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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24
어느 여인의 고백 / 한서노회
본문 1절 말씀을 보면 가나안 땅에 입성하기 위한 여호수아의 첫 번째 작전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나안 땅의 첫 관문인 여리고 성의 정황을 살피는 일입니다. 여호수아는 두 명의 정탐꾼을 선출했습니다. 이렇게 여호수아의 보냄을 받은 두 명의 정탐꾼들이 여리고 성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라합이라고 하는 기생의 집을 우선 거처로 삼았습니다. 정탐꾼들이 굳이 이 곳을 자신들의 거처로 삼은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기생의 집은 각양 각색의 사람이 모여 사담을 자유분방하게 나누는 곳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곳은 가나안 거민들의 민심이나 정치, 군사적 동태 따위를 간파하기에 적절한 곳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15절 말씀에 따르면 기생 라합의 집은 성벽 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는 여리고 성을 구석구석 살피기에 매우 좋은 지형적인 위치였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정탐꾼들은 라합의 집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에 관한 소식이 누군가에 의해 고발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요단 강 건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와 있다는 소식에 전전긍긍하던 여리고 왕이 이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습니다. 왕은 곧 사람들을 라합의 집에 보내어 정탐꾼들을 찾았습니다. 이 때에 오늘 이 새벽의 주인공인 라합은 매우 지혜로운 행동을 보여줍니다. 라합은 정탐꾼들을 숨겨주고 그들을 잡으러 온 군사들을 따돌렸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이 여인은 참으로 이상한 여인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지금 자신이 숨겨준 사람들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그들은 자신의 나라이자 고향인 여리고를 위협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한 마디로 적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그 적들을 위해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상한 일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본문 8절 이하의 말씀을 보세요. 우리는 이 여인이 왜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 군사들을 따돌린 라합은 정탐꾼들이 숨어있는 다락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왜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었는지를 정탐꾼들에게, 오늘은 저와 여러분들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본문 9절부터 13절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가리켜 '어느 여인의 고백'이라는 제목을 붙여보았습니다. 그것도 단순히 자신의 마음을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정도의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신앙의 고백입니다. 이제부터 그 고백을 구체적으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9절과 10절 말씀을 봉독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라합이 하나님을 향해 뜨거운 신앙고백을 하게 된 이유가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함께 봉독합니다.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보세요. 라합을 비롯해서 여리고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본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관심이 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우상을 신으로 섬기며 살던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라합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라합도 성장과정을 통해 그저 여리고 성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언제부터인가 요단 동편의 광야를 헤메이는 한 무리에 대한 소문이 여리고에까지, 그리고 라합의 귀에까지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라합은 그 무성한 소문 가운데 대표적인 두 가지 사건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애굽 군대의 추격으로 광야에서 몰살당하게된 위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홍해를 갈라주신 위대한 사건입니다. 홍해 바다가 갈라진 사건에 대한 소문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을 실감케 한 일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이스라엘의 화친을 거절하고 도리어 대적했던 아모리 민족의 두 왕인 시혼과 옥에 관한 사건입니다. 모세는 이들과 결코 전쟁할 의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경계했고, 전쟁도 불사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스라엘의 손을 들어 주셨습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이 여리고 성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뿐입니까? 오늘의 주인공인 라합으로 하여금 하나님에 관한 분명한 믿음의 확신을 가지게 만들었습니다. 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는 하나님은 분명 예사로운 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어려서부터 섬겼던 여리고 성 구석구석에 널려있는 우상조각들과는 분명히 다른 절대자임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 11절 말씀은 이와 같은 라합의 뜨거운 신앙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함께 봉독합니다.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할렐루야! 이 고백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라합은 분명한 어조로 고백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위로는 하늘에 계시고, 아래로는 땅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어디에나 계시고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라합은 담대하고 분명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신앙고백입니까?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문득 예수님의 제자였던 '도마'가 생각났습니다. 요한복음 20장에서 우리는 도마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말씀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때에 도마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도마는 나중에서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도마의 행동은 매우 의외입니다. 자신의 동료들이 한 목소리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해주었지만 도마는 도무지 믿지를 않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러한 도마를 매우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요한복음 20장 26절에 따르면 여드레가 지난 후에 예수님께서는 도마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20장 27절 말씀입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이렇게 예수님을 만난 후에야 도마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털어놓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바로 그 때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여러분들은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우리는 이 새벽에 바로 이 말씀과 라합을 동시에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복되도다." 