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07. 5. 25 ~ 5. 29 4박 5일간 북한의 평양에서 열린 ‘평양남포 통일자전거 경기대회’에 참가했던 평양방문기이다. 명목은 자전거경기였으나 평양, 묘향산 관광과 각급 학교와 인민대학습당 방문 등 북한에 대해 나름대로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평양 도착(5. 25)
이산가족도 아니고 해서 평양 방문은 아주 특별한 일이 있을 경우에만 가능한 것으로 알았었는데, 그 특별한 경우가 갑자기 나에게 닥쳤다.
지인으로부터 4박 5일 일정으로 ‘평양남포 통일자전거 경기대회’가 있는데, 마침 자리가 하나 났으니 참가하라는 것이었다. 적지 않은 참가비 부담이 있었지만 이런 기회가 쉽지 않을 것 같아 휴가를 내기로 하고 참가 신청을 하였다.
새벽길을 재촉해 도착한 김포공항에서 간단히 수속을 밟고 약간은 들뜬 기분으로, 약간은 긴장 속에서 아시아나 비행기에 올랐다. 이륙한지 얼마 되지 않아 서해안으로 나갔던 비행기는 바로 북녘 하늘로 접어들어 50여분 만에 평양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청사 가운데 초대형 김일성사진이 첫눈에 보인다. 태극마크를 단 항공기로 세계에서 가장 패쇄적이라는 평양으로 날아 왔다는 게 실감이 나는 순간이었다.
말이 국제공항이지 규모도 작고 고려항공이라 쓰여 있는 국적기도 몇 대 안되며 더구나 승객도 없어 썰렁한 분위기의 공항 청사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입국수속을 했다.
너무나 쉬운 통관이었다. 예상했던 삼엄한 분위기나 경계심을 가지고 대하는 태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어 오히려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자전거 잘 타십니까?”
“글쎄요. 타 본지가 오래 되서...”
“좋은 추억 만드시라요.”
평양 첫인상(5. 25)
대기하고 있던 버스에 올라 호텔로 향했다. 예상외로 이동 중에 거리 모습을 찍지 말라는 주의사항 외에는 아무런 통제도 없었다. 자유롭게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가는 평양 외곽의 전원풍경을 보면서 갈 수 있었다. 물론 함께 탑승한 3명의 안내원을 무시할 만한 강심장을 갖고 있지도 못했지만.
평양 시내로 진입하자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고 붉은 글씨로 크게 써있는 영생탑과 개선문, 천리마동상, 김일성 동상 등이 차례로 보인다. 이제야 ‘이곳이 북녘이구나!’ 새삼 느끼게 된다.
거리마다 총을 멘 군인들이 배치되어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무참히 깨졌다. 재작년 금강산 관광 때 도로마다 시선 차단시설이 되어 있고 군데군데 군인들이 경계를 하던 것에 비하면, 평양이라는 자신감을 나타내는 듯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양의 거리는 한가하다. 승용차는 찾아보기 힘들고, 여기저기 김일성 김정일에 대한 구호가 붉은 글씨로 쓰여 있을 뿐이다. 고층건물은 많으나 미장이나 도색이 안 되어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김일성 광장, 평양역을 지나고 대동강을 건너 양각도로 들어간다. 우리가 도착한 양각도 호텔은 43층의 객실과 47층에 회전라운지를 갖추고 있는 북한에서 가장 좋다는 국제호텔이다.
여장을 풀고 간단하게 늦은 점심식사를 하였다.
마침 옆자리에 앉으신 이옹(남. 80세)이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말을 건다.
“걸어서 갔다가 날아서 왔수다.”
6. 25전쟁 때 남포에 살다가 몇 날 며칠을 걸어 서울로 피난 갔는데, 비행기로 한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를 56년 만에 오게 되었다며 떨리는 목소리로 감격에 겨워한다.
만경대 · 주체탑 · 환영만찬(5. 25 오후)
오후 첫 번째 일정은 만경대 방문이다. 김일성이 태어난 조그마한 초가집과 그 일가족의 투쟁역사를 보여주는 만경대혁명사적관을 들렀다.
여성 안내원이 이곳 만경대 고향집은 김일성 생일인 4월 15일경이면 하루에만 18만 명이나 찾는데, 평일에도 5만 명 정도 방문한다고 자랑을 한다. 하지만 10명 안쪽의 1~2팀 말고는 다른 방문객을 볼 수가 없다. 아무래도 통제가 된 듯싶었다. 아니면 뻥을 좀 쳤던지.
