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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와 자연 그리고 보편적 형제애
프란치스꼬와 자연 그리고 보편적 형제애
생태계의 위기 뿐 아니라 인간의 생존과 인간다움의 위기까지 초래되고 있는 오늘의 시대에 교황 요한바오로 2세는 1979년 11월 29일, 자신의 사도적 서한, 「Inter sanctos praeclarosque viros」를 통하여 프란치스꼬를 「생태학의 주보성인」으로 선포하였고, 포담대학교의 카즌스(E. H. Cousins) 교수는 「21세기의 그리스도」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21세기에 만날 수 있는 그리스도 중의 하나를 프란치스꼬에게서 찾으면서 성인의 「태양의 노래」를 21세기를 사는 생태계의 노래로 소개하였다. 생태신학을 이야기하는 마당에 왜 프란치스꼬가 언급되어야 하는지 우리는 그 원의를 살펴보아야 한다.
따라서 지금까지 부주의한 눈으로 간과했던 우리 자신에 그리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세계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기 위하여 창조물의 조화를 형제간의 우애로 접근하였던 프란치스꼬의 관점을 「프란치스꼬와 자연 그리고 보편적 형제애」 라는 주제로 살펴본다.
1. 하느님과 피조물
프란치스꼬가 체험한 하느님은 사랑이신 하느님이었다. 그는 자기 존재의 중심에 사랑이신 하느님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의 삶이 사랑이신 하느님께 응답하는 삶이었기에 프란치스꼬는 주님께서 그를 이끌어 주시고 그의 삶 가까이에서 활동하고 계신다는 굳은 확신을 지니고 있었다.
프란치스꼬가 지닌 평화는 하느님 체험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실천하는 가난의 삶으로부터 그 바탕을 찾을 수 있다. 그가 지닌 평화는 “외적인 불쾌”가 존재하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통합의 결실로서 재형성되어 나왔는데, 프란치스꼬에게 있어서의 평화는 “하느님은 모든 것”(God is All)이시며, “모든 것은 다 선물”(All is gift)이라는 강한 의식으로부터 형성된 것이다.
이렇게 사랑이신 하느님을 늘 가까이서 체험한 프란치스꼬에게 있어서의 평화는 모든 피조물에 대한 경이로움과 친교로 반영되었다. 이러한 인식에서 프란치스꼬에게 비친 피조물들은 그저 단순한 창조물들이 아니었다. 프란치스꼬는 모든 피조물 안에 현존하는 질서와 조화를 느꼈으며, 창조된 존재들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권능을 보았다. 피조물들에는 창조하신 분의 표가 새겨져 있으며 그분의 사랑, 관용 그리고 그분의 모든 특성이 들어 있음을 프란치스꼬는 느꼈다. 그래서 프란치스꼬는 모든 피조물을 형제 자매라 불렀다. 이러한 의식은 피조물들을 있게한 근원 및 기원이 한 분 하느님이심을 인식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창조된 피조물들은 그들을 창조하고, 아낌없는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의 경이로운 빛 안에서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으며, 그 연결은 프란치스꼬에게도 생생하게 이어졌다.
2. 우리의 형제이신 그리스도
프란치스꼬는 자신을 형제, 만물을 그의 형제 자매라고 불렀듯이 그리스도를 그의 형제라 불렀다. 프란치스꼬는 존재의 내면 깊숙이에서 그리스도가 자신의 형제임을 알았다. 그에게는 모든 존재가 그리스도를 통해 형제 자매가 되었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인간 뿐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하느님과 하나로 이어주는 맏형이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시며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신 분이시며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는 분이시다. 모든 피조물은 그분의 빛을 반영하고 그분의 존재를 드러낸다. 따라서 프란치스꼬가 맏형으로 부른 그리스도가 모든 피조물의 정점이요 중심이 되는 우주론적 관계가 이루어지며,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자연은 모두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형제관계 속에서 이해되어 지는 것이다. 태양을 형님, 달을 누님, 별을 자매 등으로 부름으로써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우주론적 형제관계는 하느님과 동떨어진 관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하나로 이어지는 형제애로 뭉쳐지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프란치스꼬 안에서 자연예찬이라든지 어떤 감상적인 시를 알아보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숙고해야 할 것은 더 높은 차원의 것으로서 프란치스꼬를 통하여 우주의 성사적 성격을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즉 삼라만상은 하느님의 표지를 지니고 있는 것이며 하느님께로 들어 올려지고 또한 하느님과 하나로 일치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비적 일치는 그리스도 안에서 변모되어, 창조물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룩함 속으로 귀결되어 지는 것을 인식하여야 하는 것이다.
