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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1;1-9, 반복하는 훈련이 의식과 무의식을 바꿉니다. 2024. 2. 4.
오늘은 2024년 소망의 닻을 올리고 출항한지 한 달이 지나고 2월 첫째 주일입니다. 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과 세계 속의 기독교인들은 오늘 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물론 시차 때문에 동일한 시간대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아니지만 규정에 따라 주의 날에 경건하게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살아가는 나라와 장소가 다르고 인종과 출신이 다르고 삶의 모습이 각기 다른 사람들이 복음 안에 “우리” 라는 울타리의 이름으로 서로를 축복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렇게 삶의 모습이 조금씩 달라도 내 자신이 숨을 쉬며 살고 있는 곳이 선교지이며 나에게 주어진 삶을 이어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사역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의 삶이 뉴스를 장식할 대단한 일과 자랑거리는 아닐지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일은 주어진 하루 가운데서도 승리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이겨놓으신 승리의 길을 주님과 함께 걷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서있는 모든 곳이 선교지이고 여러분의 삶이 사역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선교 지와 부름 받은 이 사역은 주님과 함께 죽었고 주님과 함께 다시 사는 연속입니다. 우리는 가상의 세계 속에 살아갑니다. 상상이 현실화 되어진 시대입니다. 그런데 이런 첨단과 밀려오는 정보 속에 누구나 모두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젊음을 앞세우는 청소년들도 불확실한 미래에 대하여 여전히 불안함과 두려움이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이 어렵고 취업을 해도 그 직장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과학 기술의 발달은 생활의 편리함을 주었지만 인공지능의 발달로 두렵기도 합니다. 의술의 발달로 인간 수명이 연장되었지만 사망의 두려움을 제거하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주위와 환경과 여건이 여전히 두려움인데, 이 것이 스트레스 입니다. 그런데 이런 스트레스는 극한 두려움 에서 옵니다. 공항장애 역시 그런 질병 중의 하나입니다. 이런 것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을 씻기 위한 노력을 하지만 점점 더 두려움과 더 불안함이 크게 다가옵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런 두려움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까요? 환경의 지배를 받는 저와 여러분이 어떻게 두려움 없이 살아 갈 수가 있을까요? 오늘 말씀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반복하고 훈련하는 행동이 이런 두려움과 불안의 무의식을 변화시킵니다. 반복하는 행동과 훈련이 의식의 사고나 무의식의 감정을 컨트롤 하게 합니다. 여러분, 무의식이 무엇입니까? 어떤 거부감 때문에 시간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것, 무의식에서 나온 행동의 일종입니다. 화가 날 때마다 손부터 나가는 것 무의식입니다. 순간적인 말실수로 화를 자초하는 것, 무의식에서 나온 행동입니다. 그래서 반복적인 훈련과 행동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이솝우화를 잘 알지요? 이솝 우화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외나무다리에서는 두 마리 염소가 외나무다리 한가운데서 서로 양보하지 않는다고 밀치고 싸우다가 결국 두 마리 모두 물에 빠져 떠내려갔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무의식입니다. 그런데 의식적인 훈련과 행동의 필요성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계획이 수립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계획이 잘 이루어지기를 원한 할지라도 훈련과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면 계획의 수립과 소망은 허사가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 반복해야 무의식을 일깨웁니다. 반복해야 의식이 실제화 될 수 있습니다. 반복하는 훈련과 행동이 목표한 것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믿음의 사람 여호수아에 대한 내용입니다.
1.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 지금 여호수아가 처하고 있는 상황은 강하고 담대한 믿음과 마음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었습니다.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였던 모세가 떠났습니다. 더 이상 함께할 그 무엇이 없었습니다. 거의 이백 만 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야 할 중차대한 임무가 바로 자신의 어깨에 얹혀 졌습니다. 막중한 중압감이 얼마나 컸을는지 충분히 짐작이 됩니다. 바로 이런 여호수아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영적 담력을 배양시켜 줍니다. 여러분, 어떤 큰일을 앞에 두면 누구든지 두려운 마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면 큰일을 결코 이루어낼 수가 없고, 목표한 바를 만들어 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합니다. 시종은 히브리어로 메솨레트로 인데 이는 성막에서 봉사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모세의 시종이라는 말은 사환이나 심부름꾼이 아니고, 업무의 보좌관을 의미합니다. 5,6절에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왜 이렇게 하실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1-1. 맡겨진 삶과 사역의 시작은 반복하는 행동에서 쉽게 이루어집니다. 