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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아버지학교☆]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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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학교]
이정록 시집 / 도서출판 열림원(2014.09.24∙초판 2쇄) / 값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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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은 식어야 넓어지는 겨
사내가슴
- 아버지학교 1
이정록
아들아, 저 백만 평 예당저수지 얼음판 좀 봐라. 참 판판하지? 근데 말이다. 저 용갈이* 얼음장을 쩍 갈라서 뒤집어보면, 술지게미에 취한 황소가 삐뚤빼뚤 갈아엎은 비탈밭처럼 우둘투둘하니 곡절이 많다. 그게 사내 가슴이란 거다. 울뚝불뚝한 게 나쁜 것이 아녀, 물고기 입장에서 보면, 그 틈새로 시원한 공기가 출렁대니까 숨 쉬기 수월하고 물결가락 좋고, 겨우내 얼마나 든든하겄냐? 아비가 부르르 성질부리는 거, 그게 다 엄니나 니들 숨 쉬라고 그러는 겨. 장작불도 불길 한번 솟구칠 때마다 몸이 터지지, 쩌렁쩌렁 소리 한번 질러봐라, 너도 백만 평 사내 아니냐?
* 용갈이 : 용이 밭을 간 것과 같다는 뜻으로 두꺼운 얼음판이 갈라져 생긴 금.
생의 알밤
- 아버지학교 5
이정록
밤송이를 털면 땅바닥이 가시밭이 되지. 알밤은 가시밭에서 줍는 거여. 그것도 모르고 고개 쳐들고 눈물 짜는 사이, 누군가가 알밤 다 주워 가지. 남은 밤 몇톨 주우려고 이 악물어봤자 벌레 즙만 내뱉게 되지. 세상 더럽다고 욕지거리하다가 시든 밤꽃처럼 끝장 보는 거여. 알밤은 고개 푹 숙이고 가시밭에서 얻는 거여.
왜가리
- 아버지학교 7
이정록
저수지 비탈 둑에서 뛰어다니던 왜가리 때문에 엄청 웃은 적 있지? 메뚜기 잡아다 새끼 주랴 제 헛헛한 허구리 채우랴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술 취한 막춤을 보며 박장대소했지. 부리나케 일어나서는, 밀친 놈 없나? 비웃는 놈 없나? 두리번거리던 꼬락서니에, ‘술 좀 줄여요. 왜가리 꼴로 훅 가는 수가 있어요.’ 내게 쏠리던 눈초리가 떠오르는구나.
왜가리도 가을 지나 겨울 오면 차가운 물에 발 담그고 물고기를 기다리지. 사내란 저런 구석이 있어야 해. 시린 발에 온 정신을 집중시키고 지느러미가 전해주는 미세한 떨림을 읽는 거지. 눈은 시린 구름 너머에 던져놓고 의젓한 품새로 뒷짐 지고 말이여. 물고기가 가까이 다가오면 단 한 번 고개 숙이고는 다시 먼 하늘이나 바라보지. 물속 하늘은 가짜라서 진짜 하늘을 보며 살아야 한다는 거 아니겄어?
사내란 탁한 세상에서 탁발을 하고는 구름 너머 시린 하늘로 마음을 씻지. 식구들 뱃속 채워주는 일이라면 시궁창에 발 담가도 되는 거여. 사내는 자고로 연지蓮池 수렁에 서 있는 왜가리 흰 연꽃이여.
금강하구
- 아버지학교 8
이정록
살다가, 정말이지 몸이 내 몸 같지 않을 땐 금강하구에 가거라. 요 모양으로 싱겁게 살았구나, 갯물 들이켜는 강을 보아라, 이리 짜게만 출렁댔구나, 맹물 들이켜는 바다 보아라.
그래도, 내 맘이 내 맘 같지 않을 땐 금강 하구에 가서 절 올려라.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다고, 고개 숙여 들끓는 속마음 들여다보아라. 백팔배, 귀 기울여 애끓는 곡절 들어보아라.
살다가, 정말이지 오갈 데 없는 마음일 땐 눈물 콧물 질질 짜는 강물 보아라. 겨릅대 같은 다리만 스쳐도, 바위너설 조개껍데기만 만나도 칭얼대는 감강 하구 바다 보아라.
★똥구덩이에 빠져도 기죽지 마라
새
- 아버지학교 9
이정록
숫눈이 내렸구나.
마당 좀 봐라.
아직 녹지 않은 흰 줄 보이지?
빨랫줄 그늘 자리다. 저 빨랫줄도 그늘이 있는 거다.
바지랑대 그림자도 자두나무처럼 자랐구나.
아기 주먹만 한 흰 새 다섯 마리는, 빨래집게 그림자구나.
햇살 받으면 새도 날아가겠지. 젖은 자리도 흔적 없겠지.
저 흰 그늘, 혼자만 녹지 못하고 잠시 멈칫거리는 시린 것,
가슴의 성에로 쌓이는 저 아린 것, 조런 실타래가 엉켜서
마음이 되는 거다. 빨래집게처럼 움켜잡으려던 이름도
미음처럼 묽어짐을, 고삭부리* 되고서야 깨닫는구나.
그리움도 설움도 다 녹는 거구나. 저리고 아린 가슴팍이
눈송이로 뭉친 새의 둥우리였구나.
깃털 하나 남지 않은 마당 좀 보아라.
약봉지 같은 햇살 좀 봐라.
* 고삭부리 : 몸이 약해서 늘 병치레하는 사람.
호박
- 아버지학교 12
이정록
식솔을 위해서라면
호박씨처럼 똥구덩이에 몸 담그는,
나는야 커다란 황금빛 호박꽃이다.
새끼들 으스대라고 모양만은 왕별 호박꽃,
독침도 없이 붕붕 소리만 요란한 호박벌이다.
어느새 너희 머리통은 야자수 열매처럼 단단해져
늙은 호박처럼 텅 빈 아버지를 수군거린다만
끝내는 호박고지, 황금빛 목걸이라도 건네고 싶었다.
한겨울 살구나무는 붉은 우듬지를 올려다본다.
넌출거리는 마른 호박덩굴 쳐다본다.
아버지는 호박처럼 묵직한 걸 건네고 싶었다.
여린 잎에 호박순까지 끊어 바치는 게 좋았다.
허공을 짚고 오르는 덩굴손을 보여주고 싶었다.
똥구덩이에 빠져도 기죽지 마라.
