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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집니다. 요즘 부가세 신고 기간이라 이래저래 업데이트가 지연되었네요..
지난번에 올렸던 하긴스 보트 마저 올립니다.
11. 차량/병력상륙정(LCVP)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이루어진 소형 상륙주정의 가장 중요한 발전은 병력용 주정과 차량용 주정이 차량/병력상륙정(LCVP = Landing Craft, Vehicle, Personnel)으로 통합된 것이었다.
(차량/병력상륙정)
대형병력상륙정(LCP(L) = Landing Craft, Vehicle, Large)이나 램프병력상륙정(LCP(R) = Landing Craft, Personnel, Ramped)과 비교하면 차량/병력상륙정은 훨씬 뭉툭한 선수를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같은 엔진을 가지고도 속력이 1/3 정도 느렸다.
직계 조상인 차량상륙정(LCV = Landing Craft, Vehicle) 과 비교하면 현측에 680kg 무게의 6.4mm 짜리 철판을 둘렀고, 매달리는 장치도 훨씬 강력해졌다.
조종석은 함체 내부로 내려왔고 7.62mm 기관총좌 2개도 역시 함체 내부로 내려와서 3중 웰린 대빗에 3척을 동시에 매달 수 있게 되었다.
(차량/병력상륙정과 차량상륙정의 조종석. 왼쪽이 차량/병력상륙정 )
적재 갑판의 길이는 차량상륙정보다 약간 짧아졌고 대신 조금 넓어졌다.
무게는 방탄용 철판과 늘어난 연료탑재량, 그리고 강력해진 현수 장치 매문에 차량상륙정의 7톤에서 9톤으로 2톤 늘어났으며 그 결과 흘수선에서 상갑판 상부까지의 높이인 건현(freeboard)이 약간 줄어들었으나 감수할 만 했다.
(건현=Freeboard)
대형병력상륙정이나 램프병력상륙정처럼 차량/병력상륙정도 대빗을 이용할 경우 병력을 태운 채로 해상에 내릴 수 있었으나, 기중기를 사용할 경우 빈 배로 내려야만 했다.
차량/병력상륙정은 1942년 10월 5일에 최초로 시험운항을 실시했으며, 곧 차량상륙정이나 램프병력상륙정을 대부분 대체했다.
1942년에 215척이 생산된 차량/병력상륙정은 43년에 8,027척, 44년에 9,290척, 그리고 1945년 8월 15일까지 5,865척이 생산되어 전쟁 기간 동안 총 23,397척이라는 엄청난 생산량을 기록했는데 이는 대형병력상륙정(2,250척)이나 램프병력상륙정(2,635척)의 약 10배에 달하는 숫자이다.
차량병력상륙정은 미육군도 사용했으며 렌드리스 법안에 따라 영국에 321척, 그리고 소련에도 1944년에 2척이 공급되었다.
압도적인 생산량에서 알 수 있듯이 차량/병력상륙정은 1942년 11월에 실시된 북아프리카 침공 이래 미군의 대규모 상륙작전을 가능하게 만든 1등 공신이었다.
상륙작전시 보통 8척의 차량/병력상륙정이 4척씩 2개 제파로 나뉘어 1개 중대를 상륙시켰으며 후속하는 차량/병력상륙정들이 차량과 보급품을 상륙시켰다.
미해병대가 1943년 11월의 타라와 전투부터 최초로 상륙하는 제파는 상륙장갑차(LVT = Landing Vehicle, Tracked)로 상륙하는 전술을 채택함으로써 이후 태평양의 상륙작전에서는 차량/병력상륙정들이 후속 제파와 보급품들을 수송하는 2차적인 임무를 맡았지만 유럽에서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보듯이 차량/병력상륙정들이 상륙작전의 선봉에 섰다.
제16보병연대의 오마하 해안 상륙장면을 촬영한 로버트 카파의 유명한 사진도 차량/병력상륙정에서 찍은 것이다.
(오마하 해안 상륙장면을 찍은 로버트 카파의 사진)
대량으로 생산되었던 차량/병력상륙정의 일부는 얕은 바다에서 사용하는 소해정으로 개조되기도 했다.
차량/병력상륙정들과 다른 소형 상륙주정들의 제원은 아래와 같다.
(소형상륙주정들. 출처 : U.S. Amphibious Ships and Crafts, P.80)
LCP(N) (= Landing Craft, Personnel, Nested)은 당시의 상륙주정으로는 특이하게 플라스틱으로 만들었다.
