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21일 수요일 [(자) 대림 제4주간 수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성 베드로 가니시오 사제 학자 기념 허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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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는 노루나 젊은 사슴처럼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는 연인의 모습을 노래한다(제1독서). 잉태한 마리아가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엘리사벳을 찾아가 문안하자 엘리사벳은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하고 큰 소리로 외친다(복음).

<보셔요, 내 연인이 산을 뛰어넘어 오잖아요.> ▥ 아가의 말씀입니다. 2,8-14<또는 스바 3,14-18ㄱ> 8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 9 나의 연인은 노루나 젊은 사슴 같답니다. 보셔요, 그이가 우리 집 담장 앞에 서서, 창틈으로 기웃거리고, 창살 틈으로 들여다본답니다. 10 내 연인은 나에게 속삭이며 말했지요.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11 자, 이제 겨울은 지나고 장마는 걷혔다오. 12 땅에는 꽃이 모습을 드러내고, 노래의 계절이 다가왔다오. 우리 땅에서는 멧비둘기 소리가 들려온다오. 13 무화과나무는 이른 열매를 맺어 가고, 포도나무 꽃송이들은 향기를 내뿜는다오.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14 바위틈에 있는 나의 비둘기, 벼랑 속에 있는 나의 비둘기여! 그대의 모습을 보게 해 주오. 그대의 목소리를 듣게 해 주오. 그대의 목소리는 달콤하고, 그대의 모습은 어여쁘다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9-45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신 마리아는 세례자 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늦둥이를 잉태한 엘리사벳과 달리 마리아는 결혼도 하지 않고 아기를 잉태한 처지입니다. 그러니 기쁨은커녕 불안과 초조함으로 숨도 크게 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마리아를 엘리사벳은 따뜻하게 위로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얼마나 따스한 위로입니까? 앞날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에 가득 찬 마리아에게 엘리사벳은 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사실 내가 어려울 때, 누군가 내 곁에 있어 주면 얼마나 힘이 됩니까? 우리도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배려하고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내가 다른 이에게 힘을 주는 존재가 된다면 나는 더 큰 힘을 받을 것입니다. 더욱이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공통된 아픔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아이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정확히는 몰라도 나름대로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물론 그 일은 엄청난 고난의 길입니다. 세상의 그 어느 어머니가 자식에게 이런 길을 걷도록 하겠습니까? 하지만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하느님 뜻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뢰 하나로 불확실한 미래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런 여인들이 하나 되어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애절하면서도 아름다운 삶이기에 하느님께서 늘 함께하실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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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님의 80회 생신을 진심을 축하드리며 나자렛의 산골 소녀 마리아가 사촌 엘리사벳이 살고 있는 아인카림으로 서둘러 길을 떠났습니다. 길을 떠난 이유에 대해서 여러 가지 추측을 해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우선 제 머릿속에 떠오른 길 떠난 이유는 ‘난감함’ ‘당혹스러움’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물론 아기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가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처녀 잉태’란 엄청난 대 사건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확실히 믿습니다. 그러나 그 어린 소녀가 결혼도 하기 전에 아이를 가졌고, 점점 불러오는 자신의 배를 바라보며 당혹해하는 모습을 그려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산모였던 마리아가 자상한 시부모님의 따뜻한 보살핌 아래 아무런 걱정 없이 출산을 준비했어도 힘든 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로부터도 이해받지 못하는 특별한 잉태 앞에 가녀린 소녀 마리아가 감당해야했을 괴로움이 얼마나 컸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이윽고 기진맥진한 마리아가 유다 산악 지방에 유치한 아인카림에 도착합니다. 산전수전 끝에 겨우 사촌 엘리사벳의 집 마당으로 들어섭니다. 어떻게 보면 미혼모에다가 오랜 여행길에 지칠 대로 지친 마리아의 모습은 참으로 측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미혼모 마리아를 맞이하는 여인의 모습은 더 가관이었습니다. 