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 분은 저희 교회에 다녀간 부부죠. 젊은 부부가 제 목소리가 너무 차분하다고 해서 제가 요즘 고민이 좀 많아요. 텐션을 올려야 되나 이런 오늘 말씀은 좀 딱딱하기도 하지만 한 번쯤은 꼭 고민해 봐야 될 말씀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좀 귀를 활짝 열고 함께 잘 들었으면 합니다.
저는 한때 열등감 덩어리였어요. 감사하게도 지금은 그렇진 않아요. 지금은 근데 한때는 제가 정말 열등감 덩어리였어요. 그러니까 열등감 때문에 엄청나게 스스로를 괴롭혔죠. 그러니까 사람들 때문에도 괴롭힘을 당하고 이게 신기한 게 열등감이 있잖아요. 그럼 사람들도 나를 괴롭히더라고요. 열등감이 좀 사라지니까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좀 없어져요. 신기한 일이에요. 정말 그러니까 열등감이 있을 때 나도 나를 괴롭히지만 사람들도 나를 괴롭혀요.
근데 이 열등감이 좀 사라지고 나니까 내가 나를 괴롭히는 것도 빈도 수가 줄어들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괴롭히는 빈도 수도 이렇게 줄어듭니다. 사람의 괴롭힘을 당하는 것보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열등감에 괴롭힘 당하는 것이 훨씬 더 힘들었어요.
그럼 제가 가진 열등감은 어떤 걸까요?
첫 번째로는 공부 좀 더 잘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두 번째로는 운동 무척 애를 썼지만 운동을 잘하거나 특별히 이렇게 함께 팀을 이루어서 하는 운동은 잘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세 번째로는 가난 아마 여러분도 제 나이 또래에 비슷한 분들은 비슷하겠지만 진짜 찢어지게 가난하다 이렇게 표현해도 될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제가 중학교 가는 걸 온 집안이 말릴 정도였어요. 왜 그렇게 힘든데 아들을 중학교 보느냐 이게 이제 저희 집안의 반응이었어요.
네 번째로는 인간관계 등등 이런 열등감이 저를 참 많이 괴롭혔습니다. 그러면 왜 지금은 열등감에서 덜 괴롭힘 받느냐 물론 하나님과의 관계도 신앙도 큰 역할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열등감이 저의 발전과 성장에 조금 긍정적인 역할을 한 거예요.
그 열등감이 있으니까 자꾸 도전해보려고 하고 뭔가를 더 열심히 해보려고 했던 것 같아요. 또 한편으로는 열등감 때문에 뒤로 물러서기도 하고 포기하고 좌절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열등감은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열등감이 적당하면 성장의 동력이 되지만 열등감이 지나치면 우울해지거나 자기를 혐오하거나 자기를 비하하거나 불안하거나 그러니까 공격 성향이 생겨요. 그러니까 열등감 많은 사람이 열등감 덩어리가 이게 어떻게 남을 공격하냐라고 생각하지만 생각보다 열등감이 많은 사람들이 타인에 대해서 되게 공격적이에요.
이 열등감은 심리나 인격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신앙에도 영적인 영역에도 큰 영향력을 끼쳐요. 그러니까 열등감이 많은 성도들은 계속 비교하게 되어서 믿음의 성장을 방해하고 또 열등감이 많은 사람들은 연합과 일치를 이루기가 어려워요. 계속 서로를 비교하니까 그래서 공동체의 일치에도 방해가 되고 또한 성도들의 진정한 교제도 이 열등감이 방해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달란트에 대한 비유예요. 너무 많이 들은 비유죠. 짧게 이야기를 나누면 주인이 다른 나라에 가면서 종들을 불러다가 자기의 소유 되게 중요합니다. 자기의 소유그러니까 주인의 소유예요. 자기의 소유를 그 재능을 따라서 맡겼다. 이렇게 재능을 따라서 그러니까 주인의 소유 그리고 그의 재능을 따라서 맡겼다는 거예요. 그래서 한 종은 다섯 달란트, 한 종은 두 달란트, 한 종은 한 달란트를 받았습니다. 그랬더니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종은 열심히 장사해서 달란트를 남겼고 두 달란트 받은 종도 장사를 해서 두 달란트를 남겼어요.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땅을 파고 주인의 돈을 감춰뒀어요. 그러니까 이게 주인의 돈인 거는 알았던 것 같아요. 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그래서 땅에 묻어 두었습니다.