3. 태양의 노래에 나타난 하느님․인간․자연
서구 정신사의 측면에서 바라본 자연은 비슷한 것과 비슷하지 않은 것을 구별하여 각자에게 응분의 자리를 지정해 주는 위계질서였다. 따라서 하느님-인간-자연은 서로 유리되어 나타났다. 그러나 프란치스꼬는 하느님-인간-자연의 위계질서에서 인간을 피조물로부터 따로 분리하지 않고 피조물과의 관계를 동등한 차원에서 하나의 형제관계로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자연은 인간의 반영이 아니었다. 자연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반영이었다. 인간과 자연은 다같이 피조물이며 동등한 관계로서 형제요 자매였다.
프란치스꼬는 사랑의 정신과 동정심으로 가득찼었다. 온갖 피조믈과 인간과의 조화를 회복시킴으로써 그로 하여금 원죄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게 한 것은 바로 동정심이었다. 그는 사람들에게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말 못하는 짐승들, 파충류나 조류, 그밖의 감각이 있는 피조물과 무생물 즉 감각이 없는 피조물에게도 그러했다. 그래서 그는 피조물이 누구에게서 저주를 듣는 것을 보면 몹시 괴로워 하였다.
이렇게 프란치스꼬는 한 처음 창조의 첫 새벽에 인간과 피조물 사이에 존재했던 연대의식을 회복하려 하였다. 하느님께 대한 한없는 사랑이 피조물을 향한 사랑으로 자연스럽게 우러나왔으며 이러한 피조물에 대한 사랑이 전 감각세계에 반영되어 나온 것이 바로 「태양의 노래」이다.
1 지극히 높으시고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주여!
2 찬미와 영광과 칭송과 온갖 좋은 것이 당신의 것이옵고,
3 호올로 당신께만 드려져야 마땅하오니 지존이시여!
4 사람은 누구도 당신 이름을 부르기조차 부당하여이다.
5 내 주여! 당신의 모든 피조물 그 중에도,
6 언니 햇님에게서 찬미를 받으사이다.
7 그로 해 낮이 되고 그로써 당신이 우리를 비추시는
8 그 아름다운 몸 장엄한 광채에 번쩍거리며,
9 당신의 보람을 지니나이다. 지존이시여!
10 누나 달이며 별들의 찬미를 내 주여 받으소서.
11 빛 맑고 절묘하고 어여쁜 저들을 하늘에 마련하셨음이니이다.
12 언니 바람과 공기와 구름과 개인 날씨, 그리고
13 사시사철의 찬미를 내 주여 받으소서.
14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저들로써 기르심이니이다.
15 쓰임 많고 겸손하고 값지고도 조촐한 누나
16 물에게서 내 주여 찬미를 받으시옵소서.
17 아리고 재롱되고 힘세고 용감한 언니 불의 찬미함을
18 내 주여 받으옵소서.
19 그로써 당신은 밤을 밝혀 주시나이다.
20 내 주여, 누나요 우리 어미인 땅의 찬미 받으소서.
21 그는 우리를 싣고 다스리며 울긋불긋 꽃들과
22 풀들과 모든 가지 과일을 낳아 줍니다.
23 당신 사랑 까닭에 남을 용서해 주며,
24 약함과 괴로움을 견디어 내는 그들에게서 내 주여 찬양받으사이다.
25 평화로이 참는 자들이 복되오리니,
26 지존이시여! 당신께 면류관을 받으리로소이다.
27 내 주여! 목숨 있는 어느 사람도 벗어나지 못하는
28 육체의 우리 죽음, 그 누나의 찬미 받으소서.
29 죽을 죄 짓고 죽는 저들에게 앙화인지고,
30 복되다. 당신의 짝없이 거룩한 뜻 좇아 죽는 자들이여!
31 두 번째 죽음이 저들을 해치지 못하리로소이다.
32 내 주를 기려 높이 찬양하고 그에게 감사드릴지어다.