호호백발 할머니, 돌아가실 날이 그리 멀어 보이지 않는 노파 엘리사벳이 불러오는 배를 겨우 감당하며 마리아를 맞이한 것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니 참으로 웃기는 장면이요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한쪽 여인은 이제 겨우 소녀티를 벗어난 미혼모요 다른 한쪽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해외토픽감이다.’라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올 정도의 노산이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적인 시각으로는 도저히 용납되지 못할 사건이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상봉이었지만, 하느님의 시각, 성령의 눈길로 바라보니 이보다 더 기쁜 사건이 다시 또 없었습니다. 이미 하느님의 천사로부터 뚜렷한 사명을 부여받은 두 분이었기에 너무나도 웃기는 이 상봉장면이 절대로 웃기지 않습니다. 이 특별한 사건은 이 세상 안에 하느님께서 뚜렷이 현존하고 계신다는 명확한 표지였습니다. 따라서 미혼모와 노파 두 사람은 두 손을 부여잡고 대성통곡을 터트리지 않습니다. 서로를 얼싸안고 위로의 말을 던지지도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들에게 하신 대단히 특별한 큰일을 바라보며 하느님의 업적을 찬미하고 노래합니다. 이 세상 그 누구로부터도 이해받지 못하고 환대받지 못하던 마리아를 극진히 환대하는 엘리사벳의 모습이 눈에 띕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이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복음 1장 42~45절) 며칠 전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80세 생신을 맞아 바티칸 광장 근처에서 기거하는 노숙인 8명을 바티칸 식당으로 초대하셨다는 소식이 전 세계에 타전되었습니다. 습관 되지 않은 분들에게는 참으로 괴로운 일이겠지만 우리 교황님께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이벤트였습니다. 편안한 얼굴로 노숙인들과 함께 앉아서 점심식사를 하시고 그들과 담소를 나누시는 모습에 참으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런 느낌은 저만 받은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교황님 생신 관련 기사가 국내 일간지에도 일제히 보도되었는데, 인터넷 기사에 딸린 댓글을 바라보며 저는 한참을 웃었습니다. 수천 수 만개의 댓글들이 줄줄이 달렸었는데, 교황님의 감동적인 모습을 칭송하는 댓글도 많았지만, 다른 성직자들, 타종교 지도자들, 정치지도자들은 과연 뭘 하고 있는가? 하는 비난의 댓글들도 상당했습니다. 요즘 저를 포함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교황님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피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ㅋㅋ
저도 유학시절 바티칸 광장 주변에서 노숙하는 사람들을 숱하게 봐왔습니다. 마치 엘리사벳이 오랜 여행길에 지친 마리아를 따뜻이 환대하듯이 노숙자들을 극진히 환대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에게서 우리 교회의 희망을 봅니다. 교황님의 80회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부디 오래 오래 우리 곁에 남아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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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십니다, 믿으신 분!”
저의 집은 매우 가난하였습니다. 한 번은 신학교에서 기도를 마치고 함께 밥을 먹기 위해 내려가고 있는데 저의 목 뒤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어휴 촌스러워!”
아마 제 이름까지 말했었는지 저는 그것이 저를 향해 하는 말임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제 이름 자체가 촌스러운데다 워낙 촌스럽게 컸기에 그 촌티란 것이 도시에서만 살아온 이들에겐 어렵지 않게 보이나봅니다. 젊은 사제가 뭐 얼마나 시골스럽게 컸을까 생각도 하실 수 있으시겠지만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동네에 전기가 들어왔다고 한다면 환경이 어땠는지 대충 짐작을 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 때는 유치원이 있는 줄도 몰랐고 우유 먹을 돈도 없었고 신발 살 돈도 없었고 촛불 켜 놓고 공부하였고 겨울엔 따듯한 물이 모자라 형이 씻은 물에 또 씻어야 했고 자동차 배터리를 충전시켜 와서 9인치 흑백텔레비전을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사제가 된 지금 이런 모든 것들이 저의 경험을 풍부하게 하기 위한 하느님의 은총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지만 어렸을 때의 가난했던 경험들은 밤하늘의 보석처럼 제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아직도 좋은 묵상거리와 강론거리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제가 사제가 되지 않았고 세상을 비관하여 사는 사람이었으면 그 과거를 어떻게 보게 되었을까요?
‘난 태어날 때부터 지지리 복도 없었지. 우유도 못 먹어서 키도 못 컸지, 과외도 한 번 못하고 하숙도 한 번 못해서 몇 시간씩 통학하며 공부도 제대로 할 수 없었지. 그렇다고 세상이 나에게 해 준 것이 뭐가 있어? 이놈의 세상!’
어쩌면 그 가난이 지금의 비관적인 삶의 핑계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것은 저에게 커다란 선물을 해 주었습니다. 저는 시골에서 그런 것들을 겪으며 산 것을 하느님께 너무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저와 같은 연령대에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도 거의 없고 또 강론에서 보시면 아시지만 저의 많은 묵상 자료들이 어렸을 때의 어려운 경험에서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가난이 너무 자랑스럽고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가난이란 것을 조금을 알기 때문입니다.
