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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한 편씩 글을 올리려고 하는데 자칫 제 글로 도배가 될까봐 걱정입니다.
네 번째로 쓴 수필을 올립니다.
수필 치고는 글이 꽤 깁니다. 나중에 출간을 할 때는 1편과 2편으로 나누어야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말씀이든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따끔한 충고와 쓴소리 부탁드립니다.
자전거 여행
내가 자전거를 맨 처음 탄 게 언제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린 시절 앨범 안에 세 발 자전거를 타는 사진이 있으니 다섯 살 부터라고 해야 할지, 두 발 자전거를 처음 탔던 초등학교 2학년 때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두 발 자전거를 누구한테 배웠는지도 가물가물하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는지, 2학년 때였는지 매일 나가 놀던 집 앞 골목에서 같은 동네 누나한테 배웠던 것 같다. 그 누나의 얼굴도, 이름도 기억이 나질 않지만 처음엔 보조 바퀴가 달린 자전거를 타다가 이윽고 보조 바퀴를 떼고, 뒤를 잡아주던 누나가 말없이 놓았을 때 속도를 제어하지 못해 전봇대에 부딪혀 울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에 처음으로 아버지가 두 발 자전거를 사주셨다. 삼천리에서 나온 제법 큰 자전거였는데 자전거 가게에서 구입할 때 크기 때문에 고민을 했었다. 초등학교 4학년이라 체구가 아직 작으니 자전거도 그에 맞게 작은 걸로 살 것인지, 아니면 중학생이 되어서도 계속 탈 만큼 큰 자전거를 살 것인지 말이다. 난 호기롭게 큰 자전거를 사달라고 졸랐고, 체구에 비해 자전거가 커서 페달을 돌릴 때마다 다리가 거의 펴질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 서울대학교 정문의 위 쪽 관악산에서 내려오는 물은 굉장히 깨끗해서 서울대학교 하류 근처에서는 잠자리 애벌레나 개구리, 물고기 등을 잡을 수 있었고, 상류로 좀 올라가면 가재나 도롱뇽을 잡을 수 있었다. 동물을 좋아하는 나는 겨울이 지나고 날씨가 따뜻해지면 종종 집에서 서울대학교 정문까지 한 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가서 하루 종일 잡다가 오곤 했다.
그러나 새 자전거를 산 지 1년도 안된 어느 날, 그 날도 역시 자전거를 타고 가서 물고기, 가재, 도롱뇽 잡기에 여념이 없다가 집에 오기 위해 자전거를 세워 두었던 곳으로 오니 자전거가 감쪽같이 없어진 것이었다. 얼굴이 넙적한 제법 큰 도롱뇽을 잡고 기뻐했지만, 너무 상심해서 물에다 도로 던져버리고 울면서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 왔던 기억이 난다. 집에 돌아와 엄마한테 혼나고 다시는 자전거를 사달라고 하지 않을 거라는 억지 대답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6학년 즈음엔 지금은 로드라고 불리는 사이클이 너무나 타고 싶어서 몇 달을 졸라대어 기어코 어른들이나 타는 것을 사서 과천 서울대공원까지 타고 다녀왔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 사이클에는 기어가 없었는지, 아니면 아직은 어려서 다리 힘이 없었는지 차가 쌩쌩 달리는 남태령 고개를 땀을 뻘뻘 흘려가며 끌고 올라갔다가 내려올 땐 시원하고 신나서 환호성을 지르며 내려오던 기억도 난다.
그 사이클도 어디에다가 잃어버렸는지 한동안 자전거를 안타다가 다시 타게 된 것은 대학교 1학년 때.
학력고사 후기에 붙은 서원대학교는 충북 청주에 있어서 하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집에서 떨어져 타지에서 지내게 되었고, 아직 같은 과 동기들과 친해지기 전이라 외로움을 많이 느꼈었다. 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사이클을 한 대 사서 수업이 끝난 후나 집에 안 올라오는 주말에 여기저기를 타고 다니다가 어느 날 용기를 내어 청원의 대청댐까지 다녀오기로 마음을 먹었다.
들뜨고 신이 난 나머지 속도를 냈었나보다. 삼거리의 교차로에서 우회전을 했는데 달려오던 속도가 빨라 원심력 때문에 차로 중앙까지 들어갔다. 그 순간 뒤에서 빨간 프라이드 승용차가 경적을 날카롭게 울리며 내 자전거 뒤를 받았다.
운동신경과 순발력이 정점에 다다른 체육대학 1학년생이었다. 믿기 힘들겠지만 자전거가 자동차에 받히는 순간 난 페달을 밟고 뛰어 올랐다. 뛰어 오르는 것 까지는 좋았는데 자전거 속도에다 달려오던 자동차 속도까지 에너지가 더해져 난 앞으로 한참을 날아가다가 땅에 떨어졌고, 떨어지는 순간 몇 바퀴를 데굴데굴 굴렀다. 만약 옆 차선에서 차가 오고 있었거나, 아님 중앙선 너머 반대편 차선으로 구르다가 차가 왔더라면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은 없을 지도 모르겠다.
구르다가 멈춰 일어났는데 웬걸, 어디 크게 아프거나 다친 데는 없어 보였다. 이유는 그저 그 당시 스무 살이라는 나이가 모든 걸 설명해 주는 듯하다. 그러나 뒤를 돌아본 순간 자전거는 완전히 박살이 나서 찌그러져 있었고, 운전을 했던 차 안의 아주머니는 사색이 되어 흡사 뭉크의 '절규'같은 표정이었다.
