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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曜 오후에
安 泳
가장 빠른 날은 월요일과 장날이다. 소장님을 비롯해서 서무는 서무대로 약국은 약국대로 그런가 하면 건너쪽 치과에서는 쉴틈없이 들들거리며 환자의 치아를 갈아내고 이쪽 가족계획실에서도 재법 여러 층의 아낙들이 붐벼댄다.
나는 이 보건소의 맨 끝에 위치한 치료실에서 꼬박 이년째 간호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것이다.
말수가 적으면서도 꽤 영리한, 작년에 여기 시골 중학교를 갓 나왔다는 순이
가 종일토록 내 곁에서 시중을 든다.
그러니까 아침 8시부터 저녁 5시까지 순이와 나는 이 조그만 실내에서 소장님의 처방을 따라 환자들의 치료를 맡아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얼마 전부터는 〈유니세프〉의 원조를 받아 실시하는 모자보건사업 까지 겸하여 담당케 되었으므로 항상 분망한 편이다.
문을 막 열고 들어오면 오른쪽에 수도가 있고 그 곁으로 침대가 하나, 그리고 저쪽 창가엔 내 전용의 예쁘장한 테이블이 놓여 있다. 맞은편에는 기타 약장서껀 기계장들이 제나름의 질서를 잘 취한 채 늘비해 있고, 부지런한 순이의 덕분에 아직껏 치료에 한번도 지장이 없을 만큼 언제나 깨끗이 소독된 주사기구구이 길단 처치용 테이블 위에 얹혀 있다. 벽에는 모자보건 등록 분포도, 임산부 및 유아 등록 상황표, 이러고 나면 공간이라곤 통로밖에 안 남는다. 꽤 비좁은 편이다.
실상 퇴근 시간이 다섯시일 뿐이지 대개는 여섯시가 넘어야 각기의 서랍을 잠그고 도어를 닫게 되는 만큼 나는 평균 열 시간나마를 이 조그맣고 단조로운 실내에서 생활하는 셈이 된다.
일손이 뜸해지면 으례 창 곁 내 전용석에 몸을 텁썩 주저앉힌다. 우리들 간호원은 서서만 지내는 시간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창밖엔 다행히도 화단이 있다. 스르르 바람결에 묻혀오는 갖가지 꽃향을 들이쉬노라면 나는 금세 몸이며 마음이 완전한 평안속에 묻고 있음을 통째로 느끼곤 한다.
그러나 오늘은 그 꽃향이 없다.
내내 서신만 주고받다가 몇년 만에야 마주앉게 된 십년 지기(知已)와의 정 스민 대화처럼 도란도란 꽃잎을, 적시며 가을비가 뿌린다. 꽃향 대신에 무언의 대화를 새기며 잠깐 휴식을 즐기는 월요 오후, 아 피로웁다.
딱딱한 의자지만 소파인 셈 치자며 내가 막 등을 기댈 때다.
똑 똑. 빗소리에 늘려 무척 자그맣게 들려오는 노크소리. 등록된 임산부에게 나눠줄 유산철을 약봉투에 세어넣고 있던 순이가 잽싸게 일어서서 도어를 연다.
“또 왔군요, 언니.”
순이의 뒤에 은교가 따라 들어온다. 때묻은 옷, 흐트러진 머리칼, 게다가 핏기 없는 얼굴에 금방 눈물이라도 번져버릴 것만 같은 은교가 오늘따라 너무도 초라하고 가엾게 느껴진다.
소학교 이년생치고는 철이 썩 든 편이다. 아버지인 윤 선생님의 명령에 아무 불평도 없이 언제나 저렇게 금방이라도 눈물이 번져버릴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고 매일 한번씩 이곳엘 들르는 것이다. 벌써 사십여 일은 족히 계속했나보다.
비 탓일까. 오늘의 은교가 유독 초라하고 가엾어 보이듯, 그 은교를 대하고 있는 나 역시 유독 서글퍼져버린다.
“동정 (同情)이라도 좋습니다. 그저 와주시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요.”
매일 한번씩 나는 오싹 현기를 느끼며 이 짤막한 구절을 은교의 핼쑥한 눈속에서 읽어내야 하는 것이다. 괴롭다.
다른 어느 방(室〕보다 가장 바쁘다면 바쁜 편이겠지만 환자가 뜸하여 짬이 생기면 나는 또 버릇처럼 윤 선생님 일을 생각하곤 한다.
바쁜 벌은 근심할 틈이 없다고 한 격언은 우리 인간에게 늘 바빠 있으라는 훈계처럼 들리는데, 실은 가능만 하다면 인간 모두가 조금은 한가(閑暇)를 누려야 될 거라고 나는 믿고 싶다.
근심할 틈이 없다는 것은 바꿔 말해서 사색할 틈이 없다는 것과 무에 다른가. 윤 선생님 일을 생각하면 조용했던 가슴도 새삼 북북 죄여와서 무언가 목줄기를 꽉 졸라매듯한 기분속에 한동안 당황하는 터이긴 하지만 나는 그 고통을 일부러 끌어내어 향유하고 있는 겐지도 모를 일이다.
그분을 처음 뵙게 된 것은 내가 여기 부임해오던 해 초가을이었다. 서무계의 박 주사님이 일부러 치료실까지 나를 찾아와서는 오늘부터 한 열흘간 수고를 좀 빌어야겠다고 했다.
함께 하숙하고 계시는 이곳 중학교 (순이의 출신교다) 영어선생님이 한 달포 전 지상에까지 보도된 바 있던 교통사고 시에 팔이 골절되었는데 회사측 부담으로 인근 병원에서 쭉 치료를 받다가 어제야 퇴원해왔노라고, 당분간 주사를 좀 계속하는 게 안 옳겠느냐는 것이었다.
그 청을 받은 두어 시간 후에 직접 그분이 나타나셨다. 왼쪽 팔에 하얀 석고봉대를 받친 채였다.
