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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관찰사 신공 묘비명
(江原道觀察使愼公墓碑銘)
공(公)의 휘(諱)는 자건(自健)이요, 자(字)는 표직(杓直)으로 거창(居昌) 사람이다. 증조(曾祖) 휘 이충(以衷)은 판이천군사(判利川郡事)를 지냈고, 할아버지 휘 기(幾)는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지냈으며, 아버지 휘 후갑(後甲)은 예조 참의(禮曹參議)를 지냈다. 어머니는 숙부인(淑夫人) 구씨(具氏)로 판이천군사(判利川郡事) 구양(具揚)의 딸인데, 정통(正統) 계해년(癸亥年, 1443, 세종 25)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빼어나고 특출하며 단정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탁월하게 조숙(早熟)하였다. 천순(天順) 기묘년(己卯年, 1459, 세조 5) 공의 나이 17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는데, 이때부터 명성이 더욱 전파되어 사람들이 그 걸출함에 감복(感服)하였다. 세조(世祖)가 대관(臺官)에 명하여 등용할 만한 유사(儒士)를 천거하게 하자, 사헌부(司憲府)에서 공의 이름을 아뢰었고, 또 장차 등용하려 하였다. 그러나 공이 바야흐로 학문에 뜻을 두어 나아가 쓰이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성종조(成宗朝)에 이르러 공의 나이 30세 무렵에 여러 번 과시(科試)에 응시했으나 여러 번 낙방하였는데, 늙은 어버이를 생각해 일시 서사(筮仕,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아감)하여 영릉 참봉(英陵參奉)에 임명되었다가 광흥 창 봉사(廣興倉奉事)ㆍ상의원 직장(尙衣院直長)을 거쳐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로 승진하였다.
이때에 군적(軍籍)을 고정(考定)하자 (참여한) 낭료(郎僚)들이 모두 당시의 명망 있는 인사 중에서 뽑혔는데, 공 역시 거기에 참여하였다. 얼마 안 되어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임명되었다가, 비답(批答)이 내려지기도 전에 그날로 형조 좌랑(刑曹佐郞)으로 옮겨 임명하였는데, 하루 안에 영화로운 직책을 두 번 임명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것을 영화롭게 생각하였다.
이에 군적(軍籍)의 일을 감령(監領)하는 중신(重臣)들이 공을 능력이 있다고 하여 군적 처리를 오로지 맡을 것을 계청(啓請)하자, 임금이 형관(刑官) 역시 중요한 임무라 하여 윤허하지 않고, 다만 왕래하며 겸하여 처리하는 것을 허락하였으니, 대체로 공을 중히 여긴 것이다. 상의원 판관(尙衣院判官)으로 전직(轉職)하였다가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승진하였는데, 오래지 않아 (사헌부에) 상관(上官)으로 임명된 친족(親族)이 있었으므로 법(法)에 있어 당연히 피혐(避嫌)하여야 하여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로 나갔다.
임기가 만료되자 형조 정랑(刑曹正郞)으로 체배(遞拜)되어 상복사(詳覆司, 형조에 딸린 관아로 사형에 처할 중죄인에 대한 죄의 심리를 맡아 보는 곳)를 관장하였다. 구례(舊例)에 대관(臺官)은 문관(文官)이 아니면 임명할 수 없고, 상복사 역시 반드시 문관을 등용하여 관장케 하였는데, 공이 재능과 식견, 두터운 명망을 소유하였으므로 대저 임명하고 관장(管掌)케 함이 상례(常例)에 얽매이지 않았으니, 시론(時論)에 있어 존경받음이 이와 같았다.
