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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사도행전 제15강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말씀 / 사도행전 15:36-16:40
요절 / 사도행전 16: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오늘 말씀은 사도바울의 2차 전도여행 중 빌립보 개척 이야기입니다. 본문에는 두 밤에 일어났던 기적, 그리고 두 사람의 구원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는 다 알지 못하지만, 우리 인생길에 놀라운 계획과 뜻을 가지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5장 36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바나바에게 2차 전도여행을 제안하면서 그동안 말씀으로 도왔던 형제들을 다시 방문해 그들의 믿음을 굳게 세우고 돌보고 그들의 신앙을 격려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가 요한을 데려가는 문제로 바울과 바나바의 의견이 엇갈립니다. 서로 심히 다투고 갈라섭니다.
그러나 바울의 서신서들을 보면 바나바와 바울은 여전히 연결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바울이 마가 요한을 매우 아끼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나중에 마가 요한은 바나바뿐만 아니라 바울과도 사역을 함께했습니다. 이는 갈라지더라도 철천지원수가 되는 이런 앙금과 상처는 남기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갈라졌다가 합할 수 있고 합했다가 갈라질 수 있습니다. 현재의 생각과 마음이 나와 다르고 기질과 성향이 나와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늘 축복해주고자 하는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40절을 보면, 바울과 실라는 형제들에게서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신앙의 동지들이 바울과 실라를 선교지로 파송하면서 “주의 은혜가 늘 함께할 거예요” 이렇게 말하며 떠나보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주의 은혜가 늘 함께할 거예요” 이렇게 축복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이것이 듣는 상대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될 것입니다. 나와 다르다고, 나와 싸웠다고 저주의 말, 앙칼진 말, 철천지원수의 말들을 쏟아낼 것이 아니라 축복하고 위로하고 힘이 되어주는 말을 하는 그런 성숙함을 우리가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울 일행이 “주의 은혜가 늘 함께하기를 기도해주는” 동역자들을 뒤로 하고 선교여행을 떠나 루스드라와 더베로 갔는데 정말 그곳에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있었습니다. 바울에게 평생의 선교 동역자가 될 영적 아들인 디모데를 만난 것입니다. 바나바 목자님과 갈라서 떠나보내고 마음 한쪽이 힘들고 울적하기도 했을 텐데 디모데를 통해 위로를 받고 내면이 채워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은혜의 역사입니다. 현실에서 잃는 것이 있으면 얻어지는 것도 있습니다. 상실의 아픔이 있으면 획득의 기쁨도 있습니다. 이제 바울은 더베와 루스드라를 거쳐 이고니온과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쉽게 가리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개척되지 않은 소아시아 전역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때부터 이상하게 일이 꼬입니다. 6,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성령께서 복음 전파의 훼방꾼으로 나옵니다. 성령께서 바울의 계획을 어떻게 막으셨는지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이 어떤 상황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 말인지, 원인 모를 병에 걸렸다는 것인지, 전도하려고 할 때마다 폭우가 쏟아져 외출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학자들 중에는 바울의 건강 이상설을 많이 들기도 합니다. 바울은 평생 안질 또는 간질이라는 육체의 가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무튼 이유야 어찌됐든 뭔가 선교사역을 해보려고 할 때마다 난처한 일이 벌어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바울이 아닙니다.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을 통과하며 무시아 앞까지 갔습니다. 방향을 살짝 틀어 사역이 가능한 곳을 이곳저곳 시도해보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비두니아로 가고자 했습니다. 비두니아에는 비잔틴이라는 매우 크고 중요한 도시가 있었습니다. 3차 전도여행까지 통합해보면, 바울은 1차 전도여행지를 지나 소아시아의 에베소까지 가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그의 관심은 소아시아 지역에 있었고 특히 에베소에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쪽 길이 열리지 않으니 ‘꿩 대신 닭’이라는 마음으로 ‘비잔틴’이 있는 비두니아로 방향을 바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영, 즉 성령께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습니다. 원래부터 계획이 있어 내려간 것이 아니고, 이쪽도 안 되고 저쪽도 안 되니 도착한 곳이 드로아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였습니다.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바울에게 부르짖는 것이었습니다.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세요!” 마게도냐? 이는 선교지로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바울이 이방인들을 섬기는 유대인이라고 하지만 아시아에 해당하는 길리기아 다소 출신의 사람입니다. 마게도냐는 유럽입니다. 그가 로마 시민권자라고 하지만 유럽은 생소한 곳입니다. 지금 있는 곳은 드로아입니다. 드로아는 유럽 마게도냐로 건너가는 직항 노선이 있는 항구도시입니다. 직항으로 가는 배가 있는 드로아에 와서 마게도냐인의 구조를 요청하는 환상을 보니 바울의 뇌리에 무슨 생각이 스치겠습니까? “아! 유럽으로 건너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뜻이구나!” 그래서 10절에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썼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바울 일행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세계 교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유럽 선교가 시작됩니다.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 바울을 태우고 마게도냐로 갔던 그 배가 바로 유럽의 역사를 바꾸는 배였으며 유럽의 문명사의 미래를 안고 가던 배였다.”
