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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09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부활주일)
“마리아야!”
렘31:1~6; 골3:1~4; 요20:11~18
2023년 부활절 아침입니다. 부활의 신비, 부활의 기쁨과 희망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삶은 신비입니다. 머리 싸매고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니라, 경험하고 누려야 할 신비입니다. 경험하고 누려야 할 삶의 신비가 여러 모습이겠지만, 그 신비 중의 신비는 부활신비입니다. 성경이 우리를 안내하는 궁극적인 자리도 부활신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무덤에서 일으키셨다(에게이로)는 성경의 선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지켜보고(호오라) 살펴본(세아오마이) 이들의 선언은, 삶의 궁극적 신비이자 궁극적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증명해야 할 과제가 아니라, 경험하고 누려야 할 신비입니다.
사실, 경험하고 누려야 할 삶의 신비는 여러 층, 여러 겹이 있습니다. 우리가 “죽었다 살아났어~”라고 할 때, 우리는 몸의 큰 병에 걸렸다 놀랍게도 회복한 경우에도 이 말을 할 수 있고, 경제적이든 아니면 큰 사고의 어려움이나 난관에서 기적적으로 벗어난 경우에도 이 말을 할 수 있으며, 삶의 희망이 끊어진 것 같은 심리적인 큰 수렁에서 벗어났을 때도, 우리는 “죽다 살았어” 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 깊이는 다 다르겠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모두 다 어느 정도 부활의 의미층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경험이 그 깊이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언젠가 낡아지고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경험이 “의식의 구조”를 변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했던 제자들의 부활경험은 이보다 훨씬 더 깊은, 궁극적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경험은 그들을 가장 근원적인 곳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것은 감정적으로 마음이 열려 여유로워진 “상태의 경험”이 아니라, 그들의 의식 자체가 변화된,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진, 삶의 궁극적 신비에 참여한 자들의 변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것의 모든 것, 그 이상의 경험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이 어디에선가” 매년 부활을 맞이합니다. 여러 겹으로 경험되는 부활이 올해 여러분들에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요? 부활의 스펙트럼은 매우 다양합니다. 피어나는 작은 꽃봉오리를 보고 미소 지을 수 있는 수준에서부터, 어느 시인의,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지 않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 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라는 싯구처럼, 꽃 필 차례를 기다리며 잠시 머물러 설 수 있는 수준까지, 더 나아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변하는 날씨가 아니라 우뚝 솟은 산이 되는”, 갑자기 눈뜸을 경험하는 수준까지, 우리는 여러 겹의 부활을 각자 나름대로 맞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어떤 자리에 있어도 좋습니다. 남의 자리 넘보지 말고, 자기 자리 깔보지 말고, 지금 있는 자리에서, 그 깨어남, 그 열림을 충분히 맛보고 누리고 느낄 수 있으면 좋습니다. 꽃봉오리가 피어나는 것을 마음으로 감탄하는 작은 부활을 만나도 좋습니다. 좀 더 깊은 곳에서 자신의 든든함을,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시온산과 같아서, 흔들리는 일이 없이 영원히 서 있다”(시125:1)를 더 깊이 경험해도 좋습니다. 여러분의 부활을 경험하면서, 여러분의 부활을 경축하십시오. 그 안에 부활하신 주님의 메시지를 만나십시오.
사순시기를 지나며 만났던 모든 사건들, 생각들, 감정들, 그 너머에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는 내가 있습니다. 비록 우울함, 쓰라림, 불안, 걱정, 분노가 우리를 휘감아도 여전히 존재하는 내가 있습니다. 내가 허용하지 않는 한, 세상의 어떤 것도 나를 마음대로 어찌할 수 없다는 진리를 다시금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일찍이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아주 강력하게 말씀해 주셨지요.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롬8:38~39)
바로 이것이 부활의 신비이며 부활신앙입니다.
오늘 요한복음20장에 나오는 첫 번 부활의 증언자는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전통적으로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죄 많은 여인이거나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일 것이라고 여겨져 왔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마리아를 가리켜 예수께서 일곱 귀신을 내어 쫓아내 주신 여자라고 알려줍니다.