정식 소개를 그날에야 받았다 뿐이지 학생들 예방주사먀 비 시 지 접종 때 이미 안면을 익혀둔, 큰 키에 살이 알맞게 찌고 약간 파인 듯한 눈이며, 어딘가 듬직한 데가 있어 인상적인 분이었다.
“앞으로 폐가 많겠읍니다.”
허리를 구부리며 그렇게 말하는 그분의 음성이 참 맘에 들었다.
“별 말씀을…….”
나는 다소 부끄러워져서 엶은 미소속에 말꼬리를 감춰버린 채 그분이 가지고 온 살소브로칼 박스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럼 맞으실까요?”
그때만 해도 순이는 아직 들어오지 않았을 때여서 손수 이것저것 준비에 신경을 쓰지 않음 안되었다. 더구나 상처입은 그분의 팔이 다치지 않도록 침대에 누우시는 것에도 나의 조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루, 이틀·…·살소브로칼 박스 속이 차츰 한 앰풀 두 앰풀 비어가고 있었다. 그즈음 나는 이 시골생활에 퍽 권태를 느끼고 있을 때였다.
보건소에 들어오기 이전 개인병원 근무까지 합하면, 거의 4년나마를 이곳에서 생활해온 셈이다.
일찍부터 혼자 자란 나이니까 어디에 있은들 외롭고 생소하기는 매한가지다.
조그만 방 한칸을 얻어서 혼자 끓여먹고 혼자 뒹굴고.
그러다가 또 직장에 나오면 환자의 상처에 드레싱을 하고 주사를 놓고, 어쩌다 수술 환자가 생기면 부리나케 소장님의 시중을 들고·…….
더러 약효가 비범해서 상상외로 빨리 낫는 환자를 대할 땐, 온갖 권태와 피로를 잊고 그와 더불어 기뻐지는 것이지만 내 행동이라는 게 대부분 감정도 없이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것에 불과했다.
그런 때문인지 나는 그즈음 많은 관심을 윤 선생님께 쏟고 있었던 것 같다. 한 앰풀 두 앰풀 뽑혀나온 빈 주사약 자리에서 나는 까닭없는 공허를 느끼기가 일쑤였고 시간을 재어가면서까지 그분을 기다리기에 열심했다.
선생님은 언제 봐도 평화로이 웃는 모습이었지만 그 미소라는 게 여간 불안하지 않았다. 뭐랬음 좋을까. 원래의 표정은 깊으막히 따로 두고, 그. 위에 엷은 베일 하나를 씌워서 미소를 얹는 듯한, 조금치라도 그분에게 관심하는 사람이면 그 미소 뒤에 숨어 있는 어둑한 그늘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수고하였다든가, 감사하다든가, 그지 평범한 인사말만 남기고 자릴 뜨시는 선생님이었지만 내겐 왜 그런지 많은 대화가 잉태되는 성싶어 즐거웠다.
“언니, 은교 보내얄 거 아뇨?” 순이다.
어머 나 좀 봐. 여태 이앨 여기다 세워뒀었군. 움쩍만 해도 울음이 터질 듯한 은교가 푸른 비닐우산을 꽉 짚고 내 곁에 서 있다. 다른 땐 그저 그렇게 들렀다가 얼굴만 보이고 가는 수가 많은데 오늘은 애가 웬 일일까.
나는 은교를 이만큼 다가세워 헝클어진 머리칼에 빗질을 해준다. 오는 동안 우산이 샜는지 축축히 젖어 있다. 저런 웃옷엑 단추도 떨어졌군. 서랍에서 바늘 쌈지를 꺼내어 펄럭이는 부분을 대충 여며주고 나는 달래듯 말해본다.
“은교야, 얼른 돌아가야지.”
“오늘은 그냥 안 갈래요, 아줌마, 같이 가요 네?”
눈물이 글썽해지면서 “같이 가요 네?” 하는 대목은 거의 목구멍에 잠겨버린다. 나는 두 눈을 깜짝여서 솟구치는 눈물을 간신히 삼키고
“바보같이 울긴!”
은교의 어깨를 두 손으로 감싸면서 나즉이 말한다.
“내 아빠한테 전화할께 응.”
“아줌마 와주시죠 네? 우리들 좀 있다 소풍도 가고 운동회도 할 전데 그 앞에 와주시죠 네? 꼭, 꼭요.”
은교가 저만큼 멀어지고 도어를 열어둔 채 순이가 따라 나간다. 우산이라도 펴주고 오려나보다.
살소브로칼 주사약이 꼭 두 앰풀인가 남았을 때였다. 어느날 박 주사님이 치료실에 들렀다가 윤 선생님의 환경에 대해서 전혀 새로운 뉴스를 제공해주었다.
“목포가 고향이죠. 가족들은 모두 거기 있어요. 아주 이름난 양가집 외아들인데 고민이 많은 친구죠.”
그분은 그저 외아들이기만 한 게 아니라 삼대 독자였다.
그런데 문제는 윤 선생님의 부인이 딸만 셋을 낳고 심한 신경쇠약에 걸려서 지금은 성콜롬반병원에 요양차 입원중이라는 것이었다.
그분이 가정에서 얼마만큼 귀한 존재였는가를 구태여 박 주사님 얘길 안 들어도 넉넉 짐작이 갔다. 조부모님 부모님,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원하고 서둘러서 나이 스물다섯에 지금의 부인과 결혼을 했고 이어 딸아이 셋의 아버지가 되었단다. 이제 갓 서른.
“아이들은 목포 할머니가 데리고 있다나봐요. 아마 곧 퇴원하게 될 거라지만 완치가 될지. 참 훌륭한 사람인데 아깝습니다.”
박 주사님은 이토록 꽤 긴 이야기 끝에다가,
“윤 선생은 그만큼 외로운 사람이니 민 간호가 잘 좀 위로해드려요.”
