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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3월20일(화)맑음
어제 월요 강의 말미에 했던 이야기.
누가 나의 감정에 방아쇠emotional trigger를 당기는가? 누가 내 감정의 단추push button를 누르는가?
어떤 사람에게,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말을 들었을 때 화가 나는가?
상대의 어떤 말, 어떤 행동이, 어떤 얼굴표정과 몸짓이 나를 화나게 만드는가?
나에게 이미 경계하려는 태도, 상대에 대해서 냉담한 태도, 상대가 나한테 어떻게 하나 두고 보자는 심사가 있지 않은가? 그렇게 되면 상대방에게서 나오는 조그만 반응이라도 내 감정을 건드리고 마음을 흔든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나는 화낼 만반의 준비가 된 상태이다. 걸리기만 해봐라. 곧 화를 내고 말테니까.’
상대방이 나를 해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즉시 나는 무장을 해제하게 된다.
화는 몸으로 느껴진다. 배가 아프다든지 가슴이 답답하고 응어리가 맺힌 것 같다.
화는 피해야 할 것, 나쁜 것만이 아니다. 화를 내야만하는 경우도 있다. 일단 자신이 화났다는 걸 인정하고 알아차려야 한다.
화내는 방향으로 미친 듯이 달려갈 수도 있고, 화를 멈출 수도 있다. 화에 끌려갈 수도 있고 화를 멈출 수도 있다. 화내는 즉시 멈추라. 호흡을 보라. 화의 에너지를 느껴라. 그리고 생각하라. 상대방과 어떤 관계로 발전시키고 싶은가? 상대방에게 나는 어떤 존재로 남고 싶은가?
내면의 아이, 어릴 때 상처받은 아이가 울고 있는지, 화를 내고 있는지 느껴보라. 내면의 아이가 지금의 나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나한테서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은지 생각하고 그대로 말해보라.
<문정의 미소>
미소는 미소를 불러
미소 향기 퍼지면
비온 후 봄 산에 들불처럼 번져
진달래를 피우겠네.
2018년3월21일(수)눈 온 후 비
아침 커튼을 걷으니 은색산하! 겨우내 눈 보기 힘든 진주에서 눈 내리는 아침 풍경을 보다니 희귀한 일이다. 점심때쯤 학생들이 와서 함께 움직이다. 사천으로 가니 초록보살이 점심 공양을 대접한다. 차 마시고 돌아오다.
눈이 하염없이 오는데 문득 친구가 보고 싶어 말을 타고 눈 속을 달려 그 집 앞에 다다랐는데 친구는 출타중인지 문이 잠겨있다. 문 앞에 쌓인 백설 위에 말채찍으로 자기 이름 써놓고 돌아가는 마음은 어떨까? ‘나 다녀가네.’ 이백의 思君不見下渝州사군불견하유주-그대를 그리워하나 보지 못하고 유주로 내려가노라-와 같은 심정이다.
雪中訪友人不遇 설중방우인불우/李奎報이규보(1168-1241, 호 백운거사白雲居士)
雪色白於紙, 설색백어지 눈빛이 종이보다 더 희구나
擧鞭書姓字; 거편서성자 채찍 들어 내 이름을 눈 위에 쓴다,
莫敎風掃地, 막교풍소지 바람아 불어서 땅 쓸지 마라
好待主人至. 호대주인지 주인이 올 때까지 기다려주렴.
I smile at the world. The world smiles at me.
When I see sufferings spreading everywhere,
my smile gets wet with tears, but I will smile with my eyes wet.
I smile at life. I smile at death.
I am a smile of earth. I am a smile of flower.
I am a smile of rain. I am a smile of wind.
I laugh away whatever comes in the daily life.
