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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주일 독서기도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교회 안에 현존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교회 안에, 특별히 전례 행사 안에 항상 현존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미사 성제에 있어서, 특히 성체 형상 안에 현존하시지만, 사제의 인격 안에도 현존하신다. 즉 “전에 십자가 상에서 당신 자신을 제헌하신 같은 분이 지금도 사제들의 봉사를 통하여 제사를 봉헌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사들 안에는 그 능력으로써 현존하시기 때문에, 누가 성세를 줄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례를 주시는 것이다. 또한 당신 말씀 안에도 현존하시니, 교회에서 성경을 읽을 때 말씀하시는 이는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끝으로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신 대로, 성교회가 기도하거나 노래할 때 거기에도 그리스도께서는 현존하신다.
참으로 하느님께서 완전한 영광을 받으시고, 또한 사람들이 거룩하게 되는 이렇듯 위대한 사업에 있어, 그리스도께서는 사랑하시는 당신의 정배인 성교회를 항상 당신과 결합시키신다. 성교회는 주께 간구하고 주를 통하여 영원하신 성부께 흠숭을 드린다.
그런즉 전례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의 수행으로 간주된다. 전례 안에서 인간의 성화는 감각할 수 있는 표징으로 드러나고, 그것은 각각 고유한 방법으로 실현되며, 또한 그리스도의 신비체 즉 머리와 지체에 의하여 완전한 공식 흠숭이 수행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전례 의식은 사제이신 그리스도와 그의 몸인 성교회의 행위인 까닭에, 가장 우월적인 거룩한 행위이며, 그 효과에 있어서 성교회의 다른 어떠한 행위도 이와 같은 자리 및 같은 비중을 차지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이 지상의 전례에 참여할 때, 우리 순례의 목적지인 성도 예루살렘에서 거행되는 천상의 전례를 미리 맛보고 그것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곳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성전과 참된 장막의 사제로서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 그리고 우리는 지상의 전례에서 하늘의 만군의 무리와 더불어 주께 영광의 찬미가를 부르며, 성인들을 기억하고 공경하면서 그들의 일치에 한 몫 끼이기를 희망하며, 구세주인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으로서 나타나시고, 우리도 그이와 더불어 영광 중에 나타날 때까지, 그이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에 그 기원을 둔 사도 시대의 전통을 따라, 그리스도의 성교회는 여덟째 날마다 파스카 신비를 경축한다. 바로 이 때문에 이날을 합당하게도 주의 날 또는 주일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날에 신자들은 함께 모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미사 성제에 참여함으로써, 주 예수의 수난과 부활과 영광을 기념하고, 하느님께 감사하여야 한다. 이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써 우리에게 산 희망을 안겨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일은 근원적인 축일이니, 신자들의 신심을 일깨워 주어, 이날이 또한 즐거움과 휴식의 날이 되도록 강조해야 한다, 참으로 극히 중요한 것이 아니면, 다른 축제를 이와 대치하지 말 것이니, 주일은 전례 주년 전체의 기초요 핵심이다.
응송
◎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사제로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우리의 머리로서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며, 우리의 하느님으로서 우리의 기도를 받아들이시는도다. *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기도 소리를 듣고,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기도 소리를 깨달아야 하는도다.
○ 우리가 하느님과 이야기하고 기도 드릴 때, 그 외아드님을 잊지 말고,
◎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기도 소리를 듣고,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기도 소리를 깨달아야 하는 도다.
연중 제3주간 월요일 독서기도
혼인과 가정의 신성성
남편과 아내는 혼인 계약으로써 “이미 둘이 아니요 한 몸”이 되었으니, 인격과 행위의 깊은 결합으로써 서로 도와주고 서로 봉사하며 동시에 이로써 자신들의 결합의 의의를 체험하며 날로 더욱 깊게 한다. 이 깊은 일치는 인격과 인격의 상호 교환이므로, 자녀의 행복이 요구하듯이, 부부의 완전한 신의와 그 일치의 불가해소성을 강요한다.
주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의 천상 원천에서 솟아나고 그리스도와 교회의 일치를 모델 삼아 구성된 이 다각적 사랑에 풍부한 당신 축복을 내리셨다. 일찍이 하느님께서 사랑과 충실의 계약으로써 당신 백성을 도와주셨듯이, 지금은 인류의 구세주이신 교회의 정배께서 혼인성사로써 신자 부부를 도우러 오신다. 그들과 함께 계시며 당신이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부부도 역시 서로의 애정과 변치 않는 충실로 서로 사랑하도록 도와주신다.