겨우내 사랑방 윗목을 지키는
누런 호박의 가부좌를 보아라.
연탄
- 아버지학교 13
이정록
아비란 연탄 같은 거지.
숨구멍이 불구멍이지.
달동네든 지하 단칸방이든
그 집, 가장 낮고 어둔 곳에서
한숨을 불길로 뿜어 올리지.
헉헉대던 불구멍 탓에
아비는 쉬이 부서지지.
갈 때 되면 그제야
낮달처럼 창백해지지.
외출
- 아버지학교 17
이정록
아들이 커서 아버지의 구두를 신고
아버지의 옷을 걸치고 외출하기 시작하면
아들 방에 들어가 아들의 이불을 덮고
아들의 베개를 베고 한숨 푹 자거라.
아들은 이제 한 걸음씩 멀어질 게다.
멀어지는 모든 것은 다 가까웠던 것이지.
네가 나에게서 울뚝불뚝 멀어졌듯이.
운동장 가운데에다가 공을 놔둬봐라.
가만 있으려 해도 바람 따라 굴러가지.
잘 굴러간다고 좋은 게 아니란다.
잘 굴리고 가는 게 중요한 거지.
★큰 걸음으로 건너가라
담
- 아버지학교 22
이정록
담을 쌓지 마라.
누군가는 그 담장 위에 피 묻은 병조각을 꼽는다.
담을 부수려면, 담장 높이만큼 마음 쌓아올리는 수밖에.
덩굴장미나 담쟁이를 올려도 좋겠지만
비바람 몰아치면 다시 차가운 눈초리로 맞닥뜨리겠지.
맨발로 유리조각을 밟는 눈보라처럼
생을 넘지 마라.
새가슴
- 아버지학교 24
이정록
새가슴이라는
몹쓸 말이 있더라만
새의 앙가슴 솜털 봐라.
둥우리 속 새끼들
어서 세상 구경시켜주려는
따스한 솜털 새가슴 보아라.
둥우리 속 어미 날개처럼
무겁지 않게,
낮게, 사랑해라.
죽지를 움켜잡는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린 새의 부리를 틀어막는 거라.
모든 새들의
아름다운 지저귐은
다 새가슴이 키운 거라.
사랑
- 아버지학교 27
이정록
운동장 한가운데다가 물동이를 엎으면
철봉대 옆 볼품없는 나무 쪽으로 물길이 나는 거여
폭우 때 진즉 바닥이 쓸려나갔던 거지.
생선장수도 한 마리만 사는 사람한테는
값도 헐하게 받고 큰놈으로 챙겨주는 거여.
서너 마리 흥정하는 이한테는 잔챙이도 섞어 팔어.
오죽 복잡한 속사정이면 이십 리 자갈길에
고등어 한 마리만 들고 가겄냐? 그렇다고
이 가게 저 가게 다니며 한 마리씩 사는 놈은
마음주머니까지 가난한 좀팽이인 거지.
가난하다는 건 비탈이 심하다는 거다.
마음 씀씀이 좋은 생선장수든
마른 땅 적시는 물길이든, 뿌리가 드러난 쪽으로
정이 쏠리는 게 순리고 이치여.
아버지의 일기
- 아버지학교 30
이정록
귓바퀴 커지는 한겨울 새벽이다.
어제는 냇가 너설에 가서 바위 두 개를 들어냈다.
보 아래로 떨어지는 물소리가 우렁우렁 아름답다.
젖은 바지에 고드름이 매달려 서걱거린다.
그제는 커다란 워낭을 어미 소에게 달아주었다.
저도 듣기 좋은지 목을 자꾸만 흔들었다.
달포 전 혼자 사시던 기와집할머니가 돌아가시어
오늘은 추녀 밑에 쌓여 있던 오 년 묵은 장작을 옮겨왔다.
타닥타닥, 방고래가 제 뼈마디로 장단을 먹였다.
새벽 시냇물 소리, 워낭 소리, 장작 타는 소리
이것이 호강에 겨운 내 귀의 겨울나기이다.
귓속 우물에 살얼음 잡히는 한겨울 새벽이다.
★아버지의 마음 한쪽을 상속받았습니다
면도기
- 아버지학교 32
이정록
고등학교에 입학하자 수염이 검어졌습니다. 양날면도기가 차갑게 턱 선을 내리긋고 지나갔습니다. 살이 뜯겨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두 번째부터는 손쉬웠습니다. 한 면은 거칠었고 한 면은 잘 들었기 때문입니다. 날 선 쪽으로 삭삭, 두어 번 베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도루코 면도날을 반쪽만 잘라 엇갈아 끼우셨습니다. 아버지는 무딘 쪽만 쓰셨습니다. 면도기를 함께 쓰다니, 다 컸구나. 기념으로 소주도 몇 잔 받았습니다. 잘 드는 쪽이 네 거다. 아버지의 마음 한쪽을 상속받았습니다.
팔자걸음
- 아버지학교 34
이정록
아버지가 팔자걸음인 것은
새벽 풀숲 이슬받이로 앞서가라는 뜻
아버지가 팔자걸음인 것은
어둠 속 가시덤불 헤치며 나아가라는 뜻
뒤따라오는 식솔들 바지춤 젖지 않게.
헐벗은 새끼들 알종아리 긁히지 않게.
두루미
- 아버지학교 37
이정록
식은땀에 등골은 깊어졌습니다.
새벽이면 등골 계곡에서 오싹하니 찬바람 몰아쳤습니다.
베갯잇에서 서른 상을 넘긴 두루미 한 쌍,
앙상한 다리에 보풀보풀 깃털이 돋아났습니다.
날이 차니 어서 새털구름에 들자고 금실 좋게 속삭입니다.
아버지는 추울 때 떠나실 듯합니다.
아버님전 상서
- 아버지학교 42
이정록
한겨울 자리끼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차가운 윗목에서 휘둥그레 눈뜨고 있다가
어둠속 목마름을 적셔줬으면 좋겠습니다.
참을 만한 일이었지건만
밴댕이 소갈딱지에 소주 들이켜고 온 밤
뒤척이다가 자리끼를 엎기도 했죠.
이불이며 옷자락까지 흥건하게 젖어버렸죠.
하지만 언제나 당신은
영혼을 깨워주는 살얼음 잡힌 자리끼였으면 좋겠습니다,
새벽이면 당신은 군불 지피고
구정물에 메주콩도 듬뿍 넣어 쇠죽을 끓였죠.
