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기행을 아래와 같이 공지합니다.
참석하실 분 추가로 신청받습니다
■ 기 간 : 2023. 4. 8(토) ~ 9(일)
■ 장 소
- 김좌진 장군 생가 · 백야 기념관, 한용운 생가지 역사공원(홍성)
- 신상현 작가의 이비책방(보령)
- 숙소(대천 체리펜션 독채)
- 상화원, 개화 예술공원(보령)
■ 인 원 : 14명
- 김포·인천 : 강순덕(010-2855-7203), 송갑숙, 이성직(운전)
- 안 양 : 윤성식(010-3388-7284), 이시찬, 노수현, 유성자(운전)
- 충 청 : 신상현(010-3437-0697), 박희형(010-4494-0053)
- 서 울 : 안휘(010-9260-1880), 이영
- 양 평 : 류인순(010-2439-7366)외 1명(남편)
- 안 산 : 임한호(010-5697-8940)
■ 참 가 비 : 식비, 입장료 등 1인당 10만 원 내외(추후 정산)
일 시 | 장 소 | 내 용 | 위 치 | 참 고 |
4.8(토) 10시 | 홍 성 | 김좌진 생가, 백야 기념관 | 갈산면 백야로546번길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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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 | 오찬(갈산시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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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시 | 한용운 생가지 역사공원 | 결성면 만해로318번길 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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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시 | 보 령 (대 천)
| 이비양코책방 | 큰오랏3길 55 BM스쿨 1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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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시 | 체크인(체리펜션 4층) · 만찬 ~ | 해수욕장9길 2-19 | 문학의밤 |
4.9(일) 09시 | 상화원 | 남포방조제로 408-52 | 조찬(숙소) |
11시 | 오찬 |
| 장소 미정 (추천받음) |
12시 | 카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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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시 | 개화예술공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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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시 |
| 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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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좌진 생가 · 백야기념관
백야 김좌진 장군은 1889년에 유복한 양반집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공부보다는 말타기와 전쟁놀이를 좋아하여 집 안의 걱정을 사기도 했다지만, 15세 때는 집 안의 노비 30여 명의 종문서를 불태우고 논밭을 나눠주는 등 성숙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18세 때는 호명학교를 세워 집안 재산 전부를 학교 운영에 쏟아부으며 신문학을 교육하기도 하였으며, 1915년 대한광복회 활동, 1920년 북로군정서군을 이끌며 청산리대첩을 이루어내었고, 1925년에 신민부를 창설하는 등 독립운동가로서 민족 자주독립운동을 위해 앞장섰다.
그러나 백야 장군은 1930년, 공산당원 박상실의 흉탄에 맞아 42세의 이른 나이에 안타깝게 순절하고 말았고,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돌아가실 당시에도 “조국을 위해 아직 할 일이 많은데…”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김좌진 장군은 마지막 순간까지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충절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1991년 복원 사업을 거쳐서 생가, 사당,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출처] 충절의 고장 홍주에서 느끼는 독립운동가의 발자취: 만해 한용운 생가 & 백야 김좌진 생가|작성자 Insomniac
■ 만해 한용운 생가지 · 역사공원
만해 한용운 선생은 1879년에 홍주군 결성면에서 출생. 본명은 정옥, 아명은 유천이며 용운은 불교의 법호. 14세가 되던 해에 결혼하였으나 결혼한 지 2년이 되던 16세에 집을 떠나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이후 시베리아와 만주 등지를 떠돌다가 27세 되던 1905년 설악산 백담사에서 연곡의 가르침을 받고 득도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 백용성 등과 함께 불교계 대표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3년형을 선고받았고,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간, 일제 치하 저항 문학의 선구자로서 민족혼을 일깨웠으며, 1913년에 「조선 불교 유신론」을 간행하고, 52세 때 잡지 『불교』를 인수하는 등 불교의 개혁에도 앞장섰다.
1944년 5월 9일, 선생은 조선총독부를 등지고 북향으로 지어진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서 66세를 일기로 입적하셨고, 1962년 대한민국 독립에 이바지한 업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선생은 평생을 '충절'을 지키며 살아가신, 다른 민족 대표 33인과 비교하면 가장 민족대표다우셨던 분이라고 후세에 평가받고 있다.
본래 만해 한용운 선생의 생가는 해방 후 터만 남고 없어진 상태였으나 1991년 복원 사업 끝에 초가집 생가, 사당, 그리고 기념관이 건립될 수 있었다.
1927년 설립된 신간회에서의 활동 당시 신간회 봉투에 쓰인 당시 일본 연호 ‘소화’를 보고 봉투를 몽땅 불태우고는 “소화(昭和)를 소화(燒火)해 버리니 시원하군!”이라고 말씀하셨다는 만해 선생. 만해 한용운 생가를 둘러보면, 당장이라도 선생이 문을 열고 나와 "어서들 오시게, 자유롭게들 놀다 가시라고. 이곳의 숨 쉬는 공기도, 흙 한 줌도 이젠 오롯이 우리 것이지 않나!"라고 말씀하실 것 같다. [출처] 충절의 고장 홍주에서 느끼는 독립운동가의 발자취: 만해 한용운 생가 & 백야 김좌진 생가|작성자 Insomniac
첫댓글 참고로ㆍ 추가인원 많아도 보령(숙소 등등)은 감당할 수 있어요ㆍㅋㆍㅋ 더 많이 오세요ㆍ
감사합니다.
많은 참석 바랍니다.
이런 기회에 김좌진생가도 가보고 역사탐방을 해야 하는데...많은 분들이 참석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