놀라서 달려 나온 아주머니에게 순진하게도 오히려 내가 사과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 빨리 달려와서 차로 한가운데로 들어오니 그 아주머니도 미처 속도를 줄이지 못했을 것이다. 병원에 가자는 아주머니한테 괜찮다고 했더니 그럼 자전거를 변상해 주겠다며 가격을 묻는데 순진했던 건지, 멍청했던 건지, 양심에 찔려 원 가격보다 높게 부르지를 못했다.
아주머니는 그 자리에서 지갑을 열어 자전거 값 15만원을 주고 얼른 자리를 떠났고, 난 돈을 쥐고 하숙방으로 돌아와서는 며칠 동안 머리가 빙빙 돌고 어지러워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는 내 자전거 값이자 목숨 값 15만원으로 새 자전거를 사지 않고 술을 사 먹었다.
교직에 들어와 두 번째 학교인 철산중학교에 근무할 때 다시 자전거를 샀다. 2006년경이었던 그땐 MTB가 유행할 때라 안양천이나 한강을 나가도 MTB가 주를 이루었다. 사실 자전거도 유행이 있다.
나 역시 MTB를 사서 산에서는 안타고 출퇴근용이나 주말에 안양천, 혹은 한강에서 탔다.
5년 후 학교를 안양에 있는 연현중학교로 옮기고 자전거를 좀 더 좋은 MTB로 업그레이드 한 후 타이어만 로드로 교체해서 타고 다녔다. 연현중학교까지는 안양천을 타고 30분 정도 거리라 덕분에 5년 동안 출퇴근이 아주 즐거웠다.
어느 날 체육교사가 신규로 들어왔다. 내가 체육 부장이었고 신규는 체육부에 업무분장을 받아 가깝게 지내다보니 자신도 자전거를 좋아한다며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시작했다. 둘은 자전거 얘기만 나오면 신나게 대화를 하곤 하다가 한번은 체육과 회식 자리에서 자전거 얘기가 나왔다. 그 날은 스포츠 강사들도 있었는데 신규 교사가 자전거 국토종주 얘기를 꺼냈다.
자전거 국토종주. 자전거를 타고 인천 아라 갑문에서 부산 근처 을숙도까지 자전거 도로를 타고 달리는 여정. MB가 했던 4대강 사업 중 4대강 자전거 도로가 있다는 건 들었지만 우리 집 앞 안양천 자전거 도로가 부산까지 연결되었을 줄이야.
신규 교사는 신이 나서 친구들과 다녀왔던 경험담을 얘기했다. 중간, 중간 공도가 나오기도 하지만 거의 대부분 자전거 도로로만 달리기 때문에 위험하지 않고, 하루에 100km씩 달리면 나흘 정도 지나 부산에 도착한다고 했다. 부산에 도착한 후 올라올 때는 고속버스에 자전거를 싣고 올라오면 된다고 했다. 밥은 주로 사먹고, 잠은 가다가 도시가 나오면 모텔이나 찜질방에서 잔다고 했다. 중간에 포기하고 올라오는 사람도 많고, 웬만한 정신력과 체력 가지고는 안 되며, 날씨도 성패의 관건이 된다고 했다.
오! 듣던 나는 술이 확 깰 정도로 흥분이 되고 마음이 들떴다. 자전거를 오래 탔지만 장거리라고는 기껏해야 우리 집(독산동)에서 광나루까지 밖에 못 가봤는데 부산이라니.
그 자리에서 우리는 의기투합을 했다. 나와 신규 교사, 후배 교사, 스포츠 강사들까지 다섯 명이서 여름방학 때 자전거 국토종주를 떠나기로 말이다.
그러고 보니 서른한 살 후배 교사만 빼고 나머지는 전부 이십대였다. 사십대인 내가 MTB에다 타이어만 바꾼 자전거를 타고 로드를 따라갈 수 있을까 걱정도 됐지만 설마 자기들 부장인데 맞춰주며 타겠지, 하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십대에 뒤지지 않는 사십대의 체력과 끈기를 보여주리라 하는 오기도 있었다.
주말이면 몇 시간씩 한강을 달리며 어서 여름방학이 오길 기다렸다.
간혹 드라마나 영화를 보다 보면 주인공이 겪는 불행이나 시련이 나에게도 닥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아픔, 이별, 고통이나 시련, 혹은 죽음 등이 전부 남의 얘기인 냥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 그러나 난 이제 그런 믿음이 사라졌고, 세상의 그 어떤 일이라도 나에게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 일을 겪은 후로는.
그 무렵 학교에서 어떤 사고가 있었고, 그 법적 책임을 전부 내가 지어야 하는, 나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위기와 시련이 닥쳤다. 여름방학 한 달 전 6월부터 10월까지 넉 달 동안 내가 겪은 시련과 정신적인 충격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고통이었다. 술에 취하지 않고는 잠을 잘 수가 없어 소주를 병이 아닌 1.5리터 페트로 사다 놓고 마셨다. 넉 달이 걸려 문제가 해결이 되었지만 난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서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워졌다.
두 달간 휴직을 내고 집에 들어앉았다. 몸과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매일 같이 산에 올랐지만 머릿속에서 고통의 기억들이 떠나질 않았다. 이러다가 정신병에 걸리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고통과 시련의 흔적들이 머릿속에서 나를 계속 괴롭혔다. 그러한 생각들을 잊게 만들 무언가가 절실히 필요했다. 내 인생 최대의 고난과 시련 후 터닝 포인트가 될 그 무언가를 만들고 싶었다.
