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일본군은 만주에 있는 우리 독립군을 소탕한다하여 대부대를 출동시켰다. 그러나 우리독립군은 일본군이 출병하기 이전에 벌써 근거지를 깊숙한 산간지방으로 옮기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막상 일본군이 독립군 본거지를 습격하였을 때는 독립군이 자취를 감춘 후였다. 따라서 일본군은 대병력을 투입하고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독립군의 주력 부대를 추격하던 일본군의 동지대(東支隊)가 의외로 청산리 전투에서 큰 패전을 당하고 보니 기고만장하여 일거에 독립군을 섬멸할 듯이 날뛰던 일본군으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벼르고 별러서 억지구실을 만들어 대부대를 동원하였던 계획이 결국 허사로 돌아가게 된 셈이었다. 여기서 일본군은 그들의 포악하고 잔인한 근성을 드러내고 말았다. 즉 독립군소탕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군은 우리 동포가 사는 부락을 닥치는 대로 습격하여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무차별 살륙행위를 감행하였다. 일본군은 이렇게 해서라도 소위 독립군소탕계획이라는 형식적 실적을 올려야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군은 우리 교포의 촌락을 습격하여 민가는 독립군의 병영이라고 하여 소각하고 주민들은 독립군이라고 하여 무차별 학살을 감행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용정촌 동북 25리 지점에 위치한 장암리(獐岩里)에서는 무고한 청년 33명을 교회 안에 포박시키고 불을 질러 학살하였으며 며칠 후에는 다시 출동하여 부녀자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시체를 모으게 한 후 불을 질러 시체가 숯이 되고 재가 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연길현 의란구에서는 마을 주민 전부를 독립군이라 하여 학살하는 등 일군의 만행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잔인하였다. 일본군의 만행이 가장 심하였던 훈춘·화룡·연길·왕청 4현에서의 10∼11월중에 있었던 우리 교민들의 피해를 보면 피살 3,664명 체포 155명, 민가 3,520개와 학교 59개소 교회 19개소가 소실되었다. 이와 같이 일본군의 만행이 전개되는 동안 독립군부대는 북쪽으로 이동하여 일본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시베리아 방면으로 향하였다. 이것은 병력에 있어서 월등히 우세한 일본군과 정면 충돌하여 독립군이 막대한 손실을 입는 것을 피하고 또 만주에 거류하는 교민들의 희생을 덜어 주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군은 만주 전역을 뒤덮었으며 우리 교민들을 학살하고 독립군은 사방으로 흩어져버리니 독립운동의 터전을 다시 마련하고 독립투쟁의 전력을 재건하기 위하여는 비상한 각오와 대책이 서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청산리 전투를 주도하고 독립군 세력의 중심세력을 이루었던 북로군정서는 11월 중·소 국경지대에 위치한 밀산(密山)에서 비상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하나의 방안으로서 각 독립군부대에 일치 단합을 요구하는 경고문을 보냈다. 즉 군정서는 「원수의 적을 꺾어 누르고 시국을 수습코자 할진대 여럿의 계책, 여럿의 힘을 합하여 한마음으로 합치는 것이 유일한 양책이니 우리 독립군 각 단체는 속히 협동 화합」하자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군정서의 제의는 많은 독립운동자들도 동감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해 12월 밀산을 중심으로 모였던 여러 독립군 단체들이 이에 호응하여 전 부대를 한데 묶은 대한독립군단을 편성하게 되었다. 북로군정서·대한독립군 대한국민회·대한신민단·도독부·의군부·혈성단·야단·대한정의군정사 등 10개 단체가 통합한 대한독립군단은 총병력 3,500명으로 3개 대대로 편성되었다. 1개 대대는 3개중대로, 1개 중대는 3개소대로 편성되어 총 27개소대로 구성되었는데 이 부대의 편제는 다음과 같았다.
총 재 : 서 일 (徐 一)
부 총 재 : 홍범도 (洪範圖) 김좌진 (金佐鎭) 조성환 (曺成煥)
총 사 령 : 김규식 (金奎植)
참모총장 : 이장령 (李章寧)
여 단 장 : 이청천 (李靑天)
대 대 장 : 김규식 (金奎植) 윤경문 (尹擎文) 김창환 (金昌煥)
부대 편성을 완료한 대한독립군단은 이듬해 정월 우수리강을 건너 시베리아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대군단이 일시에 이동한다는 것은 일본군의 눈에 띄기 쉽기 때문에 독립군은 몇 개의 부대로 나누어 우수리강을 건넜다. 이청천 부대는 호림역(虎林驛)에서 멀지 않은 이만시(Iman市)를 향하여 이동하였는데 도중에 일본군 수비대에 발각되어 약 2시간 동안 격전을 치른 후 수비대를 점령하고 무기를 탈취하였다. 부대가 이만시에 도착하였을 때는 엄동설한임에도 불구하고 독립군 중 동복을 착용한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독립군은 군자금이 모이면 모두 무기구입에 충당하였으므로 피복이나 식량 형편은 말도 못할 지경이었다. 소련 땅으로 건너 온 독립군은 외국 땅에서 자유로운 무장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 타격도 막심하여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당시 치타에 수립되어 있던 소련의 완충정부와 군사협정을 맺게 되었다. 1921년 2월에 체결된 이 협정에 의하여 소비에트 정부는 한국독립군의 양성을 도와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주며 이 기간 동안 대포 15문, 기관총 500정, 소총 3,000정, 피복 5,000착, 포탄 3,000발, 소총탄환 10만발, 말 50필을 무상으로 대여한다고 되어 있으며 4년 후에는 양국이 연합하여 일본에 대전한다고 되어있다. 이와 같이 미문여구(美文麗句)로 되어있는 이 협정이 얼마나 허위에 가득 찬 것이었느냐 하는 것은 불과 1년도 못되어 드러나고 말았던 것이다. 당초 소련은 한국의 민족운동자들을 적화시키고 장래 동양 적화에 선봉으로 이용키 위하여 이와 같은 협정을 체결하도록 한 것이지 진정 한국독립을 위하고 우리 독립군의 처지를 동정한 것이 아니었다. 반면 우리 독립군은 약소민족 해방을 입버릇처럼 외쳐대는 소련을 신뢰하고 소련의 원조를 받아 어떻게 해서라도 우리나라의 광복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숭고한 사명감에서 이들과 협정을 체결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협정체결 후 대부분의 독립군이 알렉셰프스크로 집결하게 되었다.
자유시 참변
*19921년 러시아령 자유시에서 대한 독립 군단이 러시아의 레닌 적군(赤軍)과 교전한 사건. 흑하 사변이라고도 한다. 1920년 봉오동 전투·청산리 전투 등에서 독립군이 일본군에게 대승을 거두자 일본측은 만주의 한국 독립군을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펴기 시작하였다. *이에 독립군은 전략상 부득이 노령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동 중 밀산)에서 국경 지대에 모인 독립군 부대를 통합하여 대한 독립 군단이 탄생하였다.이때의 병력은 약 3500명 정도였으며 총재에 서일을 비롯한 독립군의 중진들이 총망라되어 행동 통일을 결의하였다. *1921년 2월 대한 독립 군단은 노령 자유시 일대에 주둔하게 되었는데, 혁명이후 국력이 쇠약해진 소련은 1921년 6월 22일 무조건 무장 해제의 통지를 내렸으며 이에 완강히 반대하는 독립군을 이중으로 포위하고 장갑차와 기관총으로 공격했다.이 날 참변으로 전사한 독립군의 수는 자료마다 다른데 <<조선민족운동연감》에는 사망 272, 익사 31, 행방불명 250, 포로 97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