만 가지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 만경봉, 그 위에 세워진 만경대(萬景臺)에 올랐다.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대동강변의 경치들이 저마다 최고라고 뽐낸다.
도중에 안내원이 “우리는 동지(同志)입니다. 우리는 통일(統一)이라는 같은 뜻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라며 동지임을 강조한다.
높이 170m의 거대한 석조물, 주체사상탑이다. 평양 시내 어디서든 볼 수 있다는 이 탑은 1982년 1년여의 공사 끝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탑 앞에는 노동자, 농민, 지식인이 망치와 낫 그리고 붓을 손에 들고 있는 모습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수령님의 탄생 70돌을 맞아 전 세계 인민들이 바친 각 나라의 돌입니다.” 국명과 기증자의 이름이 새겨진 벽돌 모양의 돌들이 탑의 입구를 장식하고 있다. 150m 높이에 있는 전망대에서는 평양 전역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지금은 사람이 너무 많아 올라갈 수가 없다고 한다. 여기에서도 여전히 관람객은 우리뿐이다.
환영만찬이 시작되었다. 북측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에서 마련한 자리이다. 알고 보니 차에 탑승했던 안내원들이 모두 여기 소속이란다.
아름다운 여성 접대원의 친절한 접대 속에 간단한 환영사와 답사 그리고 건배가 있은 후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남과 북이 섞여 만찬이 시작되었다.
우리 테이블에 있던 남자 안내원에게 건배를 제의하라고 하자, “전 군중 멀미가 있어 잘 못합니다.”라며 웃긴다. 이제 6달된 아들이 있다고 한다. 31살. 김일성대학을 나왔단다. 옆에 앉은 여성들과 금방 ‘오빠, 누나’하며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평양에서의 하루는 이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평양의 밤은 어두컴컴하다. 기대를 하고 올랐던 양각도 국제호텔 47층 스카이라운지에서는 레스토랑 불빛만이 유리창에 반사되고 있다.
묘향산(5. 26)
저녁에 독한 평양소주 몇 잔을 했는데도 아침 일찍 눈이 떠진다. 해가 뜨는 평양의 아침 풍경은 안개가 끼어서인지 희미하다. 미리 양각도 호텔 주변은 자유롭게 돌아 다녀도 좋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간단한 복장으로 산책을 나왔다. 남한에서의 시끄럽고 복잡한 생활에서 벗어나 대동강변의 호젓한 분위기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게 한다.
묘향산으로 출발했다. 평양 시내를 빠져나가자 아름다운 전원풍경이 펼쳐진다. 나지막한 야산들만 보인다. ‘평평하고 밝은 땅’이라 평양(平壤)이라 했다더니 주변에 높은 산이 없다. 곳곳에서 모내기가 한창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마주 오는 차를 볼 수가 없다. 묘향산에 도착하는 2시간여 동안 본 차량이 10대가 안된다. 그러고 보니 중앙선도 그어져 있지 않다.
풍치가 하도 절묘하고 향기 그윽한 곳이라 묘향산이라 했다는 이 산에서 첫 번째로 간 곳은 국제친선관람관이다. 김일성, 김정일이 받은 세계 각국의 선물들을 모아 둔 곳이다. 산을 뚫어 2개의 거대한 구조물을 만들었는데 밖에서는 2층의 한옥 형태로만 보인다. 그 속에는 모두 176개국 21여만 점의 선물들이 나라별, 종류별, 연도별로 구분되어 전시되어 있다. 정말 대단한 규모의 보물들이다. 마치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보물창고 같다.
“열려라, 참깨!” 주문을 걸어 본다. 열릴 턱이 없다.
김일성관에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김일성 밀랍인형이 있다. 그런데 전혀 참배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어디에서도 참배를 요구받은 적이 없다. 몇 번 와보았던 사람들이 전에는 최소한 묵념이라도 해야 했다며 놀라워한다. 북한이 무척 유연해졌다는 것이다.
안내원이 거든다. “주석님이 살아 계신 것 같지 않습네까? 이곳에서 참배를 하는 사람 중에 주석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감격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네다.” 기대에 찬 눈망울을 무시할 수가 없다. “아, 그래요. 놀랍습니다.”