하고 덧붙이며 실없이 웃었다.
민 간호란 물론 나다. 참 여태 내 이름도 소개하지 않았군. 경숙이다. 민 경숙. 어쨌건 그날 비로소 그분의 평화로운 미소에 언제나 닳고 있던 그 어둑한 그늘을, 그 그늘의 의미를 나는 깨닫게 된 것이었다.
처음부터 그렇긴 했지만 그런 얘길 듣고 나니 더욱 그분께 마음이 쓰였다.
“민 간호가 잘 좀 위로해드려요.” 하던 박 주사님의 덧붙임과 그 의미진 웃음 그것이 또한 집요하게 나를 따르고 있었다.
어느날, 그러니까 살소브로칼 마지막 한 앰풀을 주사하는 날이었을 거다.
윤 선생님이 내게 저녁을 사마고 하셨다. 그동안의 수고에 담하고 싶다고.
내가 아무말 아무 표정이 없이 꼿꼿하게 서 있자 그분은 또 말꼬리를 이었다.
“제 성의를 꺾지 마십시오. 박형이랑 함께 가는 거니까요.”
“감사합니다. 틈 내보겠어요.”
나의 순순한 허락으로 우리는 그날 이 고을서 가장 솜씨가 좋다는 〈진미식당〉에서 자리를 같이하게 됐다.
“상처가 이리 쉽게 아문 것은 오르지 민 선생님 덕택입니다.”
그분은 그동안의 내 수고에 대해서 이렇게 과찬을 해주시고 내일쯤이나 입 원해 있었던 병원에 가서 석고 봉대를 끌러야겠다고 했다.
아름다운 여인한테 치료를 받았으니 부작용 없이 거뜬할 거라는둥 박 주사님이랑 함께 있는 자리라서 그럴까, 통 말이 없던 그분이 그날은 퍽 명랑해지셨다. 식사 전에 두 분이 든 반주가 벌써 영향을 미치진 않았을 텐데. 허긴 모든 인간에게 양면성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신기할 것도 없지. 오랜만에 그 어둑한 그늘도 없어지셨군. 좋아 좋아.
묵묵히 밥술을 뜨며 내가 그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떼 박 주사님이 말을 걸어 왔다.
“민 간호, 금년 몇이요? 스물다섯?”
나는 못마땅해서 긍정도 부정도 아니게 샐쭉한 눈길로 응수해주었다.
그랬더니 이번엔 윤 선생님 쪽에서 한마디 건네셨다.
“결혼 안하세요? 시골 스물다섯이면 올든데.”
나는 약간 뾰루퉁해졌다. 묵비권을 써버릴까 하다가 명랑을 꾸미며 이렇게 대답했다.
“염려해주시니 감사해요. 허지만 제겐 제나름의 올드 미스 한계점이 있거든요.”라고.
“네?”
무슨 얘기냐는 듯이 두 분이 한꺼번에 물어왔다:
“올드미스란 말예요,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개념이라고 봐요. 비록 18세의 어린 소녀라 할지라도 그애가 결혼을 희망하기만 하면 그날부터 그앤 올드미스가 되는 거구, 반대로 30세의 나이 든 처녀라 할지라도 그녀가 결혼에 전혀 뜻이 엾다면 그땐 결코 올드 자가 못 붙어요. 안 그렇겠어요? 그러니까 전 순수한 미스예요. ”
앞으로는 〈올드〉자를 함부로 쓰지 말라고 덧붙이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두 분은 조용히들 웃고 있었다.
“공감해주신다는 거죠?”
“공감은 무슨!”
내가 기꺼이 묻자 박 주사님은 핀잔을 추시고 윤 선생님은 더욱 진하게 웃기만 하셨다.
어쨌건 그날 있음으로 해서 우리들의 사이는 차츰 친근해졌다. 이따금 전화가 걸려오는가 하면 사연도 건너오고, 더러는 함께 만나 차가운 대기를 마시며 밤길도 걸었다.
그분의 말씀인즉 올드미스가 되기 직전까지 동무가 되어보자는 것이었다. 나는 차츰 부모라든가 형제라든지, 그 비슷한 무엇을 연상하며 외롭고 허허롭던 내 영혼을 그.께로 밀착시켜갔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다.
월요일치고 이만큼 한가해보기는 처음인 성싶다. 어지간한 드레싱 환자는 순이가 다 맡아 처치해준다. 환자라야 대부분 무료 환자여서 실상 흥도 안 난다.
개인병원에 있을젠 환자가 하나라도 더 와주길 무척 바랐는데 지금은 귀찮을 뿐이다. 정말 그땐 병원이 한가하면 원장님께 무단히 미안해지고 자신의 몸 둘 바를 몰라 허둥대곤 했었다. 금전이란 유형무형으로 우리의 정신력까지에 작용하고 있나보다.
순이는 이제 환부에 붙일 가제를 자르고 있다. 어떤 것은 좀 크게, 또는 작게, 골고루 한묶음씩 잘라간다.
준비성이 저만한 애도 드물 것이다. 새벽부터 나와 청소며 기계 소독 등 한번도 날 애먹여준 일이라곤 없다. 윤 선생님이 골라 보내준 애라서가 아니라 정말 칭찬할 만하다. 보건소내 직원분들은 모두 들먹이니까.
혼잣손으로는 아무래도 딸리겠기에 서무계장님한테 절충해서 급사 티오 하나를 얻어받았고 그 추천을 윤 선생님께 부탁하여 마침내 지금의 순이를 얻었던 걸이다.
순이가 들어올 즈음은 그분과의 데이트를 무척 삼가하고 있을 때다.