아궁이 앞에서 지게 멍 자국 어루만지며
전장에서 얻은 흉터를 긁는 것도 보았죠.
이제 자리끼 속 살얼음 될래요.
살얼음에 비친 땀에 전 당신의 잠자가 될래요.
쇠죽가마 속 보릿겨가 될래요. 여물냄새가 될래요.
추억과 상처를 어루만지는 주름진 손이 될래요.
눈물 훔치는 옷소매가 될래요.
당신의 눈망울 붉은 노을이 될래요.
아주 오래도록, 당신의 서쪽이 될래요.
유언
이정록
삶은 조개 속에
속살이게* 한 마리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나누었을까?
조개 입,
다물지도 못하더라.
숨 놓기 전에
어떤 약속 건넸을까?
어린 게.,
발갛게 달아올랐더라.
*속살이게 : 속살이과에 속한 매우 작은 게. 주로가리비, 새조개 따위의 조가비 속에 숨어산다. 굴속살이게, 대합속살이게, 섭속살이게 등이 있다.
★지붕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면
얼음으로 살아야 한다
영정사진
- 아버지학교 45
이정록
보온밥통 속 누룽지 한 덩이
한때는 불꽃과 가까웠던 어금니의 생이었으나
치이고 치이다가 다시 바닥으로 갈앉는 마지막 끼니
마른 멍게껍질인가 그을린 밤송인가
좀 더 검어진 설움으로 깊은 밤 찬물 속으로 뛰어드는
뒤퉁수뿐인 얼굴, 맹물도 아니고 숭늉도 아닌
솥 부신 물에서 우물우물 건지는 물렁니 반 사발
탄 감자처럼 엎디어 절을 올립니다
송장칡뿌리
- 아버지학교 50
이정록
사나이는 굵고 짧게 살아야 한다고
아버지가 술상머리를 쳤습니다.
맥주잔 속 소주가 잔 숨을 게워 올렸습니다.
굵고 짧아 좋은 건 칡뿌리밖에 없다고
골방에 처박혀 고구마 자루를 주먹으로 쳤습니다.
아버지 산소마당 칡넝쿨을 걷어냅니다.
칡에선 언제나 염장이 냄새가 납니다.
칡넝쿨처럼 질기게 살라는 말씀,
그 푸른 밑줄에 소주병을 굅니다.
털신
- 아버지학교 52
이정록
군청 앞 백화식당에서 글 쓰는 벗들과
삼겹살에 소주 한잔하고 있는데, 흘깃흘깃
나를 훔쳐보던 도우미 아주머니가 제 옆에 앉았습니다.
미남을 알아본다고 친구들이 농을 쳤습니다. 저를 아세요?
여쭙는 순간, 십여 년 전의 안개천지라는 식당이 떠오르고
사십여년 전의 뾰족구두가 떠올랐습니다.
이 자字, 경 자, 연 자 쓰는 분을 아세요?
네, 아버님이십니다. 정말 닮았다 했어요. 근데, 요즈음 뵐 수가 없어서요.
작년 봄에 돌아가셨어요. 순간, 낯빛을 파르르 떨며 무릎을 꿇고는
제게 술잔을 건네는 거예요. 한 손으로 편하게 받아요.
이 잔은 아버님께 올리는 겁니다. 저도 무릎 꿇고 잔을 건넸지요.
한 손으로 따르란 걸 두 손으로 올렸지요. 아들로서 올리는 거예요
찡긋 웃어 보였지요. 돌아가신 날짜랑 선산도 알려드렸어요.
당연히 어머니에겐 비밀로 부쳐야죠. 하늘나라로 부치는
어머니의 편지가 끊기면 많이도 심심하고 궁금할 테니까요.
그분을 뵌 지도 십수 년이 흘렀네요.
요번 기일에 내려오면 군청 앞 백화식당에 들러보세요.
찾아갈 때에는 저처럼 뿔테안경에 파마머리로 가세요.
제 나이 쉰이고, 아버지는 쉰여섯에 떠나셨으니 속을 거에요.
그분 연세도 일흔이 넘었으니 주름졌다고 실망하진 마세요.
만나면, 아직도 경 자, 연 자, 쓰는 분이 그리워요?
개구쟁이처럼 몇 번이고 물어보세요. 저는 주로 청바지를 입어요.
저도 들러볼게요. 그럼 하루에 두 번이나 왔냐고
기뻐하시겠지요. 그 옛날처럼 돌아서서 눈물 찍으시겠죠.
참, 그분은 이제 뾰족구두 대신에 털신을 신어요.
어머니처럼 눈자위가 젖어 있고요.
머리맡에 대하여*
- 아버지학교 56
이정록
1.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머리맡이 있지요
기저귀 놓였던 저리
이웃과 일가친척의 무릎이 다소곳 모여
축복의 말씀을 내려놓던 자리에서
머리맡은 떠나지 않아요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던 첫사랑 때나
온갖 문장을 불러들이던 짝사랑 때에도
함께 밤을 새웠지요 새벽녘의 머리맡은
구겨진 편지지 그득했지요
혁명시집과 입영통지서가 놓이고 때로는
어머니가 놓고 간 자리까지 목마르게 앉아 잇던 곳
나에게로 오는 차가운 샘 줄기와
잉크병처럼 엎질러지던 모든 한숨이 머리맡에 에돌아 들고 났지요
성년이 된다는 것은 머리맡이 어지러워지는 것
식은땀 흘리는 생의 빈칸마다
머리맡은 차가운 물수건으로 나를 맞이했지요
때론 링거 줄이 내려오고
금식 팻말이 나불기도 했지요
2.
지게질을 할 만하지/ 내 머리맡에서 온기를 거둬 가신 차가운 아버지/ 설암에 간경화로 원자력병원에 계실 때/ 맏손자를 안은 아내와 내가 당신의 머리맡에 서서/ 다음 주에 다시 올라올게요 서둘러 병원을 빠져나와 서울역에 왔을 때/ 환자복에 슬리퍼를 끌고 어느새 따라오셨나요/ 거기 장항선 개찰구에 당신이 서 계셨지요./ 방울 달린, 손자의 털모자를 사 들고/ t상에서 가장 추운 발가락으로 서울역에 와 계셨지요/ 식구들 가운데 당신의 마음이 가장 차갑다고 이십 년도 넘게 식식거렸는데/ 얇은 환자복 밖으로 당신의 손발이 파랗게 얼어 있었죠/ 그 얼어붙은 손발, 다음 주에 와서 녹여드릴게요/ 그다음 주에 와서/ ,/ 그다음 주에 와서 녹여드릴게요/ 안절부절이란 절에 요양 오신 몇 달 뒤/ 아, 새벽 전화는 무서워요/ 서둘러 달려가 당신의 손을 잡자/ 누군가 삼베옷으로 꽁꽁 여며놓은 뒤였지요
3.