반복하는 행동에서 늘 의식하는 사람이 됩니다. 무의식에서 의식하는 신앙인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신앙의 선배들과 함께 해 주셨던 동행을 말씀합니다. 왜 이전의 은혜를 말씀하실까요? 반복하는 행동을 통해서 마음을 강하게 할 용기를 얻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죽은 후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세우셨습니다. 사십년의 광야 생활 동안 모세의 시종, 모세를 돕는 자로 섬겼습니다. 직책에 대한 구체적인 모든 경험을 사십 년 동안의 실무훈련을 통하여 잘 쌓아 왔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에게 주어진 과업은 시작하는 사람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 곧 광야, 레바논, 유브라데 강, 헷 족속의 온 땅, 해 지는 편 대해까지 이르는 광대한 땅으로 인도해야 할 막중한 사명이지만, 그 땅은 이스라엘 백성이 입주하기만을 기다리는 빈 땅이 아니었습니다. 강력한 이방 민족들이 이미 정착해서 살고 있는 땅이며, 이 땅을 싸워서 소유해야 할 땅입니다. 지금까지 여호수아가 경험해 왔던 업무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시작부터 이런 막중한 일을 감당해야 할 위치에 세워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여호수아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 오직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반드시 이 백성으로 하여금 이 땅을 얻게 해 줄 것이다. 이는 임직을 위한 권면의 말씀입니다. 격려의 첫마디가 너희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처음 여호수아에게 하신 약속이 아니고, 모세가 시내 산 가시떨기 불 가운데서 첫 소명을 받을 때에 해 주셨던 말씀입니다, 이 약속은 모세의 전 생애에 걸쳐서 나타났습니다. 여호수아가 그 사실의 증인입니다. 시종으로 사십년을 지내 오는 동안, 두 눈으로 친히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에게 바로 이 점을 반복하여 상기시켜 주고 반복하여 행동하게 합니다. 보았던 그대로, 바로 앞에서나 홍해 도하나 광야 40년의 온갖 난관과 역경 중에도 변함없이 함께 하시고 끝까지 승리하게 해 주셨던 바로 그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반복하여 마찬가지로 도와주실 것이라고, 염려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왜 두려워하고, 왜 불안할 까요? 같은 질문을 반대로 하면 왜 강하지 못하고 담대하지 못하며 평안과 자유를 누리지 못할까요? 나의 모든 것을 드려서 의지해야 할 대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복하시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삶을 살게 됩니다. 여러분, 연약한 인간이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왜요?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잘 버리고 잘 잊고, 의식하지 못합니다. 본성대로 무의식 속에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 되셨습니다. 임마누엘 하신 주님이 우리의 질병을 고치시고 영적인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다시 반복하여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시고, 의식하게 하시는데, 볼 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여러분, 길 닦아 놓는 것을 따라 가는 것과 해 보지 않은 일을 처음으로 시작하는 것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습니까? 여호수아는 모세와 함께 출애굽 하여, 모세의 기적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바로를 대적하여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고, 바로의 결국은 홍해에 수장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르비딤에서 아말렉과 싸울 때에 모세는 산꼭대기에 올라가 손을 들고 있었고 여호수아는 아말렉과 싸워 여호와 닛시로 승리했습니다. 출33;11에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위하여 시내 산을 오를 때에 동행을 했으며, 모세가 회막에서 하나님과 만나고, 회막을 떠날 때에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12명의 정탐 군을 보낼 때에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지파의 족장으로 가나안 땅을 정탐하였으며, 10명의 정탐 군이 그들이 우리보다 강하므로 못 들어간다고 부정으로 보고를 했을 때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땅을 취하고, 능히 이기리라 했습니다. 민14;9,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이런 말을 담대하게 선포했던 사람입니다. 믿음으로 살아남았고, 이제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있는 지도자로 서있습니다. 하지만 신령한 지도력이 없습니다. 이제 본격적인 리더십을 보여야 하는 중차대한 책임감이 그를 눌렀는데 두려워하는 줄 아시고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여호수아와 함께 있을 것이라 약속합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무엇에 대하여 담대해야 할까요? 사람에 대하여 대담해야 합니다. 맡겨진 사역에 담대해야 합니다. 시작과 새로운 일을 위하여 담대해야 합니다. 무의식을 훈련시키시고 의식적으로 변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앞에 놓인 것이 그 무엇이라 해도 두려움이 없고 불안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고,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이며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는 반복되는 말씀과 약속에서 의식하며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2. 비전과 소망도 반복하는 행동을 통해서 의식화 되고 의식화된 믿음과 신앙이 결국에는 비전과 소망의 열매를 가져옵니다. 여러분, 왜 재림하실 주님을 소망해야 합니까? 신앙인의 궁극적 비전이기 때문입니다. 재림하실 주님은 역사의 주인입니다. 