분명히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랬어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주인이 돌아와서 이제 이 종들과 달란트를 결산했습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남긴 종들에게는 21절처럼 축복했는데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내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음에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내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두 달란트 남겼거나 다섯 달란트 남긴 이 종들에 대한 평가가 똑같다는 거예요. 이것도 우리가 좀 관심을 가져야 돼요. 그러니까 평가가 똑같아요. 우리 생각에는 다섯 달로 남겼으니까 남겼기 때문에 칭찬이 더 많고 두 달란트 남겼으니까 칭찬이 좀 적을 것 같은데, 주인은 다섯 달을 남겼든 두 달란트 남겼든 상관없이 똑같은 칭찬을 했어요.
이제 한 달란트 받은 종입니다. 이 종은 주인이 무서워서 그러니까 주인에 대한 관계가 좀 문제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주인을 무서워했대요. 다섯 달란트 남긴 종과 두 달란트 남긴 종은 주인을 무서워했다는 말이 없어요.
근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을 무서워했어요. 그래서 이 달란트를 감춰뒀다가 주인에게 돌려줬습니다. 이런 한 달란트 받은 종에 대해서 주인은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서 열 달란트 가진 종에게 주라고 명령합니다.
여러분 종은 주인을 무서운 사람으로 알았는데 이 본문을 좀 잘 이해하면 이런 거예요. 종원 주인이 고리대금 업자로 알았던 거예요. 그러니까 달란트를 남겼느냐 남기지 않았느냐는 주인의 주인에 대한 인식과 관계가 있는 거죠. 그러니까 달란트 한 달을 받은 종은 주인을 고리 대금업자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땅에서 그래서 주인이 무서운 거죠.
여러분 또 고리 대금업자에게 한번 쫓겨보셨어요? 얼마나 무서워요?
그러니까 이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을 그렇게 여겼던 거예요. 그래서 땅에 감추었다가 주인에게 줬는데 이 주인은 그런 태도 그 주인에 대한 태도와 달란트에 대한 태도를 너무너무 싫어했어요. 그래서 그를 징계합니다. 그게 30절이에요. 같이 한번 읽어봅니다. 시작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여기서 달란트는 일반적으로 재능을 의미해요. 그런데 좀 총체적으로 보면 달란트는 때로 때로는 하나님께 받은 모든 것을 의미하기도 해요. 그러니까 모든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라는 거예요.
이제 달란트에 대한 이야기를 재능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할 텐데요. 첫 번째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달란트를 받지 않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해요. 나는 재능이 없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그렇게 이야기해요. 목사님 저는 재능이 없어요.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달란트가 없어요.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능력이 없어요.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말하는 곳이 하나도 없어요. 주인은 줬다는데 우리는 안 받았다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됐을까요?
파묻어둔 거죠. 한 달란트 받은 종처럼 파묻어 둔 거예요. 불륜 주인이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달란트를 다 주셨어요. 한 명도 예외 없이 다 주셨어요.
그런데 우리가 나는 재능이 없어요. 나는 달란트가 없어요. 나는 능력이 없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그 달란트를 숨겨 놓았기 때문인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어떤 재능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는지에 대해서 잘 몰라요. 정확하게 말하면 달란트를 알지 못한다기보다는 자기의 달란트를 한 달란트 받은 종처럼 가볍게 여겨서 달란트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을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분명히 달란트를 주셨는데 나는 내가 받은 달란트가 한 달란트처럼 여겨지는 거예요.
왜 저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고 왜 저 사람에게 두 달란트를 주고 왜 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셨을까 이거는 재능이 아니다. 이거는 달란트가 아니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재능이 있는 달란트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는 인간의 가치가 결정하는 게 아니에요. 어떤 사람들은 저처럼 이렇게 가르친 달란트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어요. 어떤 사람은 봉사의 달란트를 받았어요.
