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9월 20일 평화목교회 주일설교
홍지훈 목사
마태복음 18:21-35
용서는 용서받음의 확신이다
이창동 감독의 2007년 개봉영화 <밀양>을 아시지요? 아들을 잃고 절망했던 엄마는 신앙을 힘입어 겨우 용서할 마음을 먹고 아들의 유괴 살인범을 찾아가 면회합니다. 그런데 그 살인범이 매우 담담한 얼굴로 “자신은 이미 하나님께 용서받았다.”고 말하자, 이 여인은 이성을 잃고 폭주하기 시작합니다. 자기는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구 맘대로 용서를 받았다고 하는가! 그가 나에게 용서를 빌지도 않는데 어찌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소리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기도문에 나오는 죄의 용서 그리고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라는 제목이 붙은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용서가 과연 그런 용서인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유괴살인범이 말하는 용서는 “값싼 용서”입니다. 단지 “값싼 은혜”에 견줄만한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용서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기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용서가 되느냐고 반문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것도 맞는 말입니다. “일흔 번을 일곱 번까지도 용서하라.”(마18:22)는 말씀 앞에서 그리스도인은 때때로 “억지 용서”를 생각합니다. 마치 율법적인 명령처럼 다가오기 때문에, 반드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압박을 느껴서 억지로 용서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실제로 보았습니다. 스스로 죄를 지은 사람이 성경에 쓰여 있는 대로, 회개하는 자신을 무조건 용서해 주어야만 한다는 억지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또, 죄 값을 치르면 용서로 귀결되는 일도 있지만, 죄 값을 치렀다고 해도 용서되지 않는 일도 있습니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습니다. 벌을 받고 나면 그 범죄에 대해 다시는 책임을 묻지 않지만, 마음속에는 죄책이 남습니다. 그래서 용서를 말하려면, 먼저 인간의 죄성에 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 죄는 어떤 범법행위 이전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분리장벽”과 같은 것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내가 서로 잘 붙어 있었다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짓는 인간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관계를 이해해야 합니다.
주기도문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초대교회에서 주기도문을 자주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 용서 간구를 반드시 하루에 세 번 드리라고 가르친 문서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도는 남을 용서했으니 나도 용서해달라고 “당당하게” 기도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정반대로 하나님께 용서를 빌 때는 자기의 양심을 돌이켜 보라는 뜻을 담았습니다. 자기는 남을 용서할 생각을 안 하면서, 하나님께 죄의 용서를 기도하는 것은 영적인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죄”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오페이레마(ὀφείλημα)로서, “빚”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여기서 신약성경에서 보통 죄를 말할 때 사용하는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주기도문 바로 뒤에 이어 나오는 마태복음 6장 14절에 사용된 “잘못”(transgression)은 또 다른 단어인 파라프토마(παράπτωμα)입니다.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18장 21절 이하에서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이 자신의 빚을 탕감 받고도 일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감옥에 가두는 비유가 나오는데, 여기서 사용된 “빚”과 “탕감하다”는 주기도문의 “죄”와 “용서”에 사용된 단어와 정확히 같은 단어입니다.
“용서하다”는 아피에미(ἀφίημι)인데, “저리로 치워버리다”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어디로 죄를 치워버리는 것일까요? 나의 눈 밖으로 치워서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겠지요. 마음의 눈도 있으니, 자기의 마음속에서 치워버리라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빚을 진 자의 빚을 돌려받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그래서 죄와 용서를 말할 때 교리가 아닌 성서를 고려한다면, 반드시 빚과 탕감의 문제도 함께 살펴야 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시대의 죄와 빚의 상관관계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오늘의 죄 가운데 경제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 많은 것을 보면, 결국 죄란 빚과 매우 밀접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흥미로운 설명을 하였습니다. 내가 빚을 진 상대가 못된 전주(錢主)이기 때문에 죄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돈을 빌리기 전에 우리는 부자였습니다. 참된 겸손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다가 우리는 그만 겸손을 잃고 가난해졌고, 결국 마귀에게 빚을 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는 마귀의 종이며, 우리의 빚 문서를 지금 마귀가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용서의 규칙 하나를 알려드릴까요? 중세 때 공동생활을 하는 수도사들도 서로 다투었다고 합니다. 그들도 인간이니까요. 교회도 공동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분쟁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 용서의 규칙은 첫째, 다투지 말아야하고, 둘째, 혹시라도 다투게 되면 속히 멈추어야 분노가 증오로 살인으로 자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규칙은 자신의 마음의 정화를 위한 용서를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졌고, 하나님의 은총 아래 살고 있으면서도 죄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이 세상 속에는 조급함과 분노와 복수심이 발동하도록 하는 일이 너무도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넘어지고 범죄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빈약하고 가련한 모습입니다.