2018년3월22일(목)맑음
화창한 날씨. 점심을 명석 <자연에서> 먹다. 죽향에서 저녁 강의하다. 눈을 감는다. 아는 게 많아서 눈을 감는다. 아는 게 없어서 눈을 감는다. 이도 저도 아니어서 눈을 감는다. 눈을 많이 쓰니 눈이 아프다. 눈물이 말라 눈알이 아프다. 눈을 다시는 못 뜰 날이 올 것을 대비하여 미리 눈을 감는다. 다시 눈이 떠지리라 믿으면서 눈을 감는다. 눈을 무엇을 보려고 안달한다. 대상을 보려고 하는 욕망에서 눈이 생겨난다. 무엇을 보려고 하는가? 피해야 할 것, 먹을 것, 좋은 것, 마음에 드는 것을 보기 위해. 보려고 하는 것을 놓아버려라. 이제는 쉴 때이다. 눈을 감는다. 하늘이 눈을 감으니 꿈으로 별들이 날아온다. 호수로 별이 떨어진다. 호수도 눈을 감는다.
2018년3월23일(금)맑음
아침에 숙소에서 체크아웃하여 아미화, 연경, 문정과 현정과 함께 거제앞바다 해금강으로 달리다. 파도소리 펜션에 체크인하다. 점심 공양을 함께하고 그들은 진주로 돌아가다. 해금강 둘레길을 소롯이 걷다. 울창한 동백숲이 터널을 이루어 낮인데도 햇볕이 들지 않을 정도이다. 목 꺾인 동백꽃송이가 발에 밟히면 피가 묻어날까봐 살금살금 비껴 걷는다. 우제봉 전망대를 돌아서 바닷가 마을로 내려오다. 한 시간가량 걸리는 산책이다. 에머랄드빛 바닷물이 출렁대는 것을 보니 마음이 풍성해진다.
遠行到南溟, 원행도남명
優遊海金剛; 우유해금강
始皇貪靈草, 시황탐영초
冬栢喝無常. 동백할무상
멀리 달려 남쪽 바다에 와
한가로이 해금강에 노니네,
진시황제가 불로초를 탐했다니
동백꽃이 제행무상이라 고함치며 꾸짖는다.
둘레길 전망대가 있는 禹濟峰우제봉 암벽에 ‘徐市過此서불과차’라는 글자가 새겨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진시황제가 동남동녀 삼천 명을 해동으로 보내어 불로초를 찾아오게 했다는 것인데. 한반도 여러 곳에 이런 石刻석각이 남아 있으나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최근 들어 제주도에 중국관광객이 대거 몰려드니까 지방정부가 정방폭포에 徐福공원(서복과 서불은 같은 사람이다)을 세워 마치 공인된 사실인양 선전을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랬으면 하는 바람일 뿐, 사실이 아니다. 중국이 동북공정으로 우리의 고대사를 왜곡하지만 우리는 정정당당하게 나가야 되거늘, 유커를 좀 더 끌어보겠다고 역사적으로 확인도 되지 않은 서불이야기를 진실인 것처럼 호도하니 이거야말로 눈앞의 이익을 위하여 역사를 날조하는 짓이 아닌가? 동백꽃이 피를 흘리면서 꾸짖는다. 제행무상이니라! 小貪大失소탐대실이니라.
2018년3월24일(토)맑음
점심 먹고 우제봉 둘레길을 걷다. 翡翠비취 색 바다가 장관이다. 에머럴드 빛을 翡色비색이라 할 수 있을까? 고려청자의 색을 흔히들 비색이라 한다. 해금강 바다는 비색이다. 고려도공이 가마 불 땔 때 50톤의 화목을 태워 1300도의 열을 유지해야 비취색 청자가 나온다고 한다. 도공은 제 몸을 태우는 심정으로 청자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래서 그는 불의 마스터이다.
바다 색깔은 햇빛이 물속의 먼지와 같은 작은 알갱이나 플랑크톤 등의 미립자에 의해서 흐트러지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만일 표층에 미립자가 없다면 붉은색이나 노란색은 바닷물에 흡수되어 파란색만 더 깊은 데까지 투과되어 우리 눈에는 파란 바다로 보이게 된다. 그러니 내 눈에 보이는 고려청자색 비취빛 바다는 여러 조건이 모여서 비로소 나타난 경이로운 일이다.