사람이 망쳐놓은 역사를 새롭게 하고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 재림의 주님입니다. 주님은 다윗의 뿌리이며, 거룩한 성이고, 왕이십니다. 안식과 평화를 주시는 참 목자이며 영원한 왕이시며, 광명한 새벽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성에 거하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왜요? 새 아침을 여시기 때문이고, 영원한 평화와 사랑의 새로운 시대와 새 역사를 펼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마라나타입니다. 여러분, 마라나타 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만날 때와 예배할 때마다 나누었던 인사이었습니다. 서로를 격려했습니다. 왜 이렇게 해야 할까요? 반복하는 신앙의 삶이 꿈과 소망을 이루고 현실에서 좌절하지 않기 때문이고,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반복된 훈련이 무의식에서 나오는 잘못된 것을 훈련시키고 아름다운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6절에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여러분, 어느 분이 기적을 기다리지 말고, 기적을 바라보지 말고, 기적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물론 기적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비전도 목표도 의식하지 않으면 기적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0년 이상을 노예로 살았습니다. 땅이라는 소유를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비전이 주어졌습니다.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땅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라는 지도자가 없지만 이 백성들과 함께 비전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면 흔들림이 없고 두려움도 없을 것 같은데, 여호수아는 여전히 의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계속해서 비전과 목표를 향해서 반복하여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라고 하십니다. 그 비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안위와 생존을 책임져야 하는 비전입니다. 그 땅을 차지해야 하는 비전입니다. 그래서 반복적으로 두려워 말라! 강하고 담대히 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보이는 것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보이는 것을 의지하려 합니다. 공식을 찾고 방법과 수단을 찾고자 하는 속성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이런 수단과 방법으로 위안을 받고 두려움을 씻어 낸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과 불안감을 씻어 준 것은 하나님의 반복된 말씀과 반복된 약속이었습니다.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만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약속의 실현을 위해서 두 가지로 여호수아가 확인을 합니다.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을 모세처럼 따르겠다고 충성 맹세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의 사람들이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군에 간담이 녹고 있다는 두 명 정탐꾼의 전갈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을 바로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행동을 하는데, 건너야할 요단강 위에 믿음의 첫 발을 내딛자 물 흐름이 멈췄습니다. 마른 땅 같이 건넜습니다. 무의식이 훈련을 받아서 의식화된 믿음의 행동이 이런 기적을 경험하게 했습니다. 요단강을 건넌 이후에 들어가야 할 여리고성이 멀지 않는 길갈에 머무는 중 또 다시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그 내용은 전투를 앞둔 모든 장정들에게 할례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할례를 행하는 것은 적군에게 몰살당할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무장해제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적군 앞에 버젓이 할례를 행합니다. 여리고 성을 공략하는데 통상적인 방법이 아닌, 성을 단순히 6일 동안 한 바퀴씩 돌고 마지막 7일째 7바퀴를 돌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전투상식과는 전혀 맞지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만을 그대로 믿고 행동을 했습니다. 전투의 지혜와 전략과 수단을 전혀 동원하지 않고 무력을 의지하지도 않았습니다만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을 함락하는데 성공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요? 반복된 비전의 말씀 속에 이미 여호수아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무의식의 본성을 반복하는 행동을 통해서 의식화 시켰습니다. 의식한 믿음의 행동으로 백성들을 위한 지도자가 되고, 비전을 이루어 냈습니다. 여러분, 어느 구름에 비가 들어 있는지 아십니까? 늘 항상 언제나 이런 방법으로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면 안 될 일이 없습니다. 감추시면 먹구름이라도 비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관계와 나눔과 역할에 대하여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신1:1, 이는 모세가 요단 저편 숲 맞은편의 아라바 광야 곧 바란과 도벨과 라반과 하세롯과 디사합 사이에서 이스라엘 무리에게 선포한 말씀이니라 ! 광야는 히브리어 MIDVAR (미드바르)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DAVAR (디바르)입니다. 