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암 성자 李空 이세종 선생
삼월 15일 오후 2시에 전남 화순군 도암면 등광리 이공 기도 터에서 67주년 추모 모임이 있었다.
실천신학자 박근원씨가 기독교 사상지에 쓴글을 옮겨본다.
'한국 개신교 영성의 뿌리 어느 면으로 보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신앙생활의 표출은 이세종 이현필로 이어지는 신앙생활의 운동이었다. ...이 분들은 전형적인 한국 사람으로서 외부의 신학적인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다만 성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그대로 받아 들이면서 체험한 신앙적 영성의 소유자들이었고 그들의 영성이 그리스도교 전통의 영성 대가들의 신앙생활과 맥을 같이 한다는 점에서 주목할만 하다.'
이세종이 남긴 유산이라고는 가마니 한 장도 없었다. 일생 사진 한 장도 안 찍었다. 추운 겨울 언 땅을 파고 그들은 스승을 땅에 묻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의 껍데기인 육신만 땅에 묻혔을 뿐 그의 혼과 얼은 제자들의 가슴에 묻혀 한국 기독교의 토착적 영성의 뿌리가 되었다. 후에 맨발의 성자라 불리었던 이현필을 비롯한 그의 제자들의 공동체인 동광원이 바로 그것이다. 이세종의 운동을 이현필은 조직과 운영으로 정인세는 이 운동을 서울로 끌어 올리는 중추 역할을 하였다. 그 영향으로 김병로와 같은 이는 대법원장으로 있을때 판결을 내리기 전에 먼저 기도하고 성경 위에 두 손을 얹고 판결을 내렸다고 한다. 이세종의 영향을 받은 이로서는 전 검찰총장 원택연 장로가 있고 정치가로서는 장면과 김상돈이 있다. 학계에는 전남대 농대 교수인 김준과 명예교수인 신귀남이 있다. 철학자로는 유영모가 있고 사회 운동가로는 현동완 YMCA 총무가 있었다.
한국 기독백년사에 이세종 선생 같은 독특인물은 없었다. 청빈의 길 사랑의 길 순결의 길 초월의 길 고난의 길등 그것을 생명처럼 강조하며 몸소 그렇게 산 사람도 없었고 철저한 자기비움을 통해 자기완성에 이르려 애쓴 인물도 드물다. 우리는 이세종을 통해 고난의 예수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살다가 간 비천한 예수 청빈의 예수를 '주여 나는 당신 밖에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라고 기도한 아씨시의 성 프란스코 처럼 이세종은 요란한 대로변 가시밭에 한 송이 백홥화 고요히 이름 없이 지나갈 고독한 들꽃으로서의 짧으나 굵은 삶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