이제 내가 누군가의 머리맡에서
물수건이 되고 기도가 되어야 하죠
벌서 하느님이 되신 추운 밤길들
쓸쓸하다는 것은 내 머리맡에서
살얼음이 잡히기 시작한 거죠 그래요
진리는 내 머릿속에 아니라
내 머리맡에 있던 따뜻한 손길과 목소리란 것을
알고 있지만 말이에요 다음 주에 다음 달에
내년에 내 후년에 제 손길이 갈 거예요
전화 한번 넣을게요 소포가 갈 거예요 택배로 갈 거예요
울먹이다가 링거 줄을 만나겠지요
금식 팻말이 나붙겠지요
내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기도 소리다가
내 머리맡에서 들려오겠지요 끝내는
머리맡에 혼자 남아 제 온기만으로 서성거리다가
가랑비 만난 짚불처럼 잦아들겠지요
검은 무릎을 진창에 접겠지요
*시집 『의자』에서 빌려옴
★사랑을 하면 가슴팍에 짐승이 돌아다니고
귀에서 귀뚜라미 소리가 들린다
글짓기 대표선수
이정록
1.
노란 깃대를 자전거 꽁무니에 매단 삼천리자전거가 바깥마당에 받쳐 있다. 면사무소 최 서기 아저씨가 우리 집에 온 게 분명하다. 깃발에 ‘병충해방제’라고 쓰인 빨간 글씨가 도열병 맞은 벼처럼 무더위에 푹 쳐져 있다. 마을이장인 우리 아버지가 극진히 대접하는 최 서기 아저씨가 술기운 거나하게 웃는다. 아버지의 얼굴도 감나무 그늘, 홍시에 얻어맞은 삼베 밥보자기처럼 불콰하다.
“인사 드려라. 너도 이젠 꿈을 크게 가져라. 아버지 봐라. 마을 반장에 이장을 몇 년이나 해도 절대 면사무소 공무원은 못 된다. 그게 왜냐? 난 선출직이고, 이분은 시험에 통과한 수재라 그런 거다. 너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이분이 면장님 할 때, 이분 밑에서 국가에 봉사할 맘을 굳혀라. 화가나 만화가나 다 굶어죽기 십상이다. 구름 위에서 헛꿈 꾸는 놈은 해 뜨고 구름 개면 날바닥에 고꾸라져 이마빡이 수박처럼 박살나는 거다. 아비 봐라. 의사가 꿈이었는데, 산골짝에 묻혀 있으니께 평생 헛농사만 짓지 않냐? 넌 농사꾼을 지도하는 농촌지도소나 면사무소 공무원이 안성맞춤이다.”
아버지의 장광설에 귀가 닿기도 전에, 돌확에 부딪힌 유리구슬처럼 외양간 옆 쥐구멍으로 굴러들어간다. 엊그제 아버지에게 박힌 가슴 속 쇠말뚝이 아프다.
“미술선생님께서 미술대 진학반에 들어간다면 고등학교 3년 장학생으로 추천해주신대요.”
아버지는 어느 학교냐고 묻지도 않으셨다. 학교는 공립고와 신흥 사립고 둘뿐이었다. 아버지가 딱 한 마디 하셨다.
“읍내 동보극장, 간판쟁이 젊더라.”
화가는 밥 굶기 십상이나 때려치우고 고함이락도 쳤으면 말뚝까지는 박히지 않았으리라.
아버지의 바람대로 인문고에 진학했다. 2학년으로 진급하면서부터는 문과, 이과, 상과로 나뉘었다. 나는 직업반이라 불리는 상과를 선택했다. 아버지에겐 읍내 제일은행에 취직하는 게 꿈이라고 설득했다. ‘병충해방제’보다는 ‘알뜰적금’이 나낫다고 판단하셨는지 고갤 끄덕이셨다. 상과에서는 며칠, ‘빵빵’이란 별명을 갖고 있던 김영영이가 찾아왔다.
“넌, 공무원 시험 본다니까, 문과인 나랑 바꾸자. 일대일로 바꾸는 것만 허락해준대.”
문과에서의 며칠, 이번엔 눈이 안 좋은 박희선이란 벗이 찾아왔다.
“야, 공무원시험 보는 대는 문과 이과 상관없어. 이과에서도 공무원시험 필수과목 다 배워. 난 시력이 마이너스라서 공대에 원서도 못 낸대.”하고는 학교 앞 ‘복성슈퍼’로 나를 데려갔다. 아, 그 감칠맛 나는 쥐포! 쥐포 세 장 때문에 나는 또 이과로 바뀌었다. 3월 중순도 안 됐는데, 벌써 세 분의 담임선생님을 만난다. 책도 두 번째 바꾼다. 주산부기에서 고전문학으로, 세계지리에서 물리학으로.
조회시간이었다. 화학 담당인 담임선생님은 지시사항을 속사포로 전달하고는 말미에 글쓰기 선수를 한 명 뽑아야 한다고 했다.
"대학진학에 매진하는 너희 모두 매달 한두 번씩 글짓기에 다 참석할 필요가 있겠나? 반대표 한 명이 일 년 봉사하기로 하자. 누가 글 잘 짓지?“
침묵이 흘렀다. 한 참 뒤 분위기가 이상해서고개를 들었다. 아이들이 나만 보고 있었다. 순간 반장 놈이 일어나서 한마디 쐐기를 박았다.
“선생님, 정록이는 문과에서 왔습니다.”
아이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렇지. 정록이가 우리 반 글짓기 대표선수다!”
그 뒤로 나는 글짓기 공문에 따라 주제만 엇비슷하게 각종 글을 베껴냈다. 교련 책의 ‘국난극복의 길’과 국민윤리 책의 ‘경노효친’이 나의 문우였다. 이장 보시는 아버지 덕분에 공짜로 배달되던 <농민신문>의 사설과 <새농민>의 수많은 체험수기들이 아군이 되어주었다. 물론 상을 탄 적은 한 번도 없다.
2.