경술년(庚戌年, 1490, 성종 21)에 어머니 상(喪)을 당하였고, 계축년(癸丑年, 1493년 성종 24년)에 아버지의 상을 당해 거상(居喪)하였다. 3년상을 마치고 나서 의금부 경력(義禁府經歷)에 임명되었고, 여러 번 옮겨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ㆍ종묘서 령(宗廟署令)ㆍ종친부 전부(宗親府典簿)ㆍ예빈시 첨정(禮賓寺僉正)ㆍ사복시 부정(司僕寺副正)ㆍ예빈시 정(禮賓寺正)ㆍ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로 옮겼다.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품계가 오르면서 첨지 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는데, 오위장(五衛將)을 겸임하였다.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로 전직되었다가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에 승진 임명되었다. 정덕(正德) 병인년(丙寅年, 1506, 연산군 12)에 공의 나이 64세였는데 쇠로(衰老)함을 스스로 혐의하고, 세상의 분란(紛亂)을 싫어하여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교하현(交河縣) 심악산(深岳山)의 남쪽에 복거(卜居)하면서 천석(泉石)과 문묵(文墨)으로써 스스로 즐겼다. 어떤 이가 공에게 농포(農圃)를 다스려 살림을 늘여 볼 것을 권하자, 공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우리 집안은 구업(舊業)으로 먹을 것이 충분하니, 이밖에 무엇을 구하겠는가?” 하였다. 가정(嘉靖) 정해년(丁亥年, 1527, 중종 22) 7월 모일(某日)에 병으로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85세였다.
공은 젊어서부터 서예(書藝)에 능한 것으로 한 시대에 이름을 떨쳤는데, 왕 우군(王右軍, 진(晉)나라의 명필(名筆) 왕희지(王義之))의 필법(筆法)을 깊이 터득하였다. 성종이 매우 장려하고 감탄한 나머지 왕 우군의 서첩(書帖)을 임서(臨書)하여 올리라 명하고, 또 창덕궁(昌德宮)의 ‘요금문(曜金門)’ 세 글자를 써서 올리라고 명하였는데 지금도 창덕궁 문의 편액(扁額)이 있어 보는 자가 탄복한다.
공의 서법(書法)은 늙어서 더욱 정묘(精妙)하여 글을 구하는 자가 계속하여 문(門)에 이르는 것이 저자처럼 붐비어 비단이 궤석(几席)에 가득하였는데,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써내려 그침이 없었다. 공은 관리로서의 재능에 더욱 뛰어나 모든 송사(訟事)와 옥사(獄事)를 처리함에 있어 물 흐르듯 낱낱이 분별해 내었는데, 모두 정황(情況)과 법(法)에 부합하였다.
성종이 사송(詞訟)이 적체(積滯)됨을 근심하여 6품 이상 중에서 관리로서의 재능을 소유한 자를 선발하여 송안(訟案)을 나누어주어 그 처결(處決)을 직접 아뢰게 하였는데, 공 또한 장례원의 송안을 가지고 아뢰었다. 임금이 이 송사가 어떠한가를 묻자, 공이 대답하기를, “유사(有司)는 마땅히 문권(文券)에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이 송안의 수미(首尾)를 살펴보건대, 모(某)는 문권이 없어 자신의 곧음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만, 무릇 송사의 처리는 마땅히 정황(情況)과 법(法)을 참고해야 할진대 문권이 없는 자가 곧은 듯합니다.” 하고, 인하여 곡직(曲直)을 분별해 내자, 임금이 매우 수긍하여 마침내 공의 말에 따라 처결하니, 당시의 논의가 이를 통쾌하게 여겼다.
또 윤대(輪對)에서 아뢰기를, “무릇 투살(鬪殺, 싸움으로 인해 사람을 죽임)과 희살(戱殺, 장난하다가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임)한 자의 경우에 사면령(赦免令)을 당하면 으레 원유(原宥, 죄를 용서함)를 받는데 수종(隨從, 종범(從犯)을 말함)이 유형(流刑)을 범했을 경우, 물간사전(勿揀赦前)의 법1)에 얽매어 으레 사면을 받지 못하게 되어 전혀 수종(首從, 수범(首犯)과 종범(從犯))이 지은 죄의 경중(輕重)에 대한 분별이 없으니, 법을 세운 본 뜻이 아닐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조정에서 그의 말을 써서 이후로는 무릇 투살ㆍ희살의 죄에 간여하여 유형을 범한 자(종범(從犯))가 사면령을 당하면 모두 죄의 용서를 얻도록 법령(法令)에 드러내어 있어 지금에 이르러서도 행용(行用)되고 있으니, 그 정련(精鍊)하고 통민(通敏)함이 모두 이러한 종류였다.
참의공[參議公, 아버지 신후갑(愼後甲)]과 부인(공의 어머니)에서부터 공에 이르기까지 일가(一家)가 서로 이어 모두 80세까지 장수를 누리는 동안, 임금이 다달이 보내주는 은사(恩賜)를 계속하여 받는 일은 세상에서 드문 바였으니, 어찌 덕을 쌓은 것 없이 그렇게 되겠는가?