바다-2
채호기(1957~ )
바다에 와서야
바다가 나를 보고 있음을 알았다
하늘을 향해 열린 그
거대한 눈에 내 눈을 맞췄다
눈을 보면 그
속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바다는 읽을 수 없는
푸른 책이었다.
쉼 없이 일렁이는
바다의 가슴에 엎드려
숨을 맞췄다
바다를 떠나고 나서야
눈이
바다를 향해 열린 창임을 알았다
2018년3월25일(일)맑음
하루 종일 밖에 나가지 않다. 홍익학당 윤흥식은 불교와 힌두교, 단학과 요가, 유교와 도교,티베트밀교를 자기 나름대로 회통하여 하나로 돌아가는 道를 주장하며 가르치고 있다. 한동안 그의 유투브강의를 들으면서 이것을 어떻게 받아드릴까 곰곰이 생각해왔다. 오늘 <열반 그리고 표현불가능성; 초기불교의 언어, 종교철학-아상가 띨라카라뜨나Asanga Tilakaratne 저>를 읽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윤흥식의 주장은 새로울 것도 없는 범아일여의 재판이다. 그것은 전형적인 samkhya상키야학파의 전변설적인 견해이다. 그것의 중국적인 형태는 태극설이다. 그 결론은 만물의 근원으로서 性/心을 상정하고, 이것이 相을 일으키니 만상이 벌어진다. 그래서 克己復禮극기복례하면 성을 회복하여 聖人성인이 된다는 것은 유교가 되고, 精氣神정기신을 단련하여 陽神양신을 만들어 신선이 된다고 가르치면 도교가 되는 것이고, 쁘라나prana(티베트에선 룽lung)와 에너지 채널을 개발하여 意成身의성신(manomaya kaya, 티베트에선 환신幻身gyulu)을 완성하면 궁극적으로 금강신을 이룬다는 것으로 회통한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다. 세상의 여러 종교와 수행법을 통틀어서 하나의 것으로 만들어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갖다 주니 <영적인 호기심은 있으나 기성종교에 실망한 사람들>의 호응을 얻는 것 같다. 그러나 불교 안에 들어온 전변설적인 요소, 범아일여적인 요소에 대하여 일찍이 일본불교학자 마쓰모도 시로(松本史朗)에 의해서 <基體說기체설dhatuvada>이라고 비판되었던 것이다. 그의 저서 <여래장사상은 불교가 아니다>는 전통적인 대승불자들에겐 충격적이며 도발적으로 받아드려졌었다. 붓다는 초월적 실재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에 대한 일말의 긍정적인 암시도 없었다. 그런데 후대의 힌두사상가들이나 일부 대승불교학자가 붓다의 無記무기(abyakata, 산스끄리뜨에서는 avyakrta=a+vyakr설명하다, 밝히다+ta=‘설명되지 않는, 답하지 않은’을 의미하는 과거분사)를 오해함으로써 붓다가 말씀하신 무아와 열반이 초월적 실재로서 생각하게 되는 오류를 범했던 경향이 있다. ‘말하지 않은 것’과 ‘말로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붓다는 제쳐놓아야 할 질문(thapaniya)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으시고 침묵을 지키셨다. 이것은 말로 할 수 없는 초월적 실재(신비적인 어떤 것, 언어도단의 그 무엇, 말을 떠난 자리)가 있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다. 대체로 그런 질문은 형이상학적인 추론이나 바르지 않은 견해에 기반한 질문이기에 답하지 않으신 것이다.