그때 내 방 책장에 꽂혀 있는 예전에 읽었던 책 한권이 눈에 들어왔다. 이시다 유스케라는 일본인이 쓴, 잘 다니던 회사를 돌연 그만두고 자전거 한대로 7년 반 동안 세계일주를 했던 경험을 쓴 책, '가보기 전엔 죽지마라'. 자전거로 혼자서 세계일주도 하는데 우리나라 정도면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 떠나자! 나에게 지금 필요한건 이것이다. 결심을 하는 데는 1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결심을 한 다음날 바로 떠날 수는 없었다. 사전 정보가 필요했다.
먼저 다녀온 사람들의 블로그도 찾아보고, 준비물도 알아보고, 자전거 국토종주 인증 사이트에서 온라인으로 인증수첩도 미리 구매한다. 인증수첩이 올 때까지 샵에 가서 자전거 점검도 하고, 펑크 때우는 법도 배우고, 지도를 보며 숙박 시설도 미리 알아본다.
이틀 만에 종주 수첩과 자전거길 지도가 왔다. 지도를 보니 부산까지 까마득하다. 과연 내가 혼자서 저 먼 길을 갈 수 있을까. 그동안 나의 고통을 옆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아내가 말리지는 않고 힘들면 바로 올라오라고 한다. 일기예보를 봤더니 수요일쯤 비가 온단다. 오히려 잘됐다. 중간에 하루 정도 쉬면 체력도 회복이 될 것이다.
문제는 예전에 디스크 수술을 했던 허리가 얼마나 버텨주느냐. 테이핑도 하고, 허리 보호대까지 하고 달리면 괜찮을 거라 애써 자위한다. 그 어떤 문제도 그때 나의 출발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설령 중간에 아파서 실려 올라오더라도 나는 떠났어야 했다.
2014년 10월의 어느 날.
아침 일곱 시에 눈이 저절로 떠졌다. 배낭을 열어 챙겨 놓은 짐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씻었다. 아내가 닭죽을 끓여 놓았다. 든든하게 먹고 떠나라고.
허리에 테이핑을 하고, 무릎에도 보호대를 했다. 장시간을 달리면 무릎에 반드시 무리가 온다고 한다. 현관 앞에서 결의에 차 사진 한 장을 찍고 떠났다. 출발 시간은 정확히 오전 여덟시.
안양천 자전거 도로에 들어가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시작부터 문제가 생겼다. 배낭 무게가 생각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상체가 무거우니 약간의 요철에도 충격이 허리로 가는 게 고스란히 느껴지고, 배낭 때문에 답답해서 평소와 같은 속도로 달리는데도 숨이 훨씬 더 찼다.
30분쯤 그렇게 갔을까? 이렇게 부산까지는 무리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무렵, 목동교 밑에서 자전거 용품을 파는 노점상을 만났다. 자전거 짐받이가 있는지 물어보니 다행이 있다고 했다.
2만원을 주고 구입해 얼른 뒤에다 달고 배낭을 올린 후 로프로 단단히 동여맸다. 그리고 다시 출발.
뒤쪽이 무거워 잘 안 나가고, 핸들도 쉽게 안돌아가고, 중심도 기우뚱 거렸다. 그다지 유쾌한 기분은 아니지만 몸이 가벼우니 그래도 훨씬 가뿐하고 수월했다. 자전거 속도가 줄어든 게 흠이지만 그렇다고 빨리 가야할 이유도 없다.
세 시간쯤 달리니 서울을 벗어나 하남 시에 접어들고 자전거 도로에 사람들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광나루까지는 한강변을 따라 주변에 아파트가 많아 라이딩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하남 시부터는 아파트가 확 줄어든 탓이다.
팔당대교를 건너면서 사진을 한 장 찍고 남한강을 따라 계속 달렸다. 날씨도 좋고, 그림 같은 경치가 펼쳐져 기분도 최고조로 올랐다. 강 따라 자전거 길도 굉장히 좋고, 라이딩 하는 사람들도 적당히 있어서 심심하지도 않고, 핸들의 거치대에 달려있는 휴대폰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들이 계속 흘러나왔다.
팔당댐을 지나자 시간이 한시가 넘고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미리 알아본 바로는 조금만 더 가면 능내역 근처에 자전거 타는 사람들을 위한 맛있는 식당들이 있다고 했다. 밥 먹을 생각에 속도를 내어 열심히 페달을 밟았다.
역이라고 해서 큰 줄 알았는데 오래된 배경의 영화 세트장 같이 자그맣고 예쁜 기차역 앞으로 기차 길만 지나간다. 흡사 옛날 시골의 간이 기차역 같은 정겨운 느낌이고 기차는 다니지 않는다. 능내역 주변에는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쉬어 갈 수 있도록 여러 식당들과 자전거 점검소 같은 곳이 있다. 뭘 먹을까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능내역 뒤쪽으로 가니 한우 국밥집이 보였다. 뜨끈한 국물에 맛있는 밥을 먹을 생각에 군침을 흘리며 들어가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한우 국밥을 특자로 하나 주문했다. 순간 막걸리도 한 병 주문할까 고민을 했지만 음주 라이딩이 위험하다는 걸 잘 아는지라 그냥 국밥만 주문했는데 특이라 그런지 소머리 고기가 푸짐하게 들어갔다. 국물까지 다 먹고 잠깐 쉬면서 세워 놓은 자전거, 날 부산까지 데려갈 내 자전거를 바라보며 속으로 기원했다. 펑크만 나지 말아다오.
