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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조준 목사
시편 146:1~10
오늘 저녁시간으로 시편 강해를 끝맺으려 합니다. 그동안 약 3년 동안에 걸쳐서 삼일저녁 기도회 시간마다 구약의 시편을 생각하였습니다. 혹시 뜻이 중복되는 시편은 몇 편 빼놓았지만 오늘 저녁으로 그 대략을 생각한 셈이 됩니다.
모든 면에 부족한 사람이 이처럼 영감이 흘러 넘치는 주옥같은 시들을 강해한다는 것이 외람된 일이요, 또 저 자신에게 벅찬 일이었지만 하나님이 도우셔서 오늘 시편 강해를 끝맺게 되니 저 스스로 감격스러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더구나 오랜 시간 동안 시간마다 같이 말씀을 생각하는 데 동참하신 여러분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이 어지러운 세상, 문자 그대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은 세상을 걸어가면서 이 시편의 말씀을 늘 묵상하면 감사와 감격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저녁 읽은 시편은 다섯 할렐루야 시편(146-150편) 가운데 첫 번째입니다. 여러분이 보시는 대로 처음 시작할 때 할렐루야로 시작하고 끝도 할렐루야로 마칩니다. 그리고 이 할렐루야 시편은 그 내용이 대개 비슷합니다.
이 시편의 내용을 보면 크게 두 가지로 볼 수가 있습니다. 첫 부분은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권면이고, 다음은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격려의 말씀입니다. “할렐루야(Hallelujah)”는 히브리말인데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뜻이 있는 말입니다. 다윗은 그의 영혼을 불러서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1절)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평생을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아갈 것을 선언합니다.
2절에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내 평생 내가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일입니까! 평생 믿음으로 살며 승리하는 사람이 누리는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성도의 이상적인 생활상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시편 145편 1-2절에도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곳에는 어디나 찬송이 있어야 합니다. 왜요? 사람이 창조된 목적이 하나님을 찬송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찬송은 성도가 맺어야 할 열매입니다. 히브리서 13장 15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찬송은 입으로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심령으로 할 것입니다. 시편 147편 1절에도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께 찬양함이 선함이여 찬송함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함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의무라고 말했습니다.
시편 148편 1절 이하에는 “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높은 데서 찬양할지어다 그의 모든 사자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찬양할지어다 해와 달아 찬양하며 광명한 별들아 찬양할지어다 하늘의 하늘도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찬양할지어다” 했습니다.
시편 149편 1절 이하에도 찬양의 구체적 방법을 말합니다.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회중에서 찬양할지어다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자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시온의 자민은 저희의 왕으로 인하여 즐거워할지어다 춤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
우리 요리문답에도 인간의 근본 목적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에 대해 기대하는 것은 그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를 기쁘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우리의 시간과 능력을 주께 바쳐야 합니다.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시편 71편에 보면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찬송하리이다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
대개 세상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세상에 무엇 하러 왔는지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 기계론적인 인생관과 목적론적인 인생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기계론에 의하면 사람이란 부정모혈(父精母血)로 출생해서 처음에 기고, 앉고, 걷고, 소년기가 되고, 청년기가 되고, 장년기가 되고, 노년기가 되고 그러다가 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은 인생관에는 인생에 대한 책임의식 같은 것이 없습니다. 그저 시간이 지나는 대로 살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 죽으면 그것으로 다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적론에 의하면 사람이란 누구나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면 무슨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느냐 하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식이위대(食而僞大)’란 말이 있는 것처럼 우선 먹는 일이 큰일입니다.
우리 한국의 경제가 전에 비하면 많이 성장하여 국민 소득이 10,000불에 육박하고 있다고 합니다. 넉넉한 사람은 돈을 쓸 데가 없어서 고민하고 있을 정도이지만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가난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지금의 우리 나라의 경제 사정을 보면 피라미드 형태입니다. 부자는 적고 가난한 사람이 많습니다.