진정한 부부애는 하느님의 사랑에 흡수되어 그리스도의 구원 능력과 교회의 구원 활동으로 지배되고 풍요해진다. 이리하여 부부는 효과적으로 하느님께로 인도되고 부모의 숭고한 임무 수행에 있어서 도움과 힘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 부부는 그 신분의 의무와 존엄성을 위하여 특수한 성사로 견고케 되는 것이니 말하자면 축성되는 것이다. 이 성사의 힘으로 신자 부부는 혼인과 가정의 임무를 수행하며 그들의 전 생애를 신망애 삼덕으로 채워주는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충만하여 날로 더욱 자기 완성과 상호 성화에 전진함으로써 공공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게 된다.
따라서 부모들 자신이 솔선 수범하고 가정적 기도 생활을 실천하다면 자녀들과 집안에 함께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 인간적 완성과 구원과 성화의 길을 더욱 쉽게 발견할 수 있으리라. 또한 부성과 모성의 직무와 품위를 갖춘 부부는 자녀 교육의 의무, 특히 자녀들의 종교 교육의 의무를 열심히 수행할 것이다. 교육의 의무는 그 누구보다도 먼저 부모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자녀들은 가정의 산 지체로서 그들 나름으로 부모들 성화에 이바지한다. 감사하는 마음과 효심과 신뢰로써 부모에게 받은 은혜에 보답할 것이며 부모를 역경과 노후 고독 중에 자녀답게 봉양해 드릴 것이다.
응송 에페 5,32. 25b. 33b
◎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말해 주는 이 신비는 참으로 위대한 신비로다. *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해 당신 자신을 넘겨주셨도다.
○ 남편 된 사람은 자기 아내를 자기 몸같이 사랑하고 아내 된 사람은 자기 남편을 존경해야 하는도다.
◎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해 당신 자신을 넘겨주셨도다.
연중 제3주간 화요일 독서기도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아 드리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무슨 말로 적절히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 은혜의 수효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고 또 그 은혜는 너무도 위대하여 그중에 하나만 가지고도 그것을 주신 분께 끝없이 감사 드릴 만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한다 해도 말하지 않고 지나칠 수 없는 하나의 큰 은혜가 있습니다. 건전한 정신과 이성의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면, 그것에 대해 적절히 말하기는 불가능하다 해도, 그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당신의 모상과 유사성으로 지어내시어 땅에서 살고 있는 다른 모든 산 존재들과는 달리 그를 이성과 지력으로 꾸미시고 그에게 낙원의 놀라운 아름다움을 누릴 능력을 주시고 또 그를 모든 피조물의 주인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뱀에게 속아 죄에 빠지고, 죄로 인해 죽음과 그에 따라오는 어려움을 당하게 될 때 그를 내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먼저 그를 도와줄 법을 주시고, 그를 수호하고 보호할 천사들을 세우시며, 악행을 꾸짖고 덕행을 가르칠 예언자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책벌의 위협으로써 악행의 충돌을 좌절시키시고 은혜의 약속으로써 선행을 자극시키셨습니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의 결말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실생활에서 자주 보여 주심으로써 그것들을 통해서 미리 훈계를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계속해서 불순종하고 고집 부릴 때에도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어리석게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명예를 무시하고 그분이 베풀어 주신 사랑을 짓밟으며 그분 자신마저 모욕할 때에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서 당신의 사랑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죽음에서 해방시키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으로 되돌려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 은혜를 어떤 방법으로 주셨는가를 생각해 볼 때 마음속에 경악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신적 위치를 보존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 주셨고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 주셨으며 그 몸에 상처를 입으심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우리를 저주에서 구원해 내시려고 저주받은 자가 되시고 치욕적인 죽음을 당하심으로 우리를 영광스러운 생명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에로 불러 주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신적 본성에 참여하게까지 하시고, 인간의 사고를 능가하는 가장 행복한 영원한 안식처를 우리에게 마련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아 드리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너무도 선하시어 당신이 주신 은혜에 대한 되갚음을 요청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바치는 사랑이라는 보답으로 만족하십니다. 내가 이 모든 것을 생각할 때, 내 개인적인 느낌을 솔직히 말한다면, 두려움과 공포에 떨어지고 맙니다. 나의 나야함과 헛된 것에 대한 지나친 몰두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사랑에서 떨어져 나가 그리스도께 수치와 불명예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응송 시편 102(103),2. 4; 갈라 2,20c
◎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라. 당신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말라. * 죽음에서 네 생명 구하여 내시고, 은총과 자비로 관을 씌워 주시는도다.
