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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신학(1) 서론
평신도신학(1) 서론
● ‘평신도 신학’이라는 다소 거창한 주제로 매주 수요기도회마다 모이게 되었다.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신학의 범위가 워낙 방대하여 제대로 공부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시대가 온갖 정보가 넘쳐나는 최첨단과학, 인터넷영상시대라고 해도, 영적으로 심히 어두운 시대이기 때문에, 성도로서 자신의 바른 신앙을 지켜나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신학은 공부해야만 한다.
그동안 제가 부임한 이후 수요일 저녁마다, 제일 먼저 성경책별 설교를 통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각 성경의 특징과 중심 내용을 알아보았으며, 다음으로는 성경인물 설교를 통해, 아담부터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70명에 대해 살펴보았고, 세 번째로는 성경에 나오는 비유 중 30가지를 골라 설교했습니다. 이번에 하는 평신도신학는 네 번째 주제라 할 수 있는데, 1년여에 걸친 이번 교육과정을 거치게 되면, 우리 동산교회 교인들은 상당한 수준까지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매주 수요일마다 출석하는 100명 이상의 교인들이 꾸준히 공부하게 된다면, 우리 동산교회는 훌륭한 지도자 일백 여명을 양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같은 사명 의식을 갖고 앞으로도 열심히 참석하기 바란다.
● 신학이라고 하면 최고의 어려운 학문으로 생각하고, 신학생이나 신학자, 목회자들만 연구하는 특수한 학문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신학은 ‘교회의 신학’으로서 교회의 모든 평신도들이 배워야 할 중요한 학문이다. 오늘날 교계에서는 평신도의 교육과 교회사역 참여 운동 붐이 일어나고 있지만, 평신도의 교육과 교회사역 참여 운동은 평신도들에게 기독교신학을 가르치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학을 바로 이해해야, 교회의 교육과 교회의 선교와 교회의 봉사 등 각종 교회 사역에 적극적이면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신학이 바로 정립되어 있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엉뚱한 방향으로 열심을 내기도 하고, 결과적으로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신학이란 신비한 학문이다. 신비하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많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기독교 신학은 그 내용이나 체계나 모든 면에서 너무 방대한 것이어서 보통 사람들로서는 감히 접근하기 어려운 학문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다고 덮어놓고 있을 수도 없는 분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신학에 대한 무지로 인해 기독교신자들이 이단, 사이비, 미신 등에 쉽게 미혹되기 때문이다.
얼마전에 사회문제가 되었던 JMS 집단 같은 것만 봐도, 사람들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얼마나 이단 사설에 쉽게 미혹되는지를 잘 알 수 있다. JMS라는 신앙단체는 유사기독교단체로서 정식명칭은 기독교복음선교회 예수교대한감리회라고 자신들을 소개하나, 기독교 진리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이단집단이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통일교의 원리강론과 유사한 ‘30개론’을 만들어, 기존교인을 미혹하고 있다. JMS라는 명칭는 교주인 정명석의 이름 영어 이니셜을 딴 것으로, 정명석은 자칭 재림예수라고 하는데, 그는 원래 통일교에서 핵심인물로 활동하던 중 이탈한 인물이다. 주로 대학생들에게 접근하여 교세를 확장했는데, 한때 대학 써클 중에서 전국적으로 가장 큰 써클이었다. 정명석은 현재 성폭행, 살인교사 등의 혐의로 수배되어 해외도피중이다. 지금도 대둔산 자락에 정명석집단 본부가 있는데, 그 규모가 굉장하다고 한다. 우리가 생각할 때, 대학생 정도 되면, 뭔가 사리분별력이 있어 그같은 이단사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것 같은데, 지금도 그 집단에 자기 목숨을 내맡긴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JMS 집단의 꼬임에 넘어가는 대학생들이 주로 교회에 다니거나 교회에 한번이라도 발을 들여놓았던 사람이라는 점에서, 기존 교회는 경각심을 갖고 청소년, 청년교육에 보다 세심한 배려가 있어야 할 것이다.