33 한껏 겸손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초자연적 질서에 따라서가 아니라, 창조질서에 따라서 창조물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신다. 다시말하면 모든 창조물은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숨은 뜻, 신적 메시지를 간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인간은 창조물을 이용하고 지배하면서 모든 창조물과 친숙하게 되었으며, 그 창조물 안에 자신의 뜻을 새겨 놓았다. 이렇게 해서 창조물은 하느님의 메시지 뿐아니라 인간의 노력과 정성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대답을 나타내는 표지가 되었다. 창조물은 무기력한 사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인간에게 전해지고 인간의 내면성이 표현되는 장소이다. 인간과 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나타내는 표지로써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진 기나긴 역사를 이야기하여 주고 있다. 존재하는 모든 만물은 인간에게 대답을 요구하는 하느님의 행위에 대한 증거이며. 창조적 기능을 갖고 있는 하느님 말씀의 실현인 것이다. 즉 모든 창조물은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을 우리에게 드러내는 계시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에 대하여 보프(L. Boff)는 「성사란 무엇인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물들은 그 안에 구원과 비밀을 감추고 있다. 따라서 성사적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을 거부하는 중요한 이유의 하나는 이와 같은 물질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볼 때는 물질이란 인간에 의한 조형과 소유의 대상일 뿐아니라 하느님을 담고 있는 그릇이며, 구원을 만나는 장소이다. 물질은 성사적이다.”
프란치스꼬에게 있어서 자연은 하느님에서부터 시작하여 하느님 안에서 끝난다. 이를 두 가지 관점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하느님 사랑이 피조물 사랑에로(from Creator to creature)와 피조물을 통하여 하느님께로(from creature to Creator)가 그것이다.
1) 하느님 사랑이 피조물 사랑에로
프란치스꼬에게 있어서 자연은 그 자체에 매력이 있다든지, 그 자체에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 아니다. 자연에 대한 프란치스꼬의 사랑은 하느님 안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가 있다. 즉 하느님을 향한 전적인 사랑이 자연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완덕의 거울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프란치스꼬는 하느님 사랑에 완전히 몰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미 완덕을 갖춘 그의 정신 세계와 모든 피조물을 통해서 하느님의 전선(全善)하심을 분명히 깨닫고 있었다. 하느님의 창조물 그리고 하느님과 신앙생활의 진리를 특별히 나타내는 것이면 어떤 것이나 그것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마음 속에 품고 있었다.”
피조물 안에서 프란치스꼬는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지혜와 힘과 선을 명상․관조하면서 그는 해를 쳐다볼 때, 달을 쳐다볼 때 그리고 별과 창공을 응시할 때 이루말할 수 없는 경이로운 기쁨에 도취되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같은 근원에서 생겨난다는 인식으로 프란치스꼬는 아주 미미한 피조물에게조차도 그들이 똑같은 기원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형제 자매라고 불렀다. 그래서 그들이 비록 천하고 보잘 것 없다하더라도 그는 지상의 모든 피조물 안에 내재한 가장 깊은 의미 즉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이렇게 프란치스꼬와 피조물과의 상호관계의 근거 및 동기는 프란치스꼬의 하느님께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이었다.
그래서 “가장 높은 지혜에 대한 특별한 인식력을 지닌” 프란치스꼬는 모든 선의 샘이신 지존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주 하느님께 모든 좋은 것을 돌려드리고, 모든 좋은 것이 그분의 것임을 깨달으며 모든 선에 대해 그분께 감사드리고 있는 것이다: “모든 선의 주인이시며 당신 홀로 참되신 하느님은 모든 영예와 존경과 모든 찬미와 찬송과 모든 감사와 영광을 받으시고 또 받으시기를 빕니다.”
이러한 하느님 사랑의 강렬함이 그를 온갖 피조물의 형제가 되게 하고 피조물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케 하였는데, 특히 프란치스꼬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이 그를 창조주의 모상을 지닌 사람들과 모든 자연들에게 더 친절한 형제가 되게 하였다.
