 제2대 백작이고, 후에 랜즈다운의 초대 후작이 된 W. 피츠모리스페티는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설교하고 집필을 해도 좋다는 후한 조건으로 프리스틀리를 사서이자 문학 동료, 그리고 그의 두 어린 아들의 튜터로 채용했다. 1773년 7월 프리스틀리는 윌트셔의 칸에 있는 셸번 농장에 정착했다. 그 다음해 11월 그는 기체 실험에 관한 공로로 왕립학회로부터 코플리 메달을 받았는데, 그는 〈여러 종류의 기체에 관한 실험과 관찰 Experiments and Observations on Different Kinds of Air〉(6권, 1774~86)이라는 제목의 책에 계속해서 연구성과를 보고하고 발표했다.
산소의 발견
1774년 8월 1일 프리스틀리의 가장 유명한 발견이 이루어졌다. 그때 그는 적색 산화수은을 가열하여 무색 기체를 얻었다. 이 기체 속에서 양초가 불꽃을 내며 활활 타들어간다는 것을 발견하고, '플로지스톤이 결핍된 공기'라고 불렀는데, 이는 당시의 지배적인 이론을 받아들여 보통 공기는 더 이상 연소를 도울 수 없거나 생명을 지탱할 수 없을 때 플로지스톤으로 포화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플로지스톤은 어떤 물체가 타거나 호흡할 때 전이되는 물질로 생각되었다. 18세기의 화학에서 통일된 관념이었던 이러한 생각은 양적인 접근방식을 피하는 것이었지만, 1789년 라부아지에가 확립한 연소와 호흡작용에 관한 산화이론과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 자신이 '새로운 종류의 기체'를 발견했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했다(스위스의 화학자이자 약제사인 C.W. 셸레도 1773년경 산소를 발견했음). 그다음 달인 10월, 그는 셸번과 함께 벨기에·네덜란드·독일·프랑스를 두루 여행했는데, 파리에서 그는 라부아지에에게 새 '기체'를 얻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두 과학자의 만남은 화학의 미래를 위해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라부아지에는 그의 실험이 성공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것들의 중요성을 금방 인식했다. 그는 즉각 그 실험을 재현했고, 1775~80년 집중적인 연구를 한 끝에 산소의 기본적인 특성을 추론해냈으며, 그것을 대기의 활성적 '원리'로 인식했고, 연소와 호흡에서의 역할을 해석해 그것에 이름을 붙였다(1789). 그러나 그는 라부아지에의 견해를 전부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며, 특히 마지막까지 플로지스톤 이론을 지지했다.
다른 중요한 과학적 발견들
대기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다가 그는 암모니아·이산화황·사플루오르화규소·질소(1772년 D. 러더퍼드도 발견했음), 그리고 일산화탄소로 규명된 기체를 발견했다. 그는 빛은 식물 성장을 위해서 중요하며 녹색식물은 '플로지스톤이 결핍된 기체'(실제로는 산소)를 방출한다는 것을 관찰했는데,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발견이었다. 이러한 관찰들은 네덜란드의 내과의사인 J. 잉겐호우스(1779년에 연구를 시작함)와 스위스의 성직자이자 박물학자인 J. 제네바어가 그후 20년간 이룩한 체계적인 광합성 연구에 기초가 되었다. 그는 당시 이전에 알던 전기에 관한 지식에 근거하여 전기 불꽃에 의해 암모니아를 분해했으며 수소와 산소의 혼합물이 폭발될 때 이슬이 형성되는 것을 밝혔다.
1779년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셸번의 직장을 떠나 새 모임 회중의 목사로 공업도시인 버밍엄에 정착했다. 그는 셸번으로부터 약간의 연금을 받았으며, 친구들이 그의 실험에 들어가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기부금을 모금했다. 버밍엄에서 보낸 시간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하고 분주한 순간들이었다. 그는 종교와 신학에 관한 책들을 썼으며 설교집·소책자·교리문답서 등을 출판했다. 그는 저서인〈그리스도교 부패의 역사 History of the Corruptions of Christianity〉(1782)에서 삼위일체설, 예정론, 성서의 축자영감설 등을 포함한 그리스도교의 근본 교리들의 대부분을 부정했고, 그러한 오류가 나오게 된 역사적 근거들을 추적했다. 이 책은 다시 한번 격렬한 반발을 일으켰다. 프랑스 혁명 무렵 그는 모든 정치적·종교적 기존체제의 적대자라는 평판을 얻었다.
