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성심 여고 교정 안에 속하게 된 옛 용산 신학교 성당과 예수 성심 수녀회 관구 사무실로 쓰이고 있는 신학교 건물은 성소의 못자리였던 당시의 자취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서울 특별시 용산구 원효로 4가에 위치한 옛 용산 신학교 성당은 1902년에 축성된 건물이다. 여기에는 한국 천주교회의 첫 방인 사제였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가 축성 당시부터 1958년까지 모셔져 있었고 조선 교구 초대 교구장이었던 소브뤼기에르 주교와 제8대 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의 유해가 거쳐 갔던 곳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는 1855년 충청도 배론에 세워진 신학당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그 이전의 한국인 성직자 양성을 위한 노력은 이미 1830년대부터 시작되어 정하상에게 신학 교육을 시킨 바 있고 1836년에는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를 마카오에서 신학교육을 받게 했다.
배론 신학교는 1866년 병인박해로 폐교됐지만 신앙의 자유가 확보됨에 따라 1882년 21명을 페낭 신학교에 유학생으로 파견하기도 했다. 1885년에는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범골에 예수 성심 신학교가 문을 열고, 1887년에는 바로 이곳 서울 용산으로 이전한다.
그 후 1914년 성 유스티노 신학교, 1927년에는 함경 남도 덕원 신학교 등 여러 군데의 신학교가 생겨났고 서울, 대구, 광주, 부산, 수원, 대전에 이어 1996년에는 인천 가톨릭 대학이 개교하기에 이르렀다.
옛용산 신학교 성당에 그 유해가 모셔져 있었던 조선 교구 초대 교구장 소 브뤼기에르 주교는 파리외방 전교회 소속으로 1831년 조선 교구가 북경에서 독립하면서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됐다. 하지만 그는 갖은 고난과 질병을 이겨 내고 조선 땅으로 입국을 시도 하다가 결국은 조선 땅을 눈앞에 두고 조선을 향해 떠난 지 4년 만에 4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비록 그는 조선에 입국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개척해 둔 입국 경로를 따라 곧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가 조선에 들어옴으로써 한국 교회는 완전하게 조직을 갖춘 명실 상부한 교회가 된 것이다.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의 조선 교구 제8대 교구장 뮈텔 대주교는 1877년 한국에 입국해 1933년 서울에서 선종할 때까지 중간의 몇 년을 제외하고는 평생을 이국 땅인 한국에서 사목 활동을 했다.
박해 시대에 활동한 적이 있는 뮈텔 주교는 한불 조약 이후 지하 교회에서 해방된 교회의 모습을 좀더 확고히 하기 위해 예수 성심 신학교, 종현 성당, 약현 성당을 짓는 한편 각 지방에서의 본당 창설에 많은 지원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순교자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한 순교자 현양과 한국 천주교회사의 정립 그리고 순교복자의 시복 등으로 꼽을 수 있다. 유명한 뮈텔 일기는 자신이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된 1890년 8월 4일부터 임종하기 직전인 1932년 12월 31일까지 써 둔 일기로 총 6천여 면의 분량에 주교 개인 사정과 재임 동안의 교회 사정을 기록한 것인데 우리 한국 교회로서는 아주 귀중한 자료이다.
그 외에도 그는 뮈텔 문서. 기해 일기 등을 저술하고 황사영 백서의 원본이 발견되자 이를 프랑스어로 번역해 학계에 배포하고 그 원본을 교황에게 진상하기도 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사진 출처 : 오영환, 한국의 성지 - http://www.paxkorea.co.kr,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