그래서 프란치스꼬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온전히 이룩하기 위해 피조물에 대한 사랑 뿐만 아니라 인간의 이기주의를 불식하기 위하여 「태양의 노래」를 부른 것이다. 영성가 루이 라벨(L. Lavelle)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프란치스꼬는 피조물을 창조주와 대립시키려 하지 않았다. 자연은 부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의 의지가 자연을 부패시켜 버렸다고 보고 있다. … 자연 안에서 하느님의 활동하심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를 엿볼 수 있으며, 어디서나 자연의 무구함과 조화 그리고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다. … 이는 자연과 인간의 삶이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프란치스꼬는 영신을 자연화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을 영신화했다.”
2) 피조물을 통하여 하느님께로
프란치스꼬로 하여금 피조물에로 관심과 사랑을 두게 하였던 하느님께로 향한 지극한 사랑처럼, 역으로 피조물은 그를 하느님께로 이끌었으며 피조물 즉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그에게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잡이가 되었다. 프란치스꼬는 피조물의 고유가치를 인정하였으며, “피조물을 통하여” 하느님의 현존을 인식하였고, 자신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할 수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피조물의 세계는 하느님의 발자취이며 하느님께로 오르기 위한 계단이었다: “프란치스꼬는 모든 ‘피조물’을 ‘사다리로 삼아 온전히 마다하지 않을 하느님’(아가 5,16)께로 오르려 했다. 토마스 첼라노(T. Celano)는 이에 대해 잘 말해준다: “그는 아름다운 사물들 안에서 아름다움 자체를 보았다. 모든 사물들이 그에게는 선이었다. 그들은 ‘우리를 만드신 분은 가장 좋으신 분입니다’ 라고 외쳤다. 그분의 발자국이 서려있는 사물들을 통하여 그는 어디서나 사랑이신 그분을 따라갔다. 그는 홀로 모든 사물에서 사다리를 만들어 그 사다리를 밟고 옥좌로 올라갔다.”
이러한 프란치스꼬의 피조물에 대한 사랑이 보나벤뚜라(Bonaventura)에 의해 체계화되었다. 보나벤뚜라는 선하신 하느님 안에서 모든 피조물을 하느님의 모상으로 보았다. 그러기에 보나벤뚜라에게 있어서 모든 피조물 즉 전 우주는 어디서나 삼위일체 하느님을 읽을 수 있는 커다란 책인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하느님을 말해주며 그 각기의 방법으로 하느님을 나타내며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끄는 길이다. 세계가 어떻게 하느님께로 우리를 이끌어 가는가? 사물의 원리에 관련시켜 말한다면, 사물의 진리는 제일원리를 표현하는 것 즉 모방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물들에서 하느님께로 올라갈 수 있는 것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있는 유비(類比)에 의한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있는 현실의 유비는 표현의 유비이다. 따라서 하느님이 세계를 창조한 이유는 세계가 하느님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즉 하느님이 이 세계를 창조한 이유를 보나벤뚜라는 이 세계로하여금 하느님을 표현하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4. 프란치스꼬와 금욕주의
프란치스꼬의 모습이 독특하게 드러난 것은 낭만주의 시대였다. 그렇다고 그는 낭만주의자는 아니다. 낭만주의는 근대적 주관성을 특징으로 하여 인간의 감정 자체를 세계에 투사한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을 자신의 의식 즉 인간 감정에로 회귀시키며, 자연에서 우러나오는 메시지를 들음으로써 의식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신비에로 향하지 않는다. 낭만주의에서의 ‘나’는 자기 자신에 집착해 있는 패쇄적인 상태로 머물러 있다. 그런데 프란치스꼬에게 있어 ‘나’는 그 자체를 넘어선다. 그러한 ‘나’는 닫힌 한계를 열어젖히고 만물과 형제 자매가 되어 창조주 하느님을 찬미하는 송가를 부르고자 하는 열성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극도의 극기와 끊임없는 정화에의 노력이 요구되고, 사물을 소유하고 지배하려는 욕망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보프는 프란치스꼬의 자연에 대한 존경심은 매우 엄격한 금욕주의에서 기인한다고 보고 있다. 즉 고행과 극기로서의 내적 정화와 세속을 부인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참으로 형제적인 방식으로 창조된 세계를 다시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고행의 의미는 신약성서에서 볼 수 있는 회개의 관점에 따라 새 인간을 모색하는 길에서 찾아야 한다. 보프에 의하면 “회개는 가장 심오한 인간적인 모습을 띠게 한다”고 말한다. 