점심을 먹고 만폭동 등반을 시작했다. 만개의 폭포가 있어 만폭동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서곡폭포, 무릉폭포, 은선폭포에 당도하니 정자가 있다. 휴식 도중에 안내원들과 ‘우리는 하나’라는 흥겨운 노래를 다함께 합창하면서 남과 북이 하나가 되기도 했다.
묘향산에는 매장량이 많은 금광이 있는데, 김일성이 경제적 수익보다 자연훼손을 우려해 금광개발을 막았다고 한다. 바닥으로 향하는 관람객들의 눈길을 보며 안내원이 웃는다. “그렇다고 돌 주워갈 생각은 마시라요.”
하산길 무릉폭포 밑에서 안내원이 깜짝 제안을 한다. “물에 시원하게 발이라도 한번 담그고 가시라요.” 물이 정말 시원하다. 그 마음이 더 시원하다.
보현사가 오늘의 마지막 코스이다. 1042년에 세워진 사찰로 대웅전, 관음전 등 여러 건물과 우리나라 석탑 중 그 아름다움이 최고라고 하는 8각13층탑이 있는 곳이다. 이곳 주지스님과 함께 간 남쪽의 스님들이 간단하게 합동예불을 드린다. 이곳에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었던 서산대사와 사명당 그리고 처영 등을 기리는 수충사가 있다.
대웅전 옆에는 한반도 모양으로 가꾼 향나무도 있다.
통일자전거대회(5. 27)
일요일 아침. 자전거타기에 좋은 날씨다. 만경대학생소년궁전 앞에서 왕복 40㎞의 자전거 경기대회가 열린다. 미리 북측의 선수들이 준비를 하고 있다. 다니는 차량도 없지만 총 8차선의 차선을 막고 경기가 시작되었다. 1등부터 5등까지 시상을 한다고 하니, 표시 안 나게 6등(?)만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오랜만에 타는 자전거라 조심이 된다.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모내기에 한창이다. 경기 중간 중간 지나치는 평양 시민들이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격려를 해준다. 이곳저곳 구경도 하고 손도 흔들다 보니 어느새 반환점이다. 길가에 앉아 쉬던 북측 선수가 손짓을 한다. “쉬었다 가시라요. 어차피 등위에 들기 힘들지 안갔소?” 에라, 모르겠다. 푹 쉬다 가자. 결국 6등. 목표 달성이다.
남측 선수 한명이 2등을 했을 뿐, 나머지는 북측에서 다 차지했다. 좀 봐주지.
오후에는 대성산 아래 자리 잡은 광법사에 들렀다. 고구려때 세워진 사찰로 역사는 깊다지만 전부 새로 지은 건물이라 흥미가 반감된다. 오래된 비석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대웅전 안에서 만세 소리가 들린다. 합동예불 도중에 설법을 하던 남측 스님이 통일을 기원하는 만세 삼창을 제창한 것이다. 달려가 봤더니 사진 못 찍은 사람을 위해 한 번 더 만세를 하자고 한다. 열린 마음의 스님, 존경합니다. 그런데도 결국 못 찍었다.
저녁은 유명한 평양 단고기를 맛볼 차례. 평양 중심부 창광거리에 위치한 고려호텔로 갔다. 호텔 앞에는 그동안 보기 힘들었던 벤츠 등 고급 승용차가 10여대 주차되어 있다.
단고기가 부위별로 차례차례 나오는데 담백한 게 정말 맛있다.
그런데 양이 많다. “전에는 이것보다 두 배쯤 나왔습네다. 남조선 손님들이 너무 많다고 해서 반으로 줄인 겁니다.” 접대원이 친절하게 설명을 한다. 밖에 나오니 그리 늦은 시간도 아닌데 평양 제일의 번화가라는 창광거리가 사람도 없고 간판에 불도 없어 전체적으로 희미하다.
“거기 사진 찍는 분!” 누군지 딱 걸렸다.
모란봉(5. 28 오전)
아침에 일어났더니 허벅지만 약간 당길 뿐이다. 습관처럼 대동강변을 따라 산책을 하다보니 누군가 대동강을 향해 골프공을 날리고 있다. “가슴이 다 시원합니다. 강으로 날리는 샷은 처음 해보네요.” ‘아니 도대체 저 공은 어쩌지?’ 걱정을 하고 있는데 마침 옆에서 설명을 한다. 강 가운데 그물이 쳐있어서 나중에 걷는단다.