고향집 앞 시냇가 빨래터는 물소리가 좋았다. 바위로 보를 쌓았기에 냇물이 불면 폭포 소리 우렁찼다. 웬만한 울음소리는 잠재울 만했다. 눈물방울이 알알이 굴러 떨어지며 슬픔을 버무려 품고 흘러갔다. 제 설움을 빨랫방망이로 후려치며 광목치마를 끌어올려 눈물 콧물 찍어내던 동네 아낙들의 모습을 자주 마주치곤 했다. 빨래터 옆엔 새로 놓인 시멘트 다리가 있었다. 그 난간에 올라 어른인 양 헛기침을 하면 엄마는 부리나케 눈자위를 훔치며 나를 올려다보고는 어색하게 웃으셨다. 그 젖은 눈망울! 내가 무슨 죄를 지은 것같이 오금이 저렸다. 아버지를 대신해 뭔가 사과를 해야 할 것만 같았다.
“할머니 엄마 동생들이 자고 있는데, 어떻게 집에 불을 지를 수 있데요? 아버지는 아버지도 아니에요.”
“엄마는 잠들지 않았어.”
“엄마도 제 옆에서 주무시고 계셨잖아요?”
“아버지 들어오실 때는 깼어.”
“아버지가 발로 툭툭 차서 깬 거죠. 할머니하고 나누시는 얘기 다 들었어요.”
“얼마나 사는 게 힘들면 어미 새끼 다 자는 집구석에 불을 싸질렀겠냐? 그리고 금방 후회하고는 이 어미를 깨웠지 않냐? 장남인 너만은 아버지를 이해해야 한다. 삼촌들이 줄줄이 셋이나 목숨을 버렸지 않냐?”
“그러니까 더 악착같이 식구를 챙겨야지요. 할머니도 맨날 여기 냇가에 와서 우는데.”
“그려, 새끼들 눈에서는 피눈물 안 나게 잘 키울 거니까, 넌 걱정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 어떻게든 고등학교 입학시킬 테니까.”
사십여 년 전 일이다. 나도 아버지가 집에 불을 놓은 다음 나이를 벌서 지나왔다. 아버지는 그 힘든 나날을 어느 물결에다 부려 놓았을까?
어버지의 반대로 여고 입학이 좌절된 누나는 읍내에 있는 동화전자주식회사에 취직했다. 진학하지 못한 슬픔을 달래려는 듯 누나는 박봉을 쪼개 월부 책부터 들여놓았다. 누나는 <여류수필문학>전집에 보너스로 딸려온『韓龍雲의 名詩』라는 시집 한 권을 선물로 주었다. 내가 이 지구상에서 처음으로 만난 시집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맨 철음 시집을 펼친 곳에「나룻배와 행인」이란 시가 있었다. 내가 짝사랑하던 그녀의 집은 저수지에 잇닿아 있었다. 햇살바라기하는 자라처럼 마당가에 작은 배가 있었다. 그로부터 시를 도둑질해서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좋은 시구를 내 맘대로 고쳐 쓰다 보니 원작보다도 멋지게 느껴졌다. 내 꿈이 화가에서 시인으로 바뀌었다. 시인이 되겠다고 맘을 먹은 지 3년, 대학교 2학년이 되도록 시집이라고
는『韓龍雲의 名詩』한 권뿐이었다. 자취방 방세를 내기에도 빠듯한 생활비였다. 새 시집을 갖고 싶었다. 학교버스를 타고 공주시내 ‘세종서림’에 갔다. 나는 그때까지도 시집이 비싼 줄 알았다. 가장 얇은 시집 한 권을 골랐다. <창비시선> 16번, 천원이었다. 나는 신관동 자취방가지 걸어가기로 맘먹었다. 뿌듯한 마음으로 시집을 펼쳐 읽으며 금강을 건너는 중, 눈물이 쏟아졌다.
흐르는 것이 물 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 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 정희성, <저문강에 삽을 씻고> 전문
공주 연미산 아래 곰나루가 노을에 젖어 있었다. 그 붉은 노을 속에, 불길에 휩싸인 우리 집 사랑채가 활활 떠올랐다. 나는 아버지를 부르며 하염없이 울었다.
세상 모든 강은 큰물에 요동친 강폭과 수심의 상처를 갖고 있다. 그 너비와 깊이가 강을 이룬다. 거기 피난살이하던 두보의 흰 새가 날고, 그 강 언덕에 울화의 꽃도 불처럼 타오른다. 강은 억장이 무너지는 사람들의 마음을 대신 울어준다.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함께 흘러간다.
3.
대학에서도 글짓기로 상을 탄 적이 한 번도 없다. 하지만, 그때 터득한 게 잇다. 억지로 쓴 글은 누구의 눈길도 머물지 않는다는 걸. 어찌어찌 등단을 하고 대학원을 다닐 때 문예창작과에서 시 창작 강의한 적이 있다. 평가를 겸한 숙제로 자신이 좋아하는 시를 오십 편 이상 필사하라고 했다. 학생 수대로 멋진 선집이 완성되었다. 학생들에게 돌려주지 않았다. 머리맡에 두고 자주 읽었다. ‘왜 이럴까? 자신이 좋아하는 시와 자신이 쓰는 시가 같은 성향, 같은 수준이면 좋을 텐데.’ 그 ‘거리 좁히기’가 곧 시인이 되는 지름길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 ‘거리 넓히기’가 ‘상상력’이며 ‘낯설게 하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아, 내가 좋은 글은 남도 좋아한다. 남도 좋아하는 예쁜 여자를 따라다니다가, 그를 어떡하든 감동시키려고 시를 쓰기 시작한 나는 뼛속 깊이 그걸 안다. 다만, 사랑하는 이가 이해하는 언어, 진심이 담긴 영혼의 말을 참신하게 담아내야 한다. 세상 모든 독자는 가장 예쁘고 가장 아름다운 연인이기 때문이다. 나는 출발부터 ‘글짓기 대표선수’였다.
글을 쓰려고 원고지를 펼쳐 놓으면, 자꾸 그림부터 그려진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아버지의 단호한 눈초리가 백지의 성원에서 오롯하게 솟아오른다.
“읍내 동보극장, 간판쟁이 젊더라.”
꼭 필요한 사람이 되라*
이정록
그간 잘 계셨는지요? 오랜만에 글월 올립니다.