“바차곳따(Vacchagotta)여, ‘세상이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은 추측에 의한 견해, 집착적 견해, 황무지와 같은 견해, 교묘한 견해, 해로운 견해, 족쇄와 같은 견해에 이르게 한다. 그것은 격통, 고민, 심신의 괴로움, 불안을 동반한다. 그것은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도움이 되지 않으며, 마음의 평정, 집착을 멈추는 것, 마음을 평안하게 하는 것, 明智명지, 해탈, 열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바차여, 추측에 의한 견해를 갖는 것, 이것을 여래는 제거했다.”(MN)
붓다가 제쳐두어야 할 질문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신 것은 그분의 자비심에서 나온 교수법이다. 자신의 생각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기를 좋아하는 윤흥식은 초기불교의 열반을 ‘모르는 마음(숭산스님), 한 마음(대행스님), 알 수 없는 자리(선종에서 회자되는 말), 空한 자리,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소크라테스)’과 같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붓다가 말한 무아는 진짜 무아가 아니고 사실은 常樂我淨상락아정의 梵我범아라고 말한다. 그는 붓다가 초월적 실재(無我가 아니라 非我, 常樂我淨의 我, 梵我)를 깨달아서 가르쳤다고 생각한다. 무아와 범아 사이에는 건너뛸 수 없는 심연이 있는 걸 이렇게 쉽게 이어붙이니 대단하다. 용감할 정도로 막나가는 게 아닌가 걱정스럽다. 과거의 위대한 불교수행자와 불교학자들도 하지 않았던 말을 함부로 말할 수 있는 배짱은 어디서 나오는가? 조금 안 사람은 알았다고 큰 소리를 치지만, 진짜 아는 사람을 말을 아끼는 법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왜 묻지도 않는데 답을 주려고 안달일까? 누가 만 가지 종교를 하나로 만들고 동서양의 여러 가지 수행법을 하나로 통일시켜달라고 했는가? 또 그게 그렇게 쉽게 해결될 문제인가? 아무튼 윤흥식은 메시아 콤플렉스Messiah complex에 걸린 게 아닐까하는 일말의 우려를 해본다. 그는 양심정치를 외치며 지난번 대통령선거에서 후보로 나왔었다. 앞으로도 추종자가 모여들어 여건이 성숙되면 정치활동에 나설 수 있는 인물이다. 그분이 사이비교주가 될지, 영성을 갖춘 지도자가 될지, 두고 볼 일이다. 그렇다고 그분을 비난하거나 잘못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다만 진짜로 잘 돼서 동방의 빛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2018년3월26일(월)
부처님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나가 아니며,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가르치셨다. 이것은 ‘나라고 믿고 싶은 것, 나라고 생각되는 것, 나라고 여겨지는 모든 것, 내가 가진 것, 내 것이라 생각되는 모든 것’에 해당된다. 부처님은 바로 그것을 움켜쥐지 말고 놓아버리라고 하신다. 그걸 집착하여 소유하려고 하는 심리가 渴愛갈애인데 그것은 필연적으로 苦를 일으킨다. 어떤 사람은 부처님말씀을 좀 이해하여 수행한다고 하면서도 오온 밖에서 무엇을 찾는다. 오온을 놓아버린다면서도 다시 초월적인 어떤 것을 붙잡으려 한다. 선정에서 오는 비상한 경험, 니밋따nimitta나 깔라빠kalapa 따위, 아니면 에너지로 된 멘탈체mental body나 아스트랄체astral body, 氣가 모여서 이루어진 陽身양신, 윤회에서 자재한 變易身변역신....등등등 이런 것들을 움켜잡는다. 그리고는 무상하고 무아인 ‘나’를 버리니까 ‘영원하고 환희롭고 정묘하고 신비한 것’이 새로이 나타났다 하면서 그걸 ‘참나’로 삼는다. 나를 버렸다면서 또 나를 찾아낸다. 인간이 얼마나 ‘나’를 버리기 힘든지 보여주는 게 아닌가? 이것이 이생이나 저승, 다음 세상까지 어쨌든 언제까지나 살고 싶다는 본능, 존재를 놓지 못하고 지속하려는 열망이다. 이것이 존재를 지속하려는 갈망, bhavatanha有愛이다. 서양에서 초월적 실재로서 창조주 하느님을 믿는 것이나, 믿어서 천국에 가자는 것이나, 동양에서 상락아정의 我, 범아일여의 아, 神我, 초월적인 我, 眞我, 우주적인 나, 참 나를 찾는 것은 모두 같은 심리이다. bhavatanha有愛이다. 존재에 대한 갈망이다. 존재를 집착한다. 존재론적 확실성을 찾으려고 안간 힘을 쓴다. 그런 갈망을 자각하지 못한 사람이 불교를 하면 불교 안의 어디에선가 붙잡을 구석을 찾아낸다. 그리고는 깨달았다, 찾았다, 잡았다, 터졌다, 한 소식했다고 한다. 모두 헛일이다. 또 다른 五取蘊오취온(=苦蘊, 고의 덩어리)을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
붓다의 가르침은 존재하려는 중생심의 흐름에 역행(patisotagami)한다. 그러기에 깨닫고 난 다음 가르칠까 말까 망설이셨다.