● 사람을 인격적인 존재로서 지성과 감성과 의지 면에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 원만한 사람(全人)이 된다. 어느 한쪽이 모자라거나 지나친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지성에 치우치면 매정하고 차가운 사람이 되기 쉽다. 감성에 치우치면 감정적이고 불안정한 사람이 된다. 의지에 치우치면 행동주의에 사로잡히게 된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건전하고 참된 믿음이란, 자신이 신앙하고 있는 그 대상과 내용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신비한 감동, 그리고 그 실천이 조화를 이루어야만 한다. 그런데 많은 교인들이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불균형상태에 있다. 지성을 너무 강조하여 메마르고 무기력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고, 너무 감성에 치우쳐 비지성적인 신비주의로 흐르거나 맹신, 광신주의로 흐를 경우도 있다. 혹은 너무 의지에 치우쳐, 신앙의 본질을 망각하고 사회운동가로 나서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오늘 우리의 상황은 어떤가? 우리는 장로교단이기 때문에 흔히들 지성을 강조하여 감성과 의지면이 약하다고들 한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과연 우리가 지성적인 측면에서조차 제대로 신앙교육을 받고 있는지에 대해 의구심이 들 때가 많다. 항존직들 가운데 지금 주중에 어떤 형태로든 성경공부에 참여하여 성경을 깊이 상고하고 있는 분들이 있으면 손들어 보라! 아주 극소수에 불과하다. 장로교회 교인들은 오순절계통 교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감성적이다 뿐이지 지성적으로 뛰어난 것이 결코 아니다. 다시말해, 지성적으로 제대로 훈련받지 못하고, 또 실력도 없으면서도, 장로교인들은 자신들은 지성적이라고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계시록 3장에 나오는 라오디게아교회와 같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한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시작되는 수요일 평신도신학 설교는 놓치지 말고 들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 신학(神學)이란 말 그대로 신(神)에 관한 학(學)이다. 좀더 좁혀 말하자면, 신학은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에 관한 체계적인 학문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사실 신학이 없어도 신앙생활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다음 몇가지 이유에서 볼 때, 신학은 반드시 필요한 학문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신학은 믿음의 내용을 분명하게 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다. 이 질문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해당된다. 신자는 주님의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사도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했다. 이 대답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그리스도가 무엇을 뜻하는지, 왜 예수님께서 주님과 그리스도가 되시며,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는지를 알 때에라야 가능하다. 이런 내용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신학이다. 그런 점에서 신학(神學)은 신학(信學)이라 할 수 있으며, 따라서 모든 신자들에게 필수적이다.
2)신학은 성도를 하나되게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피부색이나 나이에 관계없이 형제와 자매로 여긴다. 또 국적에 관계없이 모두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여긴다. 그리고 한 믿음과 한 하나님 안에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힘써 지키기 위하여 노력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일정한 전제가 있다. 같은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들, 즉 신학이 같은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신자들 사이의 결속과 한 하나님 나라의 유지를 가능하게 해주는 끈이요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꼭 필요하다.
3)신학은 이단을 분별케 한다.
신학이 동일한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은, 동일하지 않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식별해내는 기준이 되기도 함을 의미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무조건 덮어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공의를 포함한다. 성도는 비진리를 분별해내야 한다. 그래서 그 모양이라도 버려야 한다. 만일 비진리를 고집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방인처럼 여겨야 한다. 신학은 어디까지를 한 형제로 포용할 수 있으며, 어디서부터는 이방인으로 여겨야 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 기준의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신학은 복음의 순수함을 유지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학문이다. 미혹하는 영이 준동하는 이 시대의 교인들이 반드시 신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4)신학은 전도의 내용을 제시해 준다.
예수님께서는 승천을 앞에 두고 마지막으로 명령하시기를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다. 전도는 성도들이 지켜야 할 지상명령이다. 그러면 성도는 무엇을 전해야 하는가? 우리나라 선교 초창기 최권능 목사님은 “예수 천당” 단 두 마디를 전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외침 속에는 신학이 담겨져 있다. 예수는 누구인가? 천당은 무엇인가? 왜 예수가 천당인가 등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전제로 해서 나온 말이기 때문이다. 이 전제는 신학 전반의 주제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들의 전도형식이나 분량은 서로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그 핵심내용은 동일하다. 다만 대다수의 평신도들은 전도할 때 어떤 내용을 전달해야 할지 잘 구별하지 못한다. 따라서 산재해 있는 기독교의 진리를 ‘전도’라는 바구니에 담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신학이다.