무게가 750kg 정도로 아주 가벼운 데다가 외부 엔진을 사용하고 복잡한 내부 구조물이 없어서 차곡차곡 겹쳐 실으면 작은 공간에도 많이 실을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사소한 개량이라도 하려면 따로 금형을 만들어야 하므로 새로 개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높은 생산비가 들어가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고, 탑승하는 병력들은 너무 꽉 끼어 타야 했으며, 기관총을 설치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외부 장착형 엔진은 아무래도 힘이 너무 약하고 신뢰성이 떨어졌으며, 선체도 그리 튼튼하지 못하여 결국 채택되지 않았다.
(캘리포니아 해안에서 테스트를 받고 있는 LCPN)
미군의 소형 상륙주정 중에는 무동력의 고무보트도 있었다.
7인승의 고무보트는 RB(Rubber Boat)-7, 10인승은 RB-10으로 불리다가 1942년 7월에 RB-7 은 LCR(S)(Landing Craft, Rubber, Small), RB-10 은 LCR(L)(Landing Craft, Rubber, Large)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고무보트들은 주로 습격대대, 정찰대, 그리고 수중파괴반(UDT = Underwater Demolition Team)이 사용했다.
(LCRS)
12. 기계화상륙정 (LCM)
1930년대 초반부터 해병대는 병력과 동시에 전차를 상륙시키기를 원했는데 당시까지 사용되던 무동력 야포수송정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해병대는 1935년 12월에 5.4톤을 싣고 13노트로 상륙할 수 있는 전차상륙용 주정을 요구했다.
건조수리국은 13톤인 신형 155mm 곡사포도 실을 수 있는 큰 상륙주정을 제안했으나 해병대는 야포는 무동력 수송정으로 상륙시키기로 하고 자신들의 마몬-해링턴 전차에 특화된 작은 주정을 고집했다.
해병대의 고집과 전차의 중량 증가라는 장래의 전망 사이에서 고심하던 건조수리국은 1938년에 길이 38피트(약 11.6m), 무게 20톤에 9톤의 적재량을 가진 상륙주정을 개발했다.
이 상륙주정은 개발연도를 따서 1938년형 상륙주정이라고 불렸다.
(1938년형 상륙주정. 상륙 중인 전차는 마몬-해링턴 전차이다.)
다음해에 건조수리국은 비슷한 성능을 가지면서도 무게가 11.4톤으로 대폭 줄어든 1939년형 상륙주정을 선보였다.
전차용 상륙주정들의 제원은 아래와 같다.
(전차용 상륙주정들. 출처 : U.S. Amphibious Ships and Crafts, P.92-93)
해병대는 시대의 흐름을 너무 몰랐고, 건조수리국은 나름대로 미래를 대비하려 했으나 부족했다.
장비의 표준화라는 대전제 앞에서 해병대가 따로 전차를 개발하는 비효율은 용납되지 않았고, 1941년 4월에 해병대는 육해군 합동 위원회에 육군이 개발한 전차를 사용하겠다고 보고할 수 밖에 없었다.
육군의 전차는 훨씬 무거웠다.
1930년대 후반에 이미 11.5톤을 넘어선 육군의 경전차는 M3 스튜어트 경전차에 이르러 16톤이 되었으며, M3 중형전차는 25톤, 그리고 결국 주력이 될 M4 셔먼 중형전차는 30톤에 달했다.
다급해진 건조수리국은 1940년 초에 11.8톤의 적재량을 가진 주정을 개발했는데 무게가 23.6톤이나 나갔다.
이 주정은 LCM(2)(= Landing Craft, Mechanized)라는 이름을 얻었다.
LCM(1)은 비슷한 능력을 가진 18톤짜리 영국제 상륙주정에 붙여졌다.
LCM(2)는 사실상 실패작으로서 총 280척 정도가 생산되는데 그쳤다.
(LCM(2). 1942년 11월에 과달카날에서 찍은 사진이다.)
LCM(2)가 적재량에 비하여 지나치게 무겁다고 생각한 상륙주정위원회는 건조수리국과 별도로 히긴스에게 전차용 상륙주정의 개발을 의뢰했다.
히긴스의 45피트짜리 상륙주정은 LCM(2)와 거의 비슷한 능력을 가지면서도 무게가 18.8톤으로 가벼웠으며 약 300척 가량이 생산되었다.