물론 이 일이 우리에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보통 사람들은 다분히 어떤 현상에 집착합니다. 무엇인가를 보고 나서야 그것을 인정하려고 합니다. 종종 신앙의 세계에도 이러한 원리를 적용하려고 드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 중에도 혹 이와 같은 신앙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우리의 눈에 미처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따라서 우리의 눈에 보이고, 우리의 손에 만져지는 것만을 믿겠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라합을 보세요. 라합은 아직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확실한 증거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자신이 들었던 소문만이 이 여인이 가진 정보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라합은 그것만으로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믿을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이런 점에서 라합은 예수님의 칭찬이 담긴 선포를 들을만한 신앙인입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더 복되도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지금 라합에 비해서 얼마나 좋은 여건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라합에게는 멀리서 들려오는 소문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이렇게 우리의 손안에 있습니다. 이 속에는 우리의 손으로 꼽을 수 없는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맘만 먹으면 이 속에서 얼마든지 하나님의 위대하신 일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뿐입니까? 우리 개인적으로 오늘 이 자리에 오기까지 우리 개개인이 체험한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것이 대단한 체험일수도 있고, 작은 체험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들 스스로가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고 확실히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라합이라고 하는 여인에 비해 얼마나 좋은 여건 가운데 있는지 모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이 여인보다 더욱 분명하고 확고한 신앙고백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못한 경우에 처할 때가 더욱 많은 것 같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민입니다. 또한 이 새벽에 우리가 함께 부르짖어 기도해야 할 제목입니다. 지금 당장 우리 자신의 신앙고백을 점검해 보세요. 주일예배 시간에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내용은 물론이요, 저와 여러분들이 개인적으로 고백하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보시라는 말씀입니다. 이미 잘 정리가 되어 있는 분들은 그 신앙고백이 앞으로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더욱 빛나는 고백으로 세워져가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혹 그 동안 교회에 출석하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앙고백에 있어서 웬지 모르는 뿌연 안개와도 같은 답답함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이 새벽에 간절한 마음으로 부르짖는 시간을 꼭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저 라합보다도 월등히 좋은 여건과 형편에서 믿음생활하는 내가 어찌 그 여인의 신앙고백에도 미치지 못할 수가 있을까'라고 하는 안타까움을 가지고 이 시간 간절히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이 새벽에 만나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을 지금 보다 더욱 확고부동하고 담대한 것으로 바꾸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기에 힘쓰는 여러분들이 이러한 역사를 먼저 체험해 보세요.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통해서 더욱 많은 하나님의 일들을 이루어 가실 줄로 믿습니다. 뜨거운 신앙고백의 주인공인 라합을 보세요. 라합은 물론이요 그녀의 가정 전체가 구원받게 될 약속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뿐입니까?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에 라합은 그 이름이 기록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라합이라는 여인이 자신의 신앙고백을 통해 보여주는 위대한 일들입니다. 그리고 계속되는 본문은 이 여인을 통한 하나님의 일이 여기서 끝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23절과 24절 말씀입니다. 함께 봉독합니다.
"그 두 사람이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 강을 건너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나아와서 그 당한 모든 일을 고하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붙이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거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
저에게는 이 말씀이 얼마나 큰 도전이 되는지 모릅니다. 본문을 유심히 보세요. 두 사람의 정탐꾼들이 처음에 여리고 성에 들어갈 때에는 그야말로 고양이의 목에 방울을 달러 가는 쥐와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여리고의 왕과 그 주민들의 눈을 피해 어느 정도의 정보만을 가지고 빨리 돌아가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요, 라합을 만나고 나더니 이 두 사람의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두 정탐꾼들은 라합이라고 하는 한 여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 위대하신 일들을 시작하고 계신 것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 여인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이 두 사람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여호수아에게 돌아왔을 때에는 그 얼굴이 이미 매우 고무된 상태였습니다. 이들은 흥분되고 들뜬 마음을 가지고 여호수아 앞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붙이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거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청년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라고 하는 한 사람의 역할이 신앙의 세계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라합이라고 하는 한 여인의 신앙고백은 마치 전염병처럼 보입니다. 그 여인의 확신에 찬 신앙고백이 두 사람의 정탐꾼에게 옮겨 붙었습니다. 그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에까지 전염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오늘 이 새벽에 우리가 힘써 기도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먼저 우리 개개인의 뜨거운 신앙고백을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신앙고백이 이제는 우리 개인에게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아직 믿지 않고 있는 우리의 가족, 우리의 친지, 우리의 이웃, 우리의 친구들에게까지 전염병처럼 퍼져갈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새벽이 이와 같은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