우리의 인생이 이 선교여행과도 같습니다. 잘 되던 것이 안 되고 잘 풀리던 것이 풀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어제까지 열렸던 길이 닫히고 잘 가던 길이 막다른 길이 됩니다. 인생이 풀리지 않고 막히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시아도 안 되고 비두니아도 안 되니까 드로아까지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드로아에서 하나님의 주시는 환상을 보고 왜 여기까지 왔는지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입니다. 소아시아 지역의 에베소만 생각했던 바울이 길이 막히지 않고서는 과연 드로아를 제 발로 가기나 했겠습니까? 드로아까지 가려면 여기도 막히고 저기도 막히는 것을 경험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막으신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애를 써야 합니다. 7절을 보면,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썼다고 했습니다. 애를 쓰지 않고 하나님이 막으시는지, 허락하지 않으시는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아시아로 또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를 썼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길이 아님을 깨달았을 때 마게도냐로 가고자 힘쓸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길은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성령이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시면 막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는지 원하지 않으시는지 우리는 현재는 잘 알지 못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내가 해볼 수 있는 일들에 애를 써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의 뜻은 틀어져도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져 나갈 것입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뭔지 잘 모를 때 기도하면서 자기 생각을 내려놓는 훈련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때로 하나님은 지도자들이나 주위 사람들을 통해 간섭하기도 합니다. 또 때로는 강력한 역사하심을 통해 내 생각대로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기도 합니다. 기도하면 할수록 나의 생각보다 다른 마음으로 돌리시는 것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은 이처럼 다양합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당신의 뜻을 기가 막히게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기막히게 이루어져 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드로아에서 사모드라게를 경유해 네압볼리 항구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걸어서 마게도냐 첫 성인 빌립보에 이릅니다. 첫 성은 큰 성일 수 있고 매우 유력한 성일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로마를 위해 싸우다 퇴역한 군인들이 말년을 보내던 군사 휴양도시요, 실버타운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다른 도시보다 평균 연령이 높으니 사역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또 바울은 항상 회당을 먼저 찾고 거기서 모든 전도사역을 시작했는데 이곳은 회당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기도처를 찾다가 강가에 모인 여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아마 그들도 기도나 예배하러 모인 사람들일 것으로 추측합니다. 거기서 여인들과 대화하며 말씀을 전합니다. 유대뿐만 아니라 그리스와 로마 사회에서도 여자는 하찮은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을 가르친 대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자도 생각할 줄 아는가?’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런 존재인 여자를 소중하게 여기고 다가가 복음을 전합니다. 이때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마음을 열고 말을 잘 듣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색 옷감 장사였습니다. 고대엔 자색 옷감이 귀족이나 황제만 입을 수 있는 고가의 옷감이었습니다. 이런 제품을 취급했다는 것은 그가 상당한 재력을 가진 비즈니스 우먼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바울이 요구한 것도 아닌데 그는 집안사람들까지 다 데리고 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집에 들어와 지내라며 바울 일행을 강권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집이 든든한 재정 지원이 가능한 첫 빌립보 교회당이 되었습니다.