○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당신 자신을 넘겨주셨도다.
◎ 죽음에서. 네 생명 구하여 내시고, 은총과 자비로 관을 씌워 주시는도다.
연중 제3주간 수요일 독서기도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습니다
구세주의 상처에서가 아니라면 약한 이들이 안식과 안전한 피난처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분이 지니신 구원력은 힘차기 때문에 그 상처 안에 머무는 이는 안전합니다. 세상이 으르렁대고 육신이 나를 압박하며 마귀가 올가미를 놓는다 해도 나는 단단한 바위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넘어지는 일이 없습니다. 내가 큰 죄를 범하여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해도 주님의 상처를 생각하면 실망에 빠지는 법이 없습니다. “주님은 참으로 우리의 악행 때문에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사해 줄 수 없는, 죽음으로 이끄는 그런 죄가 있겠습니까? 그렇게도 강력하고 효과적인 치료제를 생각한다면 질병이 아무리 무섭다 해도 나를 떨게 할 그런 질병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 죄가 너무 커서 용서받을 수 없다.”고 말한 사람은 사실은 잘못 알았음이 분명합니다. 이런 말을 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지체가 아니었고 그리스도의 공로의 몫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지체는 머리에 속하는 것이지만 그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으므로 자기에게 속하는 것도 자기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한편 주님의 마음은 자비에 넘치고 거기에는 은총이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있으므로, 나는 내게 모자라는 것을 주님의 상처에서 신뢰하는 마음으로 이끌어 냅니다. 병사들은 주님의 손과 발을 못으로 꿰뚫고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나는 이 갈라진 상처를 통하여 “바위에서 흘러내리는 꿀을 먹고 돌 틈에서 흘러내리는 기름을 마십니다.” 즉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보고 맛들입니다.”
주님의 생각은 평화의 생각이었으나 나는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생각을 잘 안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주님의 의논 상대가 될 만한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이제 그 상처에 들어간 못은 나에게 그것을 여는 열쇠가 되어 내가 주님의 감미로움을 맛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상처를 통하여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그 못과 상처는 하느님께서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 계시고 세상을 당신과 화해시키신다고 나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창이 주님의 영혼을 찌르고 지나가, 이제 주님의 마음은 우리에게 더 가까워져” 우리의 약점을 동정하는 법을 알게 되셨습니다.
주님은 육신이 입은 상처를 통하여 당신의 마음속에 숨겨있는 것을 드러내 보여 주시고 당신의 크나큰 사랑의 신비를 열어 주시며, “떠오르는 태양이 높은 데서 우리를 찾아오게 하신 우리 하느님의 자비의 마음을” 드러내 주십니다. 상처를 통하여 그 마음이 드러나는 것이 뭐 놀라운 일이겠습니까? 주님, 당신이 온유하고 겸손하시며 자비에 넘치는 주님이시라는 것이 당신의 상처에서보다 더 밝히 드러나는 데가 있겠습니까?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주님의 자비는 나에게 공로가 됩니다. 주님께서 자비에 궁핍하시지 않는 한 나는 결코 공로에 궁핍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자비가 무수하다면 나의 공로도 무수합니다. 그러나 내 양심이 허다한 죄로 가책을 받는다면 어찌하겠습니까?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영원에서 영원까지 한결같이 있다면 “나는 하느님의 자비를 영원토록 노래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내 자신의 의로움은 무관하다는 말입니까? “주여, 나는 당신의 의로움만을 생각하겠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나의 의로움이 되셨기 때문에 당신의 의로움은 또한 나의 의로움이 되었습니다.
응송 이사 53,5; 1베드 2,24
◎ 그분을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분을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도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셨고, *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 주셨도다.
○ 그분은 우리 죄를 당신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올바르게 살게 하셨도다.
◎ 그 몸에.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 주셨도다.