그는 매달 보름에 모이는 버밍엄 루너 학회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석했다. 런던 왕립학회와는 독립적으로 발전한 이 단체는 1766~91년 과학 및 과학을 산업과 기술에 응용하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이곳에서 그는 박물학자 E. 다윈과 도자기 제조업자 J. 웨지우드, 그리고 증기기관 발명가 J. 와트의 존경받는 동료였다. 자신이 행한 과학적 연구의 결론을 내리면서 그는 '생석회'는 수소를 넣고 가열하면 금속성 상태(환원됨)로 변한다는 것을 관찰했지만 그때 물도 생성된다는 것은 알지 못했으며 플로지스톤이론을 제시했다.
이 기간에 그는 프랑스 혁명의 원리들의 옹호자로, 또 시민적·종교적 자유의 열렬한 지지자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혁명에 반대하는 영국의 정치가 E. 버크가 쓴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 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1790)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여 혁명에 반대하는 대중을 분노케 했다. 1791년 7월 14일 파리의 바스티유 감옥을 무너뜨린 것을 기념하는 2번째 기념일에 버밍엄에서 군중 폭동이 일어났는데 그때 그의 집과 도서관, 그리고 실험실이 파괴되었다. 그는 버밍엄에서 추방되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그후 2년 동안 런던 근교 해크니에 거주하면서 뉴 칼리지(해크니 칼리지)에서 가르쳤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이 진전되면서 1793년 루이 16세가 처형되었고 같은 해에 프랑스에 대하여 전쟁이 선포되자 그는 더욱 군중들의 증오의 표적이 되었다. 프리스틀리의 세 아들들은 1793년 8월 미국으로 이주했고, 그와 그의 아내도 1794년 4월 미국으로 건너가 펜실베이니아의 노섬벌랜드에 정착했다. 미국 철학학회를 포함한 많은 학회로부터 환영을 받았으며, 펜실베이니아대학교의 화학 교수직을 제의받았으나 일체의 공직을 맡기를 거부했다.
그는 미국에 있는 동안 저작과 종교 활동을 계속했으나 잉글랜드에 있는 친구들과의 의견 교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과학 연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는 미국에서 4권으로 된 〈현재까지의 그리스도교 교회의 역사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to the Present Times〉를 발표했다. 남북전쟁의 지도자들인 J. 애덤스와 T. 제퍼슨의 친구로서 그들과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였는데, 두 사람 모두 종교에 대한 견해는 그와 비슷했다. 그의 〈계시의 교리와 비교해본 이교도 철학의 교리 Doctrines of Heathen Philosophy compared with those of Revelation〉는 그가 죽은 뒤에 출판되었다. 이 책은 제퍼슨의 제안에 따라 씌어졌는데, 제퍼슨은 그가 "죽음의 손이 자기를 짓누르는 것을 느꼈다"고 회고하면서 "이 책은 본래 기획했던 것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1804년 노섬벌랜드에서 죽었다.
그 밖에
2007년 열린우리당 의원 23명 집단 탈당
2007년 강신호 전경련 회장, 연임 포기
2001년 중국 여객선, 사상 첫 대만 직항
2001년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총리에 당선
2001년 북한-캐나다 국교 수립
1996년 내무부, 모든 재난신고 '119'로 일원화
1983년 한국-쿠웨이트, 문화협정 체결
1981년 한국-루마니아, 문화협정 체결
1981년 미국, 소련이 킬러위성 우주발사실험에 성공했다고 발표
1980년 남북총리회담을 위한 남북실무대표 판문점에서 첫 대좌
1974년 그레나다, 영국으로부터 독립
1974년 74억원 부정융자한 박영복 등 구속
1971년 한미, 주한미군감축과 한국군 현대화계획에 합의
1971년 아폴로 14호 승무원 달 표면에서 골프 스윙 연습
1966년 진주 중앙시장에 큰불, 570점포 화실
1964년 키프로스의 그리스, 터키계 주민 충돌
1963년 동서독 올림픽 단일팀문제에 완전합의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정치정화법 해당자 268명 2차 해금
1957년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 더들리 알렌 벅 교수, ‘크라이오트론(cryotron)’ 이라는 초전도성 논리소자 개발을 발표-컴퓨터의 소형화에 기여
1948년 서독, 미국, 영국 점령지구 통합헌장 조인
1946년 미소 공동위원회 설치
1923년 천체사진술의 선구자인 미국의 천문학자 에드워드 에머슨 바너드 사망
1922년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조인
1922년 조선교육령 개정 공포
1911년 미국 제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출생
1904년 일본, 러시아 국교단교
1886년 노비 폐지
1611년 중국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 출생
885년 일본 제60대 천황 다이고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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