밥을 먹고 나니 조금 늘어지긴 하지만 잠깐 쉬고 다시 달리기 시작하자 이내 환상적인 길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능내역에서 양평대교까지가 국토중주 구간 중 가장 아름다운 구간이 아닐까 한다. 일요일인데다 워낙 경치가 좋아서 그런지 라이딩 하는 사람들도 많고, 특히 데이트를 하는 젊은 커플들이 많았다.
이 구간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고 아름답다고 하는 이유는 남한강을 따라 달리기도 하지만 터널도 많기 때문이다. 자전거 도로에서 터널이 나올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아트 터널이라고 하는 터널들을 한 너, 댓 개 정도 지나면서 자전거로 터널을 통과하는 기분도 좋지만 터널 안이 시원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터널 천장에 화려한 조명을 설치해 놓아서 보는 이들의 탄성을 자아낸다.
터널 몇 개를 지나 계속 경치 좋은 남한강변을 따라 달리면서 떠나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길이 아름답고 경치가 좋으니 몇 시간째 달렸지만 힘든 줄도 몰랐다. 달리다가 경치 좋은 곳이 나오면 앉아서 쉬면서 한참을 바라보기도 하고, 다른 라이딩 하는 사람들과 대화도 하게 된다. 좋은 경치와 좋은 날씨, 그리고 자전거라는 공통점이 모르는 사람과도 쉽게 대화를 하게 만들었다.
한 시간 정도를 더 달려 양평대교를 건너자 시간이 네 시쯤 되어 양평역과 양평구청을 지나가게 되었다. 순간 여기까지만 탈까, 고민을 했다. 그런데 하늘을 보니 해가 떨어지려면 멀었다. 벌써 숙소에 들어가면 밤에 잘 때까지 무얼 한단 말인가. 게다가 또 한 가지 나를 계속 가게 만든 건 그놈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존심? 대부분의 국토종주를 했던 사람들이 첫날 100km 이상을 달려 여주나 충주까지 가서 숙소를 잡는다. 그러니 나도 여주까지는 가야된다는 생각으로 계속 달렸던 것을 그날도 후회 했고 지금까지도 후회를 한다. 휴직기간이 한 달이나 남았는데 뭐 하러 무리해서 탔을까? 남들이 4일 만에 내려가고, 5일 만에 내려갔다는 게 나와 무슨 상관일까? 왜 난 아직도 나만의 온전한 인생을 살지 못하고 남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일까?
여주에 도착하기 전에 첫 번째 고비가 왔다.
양평을 지나 달리면서 살짝 걱정이 되었다. '해 떨어지기 전에 여주에 도착 못하면 어쩌지?'
그러나 달리는 길가의 풍경과 노을이 생기기 시작한 하늘의 모습에 취해 걱정이 달아난 데다 난데없이 자전거 도로 바닥에 국토종주라는 네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사실 여기까지 오면서 집으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바닥에 쓰여 진 국토종주란 네 글자를 보면서 내가 국토종주를 하고 있다는 실감이 들면서 다시금 마음을 다잡게 되었다. 국토종주라는 그 네 글자는 힘들어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나타났다.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할 때 이포보가 나왔다. 한강물을 막아 놓은 여러 개의 보 중 하나인데 그 크기가 장엄해서 올라가 보았다. 좀 오래 있고 싶었으나 해가 언제 저물지 몰라 내려와 다시 달리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계속 달려도 왠지 자전거 길 같지 않고, 길을 잘못 들었다는 예감이 들어 고민을 하다가 다시 왔던 길을 따라 이포보로 되돌아가니 길을 잘못 든 게 맞았다. 괜히 이포보 위에 올라가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되었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났다.
얼마쯤 더 달렸을까. 이제는 길옆의 남한강은 없어지고 좌우가 확 펼쳐진 평원이 나오더니만 갑자기 자전거 길이 웬 활주로처럼 넓어졌다. 나중에 알아보니 그곳이 전시에는 실제 활주로로 쓰인다고 했다.
여기서 첫 번째 고비가 왔다. 좁은 길을 달릴 때와 넓은 길을 달릴 때의 피로도 차이가 확연했다. 넓은 길에서는 근처 경치와 사물이 느리게 움직이다 보니 속도감이 안 나서 의욕이나 재미 같은 것이 줄어들면서 굉장히 지겹게 느껴진다. 흡사 같은 경치를 보면서 집이나 헬스 클럽에서 타는 사이클링 기구 같은 느낌? 사람은 코빼기도 안보이고 농사일을 하고 돌아가는 듯 한 트럭이 한대 지나가는데 진심으로 태워달라고 하고 싶었다.
활주로 같은 길을 벗어나고도 여주는 나오지 않고 계속 같은 풍경의 넓은 길만 나왔다.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데 아무도 없고, 황망한 길을 계속 달리려니 미칠 노릇이었다. 힘들고, 배는 고프고, 어서 빨리 여주가 나왔으면 하는 심정만으로 계속 달리다 보니 이내 건물들이 눈에 들어오고 비로소 여주에 들어온 듯 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 모텔을 찾아가 방을 잡고는 냉장고에 있던 물을 다 마시고 뜨거운 물로 샤워부터 시작했다. 살 것 같았다.