그해 겨울 그분은 고향인 목포엘 한번 다녀오시더니 사모님이 퇴원했단 소식을 들려주셨었다. 두드러지게 아픈 것도 아니니 마음만 안정시키면 된다면서 의사가 후히 위로를 주더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때 나는 무언가 따끔 가슴에 찔리는 걸 느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질투 이전의 순수한 온정(溫靑)인 것 같았다. 나는 솔직이 사모님의 병이 하루속히 나아서 선생님의 그 어둑한 그늘을 지워줬음 좋겠다고 진정으로 빌었다.
그런 나의 기도가 마침내 그분과의 데이트를 삼가하도록 내 스스로를 종용했던 것이다.
“절 만나고 싶을 땐 목포에 편질 쓰세요. 전 선생님 뵙고 싶어지면 사모님 건강을 빌어볼께요.”
나의 이런 노력이 헛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제 본래의 위치로 돌아가게 되리라고 나는 믿었다. 또한 그렇게 된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무엇보다 시급히 필요한 순리(順理)가 아닌가 생각되었다.
그 이듬해 봄에 순이가 들어오고, 나는 또 박 주사님으로부터 뜻밖인 소식을 접해야 했다. 그러니까 바로 지난해인 셈이다. 윤 선생님이 살림을 벌이게 되어 자기는 따로 하숙을 구하는 중이라고. 부인이 완쾌하진 않았지만 언제까지 따로 생활할 수도 없고 해서 날이 풀리자 바짝 서둘더라는 둥, 내게 필요치 않은 얘기까지 자세히 들려줬다.
“그래요?” 나는 잔잔히 감기는 눈을 하고 말꼬리를 이었다.
“잘하셨네요. 곁에 있으면서 치료해야죠.”
그런 사홀 뒤던가, 그분의 전화를 받게 되었었다.
그동안 많은 위로를 받았다고, 살림을 차리긴 했지만 아직은 실감이 나질 않는다고, 나는 지금까지의 교류에 아무런 변화도 안 칠하고 싶은데 민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타며 여느때보다 훨씬 긴 통화를 하셨었다.
나는 잠깐 코끝이 아리이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혹 애들이라도 아프고 하며는 서슴지 말고 보내달라는, 참으로 너무나 직업적 인 응수로써 전화를 끊었었다.
나는 또다시 단조로운 생활속에 묻혀 있지 않음 안되었다. 전과 다른 것이 있다면 구리워한다거나 생각할 수 있는 대상이 정해져 있다는 거라고나 할까. 윤 선생님을 비롯한 부인과 셋의 아이들은 한사코 나의 관심속에서 우왕좌왕 서성이며 떠날 줄을 몰랐다.:
이따금 박 주사님이 나의 그런 허탈을 눈치채고 어서 결혼을 해요, 결혼을, 하며 누이동생 다루듯이 타일렀다.
“내년이면 스물일곱 아뇨. 화낼는지 몰라도 그쯤되면 이런 시골선 곤란해요. 상처자리밖에는 안 난단 말이요.”
좀 무례하다 싶어 은근히 화가 났지만 역시 태연을 꾸미며 대꾸했다.
“시시한 총각보다야 그 편이 나을 수도 있잖아요?”
사실 몇군데서 혼담을 넣어오긴 했다. 그러나 도무지 켕기는 데가 없는 것이다. 인간은 왜 그처럼 욕심투성이일까. 우선 나부터 말이다. 가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으면서 내가 가 안길 남자만은 누구보다 훌륭한 사람이길 바란다니 터무니없다.
무뜩하니 정서감이 너무 없어도 싫고 그렇다고 딸랑거리는 경솔은 더더욱 싫고, 애초부터 넉넉히 자란 탓에 고생을 너무 모르는 사람도 싫고, 겨우 끼니나 이을 빠듯한 가난도 싫고, 키가 너무 작아도 조금 그렇고…….
그래 나는 마을 어른들의 말씀에 틀림이 없음을 또 깨달아야 했었다.
“우물 좋고 정자(亭子) 좋은 곳 없느니라.”
“결혼은 그저 철모를 때 할 것이니라.”
이러는 동안 콜레라 예방점종, 유사 장티프스 예방, 왕진, 환절기마다 한참씩 바쁘고 나니 또 서울서 교육…….
그럭저력 나의 26세도 물처럼 흘러가고 말았다.
그동안 나는 여러 차례 윤 선생님의 서신을 받았지만 답장을 쓰고 어쩌고 하는 일엔 일체 무관해버렸다. 아니 무관심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면서도 나는 끈질기게 나를 따르는 집념 때문에 밤잠을 설치기가 일쑤였다.
나는 그분을 원하고 있었다. 그 가정을 허틀지 않고 우리의 교류를 계속할 수는 없는가. 그렇게 줄기찬 집념으로 몇겹의 창을 밀고 따져들어가노라면, 누군가 한 사람이 팍 쓰러지는 착각에 나는 온몸을 떨었다.
안돼, 안돼. 그것은 불가능이다. 손 닿지 않는 피안의 꿈을 쫓다니 자멸행위다. 그러나 내 욕심이라는 게 뭐 그리 대단한 건 아니었다. 그저 하루에 한번씩이나 이틀에 한번씩 그분 곁에 가서 조용히 앉아 있다가만 오면 될 것이었다. 그외엔 아무 요구도 있을 수 없었다.
그 미미한 욕심을, 조용히 앉아 있다가만 돌아오면 될 그 미미한 욕심을 채워 받지 못하다니 억울하다 싶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동정이라도 좋습니다. 그저 와주시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요.”
하루 꼭 한번씩 금방이라도 눈물이 번져버릴 것 같은 은교의 얼굴위에 그분은 짤막한 이 구절을 써보내지 않는가. 동정이라도 좋다고 동정이라도…….
27세의 봄이 왔다.
“아직도 순수한 미슨가요?”
언젠가 저녁을 같이하던 자리에서 펐던, 나의 올드미스에 대한 지론을 박 주
사님이 이렇게 공박해왔다.