공은 광흥 승(廣興丞) 이석동(李碩童)의 딸에게 장가들어 6남 2녀를 낳았으니, 난동(蘭仝)은 무과(武科)에 합격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이 되었으나 공보다 먼저 죽었고, 다음 난근(蘭根) 또한 일찍 죽었다. 다음은 난종(蘭種)이고 다음은 난원(蘭元)이며, 다음은 난수(蘭秀)이고 다음은 난무(蘭茂)이다. 장녀는 김간(金澗)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조세진(趙世珎)에게 시집갔다.
난동은 2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억령(億齡)ㆍ억세(億世)이고 장녀는 사록(司錄) 안수륜(安秀崙)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박호(朴琥)에게 시집갔다. 난근은 1녀를 낳았는데 하응징(河應澄)에게 시집갔다. 난종은 1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억년(億年)이고 딸은 현령(縣令) 허영(許瑛)에게 시집갔다. 난원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딸은 곽거인(郭居仁)에게 시집갔고 아들은 어리다.
난수는 3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지성(之誠)이고 다음은 지함(之諴)이며 다음은 지순(之詢)이고, 딸은 모두 아직 어리다. 난무는 1남을 낳았는데 지상(之詳)으로 아직 어리다. 내가 파직(罷職)을 당한 뒤부터 고양(高陽)의 망동리(芒洞里)에 집을 지어 살고 있었는데, 공의 심악산 복거(卜居)와는 거리가 겨우 10여 리였다.
내가 공에 대해 나이와 덕(德)에 있어 비록 천양지차(天壤之差)가 있지만, 함께 벼슬에서 물러나 한산한 곳에 있으면 외람되게 알아주심을 받아 연회하는 자리에서 모시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며 향곡(鄕曲)의 사이에 종유(從遊)한 것이 거의 10년이었으므로, 공에 대해 상세히 알지 못한다고 이를 수도 없었는데, 장차 묘도(墓道)에 비석을 세우려고 할 때, 공의 막내 아들 난무(蘭茂)가 찾아 와서 내게 비명(碑銘)을 청하니, 의리상 사양할 수 없었다. 마침내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거창(居昌) 신씨(愼氏)의 계보(系譜)는 그 유래가 끊이지 않아,
대대로 아름다움을 이어 그 화려함이 빛났다네.
공이 능히 그 선덕(先德)을 닮음은 근원(根源)이 있어 이에 표출된 것이어서,
재주와 명성을 떨쳐 두루 현질(顯秩)을 역임했도다.
번거로운 것을 깎아내고 처리함에 있어 칼날을 들이대기만 하면 척척 해결되었고,
법을 의논하여 원왕(寃枉)함을 편 것이 드러나게 영식(令式)이 되었다네.
공이 그 덕(德)을 향유함에 경복(慶福)은 마땅한 바이어서,
벼슬은 2품의 반열(班列)에 올랐고 수(壽)는 80세를 넘겼다네.
공의 아버지와 어머니부터 공에 이르기까지,
계속하여 임금의 위문(慰問)을 받아 베풀어 준 바가 풍부하였네.
평소의 묵적(墨跡)은 멀리 종왕(鍾王, 위(魏)나라 종요(鍾繇)와 진(晉)나라 왕희지(王義之)로 서도의 대가임)을 좇았는데,
이에 임금의 장려(獎勵)를 입어 울창하게 빛남이 있었도다.
만년(晩年)엔 세상의 분란을 싫어하여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천학(泉壑, 자연을 가리킴)에 맘껏 노닐다가 영면(永眠)하였다네.
이 묘비(墓碑)에 행적 새기어 영원한 후세에까지 전하게 하도다.