또 우리는 비교하죠. 목회니까 훌륭한 일이고 저렇게 청소하는 일이니까 훌륭하지 않은 일이라고 우리는 나름나름 평가를 해요.
문제는 하나님이 주신 것은 달란트는 어떤 환경이든 어떤 삶이든 그것은 내가 가치를 결정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주신 것을 내가 가치를 결정하기 때문에 불행이 시작되는 거죠. 하나님이 나에게 자녀라는 멋진 달란트를 주셨어요.
근데 부모가 그 자녀를 비교하기 시작해요. 그럼 어떤 일이 벌어져요?
하나님은 가장 좋은 걸 주셨는데, 부모가 자녀에 대해서 쓸모없는 아이를 가치 없는 아이를 주셨다고 스스로 판단해 버린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에게 주신 건 우리가 가치를 매길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교회도 교회도 물론 우리가 그냥 막말로 교회에 대한 평가도 하자. 목장 교회는 어떻더라 어떻더라 이 말하는 것 자체까지 아주 나쁘다 재다라고 할 수는 없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진중하게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에게 허락한 것에 대해서 우리가 가치가 없다.
가치를 매기면 안 된다는 거예요.
우리는 어떤 존재냐?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달란트를 잘 활용해야 될 존재이지 가치를 매길 존재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활용해야 되는 성도들이 가치를 매기다 보니까 비교가 되고 열등감이 생기고 그래서 자기가 가진 달란트는 재능은 없다거나 쓸모없는 것으로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게 돼요.
이런 모습은 목회자에도 잘못이 있어요. 아마 강간이나 아니면 교육이나 아니면 이런 대화나 사역 중에 아마리 그런 뉘앙스가 성도들에게도 풍겨줬을 수도 있습니다. 활용해야 되는 존재가 판단했기 때문에 사실은 달란트가 없는 사람처럼 달란트를 받지 않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떤 존재냐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잘 발견하고 그 달란트를 잘 활용해야 되는 존재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가치를 매기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달란트를 가치 없다고 말하지 말아야 돼요. 하나님이 자기 허락한 환경도 가치 없다고 말하지 말아야 돼요.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에게 잘 맞게 본문에 보면 재능을 따라줬다고 그랬잖아요. 재능을 따라 이걸 다른 말로 하면 환경과 형편과 여건과 삶의 상황에 따라서 줬다는 거죠. 달란트든 하나님이 우리 분과 허락하신 모든 것은 여러분과 저에게서는 최선의 것이고 최고의 것이에요.
그럼 누가 이걸 누릴 수 있느냐 누가 누릴 수 있느냐 이런 거죠. 하나님이 우리 최고의 자녀를 우리게 줬어요. 우리는 비교 하니라고 이 자녀를 한 번도 최고의 자녀라고 여겨본 적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부모와 자녀 관계도 어긋나는 거죠. 어긋나는 거예요. 우리는 그래서 우리가 받은 달란트를 가치 없다고 말하거나 남의 달란트를 가치 없다고 말하거나 자신에게 있는 달란트가 가치 없다고 달란트가 없다고 말하지 말아야 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달란트를 각각 다르게 해주셨어요. 각각 재능대로 맡겼습니다. 이 재능은 이제 헬라어로 보면 디나미스라는 단어예요. 그러니까 복음의 복음을 능력이라고 말하잖아요. 그때 그 능력이라는 단어와 재능이라는 단어가 재능 이능력이라는 단어가 똑같은 단어예요. 영어로는 어빌리티라는 단어를 써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맡기지 않고 능력에 따라서 하나님이 맡기셨다는 거죠.
근데 알아야 될 게 있어요. 능력에 따라서 바뀌었다는 것은 그럼 우리는 또 금방 비교해요. 하나님이 아직 능력이 없다고 막 그러면 나는 작은 걸 주셔서 이렇게 여긴다고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에게 준 달란트는 독특하고 그리고 특별하고 다 개별적인 거예요. 그래서 이것을 비교하거나 서로 견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준 것 같이 하나님도 다르게 주셨어요.