“아버지 목소리 들릴 때마다 세상을 향한 눈의 문을 열게 되었고”라는 장사익의 노래 「아버지」를 읊조릴 때가 많지만, 막상 또박또박 노랫말을 옮기다 보니 마음의 문에 삭풍이 들이치는 것 같네요.
아버님 떠나시고 소식도 못 들은 둘째가 올해 열여섯이 되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가죠. 녀석을 보면서 반성할 때가 많아집니다. 그 나이 때 저는 고2였고 이해도 못할 어려운 책과 씨름할 때였죠., 싸가지 없게 그때 저는 아버지를 많이 원망했죠. 술만 드시는 아버지를 한심하게 생각했고, 농사일에 무관심한 아버지가 미웠으며, 식구들보다 동네 사람들이나 면서시기를 더 챙기시는 아버지의 오지랖을 이해할 수 없었죠. 아버지의 어깨를 짓누르던 과중한 무게는 하나도 보지 못하고, 오직 내 아비로서 역할만 따졌을 때였으니까요. 형제 중 셋을 앞세우고, 큰어머니 한 분을 더 모셔야 했고, 난치병 앓는 여동생으로 노심초사하는 아버지는 안중에도 없었으니까요. 간경화와 황달로 고생하시던 아버지 대신 병원으로 약 타러 다니던 일만 부끄럽고 귀찮게 여기던 철부지였으니까요.
아버지, 닷; 설이 왔어요.
하늘나라에도 떡방앗간이 있는지요? 흰 구름 숭숭 썰어 넣고 별똥별로 떡국을 끓이시는지요? 하루 종일 엿도 고고 두부도 만드는지요? 만사 제쳐놓고 정월 보름가지는 화투도 치고 윷놀이도 즐기시는지요?
몇 해, 인근 학교에서 참 재미있는 일이 졌어요. 정월 대보름이 때마침 전 직원 출근 날이었기에, 막걸리 두어 통에 돼지머리도 삶아 윷놀이가 펼쳐진 거죠. 행사는 교장선생이 제안하고 직원들은 놀기만 하면 되는 날이었죠. 그런데 놀이 준비는 누가 합니까? 당연 주사 아저씨가 해야 했죠. 갑자기 돼지머리 삶으랴, 새우젓 사랴, 동태 사랴, 대파에 무 사랴, 집에 가서 묵은김치에 그릇, 국그릇, 숟가락, 젓가락 챙기랴, 양조장에 가서 막걸리 받아오랴, 이장댁에서 가서 멍석 빌려오랴, 들락날락 솥단지마다 장작 집어넣으며, 세 시간 만에 똥줄 나게 게 놀이판을 꾸렸는데 막상 윷가락을 못 챙긴 거예요. 당연지사, 교장선생님의 불호령이 떨어졌죠. 다른 것은 몰라도 윷은 밤나무로 세 벌 깎아놓으라고 단단히 이른 터였죠.
순간 아저씨 머리에는 총을 놔두고 똥 누다가 바지춤도 못 올린채 포로로 잡혔던 베트남에서의 참혹한 광경이 떠올랐죠.
‘그래, 거시기 한번 박박 긁어봐라.’
주사 아저씨는 부리나케 창고 뒤편으로 달려갔죠. 철조망 울타리에 윷가락으로 다듬을 만한 좋은 나무가 있었거든요. 지난 가을에 베어놓은 옻나무 말예요. 교장, 교감 선생님이 옻독에 오른다는 사실을 벌써 알고 있었죠. 주사 아저씨는 한 학교 오래 근무하다 보니 모르는 게 없으시잖아요. 옻나무가 얼마나 잘 깎였겠어요, 겉 좋은 윷가락 두 벌이 뚝딱 만들어졌죠. 한 벌은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서 행정실 팀끼리 따로 놀았고요.
그대로 효과만점이었죠, 술과 윷과 돼지고기는 친인척 관계잖아요. 게다가 혈기왕성한 몇몇 분들은 그날 밤 사모님들과 사랑을 나눈 거예요. 보선소로, 약국으로, 다들 분주한 신년인사를 치러야 했죠, 평소 부부 사이가 안 좋던 모 교사는 성병으로 의심을 받아서 더 곤욕을 당했답니다.
아버지, 그곳은 어떤 나무로 윷가락을 깎는지요? 나무가 없어서 별동별 몇 개로 공기놀이를 하시나요? 설이 되니 뵙고 싶네요.
산 설고 물설고
낯도 선 땅에
아버지 모셔드리고
떠나온 날 밤
얘야 문 열어라
잠결에 후다닥 뛰쳐나가
잠긴 문 열어젖히니
찬바람 온몸을 때려
뜬눈으로 날을 샌 후
얘야 문 열어라
아버지 목소리 들릴 때마다
세상을 향한
눈의 문을 열게 되었고
아버지 목소리 들릴 때마다
세상을 향한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고**
장사익의 노래 가사에는 안 나오지만 이 노래의 원작인 허형만 시인의 시「문 열어라」는 이렇게 끝나지요.
그러나 나도 모르게
그 문 다시 닫혀졌는지
어젯밤에도
문 열어라.***
세월이 갈수록 제 어두운 문을 열어주시는 아버지, 떡국은 드셨는지요? 우리가 제사상에 올리는 떡국 말고, 하늘나라 두레밥상에서도 증조할머니, 증조할아버지, 큰 할머니,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먼저 가신 삼촌 세 분과 후루룩후루룩 뜨시게 떡국 잡수셨는지요?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1993년 양력 2월 4일은 입춘이었죠. 그해 설은 요양하던 수덕사에 있는 허름한 여관에서 나셨죠. 간경화에 설암이 겹쳐 떡국도 국물만 조금 넘기셨죠. 그때를 생각하면 저는 한없이 가슴이 오그라듭니다.
아버지께서 짚고 다니시던 지팡이, 그곳에는 아버님의 유언이 새겨져 있었죠, 사하촌 상가에서 구입하고, 그곳에서 불 인주로 새겨 넣으신 열 글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라!”
처음에 저는 그 글귀를 발견할 수가 없었죠. 여관 마루에 기대어놓은 지팡이 안쪽에 새겨져 있었으니까요. 자식에게 직접 이러저러한 사람이 되어라 말씀 못하신 당신의 심정을 생각하니 또 마음이 시려오네요. 그러던 어느 날, 저는 바깥마루 귀퉁이, 걸레를 베고 비스듬히 걸쳐 있던 지팡이에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한 번 쯤은 제가 보았으면 하고는, 당신은 고드랫돌처럼 얼어붙은 걸레를 받쳐놓으신 거였죠. 무릎 끓고 싸리비 같은 당신의 손을 잡자, 희미하게 웃으시면서 농을 치셨죠.