사실 복음 역사를 위해 가정을 오픈한다는 것은 오늘날의 문화에서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매일 손님을 뒷바라지한다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하루 세끼 먹고 치우고, 섬기고 대화해 주고, 시간과 마음을 많이 쏟아야 합니다. 가정생활을 많이 희생해야 합니다. 자녀들도 힘들어하기 쉽습니다. 우리 목자님들도 선교사님들이 방문하면 기꺼이 집을 숙소로 제공하거나 초대해서 섬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방문하신 선교사님 중에 모스크바 최이삭.룻 선교사님 가정이 있습니다. 이분은 모스크바에 오는 손님들을 섬기고자 일부러 크고 넓은 아파트를 마련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루디아처럼, 최이삭 선교사님 가정처럼 복음의 동역자들을 귀하게 여기며 섬기는 것을 기뻐하기를 원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기도처로 가는 길에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납니다.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입니다. 그 여자가 소리를 지릅니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진리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진리를 전하는 사람도 중요합니다. 진리는 전하는 자의 인격을 통해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스토커처럼 며칠 동안 계속 이렇게 하자 바울은 심히 괴로웠습니다. 바울은 그 귀신에게 명령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귀신이 즉시 나갑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여종의 주인들이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관리들에게 끌고 갑니다.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라고 고소합니다. 상관들은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고 명령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많이 맞은 후, 차꼬에 채워져 깊은 감옥에 던져집니다. 차꼬는 송판에 겨우 발이 들어갈 수 있을 만큼의 구멍이 뚫려 있고 그 구멍 주위에는 쇳조각이 붙어 있어 발을 조금만 움직여도 상처가 나고 피를 흘리게 만드는 고문 도구입니다. 어둡고 차가운 감옥 속에서 상처들로 인해 온몸이 쑤시고 아팠습니다. 무슨 죄가 있어 이런 고생을 합니까? 당연한 고생을 할 때는 덜 서럽고 덜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애매하게 고난받을 때는 더 억울하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무엇을 합니까? 25절을 보십시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바울과 실라는 자정이 되기까지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맞은 곳이 부어오르고 쑤시는 바람에 잠들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입술을 꽉 다물고 신음 소리를 참습니다. 그러다가 누가 먼저인지 알 수는 없지만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여기 기도라는 단어는 헬라어 원문에는 ‘감사의 기도’라는 의미입니다. 감사 기도한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길래 과연 그런 상황에서 감사가 나왔을까요?
「돌봄의 기술」, 「치유의 고백」 등의 저자 김유비 목사가 있습니다. 그는 어렸을 적, 판잣집에서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며 아버지의 잦은 폭력으로 인해 몇 번이나 기절하기도 합니다. 심한 말더듬과 우울증까지 겪습니다. 이런 집을 벗어나고자 우여곡절 끝에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합니다. 하지만 공부할 이유,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하고 아무도 없는 쓰레기 소각장 뒤에서 눈물로 보낼 때가 많았습니다. 기숙사 리모델링으로 인해 잠시 집에 들렀는데, 부모님은 오랜만에 왔다고 맛있는 음식을 해줍니다. 아버지가 멋쩍은 모습으로 말합니다. “많이 먹어!” 그런데 속에서부터 분노가 끌어 올라 미친 사람처럼 소리칩니다. “많이 먹어! 밥 한 끼로 해결이 된다고 생각해! 난 죽어버릴 거야. 내일 아침 시체로 발견되면 당신들 평생 후회하고 살아!” 고래고래 소리치며 밥상을 뒤집어엎고 뛰쳐나가버립니다. 그리고는 동네 은행나무에 가서 평소 연습한 대로 목에 끈을 두르고 죽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 순간 자기가 다섯 살 때 어두운 방 안에서 아버지로부터 학대받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저 아이가 무슨 잘못이 있지? 저 아이의 유일한 잘못은 이 집에 태어난 것뿐인데. 왜 아무도 구해주지 않는 거지? 저 아이의 처절한 눈물을 왜 아무도 닦아주지 않는 거지?” 갑자기 그 아이의 등 뒤에 찬란한 빛이 보입니다. 그분은 그를 지켜보는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더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거기서 구경하셨어요? 왜 날 이 모양으로 내버려 두신 거에요? 당신이 하나님이라면, 당신이 실제 존재한다면 이렇게 내버려 두고 구경만 할 수는 없는 거 아니예요?” 그때 세미한 음성이 들립니다. “유비야! 미안하다. 내가 너를 상처 입은 사람들을 위해 이 세상에 보냈단다. 내가 너를 너의 가정에 보낸 이유는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들을 치유하기 위함이다. 조금만 견뎌다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지금까지 고통받았던 이유를 발견하게 되었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목적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상처 입은 사람들, 그 영혼들을 돌보고 치유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나를 때리며 상처를 주었지만, 그 아버지도 상처받은 한 영혼이었습니다. 이제는 새소리가 낭만적으로 처음 들리기 시작했고, 모든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감사와 평안이 밀려왔습니다. 그는 집에 들어가 부모님께 큰절을 하고 무릎을 꿇고 울면서 말합니다. “과거의 아들은 죽었습니다. 저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 후 그는 자신이 살아야 할 분명한 이유를 깨닫고 상처 입는 자들의 치유와 회복 사역을 위해 자신을 일평생 헌신합니다.
