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현대사회에서 예술가가 존재하는 의미는 무엇이고, 어때야 하는가? 흔히들 우리가 사는 사회가 매우 복잡하다고 말한다. 너무나 복잡해져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실체를 이해하기란 매우 어렵다고 말한다. 우선은 거기에 그렇다고 동의를 하자. 그렇다면 복잡하고, 분주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삶이 지금의 사회에 맞는, 잘 살아가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들 대부분은 멀티태스킹에 익숙하다. 한 번에 여러 가지를 할 수 있다.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읽으면서, 중간중간에 문자나 메일을 확인하거나, 답을 한다. 늘 ‘새로운 것(정보, 소비대상)’들이 출현하므로 이러한 활동은 사실상 중단이 불가능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좋게 말하면, 일상에서 우리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면 ‘소비자’로 완벽하게 전락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어쩌면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그것이 어째서 소비자라는 말인가, 라고. 그러나 거기에 우리는 이렇게 반문해볼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이 정말로 해야만 하는 일인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가’라는 질문을…. 오늘날 우리들의 삶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교감과 몰입의 절대적인 빈곤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 사이의 교감의 빈곤은 절대적으로 대화의 부재에 기인한다. 그러나 이러한 대화 부재 상황의 근원적인 문제가 반드시 핸드폰으로 인해 야기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인류의 기원 이래로 대화만큼이나 유용한 배움의 장은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성인들과 철학자들이 배움과 나눔의 장으로 선택한 것이 광장이었고, 사람들과의 문답을 통해서였다. 배움이라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습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대화는 줄고, 컴퓨터나 핸드폰 등의 크고, 작은 화면을 쳐다보며 보내는 시간이 증가하고 있다. 몸이 아프면 통증이나 고통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완화하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게 되지만, 정신이나 영혼이 병들어 가는 것은 반드시 통증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방치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이 현대의 병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 의외로 간단하며, 경제적으로 큰 투자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무엇인가에 몰입하는 것이다. 이 몰입은 인간이 정보를 포함한 모든 것에서 소비자로 추락하는 것을 지켜줄 수 있으며, 또한 인간성을 유지하게 해 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핸드폰을 열심히 들여다보는 일도 몰입이 아닌가, 라고 물을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핸드폰을 통해서 몰입의 경험을 할 수도 있다. 그것이 단순히 이 정보에서, 다른 정보로 이동하면서 그러한 정보들을 접하는, 그러니까 스스로의 사고가 완전히 중단된 정보들을 단순히 소비하는 행위가 아니라면 말이다. 핸드폰을 이용해서, 무엇인가를 읽을 수도 있고, 무엇인가를 들을 수도 있다. 그러나 몰입의 희열이나 기쁨은 한 가지 주제에 최소한 몇 시간은 몰두함으로써 외부세계로부터 스스로가 격리되고, 내면의 세계가 눈을 뜸으로써 생겨나는 것이다. 여기서 희망을 찾아야 한다.