아주 어렵게 내가 얻은 이것을-
내가 왜 이것을 알려야하는가?
탐욕과 진심에 물든 중생에게
이 법은 이해되지 않는다.
흐름에 역행하는, 성스럽고, 심오하며, 미묘하고, 알기 어렵고,
수승한 이것은 무명의 암흑에 뒤덮여
탐욕의 노예처럼 사는 사람에겐 그것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MN)
그러나 부처님은 망설임을 극복하고 법을 설하기로 결정하셨다. 자신이 과거 생에 세우신 보리심의 원력이 그분의 마음을 움직이신 것이다. 중생에 대한 자비가 부처님으로 하여금 법을 설하시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것도 일방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 듣는 사람의 수준과 처해진 경우에 맞게, 알아들을 수 있게 조리 있게 표현하셨다. 그러기에 여기에 이런 사람에게 들려주었던 내용과 수준이 다른 곳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었던 것과 다를 수 있었다. 그러니 빠알리 경전과 대승경전, 금강승경전은 서로 다른 사람에게 서로 다른 경우에 설해진 것이라 그렇게 이해하면 안 될까? 겉으로 보면 도저히 같은 부처님에게서 이렇게 다른 내용이 설해질 수 있을까? 라고 놀랄 정도이다. 여기에는 쉽게 해결될 수 없는 교리상의 모순과 사유방법상의 차이가 놓여있다. 그렇지만 부처님의 설법정신을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길이 보인다. 그분의 설법정신은 중생에 대한 연민과 자비, 중생을 고에서 벗어나게 하여 완전한 행복의 경지로 이끌겠다는 보리심이다. 우리는 그 분을 본받아 菩提心 行子보리심행자bodhicariya가 되면 될 것이다.
점심때 쯤 연경, 문정, 향인, 현정보살 와서 체크아웃하고 공곶이 수선화를 보러 가다. 회현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고 공곶이를 올라 수선화 화원을 보고 바닷가 둘레길을 따라 돌아 나오다. 진주에 돌아오니 4시다. 저녁에 월요강의하다.
어릴 때 부모에게 혼났던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된 다음 자기가 그토록 싫어했던 부모를 그대로 닮은 듯이 제 자식을 혼내는 것은 왜일까? 부모에게 혼났던 어린 아이는 혼내는 부모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 혼내는 부모 역할을 맡게 된다. 피해자에게 가해자의 심정을 알려주기 위해서 가해자의 역할을 맡겨준다. 업인과보는 공평하게 적용된다. 카르마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역할을 서로 바꾸어줌으로써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인간이 되게 만든다. 피해자(아이)는 가해자(부모)의 심정을 알기 위해서 가해자(부모)의 역할을 맡는다. 아이는 부모가 되어서야 혼내는 부모의 심정을 알게 된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그러나 부모가 그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 서툴렀기에 아이에게 아픔을 주었던 것이다. ‘나는 절대로 부모처럼 살지 않겠다.’고 말하는 아이는 ‘나는 부모의 심정을 정말로 알고 싶어.’라는 말이다. 부모의 심정을 정말로 알게 될 때 부모를 이해하게 된다. 그러면 어릴 때 받았던 상처가 치유된다. 인간관계에서 사랑 때문에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다. 서로 사랑한다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다니 이 무슨 어리석은 짓인가? 그 사람을 진정 사랑한다면 그냥 솔직하게 사랑을 표현하세요. 지금 당장 그 사람이 진실로 듣고 싶어 하는 그 말을 해주세요. 진심을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용기가 없고 쑥스러워서 가슴속에 감추어두고 있던 그 말을 이제 속 시원히 말해주세요.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용서해주세요.