일찍이 조선팔경의 하나로 꼽히는 명승지인 모란봉에 올랐다. 노래방에서 많이 불리는 ‘한 많은 대동강아’에 나오는 모란강, 을밀대, 부벽루가 눈앞에 있다. 을밀대에서 바라보는 모란강과 최승대, 부벽루의 경치가 압권이다.
다음 일정이 있다고 금방 가잔다. 차에 타니 다시 호텔로 돌아간다. 속았다. 아무래도 평양시민과의 접촉이 부담되는 것 같다.
민예전람실
북한에서 만들어진 공예품과 그림을 파는 곳이다. 재미있고 싼 물건들이 많이 있다.
조개로 만든 개구리 합창단, 독수리 돌조각상, 꽃병, 작은 조개로 감싼 병, 꿩털 부채 등. 대부분 일이만원 정도의 부담 없는 가격대다.
빨리 차에 타라고 독촉하는데 물건 사는 재미에 움직일 줄 모른다. 여기 점원들은 판매도 잘한다. “거스름돈이 없어요. 작은 거 하나 더 골라 보세요.” 작은 색동 머리띠 하나 더 샀다.
김정숙탁아소
북한의 탁아소는 나라에서 모든 비용을 부담한다. 김정숙탁아소는 월요일에 아이를 맡기고 토요일에 찾아가는 주탁아소로 3~4세의 아이들이 이곳에 있다. 아이들이 배우는 말, 춤, 노래와 놀이를 참관하고, 자는 방과 식당 등을 둘러보았다.
어디서나 아이들은 인기가 많다. 아이들 재롱에 웃음이 떠날 줄 모른다. 아쉬운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김일성 주체 사상에 관한 말과 노래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공연. 어린 아이들이 앙증맞게 장기를 보여준다. 간이 공연을 마치자 예상치 못했던 장면이 연출되었다. 인사를 마친 아이들이 우리에게 달려들어 안기는 것이 아닌가. 감동의 물결이... 최고의 연출이었다.
‘부모들이 자식을 맡겨놓고 일터로 갔지만, 사실은 당의 품에 맡겨 놓고 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잘 가르쳐야 합니다.’ 현관에 걸려 있는 글이다.
민족식당(5. 28 점심)
“아주 재미있습니다.” 안내원의 말이다. ‘아니 음식점인데 맛있다가 아니라 재미있다.’라니... 평양에 여러번 다녀간 사람들에게 가장 인상 깊은 식당을 물어보면 유명한 옥류관보다 이곳을 꼽는다고 한다.
식사는 불고기 요리가 나오는데, 중요한 것은 식사가 어느 정도 진행된 시점. 한쪽 벽의 커튼을 걷는데 신디사이저, 드럼, 기타 등을 연주하는 무대가 등장한다. 그런데 연주자들이 모두 좀 전까지 서빙을 하던 접대원들이다. 재주도 여러 가지, 앞치마를 두른 채 노래와 춤 그리고 연주를 하는데 모두 수준급이다. 공연을 하는 와중에도 들락날락 접대도 함께 한다.
“남한에서 이런 음식점 차리면 히트 치겠는 걸.” 옆에서 자본주의 티를 낸다.
“주인 마담, 잘 구슬러 봐.” 글쎄올시다.
평양음악대학, 금성학원
오늘은 강행군을 하는 날이다. 북한의 애국가를 작곡한 ‘김원균 명칭 평양음악대학(공식명칭)’을 방문했다. 전국의 음악 수재들이 모여 배우는 곳인데, 선생이 많아 거의 개인레슨을 받는다고 한다. 음악에는 문외한이라 잘 모르지만 가야금을 개량한 악기가 많이 연주되고 있고 음률은 거의 국악 형태라 쉽게 받아들여진다.
연습실마다 문을 열어놓고 마음대로 구경을 하란다. 음악에 대한 자신감이 보이는 장면이다. 마지막으로 74명으로 구성된 관현악단 공연이 있다. 우리 음악을 서양악기와 가야금을 가지고 함께 연주하는데 전혀 어색하지 않다. 이것이 진정한 우리 음악이다.
북한이 자랑하는 또 하나의 수재양성기관인 금성학원이 다음 방문코스다. 여기에는 초등학교부터 전문대학까지 있는데, 컴퓨터와 음악의 영재들을 일찍이 발굴하여 가르친다고 한다. 컴퓨터 수재는 주로 김일성대학과 김책공대로 가고, 음악 영재는 평양음악학원으로 간다고 한다.