샤워 후 무릎과 허리에 파스를 붙이고 밥을 먹으러 나갔다. 여주에서 유명한 맛 집에 가서 맛있게 먹고 싶으나 너무 힘들고 배가 고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기사 식당에 들어가 제육볶음 백반에다 막걸리를 주문해서 시원하게 들이켰다. 고된 라이딩 후에 마시는 막걸리의 맛은 천국을 간접 체험해주는 맛이랄까? 막걸리를 한 통 더 주문하고 지도를 보았다. 그래도 꽤 많이 왔구나. 여기까지 온 내 자신이 뿌듯하기도 하고, 기어코 출발을 했다는 사실이 조금은 안 믿겨지기도 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하루 종일 달리면서 그동안 날 괴롭혔던 고통의 생각들이 한 번도 떠오르지 않았음에 짐짓 놀란다.
역시 떠나오길 잘했구나. 내일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설렘과 약간의 걱정을 안고 다시 모텔로 들어갔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몸 상태부터 체크했다. 다행히 어디 아픈 데는 없고, 전체적으로 피로가 쌓인 듯 한 느낌? 축구를 두 경기 정도 뛰고 난 다음날의 느낌과 비슷했다. 샤워를 하고, 허리와 무릎에 테이핑을 하고, 널브러져 있던 짐들을 챙겼다. 마땅히 먹을 데도 없고, 가다가 맛있는 걸 먹자는 생각에 아침은 먹지 않고 출발했다.
자전거 도로에 들어가니 당황스러웠다. 안개가 너무 자욱해서 10m 앞도 분간이 안됐다. 평일 아침이라 사람 구경도 힘들고 안개가 너무 심해서 쓰고 있는 안경과 옷들이 금방 젖었다. 안개 속을 뚫고 달리다보니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이내 강천보가 안개 속에서 웅장한 자태를 드러냈다. 내려서 사진도 찍고 둘러보는데 주변에 물소리와 내 숨소리 뿐 아무 소리도 없이 적막했다. 안개 속에서 거대하지만 고요한 물소리는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남한강변을 따라 계속 달려도 자욱한 안개는 걷히지 않고 이번엔 남한강대교가 나왔다. 다리 위까지 안개가 자욱해서 다리 너머 반대편이 보이질 않아 흡사 구름을 뚫고 하늘로 올라가는 상상의 다리처럼 보였다.
9시가 넘어가자 해가 완전히 올라오고 안개가 걷혔다. 안개 걷힌 남한강변은 환상적이었다. 그 광경을 내 모자란 필력으로는 묘사하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이다.
좋은 경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데 출발한지 두 시간 만에 반대편에서 자전거를 타고 오는 사람을 최초로 만났다. 그 아저씨도 내가 반가웠던지 자전거를 세우고는 말을 건넸다. 충주에 사는데 여주까지 간다면서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출발 후 처음으로 셀프카메라가 아닌 다른 사람이 사진을 찍어 주었다.
슬슬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달려도 식당은커녕 사람 한명 볼 수가 없었다. 밥을 먹고 출발할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들 무렵 비내섬 인증센터가 나왔고 자그마한 휴게소가 보이기에 얼른 들어갔다. 불고기 덮밥을 한 그릇 먹고 해가 드는 따뜻한 발코니로 나가서 커피 한잔을 하고 다시 출발.
얼마쯤 달렸을까.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비포장도로가 나왔다. 길을 새로 내고 있는 건지, 아니면 도로가 아직 안 만들어진 건지 알 수는 없으나 더럭 겁이 나고 고민이 들었다. 이 비포장도로 위에서 자전거를 타고 갈 것인지, 끌고 갈 것인지. 타고 가다가 펑크라도 나면 낭패이기 때문이다.
사실 난 펑크 난 타이어를 한 번도 때워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고민 끝에 도로 가장자리 쪽으로 올라와 있는 좁은 콘크리트 통로로 올라가 천천히 달렸다. 생각보다 비포장도로가 꽤 길었다. 30분 이상을 그렇게 달리는데도 포장도로가 나오지 않았다. 한참 동안 비포장도로 위로 자전거를 끌다가, 타다가 하며 갔더니 드디어 포장도로에 접어들었다. 포장도로가 그렇게 고마울 줄이야. 간만에 포장 도로 위를 달리니 페달링이 그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었다. 마치 구름 위를 달리는 기분이랄까.
그런데 이 쯤 되니 만만치 않은 길이 자주 나왔다. 오르막 구간, 그리고 잦은 우회 도로들.
오르막 구간이 생각보다 길었다. 언제 정상이 나올지 몰라 힘들고 때로는 짜증도 났다. 그러나 힘들게 오르막을 오르면 그 다음은 내리막의 짜릿함이 기다렸다. 도로에 아무도 없으니 눈치 볼 것도 없이 소리를 막 지르면서 내려왔다. 그동안 쌓였던 고통과 고뇌들을 고함 소리와 함께 씻어내고 싶었다.
순간 떠오르는 생각. 우리네의 인생도 비슷하지 않을까? 오르막 다음에 내리막이 있듯이 힘든 시기를 겪고 나면 다음엔 행복한 시기가 기다리겠지. 나도 고통스러운 시련의 날들을 견뎌냈으니 분명히 좋은 날이 올 거야. 문든 자전거 국토종주와 우리네의 인생이 어딘가 닮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곧이어 충주가 나왔다. 충주호로 가는 표지판이 보여 구경이나 하고 갈까 하다가 거리가 꽤 되는 것 같아 충주 시청 쪽으로 들어갔더니 벤치가 보였다. 아침 여덟시부터 네 시간을 거의 쉬지 않고 탔더니 피로가 느껴져 그늘 밑 벤치에 앉아 물도 마시고 초코바도 먹으면서 간만에 좀 오랫동안 쉬었다.
