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역동적인 삶을 살다 - 인간, 문화, 사회 편
2장 다양성과 개방성이 조화를 이룬 문화와 사상
2-4. 가족과 혼인, 호주와 상속제도
- 일본 연구자들의 고려사 이해
일본인 고려사 연구자들은 그간 '고려 전기 고대사회론'을 주장해 왔습니다. 한국사에서 중세 사회는 고려 무신정권 이후에 시작되며, 그 이전 고려 전기 사회는 고대 사회라는 것이지요. 식민지시대 일본인 연구자들은 의도적으로 우리 역사의 발전 속도와 단계를 늦추어 잡는 것으로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하려 했습니다. 전후 일본인 연구자들도 연구 대상이나 구사하는 방법론만 달라졌을 뿐 연구의 관점은 이전의 식민사학자들과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여기에서 살펴볼 가족과 친족, 상속제도 등에서 그들의 편견과 오해가 많이 나타납니다.
일본인 고려사 연구자들이 고려 전기 사회를 고대 사회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토지의 적장자 단독 상속론'과 '군현제의 신분적 편성론' 두가지 입니다. 특히 '토지의 적장자 단독 상속론'은 고려의 가족제도와 상속 및 혼인 문제를 해석하는데 이용되었습니다. 즉 고려 전기에는 토지는 적장자(嫡長子, 적법한 배우자 소생의 맏이)에게 단독 상속되었고, 여자와 다른 남자 형제들에게는 상속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적장자에게 단독 상속되었지만, 그것은 적장자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혈연 집단의 대표로서 적장자에게 상속된 것이기 때문에 개인의 사적인 소유가 아니라 집단적, 단체적으로 상속되었다는 것이지요. 또한, 토지의 적장자 단독 상속은 재산이 적장자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여러 형제가 그를 중심으로 한 집안에서 동거할 수밖에 없으므로, 자연히 고려 전기의 가족 형태는 적장자 중심 혹은 부계 중심의 대가족 형태였다고 주장합니다.
고려 전기 사회의 기초 단위가 이렇게 적장자를 중심으로 한 혈연 공동체였기 때문에 중앙정부가 지방사회를 지배하는 형태도 혈연 공동체들의 장(長)이라 할 수 있는 호족을 통한 간접지배였다고 하지요. 그리고 호족 세력의 크기에 따라 대호족의 근거지는 주(州)나 부(府), 중소호족의 거주지는 군이나 현으로 편제했는데, 이들 지역의 거주민은 신분상 양인이었고 천민은 따로 편제된 부곡 지역에 집단으로 거주했다고 보는 것이지요. 이것이 '군현제의 신분적 편성론'입니다.
'고려 전기 고대사회론'은 조선이 대가족 중심의 혈연 공동체에 기초한 사회였기 때문에 사회의 발전 속도가 지체되었다는 식민사학의 정체성 이론을 떠올리게 합니다.
식민사학 청산을 부르짖는 한국의 역사학자들 중에도 알게 모르게 이들의 이론에 젖어있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국내 고려사 연구 동향은 크게보면 일본인 연구자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그들의 산뜻하게 정리된 이론과 사료 이용 방식에 우리 연구자들이 비판 없이 빠져든 탓입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연구자의 증가와 다양한 역사 이론 수용으로 우리 역사 연구의 수준이 크게 높아지고 일본인들의 연구가 가진 한계를 인식하게 되면서 한국사 연구에도 진전이 있었습니다. 고려의 가족제도나 상속 문제에 관한 연구는 그 구체적인 예가 됩니다.
- 일부일처의 소가족 제도
고려시대 묘지명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가족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220점의 묘지명에서 산출한 평균 자녀 수는 3.97명이고, 한 쌍의 부부와 3~4명의 자녀로 구성된 단혼(單婚) 소가족이 일반적인 가족 형태였습니다. 고려의 가족 규모는 부부를 포함한 5~6명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와 달리 조선시대에는 평균 자녀 수가 5~6명으로 고려 때보다 많은 데다, 한 집에서 3세대 혹은 4세대가 함께 거주하는 사례가 많았습니다. 가족 구성원이 적게는 6명, 많게는 20명이 넘는 가호가 전체의 64%를 차지했다고 하니. 조선시대에는 대가족 곧 확대가족이 일반화된 가족형태였던 거지요.
고려시대에는 일부일처제가 오랜 관행이었습니다. 충렬왕 때 박유가 왕에게 제안한 내용을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려사" 권 106 박유열전). 박유는 인구 증가를 위해 관료는 물론 서민들에게도 고려에 온 외국인(몽골인)들처럼 축첩을 허락하자고 제안합니다. 몽골과 오랫동안 전쟁을 해온 탓에 실제로 고려의 남성 인구가 감소했고, 원 간섭기에 원과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일부다처의 몽골 풍습이 고려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던 상황을 보여줍니다. 무엇보다 이러한 제안을 했다는 것 자체가 일부일처가 고려의 오랜 관행임을 방증하지요. 그의 제안이 여성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는 사실도 당시 일부일처가 하나의 관행이었음을 알려줍니다.