여기서도 인기는 초등학생들. 깜직한 모습으로 공부를 하는데 반듯한 자세로 수업을 듣고 있다. 그러고 보니 방문하는 학교마다 흐트러진 모습의 학생들을 볼 수가 없다.
“북조선에서는 탁아소에서부터 항상 바른 자세로 공부하도록 습관을 길러줍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반듯하지요.” 안내원의 자랑이 이어진다.
컴퓨터 교실 학생들은 프로그램을 작성하는데 열중이다. 그런데 교실에서 나오다 놀라운 것을 볼 수 있었다. 벽에 학생들 사진이 쭉 붙어있어 자세히 보았더니, 웬걸, ‘학생성적표’였다. 과목별로 등수와 점수가 사진 밑에 나란히 적혀있는데 매달 시험을 보아 바꾼다고 한다. 집에 와서 아이들에게 사진을 보여주었더니 “우~ 너무 비인간적이다.”며 항의한다. 이 놈들 성적표도 벽에 확대해서 붙여야 겠다.
여기서도 마지막에 공연을 보여준다. 수준이 아마추어가 아니다. 너무 잘한다고 했더니 안내원 동무가 입이 벌어지며 또 자랑을 한다.
“이 팀이 지난 해 인천에 가서 공연을 했는데, 열렬한 환영을 받았시요.” 어떤지...
5시부터 평양교예극장에서 서커스 관람이 있다고 서두른다. 10분쯤 늦게 도착했는데 미안하게도 인민군과 평양 시민 수백 명이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북한의 서커스는 국제적으로 그 명성이 매우 높다. 금강산 관광을 했을 때도 재미있게 보았는데, 이곳에서 양성된 교예단이 금강산도 간다고 한다. 다양한 서커스 공연이 우리 넋을 빼놓고 있다. 역시 하이라이트는 북한이 자랑하는 공중곡예, 3~4바퀴를 허공에서 돌아 그네로 돌아가는데 실수가 하나도 없다. 신기에 가까운 곡예에 입이 딱 벌어진다.
북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환송만찬이 기다리고 있다. 환영만찬과 같은 순서로 진행되는데 그동안 얼굴을 익혔는지 보다 부드럽고 대화가 많아진다.
김책공대, 인민대학습당(5. 29)
어제 밤에 무리한 일행들이 푸석 푸석한 얼굴로 모습을 드러낸다. 오늘 일정의 시작은 북한의 과학 수재들이 모여 있다는 김책공대다. 전 학생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데, 아무리 전기가 부족해도 이곳은 24시간 전기를 공급한다고 자랑을 한다. 외국어와 원서수업을 많이 하고 있단다. 컴퓨터 자판도 한글은 일부러 표시하지 않는다고 한다.
인민대학습당, 우리로 보자면 국립중앙도서관이다. 여기서도 여성 안내원이 친절하게 안내를 해준다. 입구 정면에 거대한 김일성 좌상이 자리 잡고 있다. 열람실과 학습실을 돌아보았는데 붙어 있는 각종 게시물은 전부 손으로 쓴 것이었으며, 이용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노트도 우리가 70년대 초에 사용하던 누런 갱지 같은 것이었다.
관람 도중에 직업의식이 발동해서 북조선의 중요한 고서들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아, 민족고전 말씀입네까? 2층에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들를 겁네다.”
드디어 민족고전실. 귀중한 금속활자본과 목판본 등이 전시되어 있는데, 놀랍게도 그 가운데 ‘직지’가 자리 잡고 있다.
그 때 갑자기 안내원이 주의를 환기시킨다. “자, 잘 보세요. 이것이 우리 민족 최고의 자랑인 백운화상불조직지심체요절입니다. 줄여서 직지심경이라고 하는데요. 1972년 프랑스에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도이칠란트에서 금속활자로 찍은 성서보다 70여년 앞서서 찍어낸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금속활자를 발명했다는 증거가 바로 이 책입네다.”
제대로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거 찍은 곳이 어디입니까?”
잘 모르는 모양이다. 망설이다가 “글쎄요. 아! 간경도감에서 찍은 것입네다.”
“잘못 아셨습니다, 남조선 청주라는 곳에 있는 흥덕사라는 사찰에서 찍은 책입니다.”
얼굴이 빨개지면서 일단 우겨 본다. “그럴 리가요? 간경도감이 맞습네다.”