바울의 감사 기도는 어느덧 찬송으로 변했습니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고난의 뒤 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 사람들은 감옥이라는 현실을 벗어나야 감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고, 병이 낫고, 취업 잘하고, 시험에 합격하고, 남편과 아내와 아이들이 잘되어야 감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감사는 예수님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하는 감사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의 감사의 특징은 감옥이라는 현실 가운데서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바울과 실라를 어떻게 도우십니까?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옥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다 열립니다. 모든 사람의 매인 쇠사슬이 풀어집니다. 감사의 기도와 찬송을 통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감사와 찬송은 기적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자다가 놀라서 깬 간수는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자 겁이 났습니다. 죄수들이 도망한 줄을 알고 자신들에게 큰일이 닥쳐오기 전에 칼을 빼 먼저 자결하고자 했습니다. 간수의 모습을 지켜보던 바울이 크게 소리를 질러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말합니다.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여 뛰어오더니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그들을 데리고 나가면서 질문합니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그에게 바울은 말합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간수에게 임한 구원의 복음입니다. 구원을 얻는 길은 오직 하나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유대인도 이방인도 다 동일하게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습니다. 그 밤에 간수는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깁니다. 이것은 간수의 회개의 표시입니다. 그리고 그의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습니다.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합니다. 이 밤은 바울과 실라에게 고통스런 밤, 흑암의 밥인 줄만 알았는데, 인생 다 끝나는 날인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이 밤은 간수에게 임한 구원의 밤이요, 바울과 실라를 비롯한 모두에게 기쁨의 밤이 되었습니다. 고통의 밤이 기쁨이 밤이 되었습니다. 한밤중에 감옥이라는 현실이 천국으로 변하는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밤에 일어난 기적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바울과 실라가 그렇게 매를 맞고 깊은 감옥에 갇혔으면서도 감사기도 하고 찬송을 하게 된 것도 기적입니다. 지진이 나서 옥터가 흔들리고 옥문이 열리고 차꼬가 풀어진 것도 기적입니다. 또 도저히 예수님을 믿을 수 없었을 간수와 온 집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역사는 더 큰 기적입니다. 이를 볼 때 하나님이 바울과 실라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것은 간수와 그 가족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옥에서 나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 형제들을 만나 위로하고 다음 선교여행지로 이동합니다(40).
여러분! 바울의 2차 선교여행은 처음부터 삐걱거렸습니다. 바나바와 갈라졌습니다. 1차 선교여행에서 방문했던 곳을 가려는 계획이 다 무산되었습니다. 2차, 3차 변경 시도도 다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애를 써도 잘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결론을 보니 참 은혜롭습니다. 유럽 선교도 하고, 든든한 동역자인 루디아도 얻고, 감옥이라는 안 좋은 현실 같았지만, 이를 통해 간수들과 가족들을 빌립보 교회의 든든한 동역자들로 얻게 되었습니다. 분명 바울의 처음 뜻과 계획대로는 되지 않았는데 은혜로운 결말입니다. 우리는 내 뜻대로 안 되거나 계획대로 안 풀린다고 해서 성공했다, 실패했다를 섣불리 판가름 지으면 안 될 것입니다. 내가 풀 수 없다면 하나님이 풀고자 하신다는 뜻이고, 내 길이 막힌다면 하나님이 더 좋은 길을 내고자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를 깨달은 바울은 한밤중 가장 고통스럽고 어두운 감옥이라는 현실 속에서도 감사 기도와 찬송을 부를 수 있었습니다. “찬송을 부르세요. 찬송을 부르세요.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찬송을 부르세요.” 지금도 나의 풀리지 않는 문제와 막히는 삶의 길에서 성령께서 놀라운 새 일을 행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나의 삶 속에 이루어가실 것을 믿고 기대하고 인내하며 감사하고 찬양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