또한 극기는 흘러넘치는 격정을 죽임으로써 그것의 창조적인 힘이 거룩함과 인간화를 향하여 이끌어갈 수 있게 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프란치스꼬에게 있어서 회개는 모든 참된 회개의 경우처럼 윤리적인 변화 즉 행동하고 관계를 맺는 방식에서 생겨난다. 여기서 하나의 단절이 일어난다. 한 세계가 죽고 새로운 세계가 태어나는 것이다. 프란치스꼬는 자신을 가난한 사람들과 동일시하고 힘든 고행을 걷기 시작한다. 프란치스칸 영성 안에서 고행은 마니교에서 보는 관점대로 육체가 악이기에 육체를 학대하는 의미로서의 고행은 아니다. "선(善)을 통한 해방" 즉 죄로 인하여 파괴되어진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방편으로써 고행을 허락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프란치스꼬의 내면화 과정의 핵심은 가난이다. 가난이란 한 개인이 다른 사물을 그 나름대로 있게 하는 존재 양식이다. 이 때 인간은 사물을 지배하거나 복종시키거나 권력의지의 대상으로 삼기를 거부한다. 가난은 프란치스꼬의 본질적 행로이며, 이는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그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다. 가난하면 가난할수록 그는 더 자애롭고 우애를 느꼈다. 소유는 사람들 사이와 사람과 사물 사이에 통교를 가로막는 장애를 발생시킨다. 이기심, 이익, 독점적 재산 등은 개인과 세계 사이를 방해한다. 그들이 서로 거리를 두게 되고, 그 사이에 소외시키는 대상화의 샘이 패게 된다. 가난이 철저하면 철저할수록 개인은 더욱 더 현실에 가까워지고, 모든 사물과 교류하는 것이 더 쉬워지며 그들의 다른 점이나 구별점을 존중하고 경외하게 된다. 보편적 형제애는 바로 이러한 프란치스꼬의 가난의 결과이다. 프란치스꼬는 재산이나 부나 능률에 대한 관심이 없이 만물을 모을 수 있었기에 참으로 형제다운 정을 느꼈다. 가난은 이처럼 겸손의 동의어이다. 이것은 인간 개인이 지닐 수 있는 생활태도의 한 가지이다. 이런 존재 양식으로 회심함으로써 프란치스꼬는 온 세계와 화해를 이루고 우주적이며 보편적인 형제애를 이루게 된 것이다.
이렇게 프란치스꼬에게 있어서 통합의 완전함에 이르기 위해서는 낮은 데로 임하는 육화의 체험이 필요하다. 낮은 데로 임함으로써 개인은 아래에 있는 것에 마음을 열고, 착취당하고 나병으로 시달리는 육체들의 낙인찍힌 가난에로 던져지는 것이다. 그들을 온유하고 자애롭게 받아들임으로써, 그들은 인간다운 나눔을 통하여 통합되고, 특히 가장 친밀한 나눔인 자비로운 마음에 의해 하나로 통합된다. 누구든지 이 하락의 체험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삼는 사람은 프란치스꼬처럼 그 마음의 깊은 곳에서부터 모든 피조물을 찬양하는 찬가를 부를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프란치스꼬의 자연윤리의 근본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선택이 생태계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찾을 수 있다.
보프는 결론적으로 가난이 근본을 이루는 “참회, 극기, 고행의 금욕생활 그리고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프란치스꼬와 같이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로저 소렐(R. Sorrel)도 보프와 마찬가지로 프란치스꼬의 자연관은 중세 금욕주의적 전통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소렐은 자연에 대한 신비주의, 피조물과의 친교, 기사도 정신, 자연의 선함, 동물과 새의 보호 확대 등, 프란치스꼬에게 나타나는 독창적인 모습이 전통적인 금욕생활로부터 발전된 것으로 본다. 또 소렐은 중세전통적 사고 안에서 프란치스꼬의 심미적 자연의 근원을 주의깊게 분석하였는데, 거기서 그는 금욕적인 생활이 자연 세계 즉 창조의 세계로 들어가는 중세의 여러 잠재적인 방법 중에서 가장 발전적인 것이며 프란치스꼬가 이를 실증적으로 보여주었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라도 극기와 고행과 참회 그리고 십자가를 거치지 않고서는 프란치스꼬의 자연에 대한 사랑을 따를 수 없을 것이다. 프란치스꼬처럼 가난의 정신으로 가난하게 살면서 오직 끊임없는 고행과 심오한 포기를 통해서 인간과 모든 피조물 사이에 놓인 장애물을 제거해 버릴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피조물을 형제요 자매라 불 수 있으며 물을 겸손하고 정결한 누이로, 질병과 죽음을 자기 누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진실로 내어 놓는 사람, 진실로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사람만이 모든 이의 형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점이 생태학의 주보로서 새롭게 프란치스꼬를 이해할 수 있는 본질적인 것이라고 바이간트(P. Weigand)는 말하였다. 프란치스꼬를 선택하면서 그는 생태학자들은 “그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보다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하여 맞서서 투쟁해야 할 것…” 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만일 보프와 소렐 그리고 바이간트의 견해가 옳다면 그리스도교적인 금욕주의가 환경윤리의 실천적인 지침이 되어야 할 것이다.
