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26일 우리의 벗 송헌 최문수가 전남대병원에 입원 중에 폐질환으로 우리와 운명을 달리하였기에 평소에 가까이 지내던 벗들이 26일 27일, 각각 시간을 달리하여 문상을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28일에는 나주 세지면에 조성해 놓은 가족묘지에 장례하였습니다. 28일 아침 7시에 원불교 발인식이 있었는데, 제가 전날 밤에 지은 애도문을 읽을 기회를 얻어 10분 동안 그가 가야할 길을 어루만주고 왔습니다. 장지까지는 너무 피곤하여 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날 새벽 3시까지 애도의 글을 짓느라 정신이 몽롱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음은 그를 보내는 애도의 글입니다.
‘과문불입(過門不入)은 비례(非禮)라.’ 이 말은 ‘아는 사람의 집 앞을 지날 때 들르지 않는 것은 예가 아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는 사람의 집 앞을 지날 때에는 반드시 들러서 안부를 여쭙고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 ‘과문불입이 예절’입니다. 현대 예절은 아무리 아는 사람의 집을 지나가더라고 불쑥 찾아가는 것은 사생활 침해로 예절이 아닙니다. 세상은 그렇게 변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나와 송헌은 지금도 ‘과문불입이 비례’입니다. 한 밤중이나 이른 새벽이 아니면, 지금도 찾아가서 그냥 초인종을 누를 만큼,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전화 한 마디 없이도 서로 방문할 정도로 가까이 지냈던 사람입니다.
“그대여! 정말 이 세상을 떠났단 말인가!
이제 정말 자넬 만날 수 없단 말인가!
불러도 대답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는가!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네!”
지금도 금방,
“어! 아석 뭐 해!”
하면서 자네가 들이 닥칠 것 같은 기분이 드네.
20여일 전부터 자네 집을 방문할 생각을 하였다가, 드디어 지난 7월 3일(월) 전화를 하였었지. 자네 집이 우리 집에서 너무 멀어, 혹시라도 출타하게 되면 만나지도 못하고 허탕을 칠까봐, 집에 있는 것을 확인하려고 전화를 하였었지. 휴대전화를 받지 않아 집 전화를 하였더니, 부인 오여사님이 받았네. 자네 부인의 말씀이, 자네가 지난 주 월요일 호흡기 질환으로 수완지구에 있는 KS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하였네. 오늘은 잠시 집에 들렀다가 전화를 받는 중이라면서, 오늘 사진을 찍었는데 결과를 확인하여 퇴원을 할지 더 입원 치료를 할지 결정 날 것이라고 하였네. 그러면서 신체적 노쇠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노쇠가 병행되고 있다고 한숨 쉬며, 부인께서 건강한 사람이 부럽다고 말씀 하셨다네. 그리고 코로나 때문에 병문안도 잘 되지 않으니 절대 오지 말라고 당부하셨네. 가족들도 면회가 잘 되지 않는다고 하였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 장마만 끝나면 다시 찾아가 만나서 아직까지 인지기능이 살아 있을 때, 마음속에 담아 놓은 이야기를 하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이런 청천 벽력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으니 나에게는 날벼락이 떨어진 것과 같은 마음이네.
송헌과 나는 1958년 광주사범학교 1학년 1반 학생으로 교실에서 처음 만났고, 그때는 정말 꿈 많은 청소년 시절이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하교하여 저녁때쯤 지방신문인 당시 <전남일보>를 배달하는 신문 보급소에 갔다가 나처럼 신문을 배달하러 온 송헌을 만났습니다. 그때는 송헌이 왠지 자립의지가 강한 친구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졸업하고 20년쯤 지난 후, 뿔뿔이 흩어져서 살다가, 내가 1980년대쯤 <영산포 여자중학교>에 근무하였고, 송헌이 <호남원예고등학교>에 근무하였을 때 두 번째로 만났지만 그냥 인사만 하고 지나갔지 만나서 식사를 한다거나 술잔을 기울이거나 하지 못하고 서로 바쁘게만 살았습니다.
세 번째는 광주광역시교육청 산하에서 만났습니다. 나는 광주시 관내의 여러 중학교에 근무하였고, 송헌은 <광주 농고>와 <학생회관> 연구사로 근무하면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퇴직과 함께 우리는 네 번째의 만남으로 이어졌습니다. <목요산우회>에 합류하여 같이 산행을 하면서 우리 둘 사이는 더욱 친밀해졌습니다. <목요산우회> 회원들과 전국의 산하를 누비고 다녔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지내왔는데 그는 오늘 나를 남겨두고 서둘러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갔습니다.