그 다른 것은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 독특하게 특별하게 개별적으로 능력에 따라서 여러분과 저에게 준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실을 알아야 교회를 잘 섬기고 재미있고 힘 있게 섬길 수 있어요. 우리가 열등감이 있다는 것은 비교하지 말아야 될 것을 비교하고 있다는 그런 의미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행하셨는지를 알지 못하면 비교하게 되고 열등감에 빠지게 돼요.
알아야 될 것은 하나님은 다르게 해 주셨기 때문에 동일한 결과를 요구하지 않아요.
근데 우리는 어떻게 해요?
동일한 결과가 나오기를 바래요. 다르게 받았는데 달란트가 다른데 결과는 같아야 돼. 이러니까 우리가 달란트를 기뻐하거나 즐거워하거나 그 달란트를 끝까지 사용하지 못하는 거예요. 받은 달란트도 비교하고 달란트가 만들어낸 결과도 비교하고 음리 달란트에 비유해 보면 결과를 비교하지 않아요. 그냥 다섯 달을 남긴 종과 두 달란트에 남긴 종에 대한 평가가 똑같아요. 똑같아요. 상급이 같다는
왜요?
재능에 따라 맡기고 능력에 따라 맡뀌었기 때문에 상황과 여건에 따라 바뀌었기 때문에 이 결과는 비교 대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근데 우리는 비교해요. 목회자들이 어떤 사람은 막 천 명 목회에서 은퇴를 하고 어떤 사람은 10명의 목회를 하다가 은퇴를 하고 그러니까 비교하잖아요. 비교하는 순간 어떻게 해야 돼요?
하나님이 수십 년 동안 나와 함께하시고 내 목회 여정에 나를 도우셨던 그 모든 하나님의 일들을 가치 없는 것으로 판단해 버리는 거예요.
여러분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삶이 다르고 과정이 다른데 우리는 자꾸 결과도 동일하길 바래요. 여러분 결코 저와 제 옆에 있는 동료들과의 결과는 같을 수 없어요. 하나님은 저의 재능과 여건과 상황에 맞게 저에게 달란트를 주셨고 주셨기 때문인 거예요.
여러분도 똑같아요. 여러분의 인생의 마지막을 결코 누군가 비교할 수 없어요. 형제도 비교 대상이 아니 왜 하나님이 성도에게는 각자 상황과 여건에 맞는 달란트를 주셨기 때문인 거예요.
그러니까 불행은 비교 대상이 아닌 것을 비교하면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결과를 비교하기 때문에 어떤 일이 만들어져요? 열등감이 만들어지고 좌절감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하나님 나라는 능력만큼 봉사했느냐가 중요하지 결과로 판단하지 않아요. 이런 거죠. 다섯 달란트 받은 만큼 충성했느냐는 거죠. 두 달란트 받은 만큼 충성했느냐는 거예요. 한 달란트 받은 만큼 충성했느냐는 거예요. 그래서 만약에 한 달란트 받은 사람도 한 달란트를 남겼으면 평가가 똑같았을 거예요.
근데 이게 이게 비유니까 비유니까 이렇게 통해서 우리를 깨우치려고 비교했겠지만 만약에 이 이야기를 여러분과 제가 좀 새롭게 만들 수 있었으면 그러니까 한 달란트 남긴 정도 한 단트를 남겼어요.
그럼 어떻게 평가할까요?
똑같이 내가 작은 일에 충성했으므로 크고 큰 일을 너희에게 맡기겠다 이런 동일한 결과가 당연히 나왔을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도 결과를 비교하는 사람이에요. 제 안에 만들어졌던 열등감도 결과를 비교했기 때문인 거예요.
아니 가난한 집에 태어났고 그래서 공부할 기회가 많지 않았으면 공부를 좀 못하는 게 정상이잖아요. 근데 결과를 부잣집에 태어나서 학원을 잘 다니고 공부를 열심히 했던 그 아이와 결과를 비교하니까 제가 불행해지는 거죠. 가난한 부모님 밑에 태어나서 어렵고 힘들게 어린 시절을 살았어요. 그런데 부한 집에 태어나고 정말 좋은 형편에 자란 아이와 결과를 비교하니까 제가 불행해지는 거예요.