“한 글자에 오백 원씩 오천원 줬다. 느낌표는 보너스여. 그 느낌표가 중요한 거여. 사람이 한세상 접을 때에는 느낌표가 있어야 혀.”
마루에 나와 담배 한 대 꼬나물고는, 나는 지팡이 떠받들고 있는 걸레를 보았죠.
‘그려, 걸레가 돼야지. 걸레는 저렇게 숭엄하지.’
언 걸레를 뜯어보니 수건을 반쪽으로 자른 거였죠. 아마도 반쪽은 행주로 썼던지, 방 걸레로 썼던지, 발수건으로 썼겠죠.
‘그렇지, 꼭 필요한 게 뭐여, 지팡이, 걸레, 행주, 발수건이지. 내가 쓰는 시는 이 네 가지에다 주소를 둬야지. 그러다 보면 시보다도 어렵다는 삶이란 녀석도 지팡이 짚으며 따라오겠지.’
아버님. 설날이 되었다고 뭐 달라지는 거야 없겠지요. 세상사 언제나 힘들지 않은 적 없으니까요. 하지만 갈수록 모두 힘들어합니다. 팔지 못한 배추밭이 꼭 공동묘지 같습니다. 몇 안 되는 조무래기들이 배추밭에서 비닐썰매를 타고 축구도 합니다. 그러면 눈 속에 얼어붙어 있던 배추들이 해골처럼 나뒹굽니다.
혹여 힘이 닿으시면 그곳 어른들과 상의하셔서, 지상의 어려운 분들께 희망의 복을 내려주시지요. 물론 저희 가족에게도 우수리는 꼭 챙겨주시고요.
올해에도 주저리주저리 말이 길었습니다.
참, 초겨울 날씨가 변덕스러워서 시골집 김장김치가 부글부글 끓어올랐습니다. 그래 부랴부랴 김치냉장고를 들여놓았지만 김장 맛이 지난해만 못합니다. 제사상에 올릴 동치미가 그나마 좀 나은 게 다행이네요.
어머님은 갈수록 아버님이 그리우신지 새로 배우는 뽕짝마다 사랑타령이랍니다. 어머님이 쓰시는 편지는 제때에 잘 받아보시는지요. 어머님은 요즘 제가 건네준 교무수첩에다 뽕짝 가사도 적으십니다.
아버님, 까치담배 내기 윷놀이라도 꼭 이기시길 바랄께요.
그럼 이만, 안녕히 계세요.
*산문집 『시인의 서랍』에서 빌려옴
**장사익,『꿈꾸는 세상』「아버지」2003.
*** 허형만,『비 잠시 그친뒤』 문학과지성사, 1999.
외양간 마구간 가슴간
이정록
햇살이 언 땅을 들어 올리는 봄이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날도 입춘이었다. 어머니와 단둘이 누운 봄밤! 대화가 국수토막처럼 뚝뚝 끊긴다. 고드름 부서지는 소리도 없다. 개는 일찍 잠들었나, 적막하다. 봄밤의 적막은 눅눅하다. 먹먹한 어둠을 올려다본다. 시각 천장이 거대한 도토리묵 같다. 묵 표면에 작은 기포 같은 게 반짝인다. 도토리묵의 젖은 눈빛을 읽을 길 없다. 작게 속삭이는 도토리묵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다. 어머니가 전기장판 온도를 조금 높인다. 텔레비전을 다시 켤까 하다가 리모컨을 머리맡 고구마 자루에다 다시 올리려 놓는다. 멀리서 오토바이 소리가 난다. 점점 가까워온다. 신작로에서 우리집 앞으로 이러진 마찻길로 들어선다. 대동샘까지 왔다. 감나무 밑이다. 비닐하우스 곁이다. 부릉부릉 액셀러레이터를 당긴다. 빙빙 돈다. 말뚝에 묶인 발정 난 숫염소 꼴이다.
“누구래요?”
“남정네겄지.”
“아는 사람이래요?”
“너도 아는 사람이여.”
“왜 저런대요?”
“술 한 잔하자고 저러지. 어미가 혼자 사니께…… 봄밤이잖아.”
“좀 늦은 시간인데요. 불 켤까요?”
“내버려 둬. 저러다 그냥 가.”
“맨날 와요?”
“술이 떡이 돼서는 혼자 저러다가 제풀에 지쳐서 떠나. 담날 여기 왔다 간 줄도 몰라. 그냥 오는 거여.”
“엄니를 좋아해서 오는 게 아니에요?”
“아녀. 진짜 좋아하는 과부는 따로 있어. 신양이란 동네에 나보다 어린 과부가 있어.”
“근대 여기는 왜 와서 붕붕거린데요?”
“다 헛헛해서 그러지, 닭 대신 꿩! 꿩 대신 봉황!”
“바뀐 거 아니에요?”
“넌, 어미가 닭이었으면 좋겄냐?”
“이왕 잠 놓친 거. 사랑 얘기 좀 해줘요.”
“먼젓번에 다 얘기했잖아. 진짜 사랑은 편애라고.”
“벌써 시로 써먹었어요, 그리고 그건 내리사랑이잖아요, 연애에 대헤서 한 말씀 해줘요?”
“내가 연애해봤냐. 중매결혼인데."
"그래도 엄니는 모르는 게 없잖아요.“
“어미는 결혼하고 난 뒤에 연애란 걸 해봤다.”
“엄니, 바람 피웠어요?”
“미친 놈. 내가 멋진 아버지를 놔두고 눈이 삐었냐? 아버지 간수하기도 바빴는데."
"그럼 아버지랑 연애했어요?“
“그려. 결혼하고 나서야 사랑이 싹텄지, 중매결혼은 그래. 게다가 임신시켜놓고 입대해버렸으니, 독수공방에 얼마나 그립던지, 휴가 나오기만 기다렸지. 내가 그때 알았다.”
“뭘요?”
“사랑을 하면 가슴팍에 짐승이 돌아다니고 귀에서 귀뚜라미 소리가 들린다는 걸 말이다. 귓볼이 젤 먼저 붉게 달아오르지. 귀에서 귀뚜라미 보일러가 팡팡 돌아가서 그런 거여. 그땐 생솔가지 땔 땐데, 벌써 회사는 알았는가 봐. 쩔쩔 끓는 방에서 사랑을 나누라고 보일러 이름을 그리 지었나?”
