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530리를 걷다(첫 번째)
(데미샘→운암, 2016. 1. 30∼1. 31)
瓦也 정유순
전북 진안군과 장수군의 경계를 이루는 팔공산(八公山, 1,151m) 북쪽 기슭인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 상추막이골 데미샘에서 발원한 섬진강(蟾津江)은 임실군, 순창군, 남원시, 전남 곡성군을 거쳐 지리산 서쪽의 구례군과 경남 하동군을 휘돌아 전남 광양시의 망덕포구로 약530리(212.3㎞)를 흘러 남해로 들어간다. 섬진강은 다른 큰 강과 달리 계곡사이를 흐르는 부분이 많아 경사가 급하고 전답(田畓) 등 평야지대가 비교적 적다.
이강의 이름은 모래가람, 다사강, 사천, 기문화, 두치강 등 많은 이름으로 불리어오다가 고려 우왕 때 왜구가 이강을 통해 지금 광양의 섬거라는 곳에 쳐들어오자 ‘수만 마리의 금두꺼비가 울어대어 왜구를 물리쳤다’는 전설이 있어 두꺼비 섬(蟾)자를 붙여 ‘섬진강’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달빛을 섬광(蟾光)이라고 하듯이 ‘달의 강’이란 뜻이 담겨 있다는 주장도 있다.
데미샘 가는 길은 하얀 눈이 물기를 머금고 무겁게 깔려 있다. 올라가는 길은 잘 정비되어 있지만 쌓인 눈에는 맥을 못 춘다. 아이젠을 착용했어도 몇 번인가 뒤로 미끄러진다. 천상데미(1,080m) 가는 중간지점에서 데미샘은 맑은 물을 뿜어낸다. ‘데미’는 샘 주변이 돌더미(돌무더기)로 되어있어, 이곳 방언에 ‘더미’를 ‘데미’로 부르다가 ‘데미샘’이 된 것으로 추측된다.
강의 발원지에서 항상 느끼는 감회는 “그곳에 서있노라면 모든 세상의 욕심은 사라지고 숙연해 진다. 어떤 미움도, 내 마음의 오욕의 찌꺼기도 다 끄집어내어 깨끗하게 씻어 준다. 태초의 속삭임이 기쁜 눈물이 되어 가슴으로 스며든다.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마저 잠든 영혼을 일깨운다. 우리민족이 살아온 삶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살아 움직인다.”<정유순의 ‘보석보다 귀한 물’ 중에서>
<데미샘>
데미샘 입구에 있는 정자 팔선정(八仙亭)에서 섬진강 답사에 참여하는 모든 도반들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는 고사(告祀)를 정성들여 지낸다. 고사 상에 올라 웃고 있는 돼지머리처럼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활짝 열린다. 미끄러운 눈길 위에 맑고 고운 물소리를 들으며 벡운면으로 오는 길목 원백암마을에는 주인이 없어 허물어지는 빈집이 애처롭다. 백운면 임신마을로 내려 와 장수군 천천면으로 가는 고갯길은 늘씬한 여인네의 허리춤이다.
<고사상>
<원백암마을 폐가>
<장수군 천천면으로 가는 고개>
좁은 하천 양안에는 통나무 두 개를 걸쳐 만든 섶다리가 반긴다. 산세가 높아 구름도 쉬어 간다는 백운면에는 무형문화재 제20호인 우리나라 전통 매사냥 보존회인 응방(鷹坊)이 있고,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시장 간판을 한글로 만들어 걸고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섶다리>
백운동계곡에서 흘러나오는 하천 한가운데에는 거북바위가 언 물에 잠겨 있다. 예로부터 거북은 장수동물로 십장생에 포함도 되지만, 백성의 뜻을 신에게 전달하는 매개자였으며, 수신(水神)으로 인식하여 불 막이로 이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 원촌마을에서는 거북바위가 완전히 물에 잠기면 풍년을 점쳤다고도 한다.
한참을 걸어 나와 보(洑)둑을 가로질러 내려오면 운교리 길옆에는 150년 된 백운면의 물레방앗간이 빨간 양철지붕을 머리에 이고 있다. 방앗간 안쪽에는 디딜방아와 함께 수력을 이용한 도정(搗精)기계들이 그대로 있는데, 원시의 동력과 근대의 기계가 조합되어 하나로 되는 진풍경이 있다. 그러나 큰 도로가 뚫리고 교량이 생기면서 252m나 되는 물길이 끊겨 돌지 않는 물레방아가 되었단다. 원래대로 지켜주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고 큰 불찰이다.
<보(洑)둑길>
<물레방앗간>
<디딜방아>
<근대식 도정기계>
마령면(馬靈面)으로 들어서니 진안의 명물 마이산(馬耳山)이 멀리서 두 귀를 쫑긋한다. 진안읍에서 흘러나와 마이산을 휘감고 흐르는 세동천이 이곳 마령에서 섬진강과 합류하여 맑디맑은 물이 경쾌한 노래 소리로 변주되어 성수면으로 접어든다. 성수면 원좌마을 당산목의 가지는 옆으로 펑퍼짐하게 벌어져 한여름에 시원한 평상이 될 것 같고, 시골 작은 마을에 교회 두 곳이 나란히 있는 것도 이채롭다.
