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작하는 글
산중에 살다 보니 꽃에게 눈길이 저절로 간다.
눈길을 주지 않으면 꽃이 내게로 걸어올 듯만 싶은 남도 산중인 것이다. <산유화>를 읊조린 소월의 마음을 알 것 같다.
산에는 꽃이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요즘 뒤뜰에 엷은 보랏빛을 띤 상사화가 피어나고 있다. 상사화는 불볕더위의 삼복 여름에 피고, 붉은 꽃 무릇은 선득 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초가을에 핀다. 두 꽃 모두 잎이 완전히 지고 나서야 대궁이 죽순처럼 쑥 자라다가 꽃이 피는 특성이 있다.
산중 농부들은 평생 동안 꽃과 잎이 만나지 못하므로 상사병이 든 꽃이라고 그럴듯하게 말한다. 그러나 꽃을 피우기 위해 잎이 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자기 몸을 기꺼이 희생해서 꽃을 피우고 있기 때문이다. 상사화나 꽃 무릇을 볼 때마다 '아름다움이란 자기희생의 결과물'이구나 하고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겨본다. 절망스러운 삶을 살았지만 '별이 빛나는 밤' 등 명화들을 남긴 빈센트 반 고흐를 봐도 그렇다. 뜬금없는 비약이 될지 모르겠지만 부처님도 6년 동안 처절한 고행을 했기에 그 정신력으로 거룩한 진리의 꽃을 피우지 않았나 싶다. 물론 육체를 괴롭히는 고행을 중단하고 보리수 아래 앉아서 대광명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 부처님의 고행과 깨달음
웃다카 교단에서 수도하던 다섯 사문들이 싯다르타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수행했지만 스승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이 젊은 사문이 짧은 기간에 스승과 같은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고도 만족하지 않고 보다 높은 경지를 향해 수행하려고 하지 않는가. 이분은 결코 범상한 인물이 아니다. 반드시 최고 경지에 도달할 분이다.’ 이렇게 판단한 그들은 서로 의논한 다음 웃다카의 교단에서 나와 싯다르타의 뒤를 따라온 것이다.
싯다르타는 결심했다. ‘사문들 가운데는 마음과 몸은 쾌락에 맡겨 버리고 탐욕과 집착에 얽힌 채 겉으로만 고행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마치 젖은 나무에 불을 붙이려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몸과 마음이 탐욕과 집착을 떠나 고요히 자리 잡고 있어야 그 고행을 통해 최고의 경지에 이를 수 있으리라.’ 이와 같이 고행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를 굳게 결정한 뒤, 싯다르타는 참담한 고행을 다시 시작했다.
아무도 이 젊은 수행자의 고행을 따라 할 수 없었다. 싯다르타는 그 당시 인도의 고행자들이 수행하던 가운데서도 가장 어려운 고행만을 골라 수행했다. 먹고 자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였다. 몇 톨의 낱알과 한 모금의 물로 하루를 보내는 때도 있었다. 그의 눈은 해골처럼 움푹 들어가고 뺨은 가죽만 남았다. 몸은 뼈만 남은 앙상한 몰골로 변해갔다.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여전히 번뇌를 끊지 못했으며 삶과 죽음을 뛰어넘지도 못했다. 그는 여러 가지 무리한 고행을 계속했다. 곁에서 수행하던 다섯 사문들은 너무도 혹독한 싯다르타의 고행을 보고 경탄할 뿐이었다. 이렇게 뼈를 깎는 고행이 어느 정도 수행에 보탬을 주기는 했지만, 그가 근본적으로 바라는 깨달음에는 아직도 이르지 못했다. 번뇌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고 생사의 매듭도 풀리지 않았다.
싯다르타는 언젠가 남들이 하는 고행을 보고 비웃던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나 지금 자기가 닦고 있는 고행은 죽은 후에 하늘에 태어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오로지 육신의 번뇌와 망상과 욕망을 없애버림으로써 영원한 평화의 경지인 열반을 얻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가 얻은 평화를 주기 위해서였다. 깨닫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그는 거듭 결심했다. 그는 이따금 모든 고뇌와 집착에서 벗어나 해탈의 삼매경에 들어간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나 삼매는 곧 흩어지고 현실의 고뇌가 파고들었다.
고행을 시작한 지도 여섯 해가 지나갔다.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지독한 고행을 계속해 보았지만 자기가 바라던 최고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어느 날 싯다르타는 지금까지 해 온 고행에 대해 문득 회의가 생겼다. ‘육체를 괴롭히는 일은 오히려 육체에 집착하는 게 아닐까? 육체를 괴롭히기보다는 차라리 육체를 깨끗하고 건강하게 해야 깨달음의 경지에 오를 수 있지 않을까?’ 싯다르타는 수행의 방법에만 얽매인 나머지 자기 자신이 점점 형식에 빠진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육체의 고행에 몰입하는 것보다 마음을 고요하고 깨끗하게 가지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고행을 중지했다. 단식도 그만두기로 했다. 지쳐버린 육체를 회복하기 위해서 네란자라강으로 내려가 맑은 물에 몸을 씻었다. 그때 마침 강가에서 우유를 짜고 있던 소녀에게서 한 그릇의 우유를 얻어 마셨다. 소녀의 이름은 수자타라고 했다. 우유의 맛은 비길 데 없이 감미로웠다. 몸에서 새로운 기운이 솟아나는 듯했다. 멀리서 지켜보던 다섯 수행자들은 크게 실망했다. ‘그토록 고행을 쌓고도 최고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 어찌 세상 사람이 주는 음식을 받아먹으면서 최고의 경지를 깨달을 수 있겠는가.’ 그들은 고행을 그만둔 싯다르타가 타락했다고 하여 그의 곁을 떠나 바라나시의 교외에 있는 녹야원(鹿野苑)으로 가버렸다.
