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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만리 예담은 여만리 서낭단이었다.
1) 형태와 지리, 지형적 고찰
평창의 여만리는 지리적으로 강과 산으로 막힌 퇴적지의 평야로 내왕의 입구는 시루목 아래의 여울이나 배로 강을 건너야 한다. 장마로 강물이 불땐 송개산 중턱을 타고 상리로 나올 수도 있다.초교시절 장맛비가 강물이 불면 여만리 학생들은 수업을 중단하고 빨리 집으로 돌아 가라는 교무실의 지시가 내린다. 강물이 불어 이미 배는 묶이고 늦기전에 몇 배 거리의 빗속의 송계산을 타고 집에가는 힘든 하교를 한다.
역사논증에서 일상의 이야기를 들춰봅니다만 이 이야기에서 여만리 가는 길은 배와 섶다리 그리고 시루목 여울을 건너는 것 이외에는 육로의 길은 없고 장마로 수로도 끊기면 최후에는 송계산을 타야 한다. 이로서 볼 때 시루목 여울을 건너는 것이 가장 첩경으로 이곳이 여만리 주 도로였다. 왜 주도로라 하는가 하는 점은 아래에서 고찰하는 누석단 서낭단이 두 기가 여만리 쪽에 있기 때문이다. 이 누석단은 현재 사진 한 장 찾을 수 없기에 누석단의 형태와 지형을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시루목 여울을 건너서 여만리 쪽에서 강변과 흙이 나오는 밭과의 경계는 조금 높게 뚝처럼 되어 있고 그 아래쪽에 긴 밭이 있는데 강변쪽 방향에는 5~60cm 높게 호박돌로 쌓여 있고 그 위에 두 기의 돌탑 중 위쪽 큰 것은 지름 3~4m. 높이 5~6m이고 아래쪽엔 작은 누석단으로 약 1~2m 정도 작은 원뿔형 탑이 두 기 있었다.
이 탑의 호박돌을 크기가 두 손으로 들어야 하는 크기로 이 누석단은‘80년대에 여만리 제방 축조시 돌을 재사용하고 그 자리는 제방속으로 묻혀 버렸다, 따라서 이 누석단 사진은 구할 수가 없다. 그러기에 이곳에 지형을 필자가 고교시대의 기억으로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자세하게 설명하면 직사각형의 밭이 있었는데 아마도 밭을 개간할 때 밭의 돌들을 치우는데 강쪽으로 버리며 둑을 높이는 효과를 가진 듯 하다. 이 위에 원뿔의 두 기의 돌 누석단이 있었으며 가장자리는 수직의 단으로 정리한 듯한 점으로 보인다.
평창에서 예담이라 하는 설은 예담을 혹자들은 뙈담이라고도 하며 몽고군 항쟁정도에서 전투를 준비하는 방어막 정도로 추정 하고 있다.뙤담의 뙤는 오랑캐를 말함에 몽고군 항쟁시 몽고군이 쌓았을 것이란 추정에서 필자가 우선 느낀 점은 원뿔형 방어막은 왜 필요한지? 아마도 설명할 길이 없어 궁색한 표현이라 생각하였었다.
그리고, 「강원도의 선사문화」책 도록에서는 여만리의 "예담"과 응암리의 "이담이라 불리는 돌무지를 모두 적석총(積石塚)이라 한다, 또한 평창문화원 발간의 지명지에서 여만이의 예담은 기록조차 없지만 응암리의 이담은 상세 설명하며 전투를 위해 돌을 모았다는등 여러가지 설 중에 적석총을 제일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그러나 필자의 연구로서는 예담이나 적송총이 아니라 여만리 누석단 서낭단임을 새로히 밝힙니다.
2) 책『강원도의 선사문화」
<1986 한림대학 아시아문화연구소 발행 / 평창편 발췌 인용>
◆ 소재지 ; 여만리. 명칭-적석총. 초기철기시대
◆ 조사내용- 현지에서는 "일담" 또는 예담'이라 불리웠는데 평창강의 제방을 쌓는데 이용되어 현재는 사라졌다.
*<강원도의 선사문화> 1986 한림대학 아시아문화연구소 발행 p100 18-5
3) 여만리 예담이나 적석총이 아닌 서낭단이었다.
옛 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 마을 어귀에 서낭당에서 마을 수호와 전염병 예방의 기원등 祭儀의 고사를 지내고 빌며 소원을 비는 기복신앙의 문화는 옛 우리 생활속에 문화였다. 아마도 70년대 새마을 운동을 깃점으로 시대사의 변천속으로 사라진 듯 하지만 이러한 신앙은 우리의 마음속엔 아직도 그에 대한 믿음의 신앙은 남아있으며 또한 우리의 문화로서 생활 속에 깊이 녹아 있다.
