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충고’
내가 지금까지 받은 최고의 충고는 세계 최대의 인물 중의 한 사람인 마하트마 간디로부터 십 년 전, 어느 햇살이 포근한 오후에 받은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성에 대한 신념이 흐려질 때 번민의 시기를 겪기 마련이다. 나도 그때 그런 시기를 겼었다. 얼마 전에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남편을 잃은 슬픔에 설상가상으로 굴욕적으로 느꼈다. 그것은 인도의 법률에 따른다면 나는 여성이기에 한 개인으로서 존재가치가 없어진 것이다. 다른 인도 여성과 함께, 나는 이미 여러 해 동안 여성의 자유를 위한 범국민적 투쟁을 벌여왔다. 이 일이 성취될 때까지는 나는 그들과 함께 괴로워하고 투쟁해 왔다. 그러나 우리 여성들은 법적으로는 여전히 남자에게 예속된 존재였다.
이제 아들 하나 없는 과부의 몸으로 아무런 유산도 상속받을 수 없게 되었다. 내 두 딸도 마찬가지 신세가 되었다. 나는 이 불합리한 제도에 분통을 터트렸다. 나는 이처럼 낡아빠진 법률을 끝내 고수하는 가족들에게 앙칼지게 굴었다. 이때 나는 태평양 제국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 미국으로 출발하기 전에 간디를 방문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눈 후에 그는 나에게 물었다.
“시가댁과는 화해를 했나요?”
나는 그가 시가의 편을 드는 것에 깜짝 놀랐다.
“저는 시가댁 사람들과 싸운 적이 없어요. 하지만 저는 저를 난처하게 만들고 모욕을 주는 낡은 법을 이용하려는 사람들과는 아예 말을 끊으려고 합니다.”
간디는 잠시 창문 밖을 내다 보았다. 이윽고, 그는 내 쪽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가서 그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이 좋겠어요. 그게 예의거든. 인도에서는 아직도 이런 일이 중요해요.”
“안돼요. 선생님을 괴롭히는 한이 있더라도 저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 곁에는 가지 않겠어요.”
그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마음 속에 원한이 가득 차 있군요. 그걸 억제하지 않으면 스스로 피해를 보게 됩니다.”
나는 묵묵히 그냥 듣고만 있었다. 그는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
“불행감을 느끼면서 도피하기 위해 새로운 나라로 줄행랑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을까? 자기 마음 속에 맺힌 원한이 있는데 바깥 세상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잘 생각해 봐요. 조금만 누그러뜨리면 되는거야. 사랑하는 남편을 잃었어. 그 슬픔만 해도 충분해. 자기 자신의 마음을 정화시킨 용기가 없는 탓으로 자기 자신에게 또 상처를 입혀야 옳을까요?”
그의 말이 내 몸으로 스며들어 떠나지 않았다. 그 말이 내 마음을 헝클어 놓았다. 내 자신과의 며칠 동안의 극심한 투쟁 끝에 나는 마침내 시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떠나기 전에 그와 가족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들을 만나고 오 분 쯤 되었을 때 나의 방문이 온 가족에게 안도감을 주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나는 나의 계획을 전부 털어놓고 나의 새로운 인생의 출발을 위해 축복해 줄 것을 그들에게 요청했다. 이 일이 내 자신에게 준 효과도 아주 컸다. 나는 큰 짐을 벗은 느낌이었다. 내 자신이 충실해지기 위해서 나는 자유로워진 느낌이었다.
이 조그만 행동이 나에게는 의미심장한 변화를 가져왔다. 일년 반 후에 나는 유엔의 인도 대표부 대표가 되었다. 남아공화국에 거주하는 인도 태생의 교포에 대한 처우에 인도정부는 불만이었다. 우리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남아 쪼과 우리 사이에 격한 언사들이 오갔다.