마리아는 목마름을 지닌 모든 인류와 소위 ‘죄인들’로 간주되는 사람들을 상징적으로 대표합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예수님께 받은 큰 사랑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마저 다 도망가 버리고만 예수님의 십자가 현장을 끝까지 지켜보았고(막15:40), 예수님의 시신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 묻히실 때도 지켜보고 있었으며(막15:47), 안식일이 지나 예수님의 무덤에 가장 먼저 달려갔던 여인도 이 여인이었고(막16:1), 예수님의 부활을 제일 먼저 목격했던 여인도 바로 이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눅16:9). 주님을 향해 열린 이 사랑의 힘이 그녀를 부활이 첫 경험자로 이끕니다.
오늘 본문 앞부분을 보면, 이 여인은 안식일 후 첫날 이른 새벽, 예수님의 시신에 향료를 바르기 위해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걱정하던 무덤의 돌은 치워져 있었고, 그녀는 거기서 되돌아와 제자들에게 달려가 그 소식을 전합니다. 시몬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무덤에 와서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예수님을 싸맸던 수의는 한 곳으로 개켜져 있었고,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은 생각도 못한 채,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혼자서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모두 다 무덤을 떠났지만, 마리아는 무덤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는 이 상황이 어찌된 영문인지 모른 채 발길이 옮겨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녀는 울다가 몸을 굽혀 무덤 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여 있던 머리맡과 발치에 천사 둘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천사가 “여자여, 왜 우느냐?” 묻습니다. 마리아는 여전히 예수님의 시신에 집착을 합니다.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뒤로 돌아섰는데, 예수님이 거기 계셨지만, 그녀는 예수님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어디 두었는지, 그를 모셔가겠다고 말합니다.
이 여인은 슬픔 속에 빠져 있어 예수님의 부활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많이 사랑했지만, 살아나신 예수님을 여전히 죽은 자 가운데서 찾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알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도 우리 감정 속에, 생각 속에, 경험 속에, 빠져 있을 때는 부활의 신비는커녕 우리 자신도 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 삶은 매우 연약합니다. 깨어지기 쉽고, 상처받기 쉽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헤어나오기도 참 힘이 듭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종종 우리가 딛고 있는 삶의 기반 자체가 얼마나 허망하다고 느끼는지요? 우리 삶에는 늘 죽음의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고, 인생 고비마다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긴장과 번뇌와 아픔이 있는지요? 먹고 사는 생존에 대한 고통부터, 심리적인 고통, 더 깊은 알 수 없는 고통까지, 우리에게는 말할 수 없는 상처와 번뇌와 아픔이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우리 인생에 깃든 이런 그림자를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인생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거나 회피하는 것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바라던 욕구가 채워지면 당장 헤헤거리며 좋아하다가도, 어느 순간 상황이 바뀌면 말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고통과 기쁨을 받아들이는 것도 다 내 중심적이예요. 내가 조금 살만하면 세상은 살만한 것이고, 내가 조금 어려우면 세상 다 끝난 것처럼 살지요.
우리에게 삶은 이렇게 상처와 약함과 한계와 자기중심으로 늘 제한적입니다. 사랑과 미움은 혼재하고, 슬픔과 기쁨이 혼재하며, 생명과 죽음이 혼재합니다. 아니 많은 경우 이 세상은 미움이 사랑을 삼키며, 슬픔이 기쁨을 삼키고 죽음이 생명을 삼킵니다. 이 속에 예수님의 부활이 찾아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울고 있는 마리아를 부르십니다. “마리아야!”
