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7월 9일, 해방 이후 최대의 고고학적 발굴이라 할 수 있는 백제 25대 무령왕릉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무령왕릉은 충남 공주 소재 송산리 고분군에서 배수로 작업을 하던 한 인부의 삽 끝에서 ‘처녀분’ 상태로 1,500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갑자기 다가왔다. 출토된 유물만 108종 3천여 점에 이른다. 금관 장식, 금제 장신구, 두침(頭枕) 등을 비롯하여 무덤의 주인을 알려주는 글이 새겨진 두 장의 매지석(買地石)도 함께 발굴되었다.
동시에 왕과 왕비의 시신을 감싸고 있던 다량의 목관(木棺)도 출토되었다. 그러나 시꺼먼 옻칠이 되어 있고, 으스스하기까지 한 이 목관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은 오히려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발굴 보고서에는 그냥 ‘밤나무’라고 기록되어 공주박물관의 지하창고에 들어가 다시 깊은 잠에 들 채비를 하고 있었다.
20년이 지난 1991년, 우연한 기회에 관재 조각을 입수하게 된 나는 현미경으로 세포검사를 하여 일본 특산인 ‘금송(金松)’임을 밝혀냈다. 물론 금송은 화석으로 보면 마이오세(1~2천만 년 전) 동안 한반도 남부에도 자생한 적이 있지만, 이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무령왕은 《일본서기(日本書紀)》1) 에도 기록이 남아 있으며, 어릴 때는 일본에서 자랐다고 알려져 있고 유난히 일본과 관계가 깊은 임금으로서 관재가 일본에서 가져온 금송이라는 사실은 자료가 부족한 백제사 연구에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금송은 이곳 이외에 익산 미륵사지에서도 출토되어, 당시 일본과의 활발한 교역을 짐작할 수 있는 실증적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일본인들은 금송을 ‘고우야마끼(高野槇)’라고 한다. 고우야산(高野山)에 많이 자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산은 백제와 교류가 많았던 나라(奈良)지방과 가깝고, 금송의 일본 이름이 그들의 일반적 발음인 ‘타카노마끼’가 아니라 우리식 발음인 ‘고우야마끼’라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잃어버린 왕국, 백제의 비밀을 조금은 알고 있을 것 같은 금송이 신비롭기만 하다.
금송은 세계의 다른 곳에는 없고 오직 일본 남부에서만 자라는 희귀 수종이다. 늘푸른 바늘잎나무로 원산지에서는 키 20~30미터, 지름이 두세 아름에 이르는 큰 나무다. 바깥 모양이 긴 원뿔처럼 생겼고, 가지 뻗음과 잎이 독특하여 아름다운 나무로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중남부지방에 정원수로 가끔 심고 있다. 금송의 잎은 두껍고 선형이며 너비 3밀리미터 정도로 짙은 녹색이고 윤기가 있다. 또 끝이 파지고 양면 중앙에 얕은 홈이 있으며, 수십 개씩 돌려나기 한다. 솔방울은 긴 타원형이고 위로 향하며 비늘은 편평하고 둥글며 윗부분은 젖혀진다. 특히 나무는 잘 썩지 않아 관재, 건축재 등에 쓰이며 일본의 여러 목조 문화재의 기둥으로 쓰인 예가 있다.
공교롭게도 옛 국립공주박물관의 앞뜰에는 일제강점기인 1920년경에 심은 세 그루의 금송이 자란다.
그들의 선조 나무가 역사의 영겁으로 사라져 버린 무령왕의 시신을 영광스럽게 감싸고 있었다는 가문의 영예를 아는지 모르는지 단아한 모습으로, 2004년 박물관이 옮겨가지 전까지 무엄하게 파헤쳐 전시되고 있는 대왕의 유물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일본 특산이자 일본 왕실에서도 즐겨 심었던 금송은 뜻밖에도 우리의 문화유적지 여러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모양이 아름답다고 수입하여 심은 것인데, 이순신 장군의 아산 현충사, 금산의 칠백의총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금송이 갖는 상징성을 생각해본다면 있어야 할 자리는 아닌 것 같다.
박상진 평생 나무를 연구한 학자, 서울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일본 교토대학 대학원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북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해인사 팔만대장경판, 무령왕릉 나무 관 등 나무로 만든 문화재의 재질을 분석하는 일을 했다. 그동안 '궁궐의 우리 나무', '역사가 새겨진 나무 이야기', '우리 문화재 나무답사기' 등 책을 여러 권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