“책의 마지막 장을 보면 ‘청주목외흥덕사 주자인시’라고 정확히 나와 있습니다. 그곳에 박물관이 세워져 있는데 제가 그곳 관장입니다.”
“아! 그래요. 몰랐습니다. 자료를 볼 수 있나요?”
2001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간단한 설명이 수록된 기념엽서도 전해주었다. 앞으로도 우리 민족의 최고 자랑거리를 자부심을 가지고 설명해 줄 것을 부탁했다. 같이 참관하던 일행들이 다시 쳐다본다. 어깨가 으쓱했다.
옥류관(5. 29 점심)
북한 음식 이야기에 빠지지 않는 유명한 옥류관. 대동강변을 끼고 한옥 형태로 아름답게 지어져 있어 강 풍경을 바라보며 식사를 할 수 있다. 녹두전과 고기가 먼저 조금씩 나오고, 마지막으로 냉면이 나오는데 내 입맛에는 약간 싱거운 느낌이다.
옆에 앉은 동행이 카메라를 가지고 열심히 음식을 찍는다. 아버님 고향이 평양인데 옥류관 냉면과 녹두전 이야기를 평상시 많이 하신다며, 사진이라도 찍어가야겠다고 한다.
옆에 있던 접대원이 말한다. “그럼 녹두전이라도 싸 드릴 테니 가져다 드리세요.”
작업 멘트 한마디. “얼굴만 예쁜 줄 알았더니, 맘씨도 참 곱네요.” 얼굴이 빨개진다. 순진하다.
이제 공항으로 출발이다. 가는 도중에 개선문을 들렸다. 파리의 개선문보다 10m가 더 높은 60m 크기의 개선문에는 ‘김일성노래’가 새겨져 있다. 안내원이 노래 설명을 하니까 짓궂은 일행들이 해보라고 한다. 그런데 노래를 따라 부르는 어르신들이 많이 있다. “6.25 전쟁 때 부르던 노래여. 다 잊어 버렸는줄 알았는데 그냥 나오네.” 하신다.
마지막 기념촬영을 한다고 모이라고 하는데, 놀랍게도 8차선 도로를 전부 막고 사진을 찍는다. 대단하다.
간단한 출국수속을 받고 50여분 만에 김포에 도착했다.
공항부터 복잡하다. 거리에는 사람과 차가 그득하다. 네온이 들어오는 거리는 휘황찬란하다.
나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와 같은 동화 속 나라를 다녀온 것일까?
장님이 코끼리를 말하다. - 북한의 생활
북한의 도로에는 지나다니는 차량이 거의 없다. 그래서인지 시내에 신호등도 없다. 심지어 평양 시내를 벗어나면 중앙선도 없다. 횡단보도 옆에 신호등 비슷한 게 있는데 불은 들어오지 않는다. 특이하게도 차 운전대가 오른쪽, 왼쪽 구분 없이 달려 있다.
여성 경찰이 수신호로 차량 통제를 하는데, 사전에 이야기가 된 건지 우리 차는 한번도 멈추었다 간 적이 없다.
주민들은 주로 지하철, 전철, 전기버스, 이층버스를 이용하는데, 이곳에서도 출퇴근 시간에는 만원이다.
북한 주민들은 주로 인민복이라고 하는 짙은 회색이나 검은 색의 옷을 많이 입고 다니며, 대학생은 흰색 와이셔츠나 저고리를 입고 다닌다. 어른들 옷에는 ‘휘장’이라고 하는 김일성과 김정일 얼굴이 들어 있는 배지가 항상 달려 있어 남한과 구분된다. 원색 옷을 입고 있는 어린아이들도 가끔 눈에 띈다.
도로변에는 80년대에 세워진 고층 아파트, 건물들이 많이 있어 멀리서 보면 빌딩 숲을 이루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가까이 가보면 도장이나 도색 등 전체적인 마감이 부실하다.
한동안 유리가 생산되지 않다가 최근에야 유리공장이 다시 가동되기 시작했다는데, 그래서인지 문틀 공사를 하는 건물이 많다.
도로변에 섬뜩한 문구도 눈에 띈다. ‘우리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자, 어디에 있든 결판을 낼 것이다.’
거리에는 매대(賣臺)라고 해서 간단한 음식이나 식료품, 음료, 아이스크림을 파는 곳이 여러 곳 눈에 띈다. 평양맥주라고 쓰인 가게는 지나갈 때마다 많은 사람이 있었다.