5. 생태학적 생활양식
앞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관계양식이 변화되지 않고서는 인류에게 당면한 생태학적 위기를 해소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피조물들은 여전히 인류를 긴장과 갈등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하는 폭력과 억압 그리고 빈곤으로부터 시작하여 생태계의 피폐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으로 새로워질 것을 요청한다.
그러므로 창조질서의 보전을 위한 생태학적 윤리는 생태학적 정의를 요청한다. 여기서 말하는 정의는 하나의 이상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정신이요 생활양식이다.
세상을 벗어나는 것, 다른 사람들을 보다 지성스럽게 섬기고,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보다 다정하게 살며, 자연을 보다 훌륭하게 존중하도록 이끈 새로운 선택의 행위로써 제국적 체제를 떠나는 것, 이것이 프란치스꼬가 살았던 삶의 양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삶의 가치, 삶의 양식을 복음이 말하고 프란치스꼬가 실천한 겸손과 금욕의 삶으로 대체하여야 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프란치스꼬의 보편적 형제애를 나누기 위하여 실천해야 할 세가지 요청에 대하여 살펴본다.
1) 사랑하고 겸손해야 한다
사도 바오로는 사랑에 관해 서술한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않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위기나 좌절의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태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사랑해야 한다. 인간을 포함한 생태계의 모든 피조물들이 어떻게 취급되고 있는지 “무딘 정신,” 무관심한 습성을 버리고, 감추어진 진리를 찾아내며,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끔, 모호한 것을 명쾌하게 밝혀야 한다. 이러한 사랑이야말로 생태학적 정의를 위한 확고한 토대이다.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건강한 생태계로 보전하기 위해서는 예의 즉 겸손을 지구상의 실천윤리덕목으로 삼아야 한다. 프란치스꼬는 「태양의 노래」 32-33에서 겸손을 노래하였다. 무한한 하느님 앞에 있는 유한한 피조물, 은총과 사랑이 극히 필요한 피조물인 자신을 겸손을 통해 받아들였다. 그래서 프란치스꼬는 하느님을 찬양하였고 하느님께 감사의 노래, 「태양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겸손한 자는 환상이 없다. 오만한 자는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으며, 자신을 모르고 주위세계의 중요성을 파악하지 못한다. 그러나 겸손은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한다.
2) 기도하고 명상해야 한다
피조물을 대하는 인간의 자세에 있어서 가장 아쉬운 것이 기도하는 마음이다.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모든 혜택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감사히 여길 때, 인간의 자연에 대한 태도도 변화될 것이다.
“온 누리의 주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주님의 너그러우신 은혜로 저희가 땅을 일구어 얻은 이 빵을 주님께 바치오니…” 로 시작되는 성찬 전례의 기도처럼 인간의 행복을 위해 이루어지는 모든 산업들은 나무 젓가락 한 벌의 생산에서부터 우주개발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주권과 은혜에 감사하는 봉헌이어야 한다.