말하자면 아직도 결혼 같은 걸 외면하느냐는 야유였을 것이다. 어브코스. 그
대 난 이렇게 강조하며 태연을 꾸몄지만 사실은 금년 봄부터 차츰 결혼이라는 것에 향수를 느끼고 있는 터다.
한 남자의 참한 아내가 되어서 살림을 꾸려봤음 좋겠다고. 화단을 가꾸고 벌을 기르고 방안은 고상하면서도 디자인이 깜찍한 가구들로 장식해야지, 뒤뜰엔
야채도 좀 심어얄 거야. 자잘한 것까지 사먹으려니 귀찮고 헤프더군.
대상도 없는 주부가 되어서 혼자 지껄이며 취해보는 회수가 자꾸만 늘어가고 있었다.
말하잠, 순수한 미스반(班)에서 제적을 당하고 바야흐로 올드미스반으로 입반해 가는 듯한 과도기분.
그때 마침 나에게 새로운 업무가 분장되었다. 모자(母子)보건 상담. 지난해 서울서 교육받고 온 과목이다.
우선 보건소에서 정한 모범 부락부터 가정방문을 실시하여 대상자를 조사해야 했다. 바로 읍내의 동외(東外)부락이 선정되어 나는 틈틈이 조사를 나갔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그분의 부인과 마주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장(里長)이 내민 임산부 명부에 부인이 끼여 있었기 때문이다.
박 주사님과 하숙하고 계실 때 꼭 한번 들러본 집이다. 골목 깊숙이 자리해 있는 넓고 깨끗한 기와집의 문간방.
나는 호기심과 불안감에 차서 그집 문을 밀었다.
부인은 집에 있었다. 젊고 낯선 여인의 방문에 당황한 모양으로 주춤주춤한다. 나는 나의 신분을 밝히면서 정중히 인사를 했다. 그제야 부인은 자신에게 온 손님임을 알고 영접을 서둘러 방으로 들어가길 권했다.
나는 마루가 더 좋다고 버티다가 문득 방안 차림이 보고 싶어져서 신발을 벗고 부인을 따라 들어갔다. 작은 키에 퍽 야위기까지 해서 부인이라 느끼기엔 다소 눈이 설었다. 눈매가 날카롭고 얼굴빛이 창백하다. 외출했다 돌아오는 길인지, 아니면 집에서도 그렇게 다듬고 있는지 화장이 퍽 짙었다. 조금은 실망스러울 정도로.
그러한 부인에 비해서 방안 장식은 아주 단조했다. 아이 셋을 가진 엄마는 어느새 구세대에 속해버린 것일까.
그러나 유독 이채를 띠는 장식품이 하나 있었다. 반즈봉에 얼룩진 샤쓰조각으로 러닝샤쓰를 해입힌 사내아이. 물론 인형이다,
예쁜 아가씨들의 인형이야 흔히 보아왔지만 그런 건 처음이었다. 곱슬머리에 큰 눈을 뜨고 화장대 위에 꼿꼿이 서 있는 그것은, 누군가의 수공품인 모양으로 마치 생명을 지닌 소년같이 보였다. 난 웃목에, 부인은 아랫목에 우리는 그렇게 마주앉아 있었다.
세 딸애 중 하나는 학교엘 가고 두 딸아이가 그 곁에 있었다.
차례로 은교, 은희, 은미라고 했다. 아이들도 어쩐 일인지 엄마처럼 깡말라 있었다.
나는 〈유니세프〉에서 모자보건을 위해 특별히 애쓰고 있다는 것과 일단 등록만 해 두면 계속해서 상담, 진단, 약제 지급 등 특혜를 입을 수 있다는 것 등을 설명하고 주소 성명을 카드에 옮겼다.
부인은 임신 삼 개월째였다. 이따금 신경질적인 웃음을 확하고 터뜨리는 것이며, 조금 멍하게 내 이야기를 듣는지 안 듣는지 알 수 없는 표정들이며가 나로 하여금 완치 여부를 의심케 했다.
그래 나는 엉뚱한 얘길 꺼내봤다.
“은미라고 했죠? 발육이 나쁘군요.”
“아, 예, 예. 젖이 적어요, 젖이.”
“몇 살인가요?”
“지금 세 살인가. 불쌍하죠 뭐.”
“아니 무슨 말씀을…….”
“딸이니 말이요. 원수놈의 딸, 딸.”
나는 괜한 소릴 했구나 싶어 가슴이 섬뜩했다. 부인은 말을 계속했다.
“아이고 징해. 하느님이고 뭐이고 소용도 없어요. 나 아침마다 정화수 떠놓고 기도드린 것, 어디 하나나 제대로 돼야지. 아니 그래도 어딘가 천국이 있긴 있을 텐데. 난 믿고 있다우, 거기만 가면 나도 아들 낳아요. 암 낳고말고.”
“아주머니, 아직 젊으신데 뭘 그렇게 조급히 구세요. 그보다 아들이면 어떻구 딸이면 어때요. 요즘은요, 딸들도 다 아들 구실하도록 돼 있어요.”
“그놈의 소리, 귀 아프도록 들었죠. 그래도 내겐 아들이 좋게 뵙니다. 얘 아범은 독자예요. 자그만치 삼대째. 그저 우리 은식이가 빨리 사람이 돼야지. 저 애 말입니다. 저런 앨 낳고 싶어요 나는.”
부인은 화장대 위에 서 있는 인형에다 고개짓을 해 보였다. 은식이. 이름까지 그렇게 붙여둔 모양이다.
“아주머니, 무엇인갈 일심으로 바라면 말예요, 언젠가는 꼭 그대로 된대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잖아요? 지금 가지신 아기는 틀림없이 아들일
거 예요.”
나는 건성으로 부인을 달래놓고 그쪽의 다음 말을 학듯 황급히 결론을 지었다.
“어쨌든 다음 화요일 잊지 말고 꼭 나와주세요. 은미도 유아 등록에 넣었으니 데리구요. 네?”