먼 길을 걸어갈때, 아니면 강가의 놀이에서도 돌을 쌓아놓고 무엇이든 잘 되라고 바라는 마음과, 그 보다 좀 더 이해하자면 뒷뜰 장독대에 새벽에 기른 정화수를 올려놓고 두손 모아 빌며 기원하는 마음은 기복신앙으로 서낭신앙과 동일한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네 사회는 오색 천의 깃발과 누석단에 당집의 서낭당은 꺼려하면서도 진정 마음 한 구석엔 인간사의 심정을 하늘에 맞기는 신앙심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각 동리는 두레의 향약과 마을 공동체로서 마을 어귀에 서낭등을 만드는데 위에서 언급한 지리적 고찰에서 보듯 여만리는 육로가 없기에 시루목에서 여울을 건너가는 길이 첩경으로 이곳을 건너서 서낭단이 위치해야 좋을 듯 한 지역이다. 위에 기술한 두기의 서낭단이 이러한 지점에 자리잡고 잡고 있다’
서낭당은 성황당(城隍堂)과 같은 뜻이며 대상체는 신목의 나무와 돌 누석단으로 신목에는 느티나무, 밤나무등은 제외된다, 보통 마을 어귀나 고갯마루에 원뿔 모양의 돌무더기를 쌓은 누석단(累石壇)과 신성시되는 신수(神樹) 또는 장승으로 이루어 지는데, 서낭당은 당집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누석단과 신수를 말하는 것이며 당집은 각 동리마다 그들의 수호신을 모신 곳이다.
여기에 정형의 돌 누석단 서낭단은 두 개가 쌍을 이루고 있아야 되는데 여만리 천변의 서낭단은 그 규모에서도 큰 것으로 서낭단의 격식이 맞는 아마도 우리나라 돌 누석단 서낭단의 대표적 예로 볼 수 있슬 것이다.
주진쪽의 방향의 위의 무더기가 더 높았으며 이러한 구(丘)을 만듬에 앞이 높고 뒤가 낮은 것을 모구(旄丘)라 하는데 이러한 서낭당이 정형이며 이로서 태백산의 민족정기를 잇는 맥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4자성어에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란 뜻은 여우가 구릉을 향해 머리를 향한다는 의미이지만 어쩜 언덕을 향하는 바램은 인간의 이상인듯, 과거 고구려에서부터 우리의 역사에 임금도 장수도 모두 깃발로 상징하지만 서낭당의 모구에 꼽히는 깃발은 인간이 높은 하늘을 향해 제를 드리는 것이다.
하지만 시대의 발전에 의한 편천으로 말미암아 제방으로 변하였지만 아쉬운 점은 이의 사진 한장이 남아 있지 못한 점이다.
필자는 이 글을 2017년에 필자의 사이트에 “여만리 돌 누석단은 예담도 아니고 적석총도 아닌 여만리 서낭단”이라고 게시글을 발표 하였다. 이에 댓글을 인용합니다.
◎ 댓글1 - 정원대의 채록의 증언자 시루목 고개 넘어의 전상호씨는 여만리 강가의 돌 누적단(일명 뙤담)이 본인의 글에서 밝힌바대로 여만리 성황단이 맞다하며 젋은 시절에 역사 취미가 있어서 실측을 했었는데 돌 누적단 규모는 80m*30m로 높이는 5m라 합니다.
◎ 댓글 2 – 증언자 ; 이필현 (여만리 출신), 서낭단으로 뒤로 받을 지나서 당집이 있었는데 1,972년 수해로 떠내려갔다고 증언 합니다.
이 증언들은 현재도 이곳 주민들은 잘 알고 계실 듯 합니다. 학자들의 적석총이라 함은 조금의 증언에 의한 연구도 없었으며 50년대 서울대 교수 송석하가 만들은 민속학의 범주에서 현재의 위에 민속학 박사들의 학자들까지도 국사성황사나 서낭단을 미신이라 접어두고 역사를 어떻게 이해 합니까?
여만리 적석총이란 이해는“여만리 누석단 서낭단”으로 바르게 이해하여야 합니다.
응암리 돌무지의 고찰
평창읍 응암리 4. 5. 5-1 번지에 걸쳐있는 돌무지에 대하여『강원도의 선사문화」에서는 적석총이라 하고 있다.