5)신학은 교육의 자료가 된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전도 못지않게 중요한 일은 교육을 하는 것이다. 전도의 명령은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명령으로 이어져 있다. 성도는 새로 믿는 자들이나 어린아이들에게 구원의 도리를 가르쳐주어야 한다. 또한 이미 믿는 자들에게도 성경을 계속적으로 가르쳐서 그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더하게 해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고, 그것을 기초로 하여 더욱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간교한 탈을 쓴 이단 사설의 미혹에 넘어지지 않도록 분별력을 가지게 해야 한다. 이 때 교육의 내용이 되는 것이 바로 신학이다. 그렇다고 반드시 신학이라는 말을 사용해서 학문을 가르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교육의 목적이나 방법이나 내용은 신학적 바탕에서 나와져야 한다. 그렇지 않은 교육은 매우 단편적이어서 편협되거나, 일관성을 잃어버리기 쉽다. 따라서 신학은 신앙교육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다.
다만 우리는 신학과 관련해서 유념할 것이 있다. 자기의 신학만을 절대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독선적인 자세이다. 신학은 사람에 의해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부족할 수가 있다. 편협될 수도 있다. 때로는 잘못을 범할 수도 있다. 유한한 사람에게는 항상 오류의 가능성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의 신학을 절대시한 나머지, 그것으로 함부로 남을 평가하려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무조건 전통을 고집하려는 자세를 가져서도 안된다. 우리는 항상 어떤 것이 바른 신학인지를 조심스럽게 반성하고 살피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은 신앙 안에서 은혜롭고 조화로운 삶을 살아가며 능력 있게 살아가기를 소망하고 있다. 그러나 사단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화목하며 이웃과 서로 교통하며 살아가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든지 조화롭고 일치된 삶을 파괴하고 무기력하게 만들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성도들로 하여금 사단의 세력과 맞서 싸우기 위한 영적 무장을 갖출 것을 촉구하고 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을 치열하게 치르는 것인데, 그 영적 전쟁의 대상은 사단이다. 사단은 하나님을 반역한 천사로서 악의 영들을 장악하고 있는 어둠의 세상 주관자이다. 바울은 본문에서 사단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한마디로 이들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전세계를 지배한다는 의미에서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이라고 불린다. 이들은 사악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들에게는 도덕적 원칙이나 선하고 고상한 감정이 전혀 없다. 더군다나 이들은 교활하여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 성도들 앞에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화해와 일치를 이루시고 교회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원대한 계획을 품고 계시나 사단은 기회만 있으면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며 파괴하려고 온갖 힘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사단은 그리스도인의 심령 속에 역사하여 영적 혼란과 공동체의 분열을 가져오며 윤리적으로 무기력한 삶으로 이끌고자 한다. 이러한 교활한 사단의 세력 앞에 놓인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현실적 상황이다.
그런데 사단의 존재는 인간의 지식이나 힘을 능가하는 영적 세력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힘입을 때 대결하여 물리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사단의 세력을 막아내기 위해서 전신갑주를 입어야 하는데, 그것은 인간으로는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 즉 그분께서 제공하시는 방법과 무기로써만이 가능하다.
전쟁의 성격상 승리는 최종적으로 성도들에게 있다. 왜냐하면 이 악한 영들의 권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이미 격퇴당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죽음 가운데서 일으키신 부활의 능력을 힘입을 때, 성도들은 능히 싸워 이길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영적 전쟁은 미지의 불확실한 승리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확보된 승리를 바라보고 싸우는 것이다. 하지만 승리는 보장되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응답하는 인간의 노력은 필요하다.
전쟁의 대상은 인간이 아니므로 영적 전쟁에 필요한 장비는 검이나 창과 같은 물리적인 무기가 아니요, 진리, 의, 평화, 믿음, 구원, 말씀 등과 같은 하나님의 전신갑주이다. 이러한 전신갑주는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믿는 성도들에게 제공해 주시는 영적 무기로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능력을 의지할 때 성도들은 그 무기들을 소유할 수 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선한 군사로서 악한 세력들을 능히 이기고 최후 승리의 개가를 부르기 위해서는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지 말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새로 덧입어야 한다.
신학은 이처럼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또 올바르게 전하기 위해 우리가 갖추어야 할 모든 준비를 체계적으로 진행하게 하는 안내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유한하다. 그리고 우리의 힘과 능력은 한정되어 있다. 내가 모든 것을 다 완벽하게 할 수는 없다. 따라서 허공을 치는 것같이 헛되게 힘을 빼지 말고,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잘살려, 주 안에서 값지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열심히 훈련하는 동산교회 성도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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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