이후 건조수리국과 히긴스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다시 47피트(건조수리국) 및 48피트(히긴스)짜리 상륙주정을 만들었으나 전차 중량의 증가를 따라잡지 못했다.
1941년 10월에 상륙주정 위원회는 30톤짜리 M4 셔먼 전차를 실을 수 있는 상륙주정을 요구했다.
이에 히긴스와 건조수리국의 후신인 함선국은 새로이 50피트 길이의 상륙주정들을 개발했고, 드디어 정면으로 격돌했다.
함선국은 전차갑판의 높이가 해면보다 높은 이중바닥 형식을 선호했다.
이러한 방식은 엔진을 전차갑판 밑으로 넣을 수 있었고 폭도 더 넓었기 때문에 전체적인 길이는 거의 같아도 전차갑판의 면적이 훨씬 넓었다.
실제로 함선국 상륙주정의 전차갑판 면적은 약 46㎡ 로 약 27㎡ 인 히긴스 상륙주정보다 1.7배 정도나 넓었고, 램프의 폭도 약 3m 로 약 2.6m 인 히긴스 상륙주정보다 훨씬 여유가 있었다.
반면에 전차갑판의 높이가 해면보다 낮은 히긴스 상륙주정은 훨씬 가벼웠고 구조가 단순하여 대량생산이 용이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잇점은 무게중심이 낮아서 안정성이 훨씬 뛰어나다는 점이었다.
전차용 상륙주정의 개발에는 영국해군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영국해군성은 히긴스의 설계가 더 우수하다고 결론짓고, 1941년 11월 20일에 히긴스에게 150척을 주문했는데 12월이 되어 미국이 전쟁에 뛰어들자 100척을 추가로 주문했다.
반면 함선국은 1942년 초에 시간이 촉박하다는 이유로 별도의 시험 평가 절차를 생략하고 자신들의 디자인을 그대로 표준으로 만들려고 시도했다.
당연히 히긴스는 격렬하게 반발했고, 이번에는 해병대보다도 영국해군이 더 적극적으로 히긴스의 편을 들어 함선국과 요란하게 논쟁을 벌였다.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가장 중요한 동맹국인 영국과 큰 파열음이 나자 트루먼 위원회가 개입하여 함선국에 공개적인 성능 비교 평가 시험을 실시한 후 그 결과에 따라 전차용 상륙주정을 채택하도록 권고했다.
돈줄을 쥐고 있는 미의회 내에서도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가진 트루먼 위원회의 권고를 무시할 수 있는 기관은 없었다.
성능 비교 시험은 1942년 5월 25일에 실시되었다.
M3 중형전차를 실은 히긴스와 함선국의 상륙주정이 각각 1척씩 노퍽 항을 떠나 주변에 있는 포트 헨리의 해안에 전차를 내려놓아야 했다.
히긴스의 상륙주정은 약 1m 높이의 파도를 뚫고 무사히 전차를 양륙시켰다.
함선국의 상륙주정은 실패했다.
장점으로 내세우던 넓은 전차갑판이 오히려 높은 무게중심과 더불어 약점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승무원들은 넓은 전차 갑판 위에서 무게 중심을 정확하게 맞추어 전차를 싣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전차는 약간 중심선을 벗어나 앞쪽으로 쏠려 적재되었다.
상륙주정이 항구를 떠나자마자 앞쪽으로 기울어진 뱃전을 넘어 바닷물이 쉴 새 없이 들어와 기관실 바닥에 30cm 높이로 물이 들어찼다.
결국 정장은 양륙을 포기하고 노퍽 항으로 되돌아왔다.
돌아오는 도중 상륙주정은 앞쪽 뱃전을 넘어 바닷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속력을 2노트로 늦추어야 했으며 하마터면 전복될 뻔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함선국의 완전한 패배였다.
함선국 상륙주정의 개발책임자였던 에드워드 코크레인 대령은 함선국 상륙주정보다 히긴스 상륙주정이 더 우수하며 따라서 히긴스 상륙주정이 표준으로 채택되어야 한다는 취지의 보고서를 제출해야만 했다.
코크레인 대령은 보고서에서 자신이 만든 함선국 상륙주정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합당한 개선책을 제시했지만 이미 늦었다.
미국은 시간이 없었고, 충분히 쓸만한 히긴스의 상륙주정이 있는데 굳이 함선국 상륙주정의 개선에 시간을 허비할 이유가 없었다.