지도를 펼쳐들고 오늘은 어디까지 갈까, 하고 거리를 살펴보고 목표지를 정한다. 수안보에 가서 뜨끈한 온천물에 피로도 풀고 맛있는 저녁도 먹고 자면 딱 일듯 싶었다. 혼자서 또 신이 났다.
쉬었던 공원에서 30분 정도 달리니 충주 탄금대가 나오고 이제 남한강을 따라 달려왔던 길을 벗어나 중부 내륙 충청북도를 관통하는 새재 자전거 길에 접어들었다. 탄금대 이후부터는 한동안 자동차와 같이 공도로 달려야 했다. 자전거 도로가 따로 없어 자동차 도로 한쪽에 작게 국토종주 표시와 함께 길 따라 라인이 그려져 있는데 중간, 중간 공사하는 구간에는 그마저도 없어 길을 헤매기도 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자전거 도로는 이내 좁은 길로 접어들고, 산과 산 사이 계곡의 도로로 달렸다. 공도이긴 하지만 얼마나 외진 골짜기인지 자동차는 한대도 볼 수가 없었다. 물론 한동안 인가도 없고, 사람 한명 만날 수가 없었다.
한참을 달리는데 뭔가가 자전거 앞으로 휙 지나간다. 충주 탄금대에서 수안보까지 가면서 도로 위로 지나가는 뱀을 열 마리는 넘게 본 것 같다. 그런데 탄금대를 지나고부터는 쉴 곳이 나오지 않았다. 그 전까지는 한 시간 정도 달리다 보면 작은 벤치라도 나와서 앉아서 쉬다 가곤 했는데 땅바닥에 앉아서 쉬기 전에는 그 어떤 쉴 곳도, 작은 구멍가게 하나도 나오지 않고, 사람도 구경할 수 없었다. 얼마나 사람을 볼 수가 없으면 한 시간에 한, 두 명 정도 반대편에서 자전거를 타고 오는 사람을 보며 서로 인사를 한다. 모른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모르는 사람이다. 헬멧을 쓰고, 고글을 썼으니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인사를 한다. 달리면서 힘들고 외롭기 때문이다. 특히 나처럼 혼자 라이딩 하는 사람은.
마실 물이 떨어졌다. 충주에서 한통을 채웠으나 쉴 곳이 나오지 않으니 중간, 중간 마시다가 다 떨어졌다. 한, 두 시간 달리면 뭐가 좀 나올 줄 알았다. 쉴 곳이 나오지 않으니 계속 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
저 앞에 버스 정류장이 하나 보였다. 자전거를 세우고 정류장 의자에 앉아서 쉬었다. 버스 시간이 붙어 있어서 보니 버스 노선은 달랑 하나, 한 시간에 한대씩 온단다. 주변에 인가가 있어야 버스도 타러 올 텐데 어디서 사람이 오는지.
물을 못 마시니 갈증은 나고, 이상하게 양쪽 아킬레스건이 아프기 시작하고, 오른쪽 발바닥도 아프고, 사타구니도 엄청 쓰라렸다. 보통 자전거 바지를 입을 때는 속옷에 쓸리지 말라고 아예 속옷을 안 입는다. 나도 안 입었다. 그런데도 쓰라렸다.
10분쯤 쉬다가 이제 일어나 다시 달리려고 하는데 아킬레스건이 너무 아파서 페달을 돌릴 수가 없었다. 아, 왜 이럴까? 이해할 수가 없었다. 평생 아킬레스건이 아파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할 수 없이 평지인데도 자전거를 끌고 갔다. 한 10분 정도 끌고 가다가 또 타보았다. 고통을 참고 달리다가 더 못 참을 때가 되면 다시 끌고. 그런 식으로 타다가, 끌다가 반복하던 중 번뜩 예감이 들었다. 페달을 돌릴 때 페달이 가장 밑으로 내려간 순간 발목이 이완되면서 아킬레스건이 아프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안장을 좀 낮추면, 그러니까 아킬레스건이 늘어나지 않게 페달링을 하면 덜 아프지 않을까, 하고 안장을 낮춰 보았다.
그런데! 안장이 안내려갔다. 나는 무릎이 거의 펴질 정도로 안장을 꽤 높게 세팅하고 타는 편인데 안장을 세팅한지 너무 오래 되어서 그런지 내려가질 않았다. 간혹 그런 경우가 있다. 철제의 움직여야 할 부분 틈새에 오랫동안 먼지나 녹 같은 이물질이 끼어서 굳어 버려 안 움직이는 경우. 안장 레버를 풀고 그 위에 배를 깔고 올라 타보고 별 짓을 다 해도 요지부동이었다. 포기하고 안장 레버를 푼 채로 다시 탔다. 타다가 아프면 또 끌고.
가게 하나 나오지 않고, 길은 계속 산 속을 벗어나지 못하고, 배는 고파왔다. 산에 둘러 쌓여 있으니 해는 빨리 저물어 가는데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아킬레스건은 더욱 아파왔다. 그렇게 계속 가다보니 드디어 건물들이 눈에 들어오고, 식당 하나가 보였다. 시간은 다섯 시가 다 되었다. 아침을 열시반쯤 먹고 여태 굶은 거였다. 식당이 나와야 뭐라도 사먹었을 텐데, 배낭에 넣어둔 그놈의 초코바만 입에서 단내 나도록 먹었다.