여러분 세상은 그럴 수 있을지 몰라요. 근데 아셔야 될 것은 하나님 나라는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믿음이 너무 좋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비밀을 알면 믿음이 너무 좋은 거예요. 하나님이 맡긴 만큼 충성을 요구하시니까 얼마나 좋아요. 그리고 똑같이 평가해 주시니까 똑같이 평가해 주시니까 얼마나 좋아요. 그래서 이 비밀을 알면 아마 천국에서는 열등감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싶어요.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에게 결과를 우리가 결과를 비교하는 사람이 되길 원하지 않으셔요. 우리는 받은 것에 충성했느냐를 따져야지 내가 받은 게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열등감에 빠지고 그 열등감 때문에 신앙이 힘들고 관계가 어려운 삶을 살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받은 만큼 충성했는지 하나님이 주신 만큼 노력했는지 하나님이 허락하신 만큼 최선을 다했는지가 중요해요. 그래서 결과를 비교하면 안 됩니다. 세 번째로는 달란트를 잘 사용하지 못한 성도가 징계와 심판의 대상이라는 거예요.
이것도 오늘 비유의 핵심 중에 하나예요. 왜 징계를 받냐 달란트를 내 마음대로 썼기 때문인 거죠. 한 달란트를 받았는데 이 달란트의 처분을 내 마음대로 한 거예요. 그냥 땅에서 묻어서 주인은 분명히 분명히 이것을 장사해서 이득을 남기라라고 왜냐하면 두 종이 그렇게 한 것으로 봐서는 주인이 그 명령을 했을 거라 추측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달란트를 목적대로 잘 사용하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사용한 거죠. 그래서 장사하지 않고 땅에 파묻어 뒀던 것입니다.
좀 더 생각해 보면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왜 이런 결정을 했을까 여러 이유도 있겠지만 그중에 하나는 주인에 대한 오해예요. 아까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주인을 고리 대금업자로 알았어요. 그래서 손해 보지 않고 돌려주는 것 이걸 생각한 거예요.
여러분 이 고리대금업자는 받은 만큼 돌려주면 되는 거잖아요. 그죠 주면 돼요. 못 주면 이게 문제가 되지만 받은 만큼 그냥 주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주인을 오해했어요. 그래서 만약에 자기가 장사를 봐서 손해를 보면 한 달란트를 못 돌려주잖아요. 그러면 주인이 자기를 징계할 거다 심판할 거다 생각했던 것으로 보여요. 그래서 땅에 묻어두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달란트를 잘 사용하느냐 달란트를 잘 아느냐 모르느냐가 뭐가 좌우하냐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좌우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잘 알고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의 뜻을 안에서 살려고 하는 사람은 쉽게 자기의 주어진 달란트를 발견하기도 하고, 그 달란트를 하나님을 위해서 쓸 수도 있어요.
근데 관계가 깨어졌으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졌으니까 자기가 닫은 달란트도 모르고 그 달란트를 하나님을 위해서도 사용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에 대해서 잘못된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주인의 뜻과 명령을 오해했던 거죠.
여러분 영적인 불행, 신앙의 불행은 어디서 시작될까요?
환경이 만드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오해에서 만들어지는 거예요. 성경이라는 많은 사건들은 특별히 안 좋은 사건들은 대부분 하나님에 대한 오해에서 시작이 된 거예요. 똑같아요. 만약에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져 있고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우리 인생에도 한 달란트 받은 사람과 같은 결정이 수없이 반복되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간결하게 말하면 달란트에 대한 태도는 곧 주인에 대한 태도라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달란트를 어떻게 여기느냐는 곧 하나님에 대한 태도와 직결되어 있어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른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도 잘 발견하고 또 달란트도 잘 활용해요. 삶의 수준도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연결돼 있고요. 믿음의 수준도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연결돼 있어요.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지 못하면 삶의 수준도 믿음의 수준도 결국 바닥이게 되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문제는 주인을 고리 대금업자로 알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땅에 묻어두는 최소한의 손해를 보지 말자는 최소한 손해는 보지 말자는 그런 결정을 하게 된 거예요. 이 모든 결정은 평소에 주인과의 관계가 왜곡되어져 있었기 때문이죠.