오늘날 우리의 문명은 물질을 소유하고 쌓는 것에 광적으로 몰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니고 있는 문명에서 희망을 갖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만 예술이 작고, 연약한 희망의 빛을 여전히 내포하고 있다. 두 시간에 가까운 시간 동안에 인간은 몇 번이나 핸드폰을 들여다볼까? 그런데 두 시간 동안에 단 한 번도 핸드폰을 들여다보지 않고, 무엇인가에 집중하는 일은 가능한 것일까? 그렇다. 연주회를 통해서 그것은 가능한 일이 된다. 비록 연주회 도중에도 여기저기서 핸드폰의 불빛이 반짝이는 것을 목격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이러한 연주회의 형식을 빌려서 오늘날 음악가와 예술가의 존재에 대해서 묻는 공연이 프랑스의 앙기앙-레-뱅(Enghien-les-Bains)에서 열렸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성악가인 제라르 렌느(G?rard Lesne, 1956~)가 1985년에 창단한 바로크 전문 공연 단체인 ‘일 세미나리오 뮈지칼’과 더불어 무대에 올린 ‘샤만’이 특별하고, 흥미로운 것은 프랑스인이, 유럽인이, 예술가의 존재 의미를 무당에 빗대서 묻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한국 사회에서 무당은 여전히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비록 무당의 역할이 과거와는 달리 많이 변질되기는 했지만, 사람들은 그들이 지닌 특별한 힘을 믿고, 의지한다. 그들은 과거와 미래, 삶과 죽음,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사람들이고, 예지하고, 치료하는 사람들이다. 굿이란 행위를 통해서 사람들은 하나로 이어진다. 예술에 있어서, 특히 음악에 있어서도 강신무와 세습무가 존재한다. 정말로 음악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음악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사회에서 이러한 사람들이 모두 음악가로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나 클래식 음악계에 있어서는 세습무가 강세다. 단순히 음악적인 신이 내린다고 해서 음악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재능과 노력과 환경이 모두 갖추어질 때라야 그 가능성을 어느 정도 획득할 수 있을 뿐이다. 더욱이 콩쿠르를 통해서 연주자들을 가려내고, 마케팅 논리가 작동되고 있는 음악계에서 강신무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하다.
제라르 렌느는 ‘샤만’에서 노래하고, 말하면서 오늘날 예술가의 존재에 대해서 묻는다. 우리는 어디에 있고, 또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음악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이란 무엇인가? 극도로 개인주의화된 사회에서 함께 모여 음악을 연주하고, 음악을 듣는 일이 해 줄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인간됨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하루에 최소한의 일정 시간은 자신에게 몰입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하루 세끼의 식사를 하는 것과 거의 마찬가지로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일이다. 제라르 렌느는 과거와 현대의 만남, 그러니까 바로크 음악과 홀로그램을 통해서 청중들에게 매혹적인 여행에 동참하게 한다. 결국 ‘샤만’은 그 자신이 여행자이다. 자신도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이 삶에 우연히 오게 된 여행자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여행의 목적지와 의미를 끝없이 묻는 사람이다. 그 역시도 삶과 죽음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가장 큰 위험은 사람들 사이에서 관계의 가장 기본적이고, 인간적인 신뢰가 산산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고유한 ‘정’도 옅어지고, 성별이나 나이를 불문하고 존재했던, 인간적인 따스함이 사라지고 있다. 본래 자신을 쉽게 남에게 열어 보이거나, 내주지 않는 유럽인들의 인간관계도 변화를 겪고 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너’라는 타인은 이용가치가 있는가, 욕망의 대상인가, 하는 두 가지 물음에서 판단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한 가지 욕망에서, 다른 욕망으로 지속적으로 이동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사회가 진전된다면 소비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개인은 사회에서 ‘삭제’되어버리고도 남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가 스스로의 삶에서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과 투쟁마저도 필요하다. 우리는 나무에서 다시 배워야 할지도 모른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뿌리를 땅속으로 뻗어야 한다. 스스로의 삶이 이러한 방향과 의미를 지니지 못한 상태에서 다른 양식의 삶, 그러니까 예술에 어떠한 의미나 방향성을 주는 것은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예술가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그저 흠이 없고, 아름다운 소리로 연주하면 충분하다고 여기는 것이 오늘날의 모습이다. 어차피 우리들의 삶이 어떠한 방향성이나 의미를 상실하고, 순간적인 욕망에만 충실한 파편화된 것이기에, 삶의 보편성과 개연성을 담은 음악이나 연주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상실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 프랑스 성악가가 ‘샤만’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예술가의 존재에 대해 묻는 것은 매우 신선하다. 그러므로 우리도 진정한 ‘샤만’이 삶의 특정 순간의 몰입의 중재자가 되기를 요구해야만 한다. 그것이 어떠한 형태의 예술이든지 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