연중 제3주간 목요일 독서기도
주님을 사랑하고 그의 길을 걸어가십시오
“주께서 나의 빛 내 구원이시거늘 내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이 어떻게 빛을 내리시고 빛을 내리시는 분이 누구이시며 그것을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빛을 보았습니다. 해질 때 사라지는 빛이 아닌 인간의 눈이 보지 못하는 빛을 보았습니다. 이 빛으로 조명된 영혼들은 죄에 빠지지 않고 악행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주님은 복음서에서 “빛이 있는 동안에 걸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빛은 주님 자신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보는 사람이 보지 못하고 눈먼 사람이 빛을 받을 수 있도록 당신이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의 빛이시고, 온 세상에 퍼져 있는 가톨릭 교회를 빛나게 하는 정의의 태양이십니다. 예언자가 “주께서 나의 빛 내 구원이시거늘 내 누구를 두려워하랴?”고 말할 때 이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내적 사람은 빛을 받을 때 넘어지거나 곁길로 나가는 일이 없고 실망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먼데서 자기 본향을 보면서 온갖 역경을 참아 내고 이 세상 것들로 인해 슬픔에 젖지 않으며 하느님 안에서 견고해집니다. 마음을 낮추어 시련을 감수 인내하고 겸손으로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어 주는” 이 참된 빛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모든 이에게 주어지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부어지며, 또 아드님께서 원하시는 이들에게 계시됩니다.
어둠과 죽음의 그늘, 즉 악의 어둠과 죄의 그늘 밑에 앉아 있던 이들은 이 빛이 떠오를 때 아연 실색하여 자신 안에 들어가 뉘우치고 부끄러워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나의 빛 내 구원이시거늘 내 누구를 두려워하랴?” 나의 형제 여러분,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구원입니다. 이 구원은 인간의 약함을 두려워하지 않고 피곤을 모르며 고통을 이겨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한 목소리가 되어 열렬한 마음으로 입으로만이 아니라 심령으로도 이렇게 외쳐야 합니다. “주께서 나의 빛 내 구원이시거늘 내 누구를 두려워하랴?”
빛을 비추시는 분이 주님이시고 구원해 주시는 분도 주님이시라면 우리에게 있어 두려워할 자가 있겠습니까? 유혹의 어둠이 닥쳐온다 해도 주님은 나의 빛이십니다. 그들이 온다 해도 나를 휩쌀 수 없고, 내 마음에 쳐들어온다 해도 그것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눈먼 욕정이 닥쳐온다 해도 주께서 나의 빛이십니다. 주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는 그분께 우리 자신을 바치기에 그분은 우리의 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원할 때 하지 못할지도 모르니, 할 수 있을 때 우리의 의사이신 주님께 달려가야 하겠습니다.
응송 지혜 9,10. 4a
◎ 주여, 영광스러운 당신 옥좌로부터 지혜를 보내 주시어, 내 곁에서 나와 함께 일하게 하소서. * 당신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주소서.
○ 주여, 나에게 당신 왕좌에 자리를 같이한 지혜를 주시어,
◎ 당신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주소서
연중 제3주간 금요일 독서기도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실 때 기묘하고도 놀라운 여러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그들이 발을 적시지 않고 홍해를 지나가게 하시고 광야에서는 천상 양식으로서 만나와 메추리로 그들을 먹이시며 그들의 갈증을 풀어 주시고자 단단한 바위에서 그치지 않는 샘물이 솟아 나오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또 그들에게 저항하는 모든 원수들을 눌러 승리를 가져다 주시고 요르단 강물이 본래의 흐름을 바꾸어 거슬러 흐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을 이스라엘의 지파와 가족의 수효에 따라 나누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이렇게 인자롭고 사랑스런 마음으로 대해 주셨지만 감사할 줄 모르는 그들은 이 모든 은혜를 완전히 잊어버려 하느님께 대한 참된 예배를 거부하고 여러 번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큰 죄에 빠져 버렸습니다.
다음에 하느님께서는 원래 야생 올리브 나뭇가지였을 때 “이방인으로서 헛된 우상에게 매여 우상이 하자는 대로 끌려 다녔던 우리를” 그 올리브 나무에서 잘라 내시어 유다 민족의 참 올리브 나무에 접목시키시고, 우리가 원래 지닌 가지를 잘라 내시어 열매를 맺는 당신 은총의 뿌리에 참여케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까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든 이를 위하여 내어 주시어 그를 향기로운 제물처럼 당신께 바치게 하시고, 우리를 모든 죄악에서 깨끗이 하고 속량하시어 당신 마음에 드는 백성으로 만드셨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하느님의 위대한 사랑과 우리에 대한 당신의 자비의 순수한 징표일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의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러나 감사할 줄 모르는 우리는 인간에게 있을 수 있는 모든 배은 망덕을 지나쳐 하느님의 사랑을 생각지도 않고 그분이 베풀어 주신 은혜의 위대함을 깨닫지도 못하며 오히려 그분을 거부하고 우리를 지어내시고 그렇게도 위대한 은혜를 베풀어 주신 그분을 거의 무시하기까지 합니다. 하느님께서 죄인들에게 계속하여 보여 주시는 이 놀라운 자비를 보면서도 우리는 그분의 지극히 거룩한 법에 따라 우리의 생활과 행습을 고칠 줄 모릅니다.