1) 적석총의 문헌적 기록
*『강원도의 선사문화」 1986 한림대학 아시아문화연구소 발행 p100
*소재지- 평창읍 응암리 5. 명칭-적석총, 초기철기시대
현재 주변은 밭으로 응암리 4번지이나 적석총만큼은 응암리 5번지로 군유지 임야(304평)로 되어있다.
여만리 적석총은 "예담" 또는 "일담이라 하지만 이곳은 "이담'이라 불리고 있다. 전체적으로 40m× 20m의 크기로 높이 1m정도로 테두리는 큰 자갈을 이용하고 안쪽으로는 잔 자갈을 채우고 한 가운데는 잔 자갈로 만든 석곽이 있었다 한다. 마지리의 제방을 쌓기위해 돌을 옮겨가고 현재는 파괴되었다. 돌을 실어나르는 과정에서 큰 칼과 김해식 토기 3점이 출토되었다.
⚫ 평창문화원이 2016년에 발행한<지명지>에서도 초기철기 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응암리 적석총과 출토된 가야식 토기 사진>
▲『강원도의 선사문화」1986 한림대학 아시아문화연구소 발행 p72
2) 응암리 적석총에 대한 문제제기
『강원도의 선사문화」책에서는 응암리 적석총은 BC 200~AD라 표시하는데. 이러한 명시는 어떠한 사료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토기 한 점이 김해토기하는 사료밖에 없기에 이 김해식 토기에 연유하여 BC 200~AD,라 한다면 김해토기는 가야 토기로 평창에 까지도 가야의 범주에 놓이는 문제도 있다.
평창 하리 청동기 유적은 BC 500년으로 연도가 측정되었으며 여기서 고인골은 초기 석관묘를 사용했기에 응암리 돌 무지를 적석총이 함에는 지역적 공간성으로 부정확한 단면도 보이고 있다.
여만리와 응암리의 돌 누적단 모두 적석총이라 하지만 필자는 위 여만리 놀 누석단은 신을 모시는 사당까지 있는 서낭당으로 밝혔으며, 응암리의 돌무지는 적석총이라함의 적석총의 양식에 충분치 못하고 또한 40m의 적석총이라면 하나의 부족집단의 세력권을 성했어야 하지만 토기 3점 나오는 등으로는 큰 석석총이라 볼 수 없으며 사진의 왼쪽만을 적석총이라 하는바, 적석총이라 하는데 총(塚)자는 무덤이란 뜻이다.
또한 여기서 논할 바는 아니지만 광개토태왕비나 장군총, 마야, 아즈택 문명의 신전이나 이집트 기자 피라밋, 그리고 서안(서안)에 천 여기의 비공개 피라밋, 고조선 이전의 환국시대 무덤도 광개토태왕 묘등으로 삼각 층고의 계단식 분묘를 하고 있는데 사진의 돌 무지를 조상의 묘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인간의 발전 역사는 이러한 계통적 추구에 의한 것으로 이어져 오고있기 때문에 이 모든것이 하나의 문화권에서부터 출발한 것이라고 본인은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다.
현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총(塚)은 무덤을 말 합니다, 적석총은 고구려나 백제문화에도 나타나고 있다,
큰 적석총을 논하기 보다는 백제의 초기 적석총인 삼전도 적석총을 보면 정말 초기처럼 느껴지듯 별로 크지 않은 돌로 3단을 쌓았는데 4각 한 변이 약 20m, 높이는 1,5m 정도이다. 여기도 층위의 단이 있고 정성드려 쌓은 점을 볼 수 있다. 위 사진에서 응암리 4번지는 적석총으로 지목하고 있으나 여기에는 오래되어 부서져 내린 것으로 보기엔 그기초도 없고 조상을 모시는 묘를 성의없이 쌓았다는 느낌과 또한 장마가 지면 범람하는 이곳에 쌓아쓸까 하는 의문도 가지며 가장 큰 의문으로서는 40*20m의 크기로 쌓았다면 큰 부족이 존재하였어야 할텐데 지금도 응암리는 20여호에 그보다 이만한 규모의 적석총이를 만드는 세력의 범위로 마을이 작다 하겠다. 여기에 하나의 문제 고찰의 고리는 적석총 안쪽에는 잔 자갈을 넣었다 하였다.
응암리 전경
3) 문제고찰
이 돌 무더기를 헐어서 제방에 사용할때 각기 다른 층에서 토기등이 출토되었다는데, 그러면 주거 공간이었슬까?? 알 수 없지만 지표 조사가 되었다면 적석총 안에서 나온것은 없는 듯 하다. 그러기에 적석총이라 함엔 무언가 이상하리란 판단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사각 박스형이 아닌 강물의 범람쪽인 위쪽과 강쪽의 두 면만 조적한 “ㄱ"자 형태의 돌 누적단이다. 이를 돌무지 적석총이라 할 수 있을까 의문이다.