[각주]
1) 물간사전(勿揀赦前)의 법 :
사면령(赦免令)이 내리면 사면령이 내린 시점 그전에 지은 죄가 사면되는 것이 일반적이나, 중형이나 특별한 죄의 경우 사면령이 내리더
라도 그 이전에 지은 죄에 대해 사면을 받지 못한다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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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江原道觀察使愼公墓碑銘
公諱自健。字杓直。居昌人。曾祖諱以衷。判利川郡事。祖諱幾。全羅道觀察使。考諱後甲。禮曹參議。妣淑夫人具氏。判利川郡事具揚之女。正統癸亥生公。公生而秀異。端凝好學。卓然早成。天順己卯。公年十七。中司馬試。自是聲聞益播。人服其異。世祖命臺官薦儒士可用者。憲府以公名聞。且將用之。公方志學。不樂進取。至成廟朝。公年幾立。累試累屈。念親老姑筮仕。授英陵參奉。歷廣興奉事,尙▣直長。陞軍資主簿。時考定軍籍。郞僚皆選一時望人。公亦與焉。未幾。拜司憲府監察。批未下。卽日移授刑曹佐郞。一日之內。再授華秩。人以爲榮。於是重臣監領軍籍事。以公有幹能。啓請專任治籍。上以刑官亦重任。不允。只許往來兼治。蓋重公也。轉尙衣判官。陞司憲府持平。未久。有親族除爲上官。於法應避。出爲全羅都事。秩滿。遞拜刑曹正郞。掌詳覆司。舊例。臺官非文官則不得除。詳覆司亦須用文官掌之。公有才識重望。故凡除拜職掌。不拘常例。其見重於時論類是。庚戌。丁內憂。癸丑。居外憂。服闋。授義禁府經歷。累遷漢城判官,宗廟令,宗親府典簿,禮賓寺僉正,司僕寺副正,禮賓寺正,通禮院左通禮。階陞通政。授僉知中樞府事兼五衛將。轉掌隷院判決事。陞拜江原道觀察使。至正德丙寅。公年六十有四。自嫌衰老。厭世紛謝笏歸休。卜居于交河深岳山之陽。以泉石文墨自娛。或勸公治農圃開產業。謝曰。吾家舊業足食。此外何求。嘉靖丁亥七月日。以疾卒于正寢。年八十有五。公自少以能書擅名一時。深得王右軍筆法。成廟深加奬歎。命臨右軍帖而進。又命寫昌德宮之曜金門三字而進。至今門額存焉。見者歎服。公之書法。到老尤妙。求書者踵門如市。絹素盈於几閣。揮寫不輟。公尤長於吏材。凡聽訟讞獄。剖析如流。皆合情法。成廟患詞訟積滯。選六品以上有吏才者分授訟案。親啓處決。公亦將掌隷院訟案以啓。上問此訟何如。公對以有司當從文券。然觀此案首尾。某也以無券不能自直。凡訟理。當參用情法。無券者似直。因辨析曲直。上深以爲然。竟用公言處決。時論快之。又於輪對啓曰。凡鬪殺戲殺者。遇赦例蒙原宥。而隨從犯流。拘於勿揀赦前之法例。不得蒙宥。殊無首從輕重之別。恐非立法本意。朝廷用其言。自後凡干鬪殺戲殺之罪。而犯流者遇赦。皆得原免。著在令甲。至今行用。其精鍊通敏。皆此類也。自參議公與夫人以及于公。一家相承。皆享年八十。繼受月致之恩。世所希有。豈無積德致然。公娶廣興丞李碩童之女。生六男一女。曰蘭仝。中武科。爲司憲府監察。先公死。次蘭根。亦早死。次蘭種。次蘭元。次蘭秀。次蘭茂。女長適金澗。次適趙世珍。蘭仝生二男二女。億齡,億世。女長適司錄安秀崙。次適朴琥。蘭根生一女。適河應澄。蘭種生一男一女。曰億年。女適縣令許瑛。蘭元生一男一女。女適郭居仁。男幼。蘭秀生三男二女。長之誠。次之諴。次之詢。女皆幼。蘭茂生一男之詳。幼。余自譴罷。問舍于高陽之芒洞里。距公深岳之卜。纔十餘里。余於公。年德雖有霄壤之判。而俱在散地。猥蒙見知。往往奉尊俎承警欬。遊從於鄕曲間。殆將十年。知公不可謂不詳。將立石于墓道。其季胤蘭茂。來請銘於余。義不可辭。遂作銘曰。居昌之系。其來綿綿。世以趾美。芬華燁然。公克肖德。有源斯發。聘才馳聲。歷揚顯秩。剗煩理劇。迎刃解錯。議法申枉。著爲令式。公食其德。宜慶以福。班躋二品。壽踰八袠。惟考及妣。以曁于公。繼受告存。施報之豐。平生墨跡。遠追鍾王。爰被睿奬。蔚其有光。晩厭世紛。謝笏歸田。優游泉壑。永終于天。刊此竁石。垂千萬年。<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