마지막으로 윤 선생님과 진작 인사가 있었다는 말을 할까 하다가 그냥 감추어버렸다. 부인의 신경질적인 웃음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뒤 나는 수차례 부인을 대하게 되었다. 대부분은 보건소로 부인이 와서 얘길 하는 것이지만 나의 의무 중 하나인 가정방문으로도 대면의 기회를 서너 번 가졌다.
부인은 나를 퍽 친근하게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윤 선생님과도 인사 나
누는 사이임을 알자 더욱 반가와했다. 물론 깊은 내막까진 모르고.
아이들도 모두 나를 따랐다. 내 본 성미가 아이들을 귀해 하는 탓이기도 하지만 엄마가 하는 대로 그저 내가 좋은 모양이었다.
어느날 부인이 은미와 함께 상담실을 찾아와서,
“몸이 좋지 않아요. 배가 가끔 아프고˙ 출혈도 약간 있구먼요.”
불길한 일이라도 일어날까봐 검나하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조심하셔야 해요. 마침 유산되기 쉬운 시기니까요? 과로나 부부생활 따위로 심한 자극을 주게 되면 위험할 겝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경을 좀 둔하게 쓰세요.”
나는 간호원의 입장에서 타이르듯 말하고 그달분 유산철과 비타민 A . D를 세어 주었다.
“신경을 둔하게 쓰라고요. 그게 안되니까 이렇게 애먹는 거 아닙니까.”
부인이 비로소 자기의 신경과민 증상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목포 있을 때군요. 친정어머니와 함께 유달산 기슭에 방 한 칸을 얻어 요양하고 있었어요. 하룻밤은 바깥 공기를 좀 쐬려고 마당엘 내려서니 내 발밑이 왼통 훤해요. 빤짝빤짝 별이 쫙 깔린 거죠. 아이구머니나, 하늘이 땅에 떨어졌네, 무삽고 걱정스러서 잠이 안 와요. 이튿날 동이 트기가 바쁘게 또 마당으로 내려섰어요. 그리고 발밑을 봤읍니다. 그땐 하늘이 없더군요. 어스름 속에 게딱지 같은 집채들이 뻬곡히 들어차 있어요. 어젯밤엔 그토록 아름답던 별나라가·…·나는 하도 기가 막혀서 어머님께 여쭸어요. 그랬더니 어머닌 눈물부터 글썽해지시면서 말씀합디다. 그건 전등불 아니냐. 하늘은 저리 높지 않느냐. 손으로 창공을 가리키셔요. 나는 또 딴 걱정이 생기더군요. 그럼 저 수많은 집채들 속에 누가 살까. 뭣을 먹고 무슨 재미로? 하루 종일 걱정하다가 그들이 불쌍해서 마구 울어버 렸어요.”
“그런 증상이 요즘도 나타나는가요?”
부인의 얘길 홀린 듯이, 그러나 진정으로 걱정스레 듣고 있던 내가 물었다.
“때로 약간씩 그런 것도 같아요. 내가 볶으니까 그래요. 원수놈의 딸들. 세상은 왜 아들과 딸을 차별대우하는 겁니까. 그이는 삼대독자라니까요. 말은 바로 해야지 그이같이 성실하고 원만한 남자도 없어요. 불쌍해요. 나 같은 걸 만나서 얼굴 한번 못 펴고,”
“이젠 좋아지셨는걸요 뭐. 신경 너무 쓰면 정말 해롭습니다. 특히 조심하시도록 하세요. 뱃속 아긴 아들일걸요.”
“아들? 내 팔자에 아들? 그렇기만 한다면 오죽이나 좋을까만.”
그사이 은미의 몸무게며 신장 등을 재어본 순이가 지난번보다 훨씬 늘었다고 알렸다. 영양제가 효과를 낸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얼굴 윤곽도 확실히 뚜렷해졌다. 원수놈의 딸이라고 욕설을 뱉을 때와는 달리 부인이 은미를 받아 꼭 안고 몹시 기뻐했다. 자디잔 구석까지 뿌리를 뻗힌 그 모성이 문득 짜릿한 전율로 가슴에 닿아왔다. 부러웠다.
조심하라는 말을 몇번씩이나 더 붙여서 모녀를 돌려보내놓고, 나는 참 묘한
욕심을 품어 봤었다.
부인이 잉태하고 있는 유아가 또 딸인 경우엔 어찌 될까. 혹 내가 한번 그분께 부딪치면 기적적으로 아들을 잉태할 수는 없을는지, 확률이야 아무쪽에도 없는 거지만 그분에게 그토록 소원인 〈아들〉을 하나 낳아드리고 싶었다.
망상이다, 망상. 터무니없는 망상.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다른 상담객을 영접했었다.
그런 뒤 며칠 안되어서였다.
윤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후에 좀 들러달라고. 간밤에 모처럼 한번 다투었더니 일이 난 모양이라고.
나는 가까스로 틈을 얻어 그 즉시 부인에게 달려갔다. 심한 복통을 느끼며 망울망울한 핏덩이를 아래로 쏟았다고.
창백한 부인의 동공(瞳孔)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틀림없는 유산이었다.
다투게 된 동기라는 것도 듣고 보니 매우 우스웠다. 때묻은 와이샤쓰와 양말
을 마루에 던지면서 윤 선생님이,
“내일 좀 빨아놔요.” 했던 것이 싸움의 시추였단다.
부인은 〈네.〉 하고 대답하려다가 다시 생각해보니 화가 났다. 도대체 똑같이 손 있고 발 있는데 왜 나는 남자의 시중을 들어야 하는가. 손수 해도 될 만한 일을 왜 꼭 나에게 시키는가. 드디어 부인은 쏘아붙이듯 말했다.
“이제부터 당신 옷은 당신이 좀 빨아 입어요. 뭐, 내가 종년인가?”