많은 신앙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여러분 우리와의 관계 왜곡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생을 바로 세우려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해야 되는 거예요. 달란트를 잘 이해하고 잘 달란트대로 잘 쓰고 사용하려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해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형성된 사람이 달란트도 잘 깨닫고 그 달란트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기꺼이 즐겁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위해서 오늘 본문을 좀 더 짧게 또 한번 정리해 볼게요. 첫 번째로는 우리가 강하게 마음에 새겨야 하는 것이 있는데 달란트를 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거예요. 꼭 새겨야 돼요. 하나님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달란트를 다 주셨어요.
근데 우리가 이 달란트를 비교하면서 가치 없는 것이라고 여겼고 그래서 그것을 달란트 아닌 것이라고 판단했어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은 비교의 대상이 아니에요. 불행은 비교하면서부터 시작이 돼요. 특별히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비교할 자격이 없는 인생이 비교하면서부터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왜 달란트가 중요할까요?
교회가 교회로 세워지면 저는 달란트를 따라서 그리고 은사를 따라서 교회가 섬겨져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달란트를 발견하지 못하고 달란트대로 교회를 섬기지 못하면 그 교회는 빈약해요. 여러분 한국의 교회가 빈약하죠. 어떤 교회든 조금 다녀보면 빈약해 우리 교회도 좀 다녀보면 빈약한 곳이 너무 많아요.
근데 왜 이 빈약은 이 가난은 왜 만들어졌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이 내게 주신 달란트를 못 발견했기 때문이고 그 달란트를 하나님이 주신 목적대로 못 사용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달란트가 시간이 지나면 사명이 되고 달란트가 시간이 지나면 비전이 돼요.
여러분 우리가 예배를 위해서 이제 많은 노력을 지금도 하지만 앞으로 더 이제 쏟아부을 거예요. 근데 예배가 풍성해지려면 성령도 임재하시고 말씀도 강하게 선포되고 많은 요소가 있어요. 정말 중요한 것은 성도들의 달란트가 이 예배에 다 쏟아부어질 때 정말 예배가 하나님이 받을 수 있는 예배가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지금 달란트로 교회 예배 시간에 여러분 뭐 하고 있어요?
만약 우리가 달란트로 예배 시간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손님인 거예요. 개인 거예요. 여러분 결혼식도요. 당사자만 재미있지 객은 별로 재미없어요. 그래서 저도 결혼식 가면 밥만 먹고 와요. 안 재미있더라고요.
그냥 뭐 결혼하나 보다 이제 구조를 서로 개 형식으로 하는 거니까 가서 하고 인사하고 신랑 신부 인사하고 밥 먹고 와요. 예배가 풍성해지려면 예배의 콘텐츠가 많아지려면 여러분 달란트로 섬겨야 돼요. 그러면 성도들이 자기 달란트를 발견해야 되고 그 달란트를 비교하지 않고 잘 사용해야 예배가 더욱더 풍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는 독특하고 개별적이어서 절대로 비교 불가하다는 거예요. 비교하지 말아야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우리 교회는 청소년에 대한 의사가 좀 많은 분들이 있어요.
제가 확실히 웬만한 교회보다 우리 교회가 더 깨끗해요. 우리는 이제 주중에도 사람들이 엄청나게 교회를 많이 쓸잖아요. 항상 60명 정도는 교회에 있으니까 이 교회들이 계속 주변을 돌아다니고 하다 보면 엄청나게 지저분해져요.
그런데 여러분 보시기에 교회 왔을 때 교회가 그렇게 지저분하다고 느낀 적이 많지 않잖아요. 그 말은 밤으로 낮으로 오후로 성도들이 와서 쓸고 닦고 한다는 거예요.