사업을 해도 대기업을 하면 현상유지를 해 나가지만 중소기업은 얼마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모릅니다. 신문에도 크게 여론화되고 있습니다만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하청을 주고 거기에서 갈취하는 일이 생겨서 중소기업은 실제 허덕이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 바람직한 경제가 되려면 계란 모양의 경제구조가 되어서 특수한 재벌도 적고, 아주 가난한 사람도 적고, 중산층이 많아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아직 그렇지 못한 형편이 되어서 사회적인 큰 문제를 안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되지 않은 액수의 돈 때문에 강력범이 발생하고 잔인할 정도의 참극이 벌어지곤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난한 사람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아침 한 끼 끓여 먹었으면 점심이 염려되고, 점심을 어떻게 먹었으면 저녁 준비가 걱정인 가정이 아직도 우리 생활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사람이 사는 것은 먹기 위해 산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라면 짐승보다 나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혹 어떤 이는 일하기 위해서 먹는다고 합니다. 먹기 위해서 산다고 하는 것보다는 좀 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소나 말도 먹고 일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 사람이 사는 목적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33절에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목적은, 첫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생활입니다. 로마서 11장 36절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되시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4장 8절에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제자요, 주님의 특별한 소유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피를 값으로 지불하고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나 죽으나 이 몸을 드려 주님을 영화롭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를 즐거워하고 찬양하는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까?
빌립보서 1장 11절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한 간절한 기도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맺는 생활의 열매를 통하여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16절을 보세요. “이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받기 위해서 나오는 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한 말을 기억하시지요?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했습니다. 나무가 좋으면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나무는 좋다고 하면서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면 좋은 나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는 이론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실이 따라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사실 죽은 믿음입니다. 죽은 믿음 가지고는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포도나무라면 포도를 맺는 것이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포도나무라고 해서 심었는데 머루를 맺었으면 머루나무지 포도나무가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무슨 열매를 맺어야 합니까? 우리가 무슨 열매를 맺었습니까?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 중에서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통해서 예수를 구주로 시인하고 영접해서 새 사람이 되었는데 성령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면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귀한 열매를 다 맺었습니까? 이 열매를 맺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 수가 있습니다.
물론 말로도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가 있습니다. 말끝마다 “할렐루야” 합니다. 좋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활이 “할렐루야(Praise the Lord)”가 되어야만 합니다.
요사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 중에 많은 사람들이 은혜 충만히 받고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고 자랑하며 간증하고 다니는데, 성령의 충만을 받으므로 생기는 결과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열매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물론 성령의 역사는 여러 가지이기 때문에 한 마디로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 생활과 인격의 열매를 나타나는데 대개 아홉 가지를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의 열매를 맺어야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왜냐 하면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기초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며, 으뜸이 되는 희락은 하나님 안에서의 희락이고 가장 그윽하고 깊은 화평은 하나님과의 화평이기 때문입니다.
사랑, 사랑은 성령의 첫째 열매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초대교회 때 오순절에 성령이 충만히 임하시니까 서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 34-35) 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진리를 깨닫고 “우리가 서로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하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 아름다운 것, 요긴한 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면서 그 결론이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하였습니다. 사랑은 실제적입니다.
가령 이 사회의 기본단위인 가정을 보세요. 사랑이 없는 가정을 생각해 보세요. 지옥이 다른 데 있는 것 아닙니다.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부부간뿐이겠습니까? 가족끼리 사랑해야 합니다. 교인끼리 사랑해야 합니다. 동포끼리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기쁨입니다. 세상에서 오는 기쁨은 변하는 기쁨입니다. 참 신앙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성경에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고 하였습니다.
슬퍼하는 마음은 사람을 무력하게 만듭니다. 사람을 피곤하게 합니다. 그러나 기뻐하는 마음은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줍니다. 기뻐하는 생활이야말로 능력있는 생활의 비결이 됩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든지 기쁨으로 하면 힘든 것을 모릅니다.
우리가 이렇게 환난이 많고 죄악이 가득 찬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우리가 성령의 열매인 기쁨을 소유해야 우리로 하여금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곤란을 이기는 힘이 생길 뿐더러 어려움이 변하여 밝은 날이 되게 할 것입니다.
전에 사도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체험한 사실이 이것을 웅변적으로 말해 준다고 보겠습니다. 성령을 통한 하늘의 기쁨은 놀라운 기적을 동반합니다. 우리가 봉사하는 데도 기쁨이 필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닥쳐오는 시험을 이기는 데도 마음의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평화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하셨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이란 피상적이며 일시적입니다. 재물이나 지위나 권력은 세상 환경에서 오고 또다시 그 환경이 빼앗아가는 평안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평화는 참된 평화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이 성령을 통해서 주시는 평안은 중심적이며, 항구적이며, 절대적인 평안입니다.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평안입니다.
