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함양군 안의면 ‘농월정(弄月亭)’ 한시(漢詩)편>
농월정(弄月亭)은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월림리 화림동 계곡에 있는 누정으로 예로부터 정자문화의 보고라 불리는 화림동 계곡의 정자 가운데 하나다. 조선 선조 때 관찰사와 예조 참판을 지낸 지족당(知足堂) 박명부(朴明榑 1571~1639)가 정계에서 은퇴한 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 팔작지붕 2층 누각형태로 지어졌다. 함양의 대표적인 정자로 알려지면서 많은 관광객이 찾았지만 2003년 5월 불에 타 없어졌다. 군은 2013년 도비 등 10억원으로 농월정을 복원했다. 농월정을 처음 건립한 박명부(朴明榑)는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여승(汝昇), 호는 지족당(知足堂), 박영(朴濚)의 아들로 함양(咸陽)에서 살았다.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예설(禮說)에 밝았다. 1590년(선조 23) 증광시 병과에 급제하여 교서관부정자가 되었다. 1593년 박사에 제수되었고, 그 뒤 호조좌랑·사헌부지평·합천군수 등을 지냈다. 1614년(광해군 6) 영창대군(永昌大君)이 죽음을 당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유폐되자 그 부당함을 직간하다가 관직을 삭탈 당하였다. 1615년 사헌부에서 괴산군수(槐山郡守) 박명부(朴明榑)가 사의(邪議)를 주장하면서, 역적 정온(鄭蘊)의 시비(是非)를 밝히고 구제를 주선하겠다고 하던 말을 들은 자들이 모두 분개하였다며, 본직에 제수된 박명부를 사판에서 삭제해 달라는 청이 올라오자 왕이 그대로 따랐다. 1623년 인조가 즉위한 뒤 형조참의·예조참판 등을 역임하던 중 병자호란 때 강화(講和)가 맺어지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은거하였다. 이후 1637년에는 강원감사(江原監司)가 되었는데 사간원에서 박명부의 나이가 많고 성격이 옹졸하여 두루 교화를 펴는 책임자로 적합하지 않다고 하자 왕이 승낙한 일이 있었다.
농월정(弄月亭)이라는 이름은 '달을 희롱한다'는 뜻이다. 그 이름처럼 밤이면 달빛이 물아래로 흐른다고 한다. 농월정 앞에 넓게 자리하고 있는 반석을 달바위라고 부르는데, 바위 면적이 정자를 중심으로 1,000여 평이나 된다. 정자는 뒤쪽 가운데에 한 칸짜리 바람막이 작은 방을 둔 정면 3칸, 측면 2칸 누각으로 팔작지붕이며 추녀 네 귀에 활주를 세웠다. 걸터앉거나 기댈 수 있도록 세 면에다 계자난간(걸터앉거나 기대어 주위 공간을 조망하기 위한 것)을 둘렀다. 바람을 읊고 달을 보고 시(詩)를 짓는다는 ‘음풍농월(吟風弄月)’하기 그만인 곳이다. 시(詩)를 짓고 흥취(興趣)를 자아내며 즐기기에는 여기 이만한 곳이 없다.
1) 지족당 박명부 농월정에 차운하여[次朴知足堂(明榑) 弄月亭韻] 1871년(辛未) / 허전(許傳 1797∼1886)
勇退故山卜築幽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 산천에 와서 그윽한 집을 지었으니
高風逸韻百年留 고상한 풍채와 뛰어난 정취에 백년이나 오래되었구나.
樓臺得月懷中照 누대에 뜬 달은 가슴속을 비추고
軒冕如雲夢外浮 뜬 구름 같은 고위관직 꿈 속 밖에서 떠다니네.
方丈蓬萊平地上 방장산 봉래산 평지 위로 다니며
角巾蒻笠貴人頭 각건과 부들 삿갓을 귀인이 머리에 썼네.
此間眞樂誰能識 이곳의 참 즐거움 어느 누가 알랴마는
亭下悠悠水自流 정자 아래 시냇물 유유히 절로 흘러가누나.
2) 농월정[弄月亭] / 강수환(姜璲桓 1876-1929)
隨水看山山更幽 산을 보며 물길 따라가니 더욱 그윽한 산,
先生昔日此淹留 여기서 오랫동안 머물렀던 오래전의 선생이
微吟緩步不能去 천천히 걷다가 나직이 읊조리길, “갈 수 없구나!
檻外淸江萬古流 난간 밖의 맑은 강물이 길이길이 흘러가니.“
3) 농월정[弄月亭] / 유하련방집(柳下聯芳集)
花林初曲月亭幽 굽은 시냇가 화림동 정자에 달빛이 그윽한데
知足淸風此淹留 지족당에서 불어온 맑은 바람이 여기서 오래 머무네.
江聲轉石宫商出 돌과 함께 흐르는 강물이 ‘궁상각치우’소리 내더니
草氣和烟紫翠浮 풀 기운이 안개 속에 묻혀 붉고 푸르게 흘러가네.
頻年塵兩惟眞面 해마다 속세에서 오직 진면목을 보이니
是處經綸獨上頭 이곳에 경륜(經綸)은 홀로 최고였었다.
天湖同泛還如昨 하늘 호수에 떠다니던 모습이 바로 어제 같아
我思伊人一溯流 이 분을 생각하니 오로지 강물을 거슬러 흘러갔을 듯.