제 기억 속에 남아있는 가족의 가장 따듯한 이미지 중에 하나는 전기가 처음 들어왔을 때 전기밥솥 주위에 둘러 앉아 자동으로 밥이 되는 것을 보고 온 가족이 놀라고 신기해하던 모습입니다. 잘 살게 되면서 경험하지 못하게 되었던 수많은 것들을 미리 경험할 수 있는 은총을 주셨던 주님을 찬미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로마 8,28)
믿음이 있다면 모든 것이 은총으로 변합니다. 물론 어떤 것들은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는 고통일지라도 믿음의 눈으로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사랑의 섭리입니다. 고통이 믿음을 통해서 그렇게 새로운 희망과 기쁨의 싹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차 성모님의 복되심이 그 분의 믿음 덕이라고 칭송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믿지 않아 벙어리가 되었던 즈카리아에 비해서 성모님은 믿어서 행복한 분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삶은 일곱 개의 칼로 심장을 찔리는 고통의 연속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뜻을 따르고 있다는 양심의 위안으로 평안한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이런 믿음으로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단 한 시간도 누려보지 못합니다.
성모님이 믿음으로 행복하신 분이시라면 우리도 성모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신앙인의 모범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겸손하여 믿을 줄 아셨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자아를 버린 겸손한 사람에게만 성령의 은총이 내려와 믿을 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항상 하나입니다. 성모님처럼 겸손하고 깨끗해집시다. 그러면 믿음과 행복을 저절로 얻게 될 것입니다. 그 분이 바로 우리 깨끗한 마음의 구유에 새로 태어나게 되고 우리와 한 몸이 되실 ‘성체’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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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대림 4주 수, 루카 1,39-45(16.12.21)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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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을 품는 축복과 기쁨 ♣
오늘 제 1독서는 구세주를 기다리는 교회를,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와 창틈을 기웃거리고 창살 틈으로 들여다보는 노루나 젊은 사슴과 같은 연인으로 비유합니다(아가 2,8-9.14). 그렇게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것은 설레고 벅찬 기쁨을 안겨주며 복된 ‘은총의 사건’입니다.
마리아는 성령에 의해 하느님을 품음으로써 은총을 가득히 받으시고, 충만한 기쁨의 어머니가 되셨으며(루카 1,28),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신 분이 되셨습니다(1,42). 여기서 무엇을 품고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봤으면 합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가는 내 삶의 질을 가늠하는 관건이 되지요.
남을 해치려는 생각과 악하고 불순한 마음, 분노와 증오를 품고 살아가면 영혼이 혼탁해지지 않습니까? 무엇을 더 소유할까에 온통 집중하면 그 대상에 매이게 되고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맛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마리아가 복되고, 참 기쁨 중에 머물 수 있었던 것은 기쁨이신 하느님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 스스로 기쁨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기쁨이신 분이 그녀를 방문하시어 함께해주셨기에 충만한 기쁨을 맛보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마리아의 기쁨은 일시적으로 발출된 정서적 기쁨이 아니라 구원의 기쁨이었습니다. 따라서 누구든 진정 행복해지고 싶거든 기쁨 자체이신 주님을 받아들여 품어야만 합니다.
참으로 기쁘고 복된 존재가 되기 위해 마리아의 발걸음에 집중해봅시다. 마리아는 구원의 기쁨을 위해 주님의 몸만 받아들이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 예수그리스도의 말씀과 인류구원을 위한 죽음에 이르는 수난을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참 기쁨을 향한 복된 마리아의 발걸음은 엘리사벳을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나 서둘러’(1,39) 유다 산골로 향합니다. 기쁨을 찾아가는 복된 길은 늘 그렇게 애착을 버리고 떠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버리지 않는다면 자유도 기쁨도 맛볼 수 없습니다(9,62 참조). 애착의 끈을 붙든 채 행복을 바라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마리아는 얼떨결에 주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대답하고 말았지만 불안하고 무서웠습니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임신한 몸으로 그 먼 여행길에 오릅니다. 우리가 찾아가는 기쁨의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안하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삶의 굴레를 안은 채 주님께로 가는 것이지요. 그 길이야말로 참 기쁨을 주는 유일한 길임을 믿으면서...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의 얘기를 들었을 때에만 해도 행복한 가정은 꾸릴 수도 없고 죽음만이 남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주님을 품고 길을 떠납니다. 사촌 엘리사벳을 찾아나서는 그녀의 발걸음은 구세주께서 자신의 길을 준비할 요한을 만나러 가는 ‘저 낮은 곳으로의 순례’였습니다. 기쁨의 길은 그렇게 자신과 소유를 떠나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움직임에서 샘솟습니다.
오늘도 우리 모두 애착을 버리고 성령의 이끄심에 자신을 내맡기고 주님을 품음으로써, 진정 복되고 기쁜 주님의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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