남아공 대표는 인도와 내 자신에 대한 개인적인 공격을 해왔다. 나는 그 공격에 격분했다. 나도 꼭 같은 방식으로 그들을 공격했다. 한참 동안 서로가 괴로운 말싸움이 오고, 간 후에 나는 갑자기 간디 생각이 났다. 그는 나의 마지막 행위를 옳게 봐 줄까? 간디는 방법을 목적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긴 안목으로 본다면 방법이 목적보다 더 중요할 지도 모른다. 우리들 자신의 자존심을 해치는 미심쩍은 책략으로서 결의안은 무난히 통과시킨들 무슨 이득이 있을까? 그날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유엔에서 경박한 언사는 사시 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그때 이래로 나는 논쟁을 삼가고 원점으로 되돌아 갔다. 인신공격에 대해서 보복하는 일을 삼가고 비열한 방법으로 이기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들의 적들도 그 이후로는 새로운 자세로 우리를 대해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회의에서 본 문제만 다루기로 했다.
마지막 날 위원회실을 떠나기 전에 나는 상대방 대표를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다.
“토론을 하는 동안에 나의 언동이 당신의 마음을 해쳤을지도 몰라 사과하러 왔습니다.”
그는 나의 손을 따뜻하게 잡고 흔들었다.
“전들 무슨 유감이 있겠습니까?”
그와 별 탈이 없었다는 것은 느낀 것은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내 자신이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는 일은 나를 더 기쁘게 해주었다. 다시 한 번 간디의 충고가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구해 주었다.
간디의 충고는 지극히 사소한 일에 이르기까지 내 자신이 분별을 잃지 않도록 도와 주었다. 나의 생각으로는 많은 여성들이 반복되는 악몽에 사로잡혀 있다. 물론 나도 예외가 아니다. 예를 들면, 귀한 손님이 저녁식사에 초대했다고 하자. 손님들이 도착했다. 식사시간도 되었다. 그러나 식사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잠에서 깼다. 이것이 꿈인 줄 알고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실제로 나에게 일어났다. 초대한 손님은 대영제국의 수상인 이든 부부였다. 나로서는 이보다 더 귀한 손님이 없다.
영국 연방의 인도 판무관과 나는 면밀히 검토하여 계획을 세웠다. 귀빈이 도착하여 술이 두 순배 쯤 돌았을 때 나는 집사에게 저녁식사를 시작하도록 신호를 했다. 그러나 저녁식사는 아무리 기다려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나는 손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아래층으로 줄달음하듯이 내려갔다. 부엌의 한 쪽 구석에는 키가 작달막한 심부름하는 기집애가 겁에 질려 서 있었다. 다른 구석에는 가정부가 서 있었다. 테이블 위에 요리사가 앉아 있었다. 발로는 장단을 맞추고, 국자를 휘저으면서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눈동자는 게게 풀려 있었다. 마음은 노래따라 아득히 멀리 가 있었다.
테이블에는 닭고기 부스러기들이 지저분하게 깔려 있었다. 나는 무릎에서 스르르 힘이 빠지면서 몸이 휘청했다. 안간힘을 다해서 정신을 차리고 조용히 물었다.
“어째서 아직도 저녁식사가 준비되지 않았지?”
요리사는 흥얼흥얼 하면서 대꾸했다.
“마님, 준비가 다 되어 있는 뎁쇼. 몽땅 다 준비되었는 뎁쇼. 자 다들 앉아요.”
화가 치밀어서 혀 끝에서 분노의 말이 쏟아질 듯했다.
“꺼져, 너는 파면이야!”
그 순간 나는 그토록 여러번이나 나를 진정시켰던 충고를 생각했다. 자제심을 잃으면 내 자신에게 해로울 뿐이야. 나는 제 정신을 찾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식탁 위에 음식을 갖다 놓자.”
모두 힘을 합쳐서 부산하게 움직였다. 상에 차린 음식은 메뉴대로가 아니었다. 손님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 했을 때 한꺼번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누가 이런 말을 했다.
“이것이 귀댁의 요리사가 취했을 때 만든 것이라면 정신이 말짱했을때는 기막힌 음식을 만들어 낼 것이 아니오!”
안도감으로 터트린 내 웃음이 약간은 신경질적으로 울렸을 게다. 마음이 안정되었을 때 나는 만찬회라는 것이 아무리 중요해도 인간 생활의 중심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찮은 일에 구애되지 않는 마음씨로 증오심을 갖지 않은 일이 중요하다. 우리들의 일이 무엇이든 우리 모두에게 간디가 나에게 주었던 충고는 의미심장하다.
“자신을 제외하고 너를 해칠 사람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