한 맺힌 가슴을 풀어주는 한 마디, 어떻게 말할까?
상처받은 것을 씻어주는 한 마디, 어떻게 말할까?
상처 준 미안한 마음을 풀어주는 한 마디, 어떻게 말할까?
억울한 것을 풀어주는 한 마디, 그것을 어떻게 말할까?
거부당하고, 무시당했던 섭섭함을 달래주는 한 마디, 어떻게 말할까?
고집과 무명에 휩싸인 눈을 뜨게 만드는 한 마디, 그것을 어떻게 말할까?
선종에서는 그런 한 마디를 일전어一轉語, 경계를 확 바꾸어주는 말이라 한다. 눈 맑은 선사는 제자와 문답을 하는 중에 제자의 눈을 확 바꾸어놓는 일전어를 던진다. 그것이 충격적인 방식으로 주어질 경우에는 방망이로 두들겨 맞거나, 큰 고함소리를 듣거나, 뺨을 얻어맞거나, 발길질을 당하기도 한다. 그렇지 않으면 촌철살인의 지혜가 번득이는 한 마디이거나, 폐부를 찌르거나, 비위를 뒤집어놓는 한 마디가 날아오기도 한다. 일반인들은 선사가 불친절하다고 느낄지 모른다. 그러나 진정한 선수행자라면 스승과의 문답을 두고두고 떠올리면서 스승이 꽂아준 한 마디에서 영감을 느낄 것이다.
2018년3월27일(화)맑음
페르시아 말로 ‘나는 60살입니다.’라는 말을 ‘60년째 세월이 나를 쫓아오고 있습니다.’라 표현한다고 한다. 또 손님이 물건 값을 깎으려 할 때 주인은 점잖게 ‘거벨레 쇼머 나더레’ 라고 한다. ‘당신의 가치에 비해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는 뜻이란다. 우리가 먼 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지금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게 되면 우리가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 세상 사람들의 삶에 대해 알면 알수록 생각의 폭이 넓어지고 깊이가 깊어진다. 나와 타인과의 다름과 차이를 인식하고 인정하면서 자기의 것과 통합하는 것이 중요하다. 거기서 변화와 창발이 일어난다.
오전에 모여서 기공 체조하고 점심 공양 함께 하다. 리모델링 공사 중인 선원을 보러가다.
2018년3월28일(수)맑음
오전에 영천에서 진성도예 부부 도원거사와 연수보살 및 그의 친구 한분이 찾아오다. 바스타파스타에서 점심을 먹고 시우 찻집에서 환담을 나누다. 진성도예에서 가져온 도자기를 감상하다. 아미화, 연경은 선원 살림에 필요한 접시와 찻잔, 다식판과 불단용 접시, 화병을 주문하고 문정, 현정, 향인보살은 각자 필요한 것을 주문하다. 진성도예는 화엄사 흑매를 찾아서 화엄사로 떠나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시간이 흘러 선학사 주지 대위스님, 대구 관오사에서 지우스님과 영일스님이 도착한다. 스님들과 차를 나누면서 설중매를 이야기하다. 내 숙소로 자리를 옮겨 <산쓰끄리뜨 원본 십지경 대강좌>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하다. 호수 위로 어둠이 내리고 우리는 헤어져 각자 갈 길로 가다.
2018년3월29일(목)맑음
븟반에서 점심 공양하다. 저녁 강의하다. 페르시아 시인 오마르 카이얌Omar Khyyam의 시를 소개하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현재를 살라! Seize the present moment.