북한에서는 공예를 민예라고 하는데, 공예품들이 예술적 가치는 물론이고, 가격도 상당히 싼 편이다. 이곳에서 외국인이나 남한 사람들은 유로화를 사용하도록 되어 있다. 물건 가격도 유로화로 표시되어 있다. 물론 달러도 받는다.
우리 방북단이 뽑은 북한의 대표 음식은 ‘김치’였다. 맛이 짜지 않고 담백한데, 남한과 달리 양념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곱게 갈려있고 물이 많은데, 국물이 아주 시원하다.
야간에는 일찍 불이 꺼져서 그런지 거리 전체가 컴컴하다. 그나마 지금은 전력사정이 많이 좋아져서 아파트에 불빛이 보인다고 한다. 상가도 기본적으로 네온 등이 없는데다가 일찍 문을 닫기 때문에 거리가 한산하다. 가로등이 거의 설치되어 있지 않은데, 야간에 이동을 하다보면 인도에 인민복을 입은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호텔 주변은 시골에서나 들을 수 있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린다. 날벌레도 많이 날아다닌다. 호텔 입구에는 모기나 날벌레를 잡기 위한 전기 충격기가 설치되어 있는데 전혀 효과가 없다. 아무래도 전압이 충분하지 않은 모양이다. 먼지가 없어 담쟁이 넝쿨이 윤이 난다.
양각도호텔에서는 평양 시내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데, 아침마다 안개가 자욱하여 제대로 볼 수 없어서 아쉬웠다. 객실에서 세계 각국으로 국제전화를 걸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남한은 찾을 수 없다. 저녁 10시면 TV 방송을 중단하는데, 일본 NHK나 중국의 CCN은 24시간 방영한다.
북한의 전원 풍경(평양-묘향산)은 차분하다. 논은 경지정리가 잘되어 있는데, 손으로 모내기를 하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띤다.
평양 주변은 전반적으로 낮은 구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밭으로 개간이 많이 되어 있다. 처음에는 식량 부족 때문인지 알았는데, 땔감으로 나무를 사용해서 그렇다고 한다. 지금은 계획적으로 조림도 하고 과수나무도 심는다고 한다.
묘향산으로 가는 도로 양쪽으로 10m 폭으로 나무가 심겨져 있다. 10여년 전 김정일의 지시로 심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훌륭한 휴식공간이 되고 있다. 시야 차단효과와 함께 귀중한 나무 자원이 될 것 같다. 청주 가로수길도 이런 식으로 개발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로수로 아카시아를 심은 구간이 많은데 특이하게 가시도 없고 꽃이 분홍색이다. 북한에서 개량한 품종이라고 하는데 향도 짙다.
통일이 되면 언어소통 문제가 심각할 것으로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기우에 지나지 않을 듯싶다.
가슴띠(브래지어), 즉석국수(컵라면), 머리물비누(샴푸), 단고기(개고기), 단물(쥬스), 위생실(화장실) 등 재미있는 표현도 있지만 의사소통이 어려울 정도의 차이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북한에서는 전구를 무엇이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요구하는 정답은 ‘불알’이다. 그러나 이것은 유머에 불과했다. 안내원에게 물어 보았더니 ‘남측에서는 전구를 불알이라고 합니까?’라고 거꾸로 묻는다.
북한에서는 음악에 대한 지원과 관심이 상당하다고 한다. 학교에서 ‘1인 1악기’를 필수적으로 가르친다고 한다. 서양 악기도 사용하지만 가야금이나 단소를 개량하여 사용하고, 우리 정서에 맞는 음악을 주로 한다. 아리랑, 도라지타령과 같은 민요는 물론이고, ‘태양의 위성이 되자.’ ‘어버이 수령’과 같은 선동가요의 음률도 귀에 거슬리지 않는다.
북한의 관광지에는 안내원이 배치되어 있는데, 항상 ‘경애하는 김일성수령동지, 친애하는 김정일장군’으로 안내가 시작된다. 물론 세워져 있는 안내판도 그렇다. 너무 그러니까 반발심이 생긴다.
서울을 떠나면서 기내에서 통일부 사무관의 방북교육 내용이 생각난다. “지금 발해나 고구려의 대부분의 영토가 역사에만 살아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잘못하면 북한도 그런 모습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민간 차원의 교류가 무척 중요합니다.”
첫댓글 평양견문록 출간해야 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