그러면 이 마음의 평안은 어디서 옵니까?
하나님과의 막힘이 없는 생활 가운데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언제나 같이 생활할 때 오는 깊은 생명의 평화입니다.
세상의 환경이 아무리 좋아도 마음에 화평이 없으면 그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환경이 좀 좋지 못해도 그 마음 속에 진정한 화평이 있으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성령이 충만해서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사랑과 기쁨과 화평의 열매를 맺어 우리 자신이 복될 뿐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본문 34절을 보십시다.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시편 118편 9절에 보면 “여호와께 피함이 방백들을 신뢰함보다 낫도다”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의지할 수 없을 뿐더러 방백들도 의지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신뢰하기가 어렵습니다. 인심은 조석변이란 옛말이 옳습니다. 오늘 좋다가도 내일 나빠질 수 있습니다. 아침에 사랑하다가 저녁에 달라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너무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요한복음 2장 24-25절 말씀을 늘 생각하며 삽니다.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치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정말 의미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알면 의지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다 아담의 자손이며, 약하고 결국 죽어야 할 운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만 도움이 있고 진실이 있고 힘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만 의지할 수 있고 그만을 신뢰할 수가 있습니다.
인간은 약합니다. 세상의 권력을 가졌다고 해도 약합니다. 사무엘하 3장 39절에 다윗이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날 약하도다” 솔직한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구원할 힘이 없는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라”고 말합니다. 왜요?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는 것이 호흡에 있는데 그 호흡이 끊어지면 그것으로 끝이 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이 사실은 이사야의 말대로 수에 칠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생명이 끝나자마자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흙은 우리 육신의 고향입니다. 흙에서 왔기 때문에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그가 세상에 살면서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모든 것을 다 남겨 두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훌륭한 생각과 놀라운 계획이 있었다고 해도 죽으면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될 수밖에 없습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그렇습니다. 인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잠깐 우리 눈에 보이다가 없어지고 마는 안개와 같습니다. 인간의 모든 도모가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지혜자 솔로몬은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권면합니다.
5절에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했습니다. 여호와를 저희 하나님으로 모시고 그를 섬기며 예배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며 그에게 의지하는 인생은 어려운 세상에서 승리하며 살 수 있습니다.
악한 세력의 역사 때문에 마음이 상하고 좌절되었다가도 하나님께로부터 용기를 얻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소망하는 사람은 부끄럽지 아니합니다.
세상의 소망은 소망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경우보다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설사 이루어졌다고 해도 만족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소망하는 사람에겐 실망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 소망은 이루어지는 소망일 뿐 아니라 우리에게 참 만족을 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까?”
그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에 만물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신뢰할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다 변해도 하나님은 변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진실을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상처받은 무고자의 후원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압박당하는 자를 위하여 공의로 판단하시며” 했습니다.
하나님은 궁핍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주권자에게 식물을 주시는 자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속박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호와께서 갇힌 자를 해방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의 속박에서, 바벨론의 포로생활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죄의 세력에서 해방시키십니다. 하나님은 소경의 눈을 여시듯이 우리의 심령의 눈을 밝게 해주시며 비굴한 자를 일으키십니다. 객인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평생에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입술로만이 아니라 우리의 빛된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그리고 도울 힘이 없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복된 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도의 비밀
(시 146:1-10)
찬송 19장
시편 146편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벽을 재건하려고 할 때 사마리아인의 반대로 공사가 중단됐을 때 지은 것으로 보이는 감사예배시요, 마지막 150편까지 할렐루야로 시작하고 끝마치는 할렐시입니다.
자세히 말씀하면 민족공동체적 감사예배시인 이후의 다른 할렐시와는 달리 개인적인 감사예배시에 속합니다.
1-5절은 여호와 하나님께 영원히 찬양하겠다는 다짐과 서원, 6-9절은 찬양할 이유들, 그리고 10절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통치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여기 다짐하고 서원한 이유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통치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황적으로 방향이 원치 않게 흘러가고 표면적으로는 찬양할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그래도 변함없는 하나님의 통치를 믿고 찬양함으로 환경이 역전 되는 놀라운 복된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한국강해설교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