2010년 11월부터 2011년 11월까지 1년 동안, 내가 우리 <광주사범학교> 제15회 동창회장을 맡았을 때, 송헌은 나의 요청으로 총무의 일을 맡아 주었습니다. 다음에 송헌이 회장을 맡으면 내가 총무의 일을 맡기로 약속을 주고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밀접한 관계로 끈끈하게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까지 그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고 이승에서 송헌을 떠나보내게 되었습니다.
송헌은 나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가족들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런 송헌이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과 손자들을 뒤로 하고 이승을 떠나갔습니다. 송헌은 친부모님이 일찍 세상을 떠나셔서 남달리 가족에 대한 애정이 깊었습니다. 아내를 얼마나 사랑하던지, 큰 사위로서 처가의 경조사까지 빠짐없이 챙겼으며, 특히나 자기가 70대의 노객이면서도 90대의 자유분방하신 장인어른께서 자기만의 규칙대로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셔도 그 뜻을 다 따르고 수발들면서도 얼굴 붉히지 않는 순수하고 효심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들과 며느리 사랑, 딸과 사위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라, 큰손자가 <서울대>에 합격했다고 그 기쁨을 친구들과 함께 나누면서, 공짜 자랑은 안 된다고 손자 자랑 턱을 냈던 것이 어제 같은데, 어찌 그렇게 쉽게 눈을 감을 수 있었을까? 정말 믿을 수가 없습니다.
송헌이 조상을 섬기는 마음 곧 위선(爲先) 사상은 항상 내가 배우고 싶은 분야였습니다. 선조님들에 대한 섬김 정신이 강하여, 2006년부터 2년 동안 나와 함께 <광주대학교>에서 풍수지리학(風水地理學)을 공부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송헌은 고향 부근에 선산을 마련한 다음 이곳저곳에 흩어져 모셔진 선조님들의 산소를 한 장소에 봉안하여 가족 묘원을 만들어 놓고, 해마다 명절에는 가족들과 함께 참배하면서, 앞으로도 계속 묘원을 돌보고 운영하도록 규범을 만들어 놓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서로의 교직생활을 돌아보면서 이런 대화를 나눈 적도 있습니다. ‘송헌은 됫글 배워 말글로 풀어먹었다’에 비유할 수 있고, 그 이유는 그는 사범학교만 졸업한 고졸이면서 검정고시로 중등교원 자격증을 획득하여 중·고등학교에서 근무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면에 ‘나는 말글 배워 됫글로 풀어먹었다.’고, 즉 대학과 대학원에서 7년을 더 배워 경제학 학사와 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면서도 계속 중학교에만 근무하였으니, 그런 말로 서로 처지를 비교해 보면서 한바탕 웃어넘긴 적도 있었습니다.
송헌의 삶은 굴곡이 많았습니다. 사범학교 재학시절 신문배달을 잠간한 적도 있었고, 학교가 쉬는 방학 때에는 가정에서 긴요하게 사용하는 가정용 필수품들 즉 빨래비누나 세수 비누, 바늘, 가정 상비약품 등을 구비하여, 손에 들고 또 등에 지고 섬지역과 농촌으로 가지고 다니면서 현금이나 농산물과 교환하여 그 차익을 학비에 보태기도 하였다는 고백도 들었습니다.
또, 어렸을 때 꿩이 많은 고향, 나주 공산면에서 살 때, 누군가 골짜기에 꿩 잡는 약을 놓았는지, 지게를 지고 산에 갔다가 죽은 꿩이 땅바닥에 널린 것을 한 발대 가득 주워 담아 짊어지고 집에 돌아와 식구대로 꿩고기를 포식한 적도 있었다면서, 그 기억 때문에 장년시절 백운동 주택에서 살 때에 옥상에 병아리나 꿩을 사육하는 사업을 하여 가계에 보탠 적도 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근래에는 아파트 부근에 있는 공터에 고추를 심어 수확한 다음 그것을 건조시키기 위해 고추를 하나하나 바늘실로 꿰어 베란다에 널어서 건조시키는 정말 기발한 착상으로 가정을 운영한 정말 가정적이고 세심한 사람이기도 하였습니다.
송헌! 오여사를 두고 가는 심정이 어떠한가! 혼자 남은 오여사가 안쓰럽고 가여운 생각이 들겠지만 걱정을 내려놓게나! 남은 가족들이 오여사를 외롭지 않게 할 것일세!