이 모든 것은 후손들이 영원히 생각하도록 기록에 남길만한 사실들입니다. 그렇게 하면 미래의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자비를 알아 그분을 항구히 찬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응송 시편 67(68),27; 96(96),1
◎ 축제의 모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라. * 이스라엘 자손들아, 주께 찬송 드려라.
○ 새로운 노래를 주께 불러 드리라. 온 누리여, 주께 노래불러라.
◎ 이스라엘. 자손들아, 주께 찬송 드려라.
연중 제3주간 토요일 독서기도
죽음의 신비
죽음 앞에서 인간 운명의 수수께끼는 절정에 달한다. 인간은 아픔과 꺼져 가는 육체의 파멸을 괴로워할 뿐 아니라 영원한 소멸을 두려워한다. 인간 실존의 완전한 파멸과 결정적 끝장을 싫어하고 거부할 때 마음의 본능에 따른 이 판단은 옳은 것이다. 인간이 자기 안에 지니고 있는 영원의 씨는 순수 물질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기에 죽음에 저항하여 일어설 수밖에 없다. 기술의 모든 노력이 제아무리 유익하다 해도 인간의 불안을 해소시킬 수는 없다. 생물학적 수명의 연장은 마음속 깊이 뿌리박힌 고차적 생명에 대한 갈망을 만족시킬 수 없다.
어떤 상상도 죽음 앞에서는 맥없어지지만 하느님의 계시를 들은 교회는 인간이 지상 불행의 한계를 넘어서 행복한 목적을 위하여 하느님께 창조되었음을 주장한다. 그뿐 아니라 육체의 죽음도 인간이 범죄치 않았던들 모면할 수 있었을 것이며, 죄로 잃었던 구원을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구세주의 은덕으로 인간이 다시 회복할 제 죽음은 패배를 당할 것이라고 그리스도교 신앙은 가르친다.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성 전체로써 당신과 영원히 결합하여 당신 불멸의 생명을 나누어 받도록 인간을 이미 부르셨고 거듭 부르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 승리는 그리스도 친히 당신 죽음을 통하여 인간을 죽음에서 해방시키시고 다시 부활하심으로써 거두신 승리다. 따라서 확고한 논증에 바탕을 둔 신앙은 깊이 생각하는 모든 사람에게 해답을 주며 미래 운명에 관한 그의 불안을 해소시켜 준다. 그와 동시에 신앙은 또한 죽음이 먼저 앗아간 사랑하는 형제들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결합할 가능성을 제공하며 그들은 이미 하느님 곁에서 참 생명을 얻었다는 희망을 우리에게 준다. 물론 그리스도교 신자는 많은 환난을 겪으면서 악을 거슬러 싸우고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그는 파스카 신비에 결합되어 그리스도의 죽음을 닳은 모습으로서 벅차오르는 희망을 품고 부활을 향해 전진할 것이다.
이것은 비단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게 역사하는 은총을 마음에 지니고 있는 모든 선의의 인간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고 인간이 불린 궁극 목적도 사실은 하나뿐이며 그것이 신적인 것이므로 성령께서는 하느님께서만 아시는 방법으로 모든 사람에게 파스카 신비에 참여할 가능성을 주신다고 믿어야 한다.
인간의 신비는 이와 같이 위대한 것이며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계시가 믿는 이들에게 밝혀 주는 진리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고통과 죽음의 수수께끼가 풀린다. 그의 복음을 떠나서는 이 수수께끼가 우리를 질식시켜 버릴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으로 당신 죽음을 쳐부수시고 부활하셨으며 풍성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다. 이로써 우리는 성자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성령의 은총으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응송 시편 26(27),1; 22(23),4ab
◎ 주께서 나의 빛 내 구원이시거늘, 내 누구를 두려워하랴? * 주께서 내 생명의 바위시거늘, 내 누구를 무서워 하랴?
○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간다 해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나이다.
◎ 주께서. 내 생명의 바위시거늘, 내 누구를 무서워 하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