남편은 어이가 없었다. 아내가 매사에 신경을 쓰고 밤잠을 설치는 정도까지는 알고 있었다. 그려나 이건 너무하지 않는가. 이리하여 그분의 관용은 궤도를 잃었다. 오랜만에 불꽃을 퉁겨 꽤 오랫동안 다툼이 계속됐다.
굽히지 않는 부인. 울화가 터진 그분. 결국 부인은 난생 처음으로 남편의 손찌검을 받게 되고 말았다. 뺨이 얼얼해지면서 코피가 흘렀다. 아니, 이 피, 피. 밤에 보는 피의 색깔은 부인을 질식케 하기에 충분했다. 잠깐 동안이지만 부인
은 의식을 잃고 까무라쳤다.
체질이 약한데다 신경과민. 4개월째인 태아의 유산은 불가피한 것이 되고 말았다.
나는 틈이 있는 태로 부인의 건강을 위해 그곳엘 들렀다. 플라스마도 놓아주고 영양제토 계속 지급하고 또 약효를 보아 살이 포동이 오르는 은미도 한번씩 안아줄겸. 그 가정에 대해선 나도 모르는 새 지극한 정성 이 우러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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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는 그런 대로 내게서 책 익기를 배우고 은희는 동요를 매우고, 말하자면 나의 그런 관심의 출처는, 외롭게 자란 탓에 한 가정의 분위기를 못내 그리워해오던 잠재의식 비슷한 것이 아닌가 싶다.
윤 선생님은 대개 부재중이셨지만 혹 한자리가 되며는 비스듬히 벽에 기대앉아서 나의 일거일동을 지켜보시곤 했다. 그럼 나는 당황해지고, 내 행동에 실망을 하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무척 가엾어져서 다른 날보다 몇곱이나 더 빨리 그곳을 빠져나와버 리곤 했다.
하얀 마가렛이 한창 꽃밭을 피우던 오월 하순이었다. 가정방문 시간의 틈을
얻어 그곳에 들렀더니 오래 기다리기나 한 사람처럼 부인이 나를 반겼다. 꿈을
꾸었다는 거였다. 이상한.
동네 아낙들과 더불어 〈새터〉로 빨래를 갔단다. 이불 호청이야 뭐야 큰 빨래서
껀 접떼 그 와이샤쓰와 양말도 함께 가지고 갔다. 빨래를 막 시작하려 자릴 잡고 앉았다. 출렁이는 물이 너무도 맑고 좋다. 고개를 휘둘러가며 부인은 완상(玩賞)하듯 물밑을 주시했다. 그때 였다.
저쪽 물가에 야릇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아담하고 맑게 씻긴 집채들, 느슨하고 한가로운 물오리떼, 더 깊숙이는 바람이라도 빚어낼 것 같은 소나무 한 그루가 제 폭넓은 그늘을 쫙 펴고 우뚝 솟아 있다. 어른어른 그것들이 자꾸 흔들렸다. 아 저건 천국이다. 나 같은 사람도 저속에 가면 천사가 되겠구나. 아니 그것보다 저기 가면 나도 아들을 낳게 될지 몰라. 아들 아들, 틀림없이 나는 낳게 돼. 나도 남들처럼 낳을 수 있어. 한참 중얼대며 도취해 있는데 응애! 가냘프면서도 째지듯한 갓난애의 울음소리가 들려오지 않겠어요? 그리곤 분명 보았어요. 예쁜 고추를 달고 둥실둥실 그 물속에 떠가는 옥동자를. 그래 단숨에 물로 뛰어들다가 깨니 꿈 아녀요. 아이, 허망해. 접때 흘려버린 애는 틀림 없이 아들이라요.
유산 이후 부인의 신경은 날로 쇠약해가나봤다. 작고 깡마른 부인이 더욱 초라하게 보였다. 엊그제 들렀을 때 내 손수 꽂아준 마가렛 꽃송이가 그 화사한 웃음을 거두고 축 처진 채 시들해 있었다.
“아주머니, 어디 가 좀 조용히 쉬었다 오심 좋겠어요.”
나는 진정으로 염려가 되어 그런 제안을 해보았다.
“다 쓸데없읍니다. 정양도 나만큼 한 사람 있을라고요. 고통이 나보다 먼저 가서 쉬고 있어요. 어디든지.”
유달산 기슭에서도, 성콜롬반병 원에서도, 광주 지산동 산수 좋은 계곡에서도 부인은 언제 어디서고 자기보다 먼저 와 있는 고통 때문에 한번도 편히 쉴 수가 없었다는 거였다.
“동정이라도 좋습니다. 그저 와주시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요.”
금방이라도 눈물이 번져버릴 듯한 얼굴위에 아빠의 이 같은 편지 구절을 쓰고 내일 은교는 또 나타날 것이다.
환자가 별로 없는 대로 가을비 내리는 월요 오후가 저물고 있다. 퇴근 전에 나는 하나의 답을 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십여 일, 어린 은교에게는 너무 길고 서러운 시간이었을 거다. 소풍도 가고 운동회도 하고, 그. 안에 꼭 와주세요 네, 하며 울먹이던 그애가 가슴 저리다.
부인이 편히 쉴 곳은 결국 그 길뿐이었을까. 푸른 저수지 속 쪽빛 하늘에는 매양 몸보다 먼저 가 있곤 한다던 부인의 고통도 자취를 감춰주었는지.
그러니까 꿈 이야기 후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부인은 남편과 큰딸 은교가 각각 직장으로 학교로 나가고 없는 틈을 타서 기어이 일을 저지르고 만 것이었다.
그날 혼자 집을 지키던 금년 열다섯 살 난 식모애의 말을 빌어보자.
아침을 치우고 나서 아줌마는 언제보다 더 곱게 화장을 하고 이것저것 옷을 꺼내 입어보는 것 같더니, 요 앞 상점에 좀 다녀오마고 집을 나갔다.