긴 말씀을 하신 것도 아니고, 자신이 부활을 어떻게 입증하신 것도 아닙니다. 단지 “마리아야!”라고만 부르십니다. 깨우는 것이지요. 아주 짧은 한 마디,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이 순간에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합니다. 부활은 이런 겁니다. 긴 설명이나 증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과학적 입증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깊은 접촉이며 근원과의 만남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의 부활하신 예수님 경험과 함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늘 목격자의 부활경험과 함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자체만 따로 존재하는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목격자의 부활이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부활은 우리의 일상적 의식을 넘어서는 초월의 체험이며 새로운 차원으로의 의식의 변화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몇 가지 바뀌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의식의 차원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부활은 우리가 새로 깨어남이며, 우리가 새로운 시선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부활신앙을 통해서만 우리가 믿는 신앙과 신비로운 삶의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성경의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신앙은 우리네 수수께끼 같은 인생의 문제들을 푸는 열쇠가 될 것입니다. 부활 신앙은 우리의 가장 깊은 삶의 의미를 설명해 줄 것입니다. 그것은, 인생의 연약함과 온갖 상처 속에서 우리의 삶이 어째서 의미가 있는지를 밝혀줄 것입니다. 우리 세상 속에 온갖 고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의 삶은 의미가 있는지를 밝혀 줄 것입니다. 부활신앙은 이 세상 속에 온갖 악이 횡횡하더라도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을 이기며 살 수 있는지를 알려줄 것입니다. 우리 삶이 온갖 회의와 번뇌로 가득 차 있고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수없이 일어난다 해도 우리의 삶이 왜 의미 있고 값진 것인지를 알려줄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 같은 때에도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을 알려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우리 삶의 의미를 밝혀주고 우리 삶을 심화시키는 열쇠입니다.
그 다음,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내게 손을 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즉각적으로 우리의 감각으로 다 확인해 보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들을 다 우리의 감각 안에서만 인정하려고 합니다. 부활도 그렇게 우리의 감각 안에서 확인해 보려고 하고, 하나님도 우리의 감각 안에서만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나의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께서 아버지로 경험하신 분이 우리의 아버지시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 경험하신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믿음, 이 순수한 믿음입니다. 이 순수한 믿음만이 우리에게 부활의 진정한 의미를 알려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살림교회 식구 여러분, 우리에게 지금 많은 상처들이 있고 번뇌가 있고 아픔이 있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삶을 결정짓지 않게 하십시오.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신만을 찾으려고 울고 있지 말고(그 시신은 우리가 손에 넣고, 확인하고, 붙잡으려고 하는 모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확인하고는 더욱 더 번뇌와 나락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무덤에 묻혀 있던 예수님을 일으켜 세우신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십시오. 우리의 삶을 예수님의 무덤을 막았던 큰 바위 같은 것이 막고 있더라도, 그것으로 우리의 삶을 한계지우지 말고, 그 무덤 문을 활짝 열어 놓으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십시다.
온전한 치유란 우리 안에 여러 가지 장애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힘입니다. 상처에서 눈을 떼고 부활하신 예수를 보는 것입니다. 무덤 안에만 들여다보며 울지 말고, 그 옆에 서 있는 천사들을 보는 것입니다. 무덤을 막고 있던 바위를 보지 않고 그 바위를 굴러 버리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내 경험으로 당연히 동산지기라고 결정짓지 않고,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상처는 여전히 있을 것입니다. 무덤도 여전히 거기 입을 벌리고 있을 것입니다. 무덤을 막은 큰 바위도 여전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상처가, 그 무덤이, 그 바위가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무덤에서 일으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마리아는 우리에게 부활의 신비를 이렇게 알려줍니다. 우리는 오늘 부활절을 시작으로 50일 동안 주님의 부활을 경축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부활 설교에서 “우리도 언젠가는 저곳에서 안심하고 노래할 수 있도록 아직은 걱정 많은 이 세상에서 알렐루야를 노래합시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걱정 많은 이 세상을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걱정 많은 세상에서 원망 불평으로 세월을 보내는 대신, 할렐루야를 노래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나아가며, 곤궁 속에서 노래하며, 자신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온갖 장애들을 무기력한 삶을 사는 무기로 삼는 대신, 현재 자신의 삶의 처지를 합리화하는데 쓰는 대신, 삶의 넓이와 높이와 깊이를 경험하고 자유를 누리는 삶을 위해, 일어나(에게이로) 노래하며 걸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부활의 능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