응암리 지형적 특성을 보자면 감입곡류에 의한 평창 어디에서나 유사한 유형의 산 기슭에 평창강이 직각으로 꺽여서 내려가며 퇴적층이 쌓여서 만든 마을이다.
중리의 두만여울도 동일한 지형으로 물이 굽어 돌아가기에 지형의 낮차가 커서 여울을 만드는데 이곳의 강물는 두 줄기로 갈려져내린다. 그러기에 강 유역은 넓은 공간을 가진 점을 볼 수 있다.
응암리도 강물이 굽애돌며 낙차에 물살이 센 여울을 만들고 있다. 이 점에서 돌 응암리 5번지 일대의 돌 무더기를 논하기 전에 위 사진에 노란색 반 원은 강을따라 제방이 있었던 곳이다. 이 제방은 7~80cm이상의 돌로서 80냔대 초 마지리 제방공사에 약 200여 차를 실어 날랐다, 이때 돌무지에서도 큰 돌은 가져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제방이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제방이란 강물의 범람을 막기 위해 축조되지만 응암리에서 이 제방은 마을을 보호하기 위한 중요한 시설이었다.
위 지도에서 보면 이 제방을 쌓은 이유는 장마시 강물이 응암리를 밤한다는 점 때문이다. 제방이 시작되는 지점은 지면의 고저에 의해 강물은 똑바로 흐르며 옆으로 작은 자갈이 섞인 토사를 퇴적시킨다. 적석총 가운데에 이 잔자갈을 넣었다 하는 기록을 볼 수 있는데 응암리 앞 부분에는 이러한 토사로 퇴적층이 쌓임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강물이 불면 이를 넘어서 물은 직류하여 사진 아래의 응암리 마을까지도 수몰되는 문제를 고대로부터 가진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자세히 보면 이 일대는 밭이지만 그 아래는 논이 형성되고 작은 마을로 구성되는데 이러한 응암리는 전체가 습곡산지보다는 배사토의 퇴적층으로 많은 부분이 수몰된다.
그러면, 80년대에는 제방을 해체하여 아랫 마을에 제방으로 사용하는데 이곳이 범람지인데 제방이 더 이상 필요치 않은가 하는 문제가 봉착된다. 제방을 쌓을때에는 분명 범람을 방제하기 위한 마을로선 중요한 공사였겠지만, 이러한 인공적 시설로 인하여 산을 지나 넓은 공간으로 강물은 버져 나가며 가장자리로 밀려나는 잔 자갈모래의 퇴적층이 다시 쓸려 내려가지 않게 되고 퇴적되어 현재로서는 높은 지층으로 변하여 제방이 없이도 똑같은 효과를 가지기에 제방 축돌이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 점으로 보인다. 여기서 이 제방은 일반적으로 사방공사에 의해 축조되는 높은 제방이 아니라 한 아름이 넘는 큰 돌로 놓여진 것이다.
이제 이 제방이 축조되기 이전에 돌무지는 강가이지만 강따라 쌓은것도 아닌데 어떠한 작용을 하였는가 하는 점이 문제가 된다. 윗쪽의 노란 반 원형 선 부분의 제방 이전에는 아래의 타원형의 돌무지는 ‘ㄱ’형이다, 이로볼때 지형상 이 지점에서 범람하면 아래 마을이 범람한다는 점을 오랜시간에 현장적으로 터득하였을 것이다.
이곳에 제방을 쌓은 것으로 이 돌 무더기의 작용은 강물의 범람시 마을이 반으로 갈라지며 수중화됨을 방지하는 제방으로 또 하나의 기능으로는 여울의 낙차가 커서 범람시에 유속의 힘에 의해서 아래 마을의 강변은 토사가 퇴적되는 것이 아니라 깍여 실려 내려가는 현상으로 마을이 점차 유실되기에 바로 돌 무더기 이 지점에 범람하는 센 물살을 죽여 느리게 하는 작용릏 함으로서 물의 유속이 느려지게 하여 장마시에 바로 밑은 여울 아랫쪽 마을 앞쪽에 토사 유실이 반대로 쌓여 퇴적하게하는 기능으로 현재는 모래턱이 제방화 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이 한 번의 역사가 아니라 자주 범람시에 이러한 원리 작용을 파악하였슬 듯하며 오랜기간 쌓여진 것이라 볼 수있으며 이제방이 일자현이 아닌 ㄱ 자 형에 아랫쪽으로 안쪽으로 들어오는 이유는 아래쪽은 일자형으로 내려오지 않고 지형과 물길의 필요 사유에 안으로 좁은 결과를 마련하며 이 돌 무더기의작용은 강물의 범람시 마을이 반으로 갈라지며 여기서 토기가 세점 발견된 것은 이곳은 당시 마을서 멀기에 취사시에 토기 3점이 남은 것등으로 추정해 볼 수 있으며, 한번의 계획적인공사 보다는 오랜 시간동안 다시금 높이고 하는점으로 물 수량적으로는 일자형이란 점이다
그리고 4번지의 사진에 보이는 맨 끝쪽에 돌 누적단은 이러한 제방의 목적이라기 보다는 다른 논과 밭은 개간을 위해 치워지는 돌들을 가져와 버려진 무더기란 점의 이해이다.