자연에 대한 명상은 평화와 평온을 가져다 주며 생태계의 균형을 위한 인간의 책임을 새롭게 일깨워 줄 것이다. 우리는 현실에 대한 더 깊은 관점을 얻기 위해서 명상을 한다. 명상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인류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대부분의 삶이 그러한 수준에 못미치고, 왜곡되고 왜소한 개성으로 인해서 우리가 편협하고, 무감각하고, 무의미하고, 어리석고, 자신과 다른 사람을 고통과 죽음으로 몰고가는, 자기파괴적인 어리석은 행동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명상을 통해서 우리는 잃어버린 관계를 되찾으려고 노력하고, 신비주의의 길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자신의 가정, 그리고 우주와의 관계를 더욱 완전하게 하려고 노력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명상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과 자신, 그리고 우주는 하나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부분에 있어서 더욱 완전해지지 못하면 존재의 한 부분 역시 더욱 완전해질 수 없다. 이러한 관계의 연결 속에서 한 부분이 왜소해진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다른 부분 역시 왜소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명상체험과 책임의식 없이는 환경보전에 대한 도덕률이 인간내면에서 자발적으로 우러나올 수 없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주의 조화로운 순환질서를 통해 인간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어주신다는 자각만이 자연을 사랑하고 보호하며 자연과 하나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기도와 명상은 우리를 하느님 안에 잠기도록 하며 하느님 뜻에 맞갖게 하여 허영과 편견 그리고 이기심을 없애줌으로써 모든 피조물을 형제 자매로 보게 한다.
기도와 명상은 우리 힘으로 구할 수 없는 평화를 선물로 주기에 우리는 모든 인류, 전생태계를 위해 프란치스꼬의 「평화의 기도」와 「태양의 노래」를 생태학적 정의를 위한 공동기도로 드렸으면 한다.
3) 협력하고 교육해야 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평화로운 사회발전의 토대인 윤리가치들은 생태환경문제에 구체적으로 관련되어 있음을 진단한다. 교황은 생태계 위기의 요인으로 크게 과학기술발전의 무차별 적용과 생명 존중의 결여로 보면서 그 해결책을 창조질서의 보전자로서의 인간의 책임과 재화의 보편적 목적성에 두고 국제적 협력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특히 순간적인 만족과 소비주의 그리고 인간의 가치와 생명에 대한 존중의 결여로 야기되는 인간과 생태계에 대한 무관심한 우리의 생활양식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호소한다.
이러한 관점으로 교황은 생태계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절제와 극기, 희생정신을 포함한 금욕주의 전통을 그 실천덕목으로 제시하면서 특히 생태계에 대한 책임을 가르치는 생태계 교육 즉 창조의 미적 가치를 올바로 식별할 수 있는 교육이 절실히 요청됨을 역설한다. 생태계 교육은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의 진정한 회개를 수반하는 것이어야 한다. 생태계 교육은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풍부해지기 위해서 행해진다. 생태계 교육을 통하여 창조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선하고 아름다운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생생한 형제애를 의식하고, 인간의 신비, 물질의 신성성에 대해 인식한다.
에릭 도일(E. Doyle)은 구체적으로 이에 따른 교육목표를 제시하였다:
- 주의, 피부색, 인종을 초월하여 모든 이의 존엄성과 개성을 깊이 인식한다.
- 어느 누구도 홀로 완성된 인간이 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 개인은 우선 인류가정에 속하고 그 가정은 지구라는 사실을 전달한다.
- 역사는 목적을 가졌음을 보여 주고 가능한한 일찍 세계사를 소개한다.
- 단결이 획일화가 아니며 다양성이 분열이 아님을 가르친다.
- 동서양의 신비한 전통 속에 나타나는 보물을 나누게 한다.
- 물질과 생명의 신성함에 대한 깊은 존중을 전달한다. 이를 위해 「태양의 노래」를 부르게 한다.
결론
창조질서를 보전해야 할 의무가 하느님 나라의 구현을 위한 시대의 소명임을 다시금 확인하면서, 이제 프란치스꼬의 보편적 형제애를 21세기를 살아야 할 우리의 도전이요 희망으로 받아 들여 하나의 운동으로 펼쳐나갔으면 한다.
약어표
Am Ammonizione
Cant Il Cantico delle creature
1Cel Leggenda prima di Tommaso da Celano
2Cel Leggenda seconda di Tommaso da Celano
Fonti Fonti Francescane
LegM San Bonaventura, Leggenda Maggiore
Lf Lettere a tutti i fedeli
Lore Lodi per ogni ora
Rnb Regola non bollata
Salimbene Cronica di frate Salimbene de Adam da Parma
Spec Specchio di Perfezione
Uff Ufficio della passione del Signore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홈페이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