아들 남현의 병원은 이제 확실히 기반을 잡았고, 특히나 현명한 큰 며느리 장자영씨가 남편 병원을 잘 보좌하여 날로 번창하고 있으며, 손자 진우는 서울대 정외과를 휴학하고 군복무 중이라 들었고, 손녀 승희는 과학고를 조기 졸업하고 포항공대 1학년에 입하였다 들었네. 작은 아들 남기부부와 따님 선정씨 부부도 모두 자기의 업종에서 확실한 지위를 확보하고 있으니 무슨 걱정인가? 다른 손자들과 손녀들도 모두 건강하고 공부 잘하니 아무 걱정할 것 없지 않는가? 자네는 그저 자네가 있는 곳에서 가족들이 더 잘 되라고 돌보아 주기만하면 만사형통으로 행복한 가정이 유지될 걸세!
이제 자네와 나는 이승에서의 인연이 끝나는가 보네. 자네 없는 이승에 자네 가족들이 남아 있으니, 풍문으로라도 자네 가족들의 소식을 듣게 된다면 자네를 만난 것처럼 기뻐할 것이고, 어두운 소식을 듣게 되면 안타까운 마음으로 내 가슴 태우면서 좋은 일만 생기도록 기도할 걸세! 제일 걱정스러워 눈감기 어려웠던 사람 오여사! 이 또한 자네를 남편으로 둔 어쩔 수 없는 숙명이니, 누구를 탓하겠는가!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 수밖에. 자네의 마음 더 어떻게 달래줄까? 자네가 이승에 없다는 내가 느낄 상실감! 그것도 내 스스로 극복해야 할 숙제이네.
아! 슬프고 애간장이 끊어지는 것 같네. 이제 헤어질 시간, 자네의 명복을 간절히 빌면서 나의 슬픈 마음 가슴 한켠에 접어두어야겠네. 잘 가시게! 잘 가시게!!
2023년 7월 29일 아침. 편견 없이 두루뭉술하게 사귀었던 벗. 아석 양수랑 애도의 글을 마치네.
첫댓글 장문의 추도사를 읽으면서 두 사람간에 나눈 우정을 깊이 살피면서 15야 동창생들의 우정에도 빈틈이 없는가를 살펴보는 귀중한 시간이었네 추도사이면서도 옆에 살아있듯이 다정하게 나눈 것은 망자에 대한 새로운 형식의 편지글이었네 ! 옆에서볼때도 훈풍이 부는것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가족간의 얘기도 빠짐없이 얘기를 하는것은 양수랑회장의 글솜씨가 아니면 누구라도 흉내 낼 수 없는 명문의 글이네 참석하지 않고 마음속으로라도 애도하지만 친구에게 보내는 글로 나도 친구에게 대신해도 아무 손색이 없겠네 최문수 영전에 다시한번 촛불을 켜고싶네 ! 아 여원히 우리곁을 떠난 친구지만 우리들도 언젠가 떠날몸이니 그리 서운하지도 않을걸! 영원히 잠들게나! 친구여! 아무리불러도 대답없는 친구여 ! 선채로 이자리에 돌이되어도 내가 부를 이름이여! 최 문 수
이 글은 유족으로부터 받은 감사의 뜻이 담긴 글을 다음에 올립니다.
삼가 아뢰 옵니다.
지난 07월 27일 저희 아버지(고 최문수) 장례식을 도와주시고,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보내주셔서 마음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발인제에서 저의 아버지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들을 나눠주시고, 가족과 아픔을 함께 해주셔서 아버지께서 저희 가슴 속에 더욱 빛나는 별이 되셨습니다.
베풀어 주신 은혜를 생각하면 직접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 하는 것이 도리이오나, 아직 경황이 없어 서면으로 대신함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기 바라며 다음에 댁 내에 경조사가 있어 연락주시면 필히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08월1일
최선정 최남현 최남기 올림
목요산우회원 고 최문수 친구 떠나 보내며 아석 회장 고인에 대한 헌사를 쓰느라 얼마나 애썼는지 보지 않아도 잘 알겠네 사모님을 비롯해 자녀들도 이 글을 통해 모두 큰 위로와 함께 선친에 대한 그리움과 정을 오래 간직할 수 있는 좋은 큰 선물을 안겨 드린 것 같아 추도사를 쓸 생각 하게 된 것만도 참 좋은 아이디어었고 고인에 대한 참 좋은 마지막 선물을 안겨 드린 것 같아. 우리 모두 언젠가는 가야 할 길인데 내 장례식땐 그 누가 아석처럼 마음 써 . 줄까 상상해 보는 이 조용한 아침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