필자로서는 적석총이 아니라는 이해에 대하여 그 반증으로 장마시 이 부분을 타고 마을이 침수하는 문제에 대응하는 제방이라는 견해입니다.
⚫ 증언및 현장 협조; 응암리 주민 이용춘
(응암리를 확인후 지적바람)
평창역사 연구란 책에 수록할 것인데 분량이 450p 넘어가면 비중이 약한 점들은뺄 수 있다. 잘 검토 바란다.
<중리의 돌 누적단의 이해>
중리의 공동묘지 아래에 이러한 돌 누적단이 있는데 이 문제도 아직 해답을 찾지 못하였는데 이 지역은 1,930년대 제방공사와 사방사업이 있기 전에는 천변이었다. 장마나 홍수시에는 범람하는 지역으로 제방공사로 인하여 경작지 논을 뜨게된다. 당시 논은 천수답이나 일부 관계시설이 용이한 계곡물을 막아 논이 형성되었지만 제방 축조 이후에는 중리보를 막고 이곳이 농지로 변한다.
이때 천변의 돌을 모아 탑처럼 쌓을 수도 있지만 일제 강점기에는 집의 기둥도 우리는 일반적으로통나무 그대로 사용하지만 일본 방식은 직각 목재를 사용하였듯이 논의 개간에서도 돌을 한쪽으로 정돈하여 쌓은 것이란 이해이다. 여기서 이 돌누적단이 관계시설의 공공적인 도랑 건너편에 있었다면 문제의 성립은 않되지만 농지쪽에 있다. 그리고 제방과 이에 따른 중리보의 축조에 의해 하평까지 관계수리가 이어지며 논이 생성되며 평창인들을 쌀밥을 구경할 수가 있었다. 읍내 시장내에도 정선이 고향인 사람들은 쌀밥 먹으려고 평창으로 이사왔냐는 농담을 많이 듣는다 한다.
즉, 당시에 농사지으면 일제는 30%의 세금을 가져갔기에 농민은 울상이었지만 평창은 많은 옥토를 마련하였다. 물론 평창읍내는 10개의 보가 있듯이 농민은 고생하였지만 그 보상은 받을 수 있는 지역이었다. 인근 영월이나 정선은 평창 농토에 절반 면적도 못된다. 당시 정선사람이 머슴으로 일년내내 쌀밥 한 공기 먹어보지를 못하였다 하며 저 백파령을 넘어가면 쌀밥 구경을 할 수 있기에 주인몰래 도망와 현재 안미에 살고 있다 한다. 조금 빗나간 듯 하지만 이 책의 제목이 평창 역사의 연구이고, 연구란 여러사람들에게 이해의 목적을 가지기에 인근 영월, 정선과 평창의 비교론적 차별성으로 당 시대의 일면을 서술한 것입니다.
돌담의 이해로 유럽의 전원의 사진에서 언덕아래로 많은 농지가 보인다. 그리고 밭 가장자리 따라 길게 내려가는 낮으막한 돌담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논농사이기에 물의 수로와 논뚝의 시설이 필요하지만 그들은 밀이나 여러 농사에 밭 뚝까지 만들 이유가 없는데 왜 돌담인가 하는점으로 이는 밭의 개간을 위해 정리한 돌을 깨끗하게 무져 놓은 것이다. 이러한 점은 우리 주변에서도 많이 볼 수있으며 중리의 돌담은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한다.
ㅇㅇㅇㅇㅇㅇㅇㅇㅇ
< 이 글은 평창 역사서에 수록하는 원고입니다>
그럼 다음으로는 평창애 어떠한 문제를 다루는가, 또한 역사는 무엇인가 하는 관점을 서술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