이 두 단어는 같은 어원인데 신명기 1:1에서 광야라는 단어와 말씀이 함께 나옵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이며,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광야는 힘들고 어렵고 고통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광야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구름 속에 은혜의 소낙비가 있고 광야 속에 길을 여시고 밝히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슨 일을 하시고, 무엇이 맡겨졌습니까? 비전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까? 반복된 행동이 우리의 습관적인 무의식을 훈련시킵니다. 무의식에서 의식화 된 이런 신앙과 믿음의 발걸음이 2024년, 여러분의 비전을 이루고 소망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나쁜 습관입니다. 반복하는 잘못된 의식과 잘못된 행동이 삶을 힘들게 하고, 이상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여러분, 烏有 先生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까마귀는 온통 검어서 이목구비 중에 눈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까마귀 오자는 새 鳥에서 점이 하나 빠진 烏 자입니다. 그런데 빠진 점 하나는 눈을 뜻합니다. 오의 본 뜻은 까마귀이지만 烏飛梨落오비이락, 烏合之卒오합지졸, 長頸烏喙 장경오훼 의 표현 안에 검다는 뜻이 있습니다. 烏骨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오자는 왜, 어찌? 라는 强한 疑問의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烏有는 어찌 그런 일이, 어찌 그런 것이 있을 수 있느냐는 뜻입니다. 그리고 烏有先生은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있지만, 존재하지만 사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있을 수가 있을까? 그런 의미입니다. 그럴 듯한 지위와 체면에도 불구하고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행위를 반복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반복하여 의식에 이르고 반복하여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의식과 잘못된 행동을 반복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후회를 하잖아요. 여러분, 성경적이나, 복음적인 의미로 무엇을 해도 후회가 남고, 안 해도 후회가 남는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안해야 좋을까요? 하는 것이 좋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고나서 남는 후회는 경험을 통해서 앞을 보게 하지만, 무엇인가 하지 않고 후회를 하면 미련이 남아서 과거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느 것이 좋아요? 내일과 미래를 보는 것이 낫잖아요. 여러분, 하고 매듭을 지으면 됩니다. 다시 시작을 하고 의식하면 됩니다. 여러분, 1년이 몇 칠입니까? 괜한 것 묻지요? 그런데 일 년을 12달로 나누었습니다. 한 달은 30일입니다 몇 주로 나누었어요? 4주입니다. 한 주일은 7일입니다. 하루는 24시간입니다. 다 나누었습니다. 왜 나누었을까요? 하나로 다 연결이 되면 안 됩니까요? 잘못되었다고 하나요? 왜 나누었을까요? 매듭과 시작을 위해서 그렇습니다. 일 년의 매듭, 한 달의 매듭, 일주일의 매듭과 시간의 매듭이 있습니다. 매듭만 있습니까요? 매듭과 함께 새로운 시작이 있습니다. 일 년의 시작, 한 달의 시작, 하루의 시작이 있습니다. 매듭은 정리이고 시작은 소망입니다. 여러분, 위대한 사람은 이런 매듭과 시작을 잘 했던 사람입니다. 졸업은 끝이 아니라 원대한 새로운 계획의 시작입니다. 여호와 이레와 함께 임마누엘을 믿고 말씀을 기준으로 작은 일에도 충성하여 영광을 드러내고 필요한 일꾼이 되는 시작입니다. 이런 매듭과 시작은 늘 반복합니다. 아름다운 것에 대한 반복이고, 도전에 대한 반복이고, 꿈에 대한 반복입니다. 그래서 어째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어째 이런 사람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처음 시작부터 반복된 의식을 요구하고, 반복된 행동에 이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런 반복된 의식과 행동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을 받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얻기에 부족함이 없게 하셨습니다. 시작과 비전을 반복된 말씀과 약속을 의식화 시켰습니다. 비전이 이루어질 때까지 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의식화 된 여호수아가 수 24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력하게 말씀을 하고 그의 마지막에서도 반복하는 행동을 통해서 무의식을 깨우치고 요구를 합니다. 가나안을 정복하고 이제 늙어서 죽음을 눈앞에 둔 여호수아는 고별설교를 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귀를 기울였습니다. 역사의 산 증인이며 백전노장인, 아버지 같은 민족 지도자의 유언이기 때문에 갈망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숱한 대가를 지불하고 정착 단계에 돌입하는 복을 누리면서 가나안에서의 삶에 적응을 했습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여호수아는 죽음을 앞에 두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예견하면서 위대한 삶을 살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말씀합니다. 백성들로 하여금 어떤 결정과 결단을 촉구합니다. 백성들은 여호수아의 이 설교를 듣고 어느 한 쪽을 선택하고 결정할 숙제를 떠안았습니다. 사실 여러분, 우리의 삶은 수 없는 결정의 연속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 자리에 계신 것도 결정의 결과이며 산물입니다. 물론 우리의 선택 중에는 우리 힘으로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불가항력적 요인도 있고, 선택이라고 해서 다 중요한 것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결정은 일생을 규정하는 중요한 결정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좋은 결정을 하면 아름다운 결과물이 산출되고, 나쁜 결정이 많으면 많을수록 삶은 힘들어 집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선물 중에 최고의 것이 무엇입니까? 