4) 농월정[弄月亭] / 김윤수(金允壽 1387∼1462)
安陰三洞八亭峨 안의삼동에는 여덟 정자 우뚝 솟고
白石月淵弄月波 흰 돌 달 못은 달빛 물결 희롱하네
知足南冥吟詠處 지족당과 남명이 시를 읊조리던 곳
仁山杖屨彩光多 인산이 소요하니 광채로움이 많네
5) 농월정[弄月亭] 잠시 쉬면서(暫憇) / 최익현(崔益鉉 1833∼1906)
絶頂烟霞席 연하가 가득한 산꼭대기
酒鷄出草菴 초막 암자에서 나와 잔치에 참석해
新交言未了 새로 사귄 벗과 대화를 다 끝내지도 못하고
策馬路從南 말을 재촉하며 길 따라 남쪽으로 달렸다.
6) 농월정 지족당은 박공이 쌓은 것이다[弄月亭知足堂朴公所築] / 하겸진(河謙鎭 1870~1946)
足翁亭子澗之幽 그윽한 시냇가에 지족당의 정자
曠世吾行爲暫留 희귀한 우리 여행길 잠시 머무네
月出金砂燦可數 달뜨니 금빛 모래 찬연히 세겠고
谷虛雲日遞相浮 골짜기 비니 구름 해 번갈아 뜨네
風光乍動紛盈目 풍광이 언뜻 이니 눈에 가득하고
塵土旋銷在轉頭 먼지는 고개 돌리는 새 사라지네
始識子荊非善謔 자형이 농담 잘 못함을 알겠으니
終宵一枕枕寒流 밤새도록 찬 물결에 선잠 이루네
柏村翁六十二歲 박옹이 육십이 세(62세) 즈음에
東遊雪嶽將以求 설악산 동쪽에서 노닐다 무엇을 구했는데
三枝五葉靈草於 세 가지에 다섯 잎의 영묘한 풀을 얻어
其行 二詩 爲贈 두 편의 시와 함께 주어 먼저 보냈다.
往年蓬峀躡巑岏 지난해에는 가파른 높은 산에서 거닐다가
今歲重遊雪嶽山 금년에는 설악산에서 거듭 노닐었다.
飄然一杖知何力 표연히 지팡이 하나 쥐고 그 노력 얼마던고
會有金莖駐渥顔 살뜰한 안색으로 금경(金莖)을 받드는 모임이 있었다.
關東東去海漫天 관동의 동쪽으로 가서 바다에 가득 찬 하늘아래
鏡浦高臺日出邊 경포대 높은 누대에서 일출을 보았다.
魯客乘桴望不到 공자도 뗏목 타고 가지 못한 먼 곳을 바라보는데
知君佇立傷千年 천년을 애태우며 우두커니 서 있는 그대 마음 알겠네.
[주1] 자형의 농담 : 돌로 양치질하고 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는다는 뜻으로,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마음이 유별남을 비유하는 말로 흔히 쓰인다.
[주2] 금경(金莖) : 금경은 동주(銅柱)인데, 한 무제(漢武帝)가 20장(丈)의 동주를 세우고 그 위에다 이슬 받는 선인장(仙人掌) 모양의 승로반(承露盤)을 받들어 옥설(玉屑)을 이슬에 타서 마시며 신선(神仙)을 구하였다. 두보(杜甫)의 시에 “이슬 받는 금경이 운한 사이에 솟았도다.[承露金莖雲漢間]” 하였다
[주3] 노성승부(魯聖乘桴) : 공자가 세상에 도가 행해지지 않자 뗏목을 타고 바다를 항해하고 싶다고 말한 데서 나온 것으로, 본디 세상을 피해 바다 건너 멀리 떠나고 싶다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7) 농월정 판상에 차운하여[次弄月亭板上韻] / 곽종석(郭鍾錫 1846∼1919)
洞天花峽爲誰幽 신선의 별천지인 화개골 누굴 위해 그윽한가?
人古亭新逸躅留 옛 사람을 새로운 정자에다 편히 자취를 남겨 놨다.
殉以道身簪冕薄 벼슬살이는 야박했으나 도(道)닦는데 목숨 바쳤고
淡然生計水雲浮 욕심 없이 깨끗한 생계 꾸려가며 물과 구름처럼 떠다녔다.
某里淸風隣屋角 어느 마을의 맑은 바람은 이웃집 용마루에 불고
前堂霽月讓源頭 집 앞의 시내엔 맑은 달이 떠 원천을 사양하네.
荒墟肯構非容易 황폐한 폐허를 계속 지켜가는 것이 쉽지 않아도
從覺門庭有碩流 대문 안뜰에 큰물이 흘러가니 단잠을 깨우누나.
8) 농월정 판상에 차운하여[弄月亭次板上韻] / 김인섭(金麟燮 1827∼1903)
路出花林洞口幽 화림동 길로 나오니 골짝 어귀 그윽한데
名亭爲訪少遲留 이름난 정자를 방문하기 위해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다.
已聽綠水軒邊活 이미 푸른 물소리가 집 가까이에서 콸콸 들리고
又愛白雲天際浮 동시에 흰 구름이 사랑스럽게 하늘가에서 떠다닌다.
擧世枉他多著脚 온 세상이 뛰어난 신선의 자취 같아 사특한 마음 생겨나니
幾人於此勇回頭 이곳에서 용감히 머리 돌린 이가 몇이려나?
先賢芳躅千秋在 선현(先賢)이 남긴 훌륭한 행적이 천추토록 남아있으니
奚獨當時第一流 당연히 당시에 최고로 학덕 높은 분이라고 전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