밤거리 가로수 벚꽃이 팝콘마냥 하얗게 터졌다. 자신의 속을 터뜨려 주위를 환히 밝히는 벚꽃이여. 이차돈이 순교하는 모습인가? 목에서 흰 피가 솟구쳐 세상을 밝힌다. 벚꽃, 하얗게 벗은 꽃. 하얗게 벗은 몸의 꽃. 하얀 몸의 꽃. 하얀 옷 입은 벗友의 꽃. 저 꽃은 나무의 몸에서 피가 터져 나온 것이다. 하얀 피가! 하얀 피, 하얀 꽃, 하얀 정신. 나무도 정신이 있는가? 꽃을 보는 사람의 의식이 터져 하얗게 흐른다. 땅위로, 물 위로, 몸으로 흐른다. 천지가 꽃이다, 천지가 나의 눈꽃, 眼中花안중화이다. 눈에 꽃이 피어나면 눈병이 난 것이다. 봄꽃은 눈병이다. 눈병은 뭘로 치료하는가? 瞑目명목, 눈을 감고 瞑想명상하라. 봄이 눈앞으로 지나간다.
2018년3월30일(금)맑음
화엄사로 오다. 먼저 각황전 부처님께 예배드리고 흑매를 친견하다. 공양간에서 점심 공양하고 선원으로 올라와 본해스님과 차를 나누다. 맑게 갠 시야에 노고단이 보인다. 봄 햇살 아래 포근히 자리 잡은 도량이 환하다. 밤 앞산에 달 떠오른다. 흑매를 보러 큰 절로 내려가다. 전문 사진기자들이 흑매를 찍기 위해 삼각대를 설치하여 렌즈를 장착한 카메라를 들여다보고 있다. 흡족한 한 컷을 얻기 위해 몇 시간씩 오브제를 쪼아보고 있는 사진사들이 대단하다. 선원으로 돌아와 본해스님과 차를 나누며 선원 운영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주다.
花巢小鳥緩, 화소소조완
山吐笑月滿, 산토소월만
梅靈紅益濃, 매령홍익농
梵鐘浥刹塵. 범종읍찰진
꽃 둥지에 작은 새 살포시 내려앉고
앞산은 웃음 짓는 보름달 토해낸다,
신령한 매화에 붉음이 짙어지자
범종소리 진진찰찰 적시노라.
2018년3월31일(토)맑음
오전에 섬진강변으로 달려가 벚꽃터널을 감상하다. 백장암으로 가서 행선, 보성, 효원스님과 점심공양하고 뒷 산길을 포행하다. 돌아와 차를 나누며 환담하다.
玩走櫻花窟, 완주앵화굴
春光一瞬瞥; 춘광일순별
何期山中樂, 하기산중락
百丈閑望月. 백장한망월
벚꽃터널 즐겨 달리지만
봄빛은 한 순간이니
어찌 산중의 즐거움을 기약 하리오
한가로이 백장암에서 달을 바라보노라
2018년4월2일(월)맑음
화엄사를 떠나 진주로 오다. 오는 길에 섬진강변 벚꽃 터널을 지나다.
봄 빛 찬란. 꽃인 듯, 눈인 듯, 나비인 듯. 발에 밟히기에 아까운 꽃잎.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지 않아. 하동에서 척량을 거쳐 진주로 돌아오다. 죽향에서 저녁 강의하다. 코헛Kohut의 자기대상self-object, 변형적 내면화transmuting internalization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50대 한국남자의 문제를 거론하다. 자기조절, 자기수양, 심신단련에 게으른 한국의 50대남자의 말로는 어떠할까? 남편교실을 열어서 남편들을 깨우쳐 주고 싶다.
첫댓글 스님께서 말씀하신 나를 버렸다면서 나를 찾는다는 말씀으로 저를 돌이켜봅니다 감사합니다^^
진주선원
새보금자리를 얻기위한 진통의 시간
그 틈으로 스님과 도반님들 그리고 2018의 봄 날을 생생히 느끼며 누리고 있습니다
사두 사두 사두_()_ _()_ _()_
붓다의 가르침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던지 꽃자리 아니겠습니까? 스님과 도반님이 계시면 어디라도 좋습니다. 노상에 천막을 치고 공부를 해도 행복할 것입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