좀 더 현실적인 용서의 방법이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이 제안한 것인데, 인간이 하는 용서란 “우리 마음에서 분노나 증오, 복수심 등을 기꺼이 내버리고, 부당한 일을 당했다는 기억을 자발적으로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나에게 잘못한 사람의 죄와 빚을 우리의 기억에서 조금이라도 지우려면, 증오심에서 나오는 복수를 계획하지 말아야하고, 그 대신 화해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아픈 기억이 완전히 지워질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용서의 가장 큰 걸림돌은 죄 지은 자가 용서를 구하지도 않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었으면 반드시 합당한 벌을 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라고 주장한 역사 기록도 있습니다. 하지만, 죄와 용서의 관계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빚진 자임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서로에게 채무자이기도 합니다. 크게 보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빚을 졌다는 말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에 우리가 기대어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정의만 내세우시면, 그 앞에 고개를 들고 떳떳할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자비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예수 시대 가끔 일어난 혁명이 성공해서 예루살렘을 장악할 때가 있었답니다. 그때 그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이 빚문서를 찾아서 불태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빚을 의미하는 죄의 용서 또는 탕감을 주의 기도에서 가르친 것은 그 시대의 경제적 상황과 무관하지는 않습니다. 동시에 죄의 용서는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서 전 사회적인 문제라는 의미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죄를 빚이라고 이해할 때 우리의 용서를 바라는 기도가 구체적인 기도가 됩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만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종이 동료의 빚 백 데나리온을 탕감해 주지 않아 자신의 빚을 모두 되갚아야하는 상황에 처하는 비유를 읽으면 실감이 납니다. 만일 남을 용서(탕감)할 줄 모르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든 빚을 다 갚아야하는 난처한 상황에 처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용서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울 때,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일이 가능하고, 용서하는 일이 참으로 즐겁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용서를 말할 때에, 우리는 우리가 남을 용서해야하는 것에 더 집중합니다. 사실 나 자신이 용서받아야 할 것이 훨씬 더 많은 데도 남의 잘못만 더 크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눈에 들어있는 대들보는 못 보면서, 남의 눈에 들어있는 티를 빼주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빚지고 있는지 따져보겠습니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다만 나그네이며, 나에게 와서 사는 임시 거주자일 뿐이다.”(레25:23)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땅에 사는 백성은 소유주이신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것을 산출해야한다고 뜻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용서의 횟수를 물었습니다. 그때 들려주신 비유는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마치 자기 종들과 셈을 가리려고 하는 어떤 왕과 같다.” 이 상황이 벌어진 장소가 바로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사는 백성은 하나님의 규칙을 따라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부채는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모든 것입니다. 그것이 죄라면 우리의 악행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뜻대로만 하려는 것 모두가 죄이고 빚입니다. 나그네와 임시 거주자들은 절대로 주인 행세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들을 괴롭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자연이든 서로가 하나님의 세상에 깃들어 살고 있는 나그네들인데, 서로 지배하고 억압하고 착취하면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우리 모든 임시 거주자들은 때가 되면 떠나야 합니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에 이런 대목이 있지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이런 마음으로 사는 것이 소유주이신 하나님께서 기대하는 것을 산출하는 것입니다.
평화목 교우 여러분,
죄와 용서의 정의가 어떻게 되었든지, 용서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더구나 용서를 구하지도 않는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내가 먼저 용서받은 것을 감사하는 마음이라면 용서할 용기를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용서를 화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이 바로 용서를 경험하는 일입니다. 동시에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 주는 것은 사람과의 화해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화해해야할 대상이 더 있습니다. 과거의 역사와도 화해해야합니다. 용서하지도 용서받지도 못할 것 같은 부끄러운 과거의 역사를 꺼내어 화해를 시도해야 합니다. 동시에 인간은 자연과도 화해해야 합니다. 인간이 해를 끼친 자연에게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화해해야할 소중한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스스로 용서 받아야할 것이 많은 줄도 모르고, 남에게 용서를 베풀려고 하지도 않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용서 앞에 겸손과 감사의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은총이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간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