들어가서 얼른 국밥 하나를 시켜 먹었다. 다 먹고서 오래 쉴 수도 없었다. 해까지 떨어지면 컴컴한 산속을 혼자 가야했다. 아픈 몸을 끌고.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얼마나 갈증이 났던지 콜라 큰 캔 하나를 다 마시고, 또 물을 두 컵이나 마셨다. 수안보가 얼마나 남았냐고 물어보니 사, 오십분 정도 가면 된다고 했다.
물통에 물을 담고 다시 출발. 조금 타니 또 아프다. 욕이 절로 나왔다. 내려서 끌다가, 타다가. 그렇게 간신히 수안보에 도착하니 여섯 시 반.
수안보 온천 구역 내의 모든 숙소는 전부 온천을 겸하고 있다. 절뚝거리며 자전거를 끌고 모텔에 들어가서 방안에다 자전거를 세웠다. 카운터에 내려가서 공구를 빌려와 안장의 기둥을 있는 힘껏 돌려본다. 미동도 없던 안장이 몇 번 만에 돌아갔다. 이번엔 안장을 잡고 계속 힘주어 돌리면서 밑으로 누르니 내려갔다. 헛웃음이 나왔다.
옷을 갈아입고 절뚝거리며 1층 온천탕에 가서 뜨거운 물에 몸을 한참이나 담근 후 나가서 저녁을 먹고 방으로 올라와 파스를 붙였다.
'내일 괜찮아야 할 텐데.'
캔 맥주 두 캔을 마시며 아내와 아들과 통화를 하다가 너무 피곤해 이내 골아 떨어졌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발목부터 보았다. 양쪽 발목의 아킬레스건이 퉁퉁 부었다. 굵지 않은 발목이었는데 무 다리가 되었다.
일어나서 걸어보았다. 나도 모르게 비명이 나왔다. 온천탕에 가기 위해 1층으로 내려가는데 너무 아파서 계단 손잡이를 잡고 한 칸, 한 칸씩 절뚝거리며 내려갔다. 온천물에 담그고 올라와 맨소래담을 잔뜩 발랐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다시 1층으로 내려가 근처 병원을 물어서 한의원에 갔더니 한의원보다는 병원으로 가야할 것 같다며 근처 병원을 알려주었다.
'수안보 의원'이라는 간판을 단 병원에 들어가 발목을 보여주니 아킬레스건염이라고 했다. 6주 정도는 치료 받고 쉬어야 나을 거라면서 나중에 심해지면 아킬레스건 파열로 접합 수술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으니 조심하라고 했다. 부산까지 마저 내려갈 수 있겠냐는 미련한 질문에 평생 다리 절고 살고 싶으면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물리치료 받고, 약 타서 나왔더니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우울해졌다.
점심을 먹으러 숙소 앞 식당에 갔지만 밥 생각이 없어서 파전을 하나 시키고 막걸리도 하나 주문했다.
'아. 올해는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는지. 하다못해 모든 걸 잊겠다고 떠나온 자전거 여행마저도 뜻대로 안되는구나.'
자전거를 타는 동안 잊고 있었던 고통의 기억들이 다시 떠올랐다. 막걸리를 하나 더 시켜 먹으며 아내와 통화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주룩 눈물이 흘렀다. 비 내리는 평일 오후, 손님 한명 없는 식당에서 파전에다 막걸리를 마셔가며 전화통 붙들고 우는 남자라니. 식당 주인아주머니 보기가 민망해서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마저 먹고 다시 모텔로 들어갔다. 방 입구에 세워져 있는 자전거를 보니 한숨이 나왔다. 창밖을 보니 비는 계속 내리고, 머릿속에서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어떻게 할까. 사실 일기예보를 보고 비가 올 거라 는 걸 미리 알고 출발했었다. 비가 오면 하루를 쉴 수 있으니 체력을 회복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오히려 더 잘됐다고 생각했다.
'그래! 오늘은 아무 생각 말고 하루 푹 쉬자. 내일 상태를 보고 안 좋으면 하루 더 있지 뭐.'
종일 혼자 침대에 누워 TV를 보면서 빈둥거리며 하루를 보냈다. 저녁엔 온천을 한 번 더 하고, 밥도 먹고, 약도 먹고.
내일은 나아지길 간절히 바라며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발목 걱정부터 되었다.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서 보았다.
아. 전날과 별 차도가 없었다. 뜨거운 물로 찜질은 해야 하기에 1층 온천탕으로 내려가는데 걷기가 힘들었다. 온천을 하고 올라와 침대에 다시 누우니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아내한테 전화를 해 보았다. 올라오라고 계속 성화였다. 나중에 또 하면 되지 않으냐고, 뭐 하러 아파가면서까지 무리하면서 타냐고.
혼자서 자전거 타고 부산까지 내려간다고 큰소리치고 왔는데 이렇게 올라갈 수는 없었다. 그러나 다음날까지 또 이렇게 혼자 여관방에서 보낼 생각을 하니 우울해졌다. 더구나 일기예보를 보니 중부지방은 다음날 늦은 오후가 되어야 비가 그친다고 했다. 아니, 무슨 여름 장마도 아니고 10월에 비가 사흘씩이나.