은혜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유의지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 자유의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하나님 안에서 인생이 전혀 달라집니다. 이 자유의지의 행사 여부에 따라 길이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면 왜 여호수아가 이런 결정과 결단을 요구합니까? 여호수아의 마음속에 무엇인가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정착한 가나안 땅의 문화와 문명은 대단합니다. 그들이 지금까지 살았던 유목민의 떠돌이 인생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의 땅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생활 하는 것과 안주하는 것이 당연한 문화이었습니다. 이 상황은 지금 살고 있는 이 시대와 이 도시가 정확하게 맞물려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만만한 구조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순교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그 모두를 견뎌내야 하는, 형태는 다르지만 일종의 순교입니다.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신앙생활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문제는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순수성을 유지하면서 살 수 있을 것인가에 똑같이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떻게 순수한 신앙을 유지해 갈 것인가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과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염려하면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믿고 섬길 대상에 대하여 결정과 결단을 촉구합니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하나님만 섬기라고 촉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 현재를 이야기 하면서 한 번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다른 신들과 비교를 해 보라는 거예요. 24;15절,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그러면서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다고 선언을 합니다. 이 말 속에는 강제적인 프레스가 있지만 은연중에 너희들이 조금만 비교하고, 조금만 생각하면 누구를 섬겨야 될 것인가 답이 나오지 않느냐? 예전에 기준하고 살았던 기본을 다시 반복하면서 지금 결정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14-18절 사이에 이 섬기라는 동사가 10번 가까이 반복됩니다. 중요하기 때문에 계속 반복합니다. 여러분, 인생은 누구를 섬기며 사느냐에 따라 갈립니다. 인생의 모든 줄기가 여기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모든 행동과 결정과 선택은 누구를 섬기느냐에 따라 파생되는 문제이고, 이 문제는 Yes와 No 양 갈래 길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 주시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얼마든지 복을 주십니다. 문제는 너무나 쉽게 변질된다는 점입니다. 가나안 문화에 영향을 받고, 그 모습이 드러났기 때문에 여호수아가 근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하나님만 섬길 것이냐를 반복하고 확인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복 주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복 주시는 것에 대하여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입니다. 계속 복을 받고 계속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바른 의식과 바른 행동의 반복이 필요한 있어야 될 사람, 필요한 사람,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살고 있나요? 이스라엘 백성의 반응은 긍정적입니다. 아주 강하게 결정을 하고 결단을 합니다. 16절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 하오리니. 아멘!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여러분, 오늘 아침부터 지배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근심과 걱정꺼리인가요? 불안과 두려움이 눈을 뜨면서부터 지배하려고 하며, 주변은 여리고성과 골리앗이 이끄는 블레셋으로 둘러 싸여있습니다. 그러나 내 지혜와 능력이 넉넉하다고 생각하는 한 여호수아나 다윗처럼 강하고 담대할 수가 없습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헬라어로 하마르티마 인데 ~빗나가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향하지 않는 빗나가는 삶입니다. 다른 신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찾고, 구하고, 두드리면서 나의 삶속에 말씀이 쌓이고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경험이 많은 장수이었습니다. 다윗은 목동이지만 곰과 사자와 싸워 이겼던 경험도 갖고 있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경험이나 능력을 의지 하지 않았습니다. 동행하시며 문제를 친히 해결해 주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삶을 살았습니다. 여러분, 나의 뜻을 내려놓고 의지하던 것을 내려놓아야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내 것으로 삼을 수 있고,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을 버리지도 아니하시고 떠나지도 않습니다. 점 하나가 빠진 어째 이런 일이 아닌, 어째 이런 사람이 아닌, 여호수아와 다윗과 같이 어째 이런 기적과 어째 이런 놀라운 믿음의 역사가~감탄하시고 복을 받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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