히긴스의 50피트-상륙주정은 1942년 7월에 LCM(3) 로 명명되었다.
LCM(3) 는 1942년 11월의 북아프리카 상륙작전을 시작으로 미군이 실시한 거의 모든 상륙작전에 참가했다.
미해군은 대량 생산을 위하여 일단 히긴스가 양산을 위한 설계도를 제출하자 LCM(3)의 설계를 고정했다.
그리하여 LCM(3)는 종전시까지 사소한 개량도 없이 히긴스의 설계 그대로 대량 생산되어 사용되었는데, 이 사실은 히긴스의 설계가 얼마나 뛰어났던가를 증명한다.
1943년 들어서서 육군은 무게가 더욱 늘어난 개량형 셔먼전차를 위하여 LCM(3)보다 더 큰 상륙주정을 원하게 되었다.
히긴스는 새로운 상륙주정을 설계했으나 적당한 엔진을 찾기가 어려웠다.
결국 LCM(3) 의 길이를 약 1.8m 정도 연장한 개량형이 채택되어 LCM(6) 로 명명되었다.
노먼 프리드먼의 U.S. Amphibious Ships and Crafts 에 의하면 LCM(6)는 더블 LCM(3) 또는 슈퍼 LCM(3)의 뜻으로 6번째 LCM 이라는 뜻이 아니라고 한다.
실제로 인터넷에 공개된 미해군의 공식전사에도 LCM(2), LCM(3), LCM(6)만 나와있다.
(LCM(3)와 LCM(6), 윗쪽이 LCM(3)이다.)
LCM(6)는 원래 육군의 요청에 의하여 만든 것인데 LCM(3)보다 철판이 많이 들어갔으므로 1943년 10월에 해군은 LCM(6) 의 생산을 기존의 매달 150척에서 매달 135척으로 줄이겠다고 육군에 통보했다.
그러자 육군이 12월에 모자라는 만큼의 강철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하면서 매달 150척의 생산량을 유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1944년 후반기가 되자 실제로 LCM(6) 의 생산량은 매달 175척까지 올라갔다.
1945년이 되자 해병대도 무거운 신형 셔먼전차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따라서 만드는 족족 맥아더 장군의 남서태평양지역군에 공급되던 LCM(6)를 미해군의 공격수송함 및 공격화물수송함들도 장비하기 시작했다.
기계화 상륙정은 원래 전차를 상륙시키기 위하여 만들어졌으나 실제로는 대부분 후속 제파의 병력을 상륙시키거나 보급품 양륙에 쓰였다.
LCM(3)는 한번에 60명의 병력을 상륙시킬 수 있었는데 대빗에 실을 수 없었으므로 기중기로 내려야만 했고, 내부에 병력이나 보급품을 실은 채로 해상에 내릴 수는 없었다.
LCM(6)는 80명의 병력을 상륙시킬 수 있었다.
1945년에 들어서면 상륙작전시 전차는 주로 상륙선거함(LSD = Landing Shup, Dock)에 실려온 전차상륙정(LCT = Landing Craft, Tank)이나 전차상륙정에게 장거리 항해능력을 부여한 중형상륙함(LSM = Landing Ship, Medium)에 실려 상륙했다.
일부 전차는 자항 장치를 부착하고 스스로 헤엄쳐 상륙하기도 했다.
기계화 상륙정은 전쟁 중에 대량생산되어 광범위하게 이용되었다.
LCM(3)는 1942년에 1,255척, 43년에 3,967척, 44년에 3,360척, 45년에 71척 합계 8,653 척이 생산되었다.
LCM(6)는 1943년에 52척, 44년에 1,850척, 45년에 828척, 합계 2,730척이 생산되었다.
이리하여 전쟁 중에 생산된 LCM(3)와 LCM(6)의 척수는 합쳐서 11,383척이다.
렌드리스에 의하여 영국에 671 척의 LCM(2) 및 LCM(3)가 제공되었고, 소련에 56척의 LCM(3), 그리고 터키에 3척의 LCM(3)가 1943년에 공여되었다.
원본 : 대사의 태평양전쟁 이야기 http://blog.naver.com/imkcs0425/60167286420
이글은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란 싸이트에 대사란 분이 이를 아주 잘 정리해서 잠시 빌려왔습니다. ( 이 글은 무려 26편까지 되는 방대한 내용이라 앞과 뒷부분은 생략했으며 일부사전은 추가했습니다.
pt4 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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