절뚝거리며 시외버스 터미널에 가 보았다. 동서울 까지 올라가는 시외버스가 한 시간에 한대씩 출발한다고 했다. 출발하려고 대기하고 있는 버스 기사 분한테 물었다.
"아저씨, 자전거도 실을 수 있죠?"
대수롭지 않다는 듯 화물칸에 짐 싣는 건 승객 마음이라고 했다.
다시 절뚝거리며 방으로 돌아와서 고민에 빠졌다. 고민보다 날 더 괴롭히는 건 전날에 이어 그날도 하루 종일, 그리고 다음날도 오후까지 이 방에 혼자 있어야 한다는 것. 컴퓨터도 없고, 있는 거라곤 TV 밖에 없는 좁은 방에서 이틀을 지내야 한다는 것. 아프지만 않으면 근처에 돌아다니면서 구경이나 하겠지만 아파서 맘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하는 게 곤욕이었다.
결국은,
오랜 고민 끝에 올라가기로 결정을 했다.
자전거를 끌고 비를 맞으며 시외버스 터미널에 가서 버스표를 끊고 식당에 가서 밥을 먹었다.
버스 시간이 되어 자전거를 싣고 자리에 앉자 이내 버스가 출발했다. 차창 밖으로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보았다. 창밖이 흐릿한 게 비 때문인지 눈물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이렇게 올라가기는 정말 싫은데. 비도 원망스럽고, 내 발목도 원망스러웠다.
설레던 출발, 아름다운 경치들, 힘들게 달리던 길, 퉁퉁 부은 발목, 혼자 보낸 여관방. 몇 개월간의 정신적 고통과 시련을 잊기 위해 떠나온 자전거 국토종주. 하지만 시행착오로 인해 중도에서 포기하고 패잔병이 되어 올라가는 나.
이제는 세상 일이 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구나.
머물러 있는 청춘인줄 알았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더 내 맘대로 안 되는 세상. 이제는 세상 순리에 순응하는 법을 배워야 할 듯하다. 마음은 괴롭고 우울했지만 그래도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내와 아들 생각에 한편으로는 위안을 얻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다음에 다시 떠나오기로. 다음엔 힘들고 괴로운 일을 잊기 위한 자전거 여행이 아닌, 천천히 즐기는 행복한 자전거 여행을 하고 싶다.
나와, 그리고 며칠간 나와 한 몸이 되었던 자전거. 우리 둘을 실은 버스는 내리는 빗속을 뚫고 고속도로를 달렸다.
첫댓글 한편에 자전거 드라마를 본듯.. 기쁘고 슬프고 아픈 것들이 곳곳에 묻어있어 지루하지 않네요. 다만 그때 어려움을 극복하고 완주했다면 이 글을 쓰는 마음이 어땠을까 궁금해지네요. 아마 의기양양했겠죠. 그놈에 아킬레스만 없었다면. 저도 아주 오래전에 서울에서 양양까지 도보로 종주했었는데 한계령을 넘기직전 인제 원통리에 아주 작은 슈퍼에서 잠시 쉬던 중 지나던 택시가 멈추더니 콜받고 양양으로 돌아가는 차라며 기름값으로 1만원만 달라는 꼬임에 그만 넘어가 한계령을 도보로 종주하지 못한 아쉬움이 지금껏 남아있죠. 그러나 살다보니 성공한 기억보다는 실패한 추억이 더 삶을 풋풋하게 만들더군요. 감동깊게 읽었습니다.
긴 글이라 자칫 지루할까 걱정했는데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울~양양 도보 종주 다시한번 도전하시죠. ^^
재밌게 잘 읽었어요.
항상 청춘으로 알았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내맘 대로 안 되는 세상... 공감이 가요.
다만, 길이가 단편소설 한 권 분량이라 좀 길어보이네요. 수필은 원고지 분량 20장 내외 정도가 적당하죠.
참고로 이 글의 분량은 원고지 87장입니다.
그리고 일주일 단위로 기간을 정할 필요는 없어요. '최신글 보기'에서 다른 이의 게시글 총 수가 10여 개 정도 넘으면
하루에 한 편씩도 괜찮아요. 수필 게시판으로만 치면 연속일 수 있는데 상관없어요. '최신글 보기'만 신경쓰세요~
애초에 수필로 시작한 글이라면 이렇게 길지 않았겠지만 예전에 제 블로그에 여행 일차별로 사진과 함께 올렸던 글을 하나로 연결하다 보니 이렇게 길어졌습니다.
매번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
저는 거의 매일 올리는데요 걱정안하셔도 될 듯 좋은 계획이신 것 같습니다 약간은 자신에게 강제를 해야 게으름에서 유리한 거 아닐까요.개성적이고 일인칭 체험인것은 수필 인연을 읽는 것 같고요 배경 사건 묘사는 단편 소설 하나를 읽은 것 같습니다 풀어내실 것이 많은 것은 큰 원동력이지요 이제 자신의 이야기에서 타인의 이야기를 풀어내러 가실 때 고행은 시작되는 것 아닐까합니다 영혼에 많은 문학을 가라앉혀 두신 선생님들은 그렇게 가는 것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아직은 타인의 이야기를 풀어낼 경지까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저의 모든 수필들은 전부 저의 이야기네요. ^^
삭제된 댓글 입니다.
그렇게도 보실 수 있군요. 확실히 글 쓰시는 분들이라 보는 관점이 일반인들과 다르신 것 같습니다.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