- 서류부가혼과 자녀 균분 상속
고려시대 가족의 형태나 규모가 일부일처제를 기반으로 한 단혼 소가족이었던 이유는 고려의 혼인 풍습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앞에서 고려 왕실에 근친혼이 성행한 사실을 지적한 바 있는데, 일반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일반인의 혼인 풍습은 한마디로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입니다. 즉 신랑이 신부의 집으로 가서 결혼식을 올린 후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장성할 때까지 처가에서 거주한다는 의미입니다. 고려 중기의 문장가 이규보도 장인의 제문(祭文)에 "사위가 되어 밥 한 끼와 물 한모금을 다 장인에게 의지했다"라고 써서 결혼 후 처가에서 생활했음을 알려줍니다. 이런 상황인 만큼 첩을 두고 싶어도 둘 수가 없었겠지요?
서류부가의 혼인 풍속은 재산 상속의 관행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남편이 처가에서 자식이 장성할 때까지 머무를 수 있었던 것은 아내에게 경제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인 연구자들은 토지의 적장자 단독 상속을 주장하며 노비만 아들딸 구분없이 균등하게 상속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재산이 적장자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여러 형제가 한 집안에서 동거할 수밖에 없으므로 자연히 부계 중심의 대가족이 일반적인 가족 형태로 자리잡게 되지요.
하지만 최근의 연구들은 고려시대에 노비뿐만 아니라 토지도 자녀에게 균등하게 상속되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를 '자녀 균분 상속(子女均分相續)'이라 합니다. 자녀 균뷴 상속은 성별이나 태어난 순서와 관계없이 자녀 모두가 부모의 재산을 균등하게 상속받아 각자 독립된 가계를 이루기 때문에 자연히 가족 형태도 한 쌍의 부부가 중심이 되는 단혼 소가족 형태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류부가의 혼인 풍습은 부모의 입장에서 상속된 재산이 사돈집 차지가 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뜻도 있었을 것입니다.
조상에 대한 제사도 장자가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딸이 번갈아 가며 지냈습니다. 이를 '윤행봉사(輪行奉祀)'라고 합니다.
서류부가혼과 윤행봉사는 대체로 조선 전기까지 유지되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가족 형태 속에서 점차 장자 상속이 주류를 이루게 되어 고려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장자상속은 장자가 조상의 제사를 독점하는 관습과 연결됩니다. 조선 후기에 동족 마을이 발달하고 "주자가례(朱子家禮"가 널리 보급되면서 장남이 제사를 도맡는 '장자봉사(長子奉祀)'가 관행으로 굳어지게 되고, 그에 따라 남아선호 사상이 자리를 잡으면서 가족 규모도 자연스럽게 커지게 되지요. 이 점에서 고려와 조선 후기 사회는 분명히 다른 사회였습니다.
- 여성이 호주가 되는 사회
고려시대의 호적은 현재 전하는 것이 없으나, 국가가 호적 작성의 기초 자료로 쓰기 위해 호별로 호구 상황을 작성해서 관에 제출하게 한 호구단자(戶口單子)가 몇 건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호주의 직역(職役)과 가계, 배우자의 가계 및 소생 자녀 등이 기록돠이 있는데, 이 중에는 여성이 호주로 기록된 단자도 있습니다.
먼저 조선시대의 호구단자나 호적을 보면, 호주는 예외 없이 남성이며 노비도 남성인 호주의 소유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고려의 호구단자에는 노비의 소유주를 어머니 쪽과 아버지 쪽으로 구분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성도 남자 형제와 다름없이 부모로부터 균등하게 노비를 포함한 재산을 상속받았고, 이 재산이 결혼 후에도 남편과 시댁에 귀속되지 않고 본인의 재산으로 유지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이런 사실은 족보에도 반영되었습니다. 조선 후기 족보에는 자녀를 기록할 때 대체로 딸의 이름은 생략하고 대신 사위의 이름을 기록합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딸아들 구분 없이 출생한 순서대로 기록했습니다. 고위 관료나 공이 있는 관료의 자손에게 관직 진출의 특혜를 베푸는 음서제를 적용할 때도, 아들이 없는 관료의 경우 딸의 자손에게도 음직(蔭職)이 계승되었습니다. 여성이 상속, 호주, 제사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사회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지요.
2008년부터 호적법이 폐지되고 '가족 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면서 남성과 부계 위주의 관행에 많은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출생 자녀는 혼인 당사자가 합의할 경우 어머니의 성과 본관을 따를 수 있게 되었고, 부모가 청구하고 법원이 허가하면 자녀의 성과 본관을 중간에 변경할 수도 있습니다. 호주제도 폐지되어 출생, 혼인, 사망 등의 신분 변동 사항이 가족 단위의 호적이 아니라 개인 단위의 가족 관계 등록부에 기재됩니다. 이는 출생과 동시에 개인별로 하나의 신분 등록부를 만든 뒤 모든 신분 변동 사항을 개인 중심으로 기록한다는 '1인1적(一人一籍)'의 원칙에 기초합니다.
주:
이 글은 "오백년 고려사"(박종기, 휴머니스트 출판그룹, 2020)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 요약자가 곁들인 글
첫댓글 여성호주
그 때가 여성상위시대였네요
좋은 글
감사합ㄴ 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