“어떤 짐승이 살아요?”
“모르긴 해도 황소 같아. 코끼리보다는 자발스럽고 원숭이보다는 점잖은 짐승, 말이나 소가 아닐까 싶어. 왜, 소 키우는 데를 외양간이라고 하고 말 키우는 델 마구간이라고 하지 않냐. 그럼, 사랑하는 사람이 크는 데는 가슴간 아니겄냐. 내가 이름을 붙여봤다.”
“엄니 가슴간엔 누가 산데요?”
“난 죽어서도 아버지다. 그만한 멋쟁이가 없지. 술 조금 많이 먹고 나보다 먼저 저세상 간 거만 빼고는 흠잡을 데 없지. 술 취해서 농사일 안하고 병치레 십수 년 한 거 빼고는 얼마나 멋졌냐?”
“그거 빼면 뭐가 남아요. 우리도 그런 얘기를 해요. 수업하고 업무만 없으면 선생 노릇 할 만한 거라고. 신문기자들도 그런대요, 취재와 기사 쓸 일만 없으면 기자가 최고라ㅣ고. 농사꾼이 농사는 안 짓고 병원비로 기둥뿌리 뽑는데, 뭐가 멋지데요?”
“그런 데에는 그럴 만한 속사정이 있는 거야. 사랑하면 눈물과 고통의 뿌리를 알게 되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이 식지 않고 끄느름하게 익어가는 어여. 꽃 좋은 것만 보고는 열매를 못 보는 거여. 난 좋아하는 사람은 꽃만 예뻐하질 않아.”
“그럼 엄니 허리가 자꾸 굽는 이유가, 그 짐승이 커져서 그러는 고만요? 가슴이 쪼그라드는 것도 그 짐승이 밤낮으로 쪽쪽 빨아먹어 그렇고요?”
“그려, 근데 넌 다 가르쳐줘도 반밖에 몰라. 허리가 굽는 건 말이여. 가슴간 울타리가 자꾸 허름해지니까 짐승이 달아날까 봐 그려. 그리고 가슴간이 자꾸 식으니까 짐승이 추울 거 아니냐. 그래 허리를 구부려 감싸주려는 거지.”
“그럼 쭈그렁 가슴은요?”
“그건, 보는 나도 속상하지. 그쪽은 미용이 첫째인데. 하긴, 그것도 늘어져야 짐승우리를 잘 감쌀 거 아니냐?”
오토바이마저 떠난 봄밤이다., 어머니의 마음간 울타리에 어찌 아버지만 있으랴. 어머니의 귀에 귀뚜라미가 우는 가 보다. 귀를 베갯잇에 살포시 뉜다. 돌아누운 어머니의 등이 내 쪽으로 둥글다. 어머니 가슴속 짐승이 나를 보고파서 머리를 들이미는 것 같다. 고구마 자루에 올려 있던 리모컨이 방바닥으로 미끄러진다. 고구마에 싹이 돋나 보다. 고무가의 가슴에도 뿔 좋은 짐승 한 마리씩 뛰어다니는 봄밤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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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어머니학교』는
어머니 연세에 맞춤하여 72편으로 마무리했다.
『아버지학교』는『어머니학교』에 비해 편수가 줄었다.
불효막심하게도,
생을 앞당긴 당신이 잠깐이나마 고맙게 느껴졌다.
예순까지 사는 건 기적이라며,
아버지는 51세 생신날에 회갑연을 했다.
아버지가 평생 되뇐 고갱이는 두 문장이다.
“도는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와
“꽃 필요한 사람이 되어라!”
지병이 아버지에게 가르쳐준 지혜의 약봉지뿐만 아니라,
잠들지 않는 욕망과 조급한 훈계도 담았다.
애이불비哀而不悲 애이불상哀而不傷이라 하였건만,
비상悲傷에 빠져 물속 하늘로 비상飛翔하는 나날이었다.
아버지는 쉰여섯, 입춘에 운명했다.
소한 지나 입춘까지,
원고지라는 멀고도 척박한 땅에 아버지를 모셨다.
두 시집을 나란히 읽어보니 ‘성숙시집’같다.
생의 여로가 그렇게 이어진 듯싶다.
두 학교를 모두 마쳐도 졸업은 없다.,
죽어서도 무릎 아픈 학생부군이다.
우리는 모두『아버지학교』의 불량학생이다.
내자가 먼저 회초리를 맞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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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을 나는 먼저 시인의 ‘아버지’에 대한 추억으로 읽는다. 그 ‘아버지’는 이 땅의 다른 아버지들에 비해 더 잘난 데도 없고 더 못난 곳도 없는 평균적인 아버지다. 그러나 바위나 나무처럼 묵묵히 자리를 지키면서 그 ‘아버지’가 들려주는 얘기는 그가 바로 더 잘난 데도 더 못난 곳도 없는 ‘아버지’이기 때문에, 한없이 크고 바닥을 모를 만큼 깊다. 시인은 아버지의 얘기를 더 많은 ‘아들’들에게 들려주고 싶어서 이 시들을 썼을 터, 이 시들을 읽으면서 나 또한 문득 가슴이 따듯해진다. 역시 이 시인은 작은 말을 가지고 큰 얘기를 할 수 있는 빼어난 이야기꾼이다. - 신경림(시인)
갓난아기 세상에 태어나 제일 먼저 부르는 소리 ‘엄마’. 두 발 딛고 걸음마 시작하며 부르는 소리 ‘아버지’. “사람은 경우를 알아야 혀!” 평생 사람의 근본을 말씀하셨던 고향의 아버지들. 얼마 전 『어머니학교』 정겹게 열더니 이젠 『아버지학교』입니다. 나이 들어 어머니 아버지 속내 알면 그때부터 진짜 어른입니다. 아버지 말씀 가득한 곳에 꽃피어 향기 가득합니다! “얼라! 그러고 보니 시인님, 우리 고향이시네!” - 장사익(국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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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시인∥
∙ 1964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1989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로 등단하였으며 김수영문학상과 김달진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시집으로 『어머니학교』 『정말』 『의자』 『제비꽃 여인숙』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 『풋사과의 주름살』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 등이 있고, 산문집 『시인의 서랍』, 동화 『십 원짜리 똥탑』 『귀신골 송사리』, 동시집 『콧구멍만 바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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