잠깐 후에 돌아온 아줌마는 은희와 은미를 깨끗이 씻기라고 큰소리로 명령했다. 손에 두툼한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아이들을 씻겨 방에 들여놓자 아줌마는 아까 들고온 꾸러미를 끌러 은희와 은미에게 각각 새옷을 꺼내 갈아입혔다. 뜻밖에도 사내들이 입는 줄만 알았던 바지와 샤쓰였다.
‘아줌마가 좀 이상하다…….’ 그러나 식모애는 그런 속뜻을 나타낼 수가 없었다. 어쩐 일인지 아줌마의 표정이 얼음장같이 싸늘했다. 말을 붙이기가 겁이 날 만큼. 외출 준비를 다 마친 아줌마는 아이들을 얼르기 시작했다. 엄마랑 천국(식모에는, 이 천국이란 말을 한참만에야 찾아냈다)엘 가는 거다. 오리새끼도 있고, 푸른 소나무에 솔방울도 주렁주렁 하고, 너희만한 아이들이 장난감을 무더기로 놓고 놀아요. 다섯 살 난 은희가 바지를 안 입겠다고 끙얼댔다. 바보, 치마 입고 가면 그애들이 쫓아낸대요. 자 얼른 입지? 거기 가면 종일 내 과자도 준다. 아이들은 무서무서 하면서도 엄마의 손 한짝씩을 붙들고 따라 나섰다. 대문만큼 나가다가 잊었다는 듯 식모애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 후딱 가서 우리 은식이 데려올께 집 잘 보고 있거라. 한 두어 시간이면 될 거다.
그런 아줌마가 12시 사이렌이 불고 저녁밥때가 다 되어도 안 돌아오셨어요.
아이는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불행중 다행이랄까. 부인은 그날 밤을 넘기지 않고 낚시꾼들한테 발견되어 집으로 돌아오긴 했다. 두 딸애와 함께 훔뻑 물을 쓴 시체로서였다. 〈새터〉 바로 뒤에 있는 저수지에서라고들 했다.
그러나 내가 무엇보다 가슴 아파한 것흔 그 인형이었다. 물에 팅팅 불은 부인의 허리춤에서 은식이라 부르던 그 곱슬머리 사내의 인형이 튀어나온 것이다.
두어 번 눈을 깜짝거리면 능히 없앨 수 있던 내 눈물도 그런 광경 앞에선 도저히 불가능했다. 은교를 안고 달래면서 나도 그냥 끄이끄이 울어버렸던 것이다.
나는 그후 과거 어느때보다 더욱 뼈저린 공허를 느끼면서 부인과 두 어린이의 명복을 빌었다. 지금의 나는 윤 선생님을 생각하는 건지 그 가정을 생각하는 건지 묘하게 선후가 엇갈려버린 셈이다. 그분의 아들을 하나 낳아주고 싶다던 터무니없고 막연한 꿈도 와사삭 무너지고, 매일매일 끈질긴 공허의 연속 위에 심신을 내맡길 뿐이었다. 이따금 만취한 그분의 모습을 거리에서라도 대하게 되면, 나는 겁부터 미리 먹고 피해버리기가 일쑤였다.
은교를 보살펴주고 싶은 생각은 간절했지만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그분과 부딪치지 않을 시각만 고르자니 그 역시 어려웠다.
그리고는 8월 어느 날, 나는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그분의 편지를 받게 된 것이었다.
〈은교 어미가 천국을 찾아간 지 벌써 두 달이 넘었소. 이제 나 경숙씨한테 그동안의 침묵을 깨고 무언가 좀 지껄일 수도 있을 성싶으오. 우리에게 와주시오. 이건 어디껏 은교와 나의 공동의사요. 어찌된 일인지 그앤 〈아줌마〉랑 함께만 살고 싶다는 거요. 목포의 부모님은 벌써부터 그곳 사립학교에서 자릴 얻어놓고 어서 내려와 같이 있자고만 하오. 그리고 새사람을 얻어야 한다는 거요. 그들은 내게서 대를 이을 자손을 기대하고 있지요. 나는 딱하게도 삼대 독자니까. 달리 할말이 뭐 있겠소. 자격 상실자인 내가 이렇게 굇스러운 프로포즈를 하다니 주책없는 사내라고 화낼는지. 실은 꼭 경숙씨 앞에 붙여주고 싶은 형용사가 하나 있소. beautifu1, 이거요. pretty가 아닌 beautiful 말이요. 경숙씬 비록 빈손이지만 당신 내부에 간직된 그 〈아름다움〉이란, 다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품이오. 그 무길 가지고 와주시오. 은교와 내 이웃에게로. 그리하여 우리 목포를 향해 떠납시다. 그럼 내 오늘부터 은교를 그리 보내기로 하오. 답이 올 때까지 날마다. 경숙씬 그애 얼굴에 쓰인 내 다음 말만 읽어주면 될거요. 〈동정(同靑)〉이라도 좋습니다. 그저 와주시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요.〉
“언니 어디 머리 아파요.”
“응? 아니, 한가해서 그래.”
“퇴근해요 우리. 6시에 다 됐는데.“
순이가 내 착잡한 맘을 알 리 없다.
“먼저 가 순아. 오늘은 내가 문 잠글께 수고했다.”
“결심. 그렇다. 이 이상 더 누구고 참고 견뎌야 할 까닭도 의미도 없는 것이다. 은교가 내일 나타나면,
동정이라도 좋다구요? 그저 가기만 하면 된다구요?”
이렇게 써서 얼굴에 담아주리라. 번질 듯한 눈물이 걷히고 기꺼이 미소하며 나타날 다음날의 은교를 그려본다. 만약 은교가 남동생을 본다면 은식이라 지어주자.
가을비 내리는 한가한 월요 오후도 이제 저녁이 되어 있었다.
―196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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