<마이산 원경>
<새동천>
<원좌마을 당산목>
조금 더 하류로 내려오니 풍혈냉천이 보인다. 풍혈이란 한여름 삼복더위에도 찬바람이 나와 얼음이 언다는 동굴인데 요즘은 얼지 않고 찬바람만 약하게 나오는데도 평균온도가 영상섭씨4도란다. 개인이 풍혈창고를 지어 김치 등 여러 물품을 보관하는 곳으로 이용하고, 계단 밑의 냉천약수는 뱃속까지 시원하게 하여 발걸음을 한층 가볍게 한다.
<풍혈창고 내부>
<온도계>
<냉천약수>
엊그제 내린 눈길에 천하가 하얗고 추운 날씨에 섬진강은 대부분 꽁꽁 얼어 말이 없는데 발길은 성수면 용포리 반용마을 앞을 지나친다. 모 종교시설인 수양관이 저녁노을에 물든다. 오늘 걸어 온 백운 마령. 성수 등 진안군 3개면은 섬진강이 발원하여 흐르는 최상류지역이다.
<반용교아래 섬진강>
어제 해넘이를 한 진안군 성수면 용포리 포동마을 입구에서 오늘 첫걸음을 시작한다. 섬진강 수면은 얼음판으로 강물의 흐름이 보이지 않지만 보(洑)사이로 흐르는 물소리는 아침의 심장 뛰는 소리다. 강둑에는 어젯밤에 어느 육식동물이 포식을 하였는지 새의 깃털이 길바닥에 널려 있다. 강 따라 한참을 정신없이 내려오니 이틀 밤을 잔 사선대(임실군)청소년수련원이 눈에 들어오는데, 그새 낯이 익었다고 무척 반갑다.
사선대(四仙臺)는 진안마이산의 두 신선과 임실운수산의 두 신선이 경치가 뛰어난 이곳에서 까마귀와 선유(仙遊)하는데, 하늘에서 내려온 네 선녀가 신선들과 노닐다가 하늘로 같이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이 앞을 흐르는 섬진강을 오원천(烏院川)이라고도 한다. 사선대 높은 언덕에는 운서정(雲棲亭)이라는 정자가 있어 신선의 세계를 내려다본다. 사선대 조각공원과 체육공원이 하얀 눈에 덮여 겨울잠을 잔다.
<오원천>
<체육공원>
울창한 숲속에 자리한 운서정(雲棲亭)은 김승희(金昇熙)란 사람이 부친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일제강점기인 1928년부터 6년에 걸쳐 지은 정자로 정각과 동∙서재, 가정문(嘉貞門) 등으로 이루어졌다. 이곳에서 우국지사들이 모여 망국의 한을 달래던 곳이라고도 한다.
<운서루 전경>
<운서루>
자동차가 쌩쌩 달리는 전주∼남원 간 국도를 따라 임실 관촌역 앞으로 내려와서 제2오원교를 건너면 바로 임실군 신평면이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주인이 떠난 폐가가 먼저 보이고, 조금 더 올라가니 신평 농공단지가 있어 차량의 움직임이 바쁘다. 대리초등학교 간판도 보이고, 대리교육문화마을 장승도 서 있는 것으로 보아 지나는 곳이 대리마을인가 보다. 대리초등학교 앞에 ‘말목書堂(서당) 多笑(다소)글방’이란 현수막이 강바람에 펄럭인다.
<신평면 폐가>
<대리초등학교 앞>
제6탄약창 까지 갔다가 관촌으로 되돌아와 청정지역에서만 서식하는 다슬기탕으로 오전을 마감한다. 된장이나 다른 양념 없이 맑은 물에 수제비를 떠 넣어 만든 국물이 아주 시원하다. 그리고 별식으로 올라온 차조밥도 입맛을 댕긴다. 식당 천정부근에 매달아 놓은 노란빛갈의 차조 묶음이 고향의 처마 밑 정경 같다.
<차조묶음>
다시 신평면 원천리 다리입구에서 오후 걷기를 시작한다. 얼음이 녹은 물 흐르는 소리는 나의 힘찬 맥박이 뛰는 소리다. 신평면 문화회관 앞을 지나 용암리 마을을 가로지르니 임실 진구사(珍丘寺) 절터가 보이고, 보물로 지정된 석등이 보이는데,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큰 석등이란다.
<원천리 다리>
<신평문화회관>
이 석등은 신라 후반기 때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아쉽게도 석등의 윗부분이 파손되어 원래의 모양이 훼손되었지만, 섬세하고도 정교한 문양이 돋보인다. 팔각의 받침대에 새긴 연꽃과 구름무늬, 가늘고 길다란 안상(眼象)은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큼직한 귀꽃으로 장식된 덮개는 웅장한 느낌을 준다.
<진구사지 석등>
신평면 용암리를 지나 운암면으로 접어든다. 하류로 내려갈수록 수량도 많아지면서 물 흐름속도가 느려지는 것 같다. 아마 운암댐으로 저수지가 된 옥정호가 가까운 모양이다. 학암리마을 노송정은 보수공사를 하는지 파란 치마로 몸통을 가리고 있고, 섬진강을 건너는 선거교 옆 단애(斷崖)에 부딪히는 햇살은 굴절되어 더 큰 곡선을 그리며 다가온다.
<학암리마을 노송정>
<선거교 옆 단애(斷崖>
첫댓글 섬진강이 데미샘에서 발원한다는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상세히 그유역울 설명하해주시니 감사하기이를데 없네요
저도 어디다가 섬진강에 대한 글을 쓸일이 있는데 선생님 글에서 참조해야겠어요 괜찮지요?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