싯다르타는 홀로 숲속에 들어가 커다란 보리수 아래 단정히 앉았다. 숲 전체가 아름다운 향기로 넘쳤다. 핍팔라 나무라고 부르는 이 나무는 바람에 천천히 흔들리는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사람은 어떻게 하면 시원해지나?’, ‘번뇌의 뜨거운 열기를 어떻게 하면 다스리나?’ 이런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나무는 속삭였다. ‘싯다르타여, 여기로 오세요. 여기 평안하게 앉으세요. 어려서 숲속 나무 앉았을 때처럼, 깊고 고요한 명상에 들어가세요.’
맑게 갠 날씨였다. 앞에는 네란자라강이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싯다르타의 마음은 날듯이 홀가분했다. 모든 것이 맑고 아름답게 보이기만 했다. 싯다르타는 오랜만에 마음의 환희를 느꼈다. 그는 다시 비장한 맹세를 했다. ‘이 자리에서 육신이 다 죽어 없어져도 좋다. 우주와 생명의 실상(實相)을 깨닫기 전에는 이 자리를 떠나지 않으리라.’
싯다르타는 평온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깊은 명상에 잠겼다. 이레째 되는 날이었다. 사방이 신비로운 고요에 싸이고 하늘에서는 샛별이 돋기 시작했다.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의 마음이 문득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넘치기 시작했다. 싯다르타의 얼굴에는 이제 막 맑고 밝은 빛이 깃드는 중이었다.
네란자라강 너머로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자연의 새벽이 열리는 것처럼 인간 정신의 새벽도 처음으로 열리는 중이었다. 싯다르타는 새로운 광명이 온몸을 감싸오는 것을 느꼈다. 집착을 벗어나서 번뇌와 망상을 끊으면 무엇에도 속박되지 않고 영원히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꿰뚫어 알게 되었다. 참선 명상의 초선(初禪) 차원을 지나 지나고 새로운 차원으로 올라갔다. 이제 마음속의 모든 어둠이 환히 밝아지고, 시간을 거슬러 우주 탄생의 첫 순간까지 다 보였다. 우주가 곧 내 자신이고 내 스스로가 우주임을 알게 된 것이다. 마침내 대광명의 세계에 도달한 것이다.
이제는 두려워할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이치가 그 앞에 밝게 드러났다. 태어나고 죽는 일까지도 환히 깨닫게 되었다. 온갖 집착과 고뇌가 자취도 없이 풀려 버렸다. 싯다르타는 드디어 더없이 높고 밝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토록 어려운 수도의 길이 끝난 것이다. 싯다르타는 자신이 ‘부처’가 되었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질 수 있었다. 스물아홉에 태자의 몸으로 카필라의 왕궁을 버리고 출가한 젊은 수도자는 목숨을 걸고 찾아 헤매던 끝에 더 이상 도달할 수 없는 최고의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싯다르타가 ‘깨달은 사람’이 되었을 때는 출가 육 년 만인 서른다섯 살이었다. 이제는 인간적인 갈등과 번뇌가 깨끗이 사라졌다.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경험할 수 없었던 으뜸가는 열반의 경지를 스스로 깨달아 얻었다. 이렇게 해서 일류의 스승 부처님이 나타나신 것이다. 『불전佛傳』
▪ 맺는 글
내 산방에는 불일암 의자와 비슷한 나무의자가 하나 있다. 산방을 짓고 나서 내가 소나무 가지로 처음 만든 20여 년 된 의자이다. 나의 스승이신 법정스님께서 불일암 의자를 만든 사연은 이렇다. 영화 <빠삐용>을 보시고 나서 불일암 뒷산에서 굴참나무를 베어다가 만드셨던 것이다. 그래서 불일암 의자를 일명 ‘빠삐용 의자’라고도 불린다.
영화 속의 주인공이 절해고도 감옥에 갇히는데 검사가 선고한 죄목은 ‘인생을 낭비한 죄’였다. 그런 죄목이 있다니 주인공은 억울할 수밖에 없다. 끝없이 탈출을 시도한다. 그런데 영화 속의 주인공만 ‘인생을 낭비한 죄’를 저지른 것일까? 우리 역시 그런 죄를 짓고 사는 것은 아닐까?
휴대전화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이들, 풍요로운 감옥에 갇힌 이들, 자기 인생에 대한 각성이 없는 이들, 욕구의 노예가 되어 자주적 삶을 포기한 이들 역시 크든 작든 ‘인생을 낭비한 죄’를 짓고 사는 것은 아닐까? 부처님이 하신 처절한 고행을 따라 하지는 못할망정 ‘인생을 낭비한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매 순간 깨어 참회하는 삶을 살고 싶다.
출처 : 정찬주 불교 이야기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