여러분 문제는 우리가 이런 행위를 비교하잖아요. 그러면 스스로 하는 행위를 가치 없게 여기고 그리고 다른 사람의 경우 그 사람의 행동을 또 가치 없게 여겨요. 교회는 교회는 절대 그래서 은사를 비교하면 안 돼요. 개별적이고 은사는 독특하다. 자녀를 비교하고 남편과 아내를 비교하고 부모를 비교하면 그때부터 인생이 불행해져요.
저는 이 생각이 들어요. 부모도 달란트다 한번 따라 해볼까요?
부모님도 나의 달란트다.
하나님이 가장 맞은 사람을 나에게 줬어요. 아멘을 안 하시네요. 부모님을 비교하신 것 같은데 지나보니까 그렇더라고요. 나에게 가장 맞는 아버지 어머니를 나에게 줬어요. 제가 사춘기고 또 하나님 관계가 잘못되어 있고 내 믿음이 어릴 땐 이분이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가치를 지닌 부모라는 것을 잘 몰라요.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그걸 알게 되더라고요.
여러분 교회도 달란트예요.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목장 교회를 주셨어요. 그럼 딴 교회랑 비교하지 말고 열심히 섬기면 되죠.
일단 죄송해요. 저도 많이 비교한 것 같아요. 당연히 비교가 되겠죠. 노회를 가도 비교가 되고 다 비교가 되죠. 근데 저도 비교했어요. 그래서 아마 제 목회에 불행한 구석이 있었다면 그 비교가 저를 불행해했을 거예요.
여러분 부모도 달란트요. 벼도 달란트요. 물질도 달란트요. 이렇게 여기십시오. 그럼 인생이 복스러워져요.
할렐루야 그냥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냥 부모는 달란트다. 농사 짓는 부모도 달란트고, 혼자 계신 부모님도 달란트고, 너무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도 그냥 달란트다 이렇게 여기면 인생이 인생이 좋아져요.
그리고 이런 평가는 누가 내릴 수 있어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은 성도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예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형성된 성도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에덴 동산에서도 사탄은 하나님과 인간을 비교시켰어요. 비교는 가치 없는 것을 가치 있는 것을 가치 없게 만듭니다.
마지막으로는 달란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 이거는 충분히 말씀드렸으니 이까지 하고요. 달란트가 왜 중요하냐 하면 중간에 잠깐 말씀드렸던 것처럼 이것이 시간이 지나면 사명이 되고 시간이 지나면 비전이 돼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귀하게 여겨야 교회는 교회로서의 역할을 온전히 감당하게 돼요.
여러분 교회가 세상을 향해서 선포만 하고 세상을 위해 섬길 수 없느냐?
성도들이 달란트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인 거죠. 성도들이 달란트를 발견하고 그 달란트를 귀하게 여겨야 목회자가 강단에 선포한 것을 성도들이 세상에 살아요. 달란트로 사는 거죠. 이게 교회의 첫 모습인 거예요. 선포한 것을 달란트를 따라서 세상을 사는 것이 교회와 성도의 참 모습입니다. 좋은 팀은 각자의 달란트로 섬길 때 만들어져요. 오늘 설교 조금 긴데 그냥 양해하시고 들으십시오.
오전에도 잠깐 이야기하겠는데 신인 감독 김연경이라는 이제 약간 길지 않은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저는 처음에는 그냥 뭐 뭐를 이렇게 봤다가 몇 번 이렇게 반복해서 보니까 이게 너무 의미가 많은 거예요. 그동안은 이제 보통 선수만 비춰졌는데 이 프로는 이제 감독을 이렇게 비춰줘요. 이 감독이 선수들의 역할을 계속 이렇게 독려하는 거예요.
교회는 어떤 공동체냐 서로의 달란트를 독려하는 공동체죠. 독려하는 공동체 청소 잘하는 분에게는 세제 하나 더 사드리고 이렇게 자꾸 독려하는 찬양 잘하는 분에게는 악기 하나 더 사주고 잘 가르치는 교사들에게는 그렇게 교회는 어떤 공동체여야 되느냐 서로의 달란트를 격려하는 공동체여야 돼요. 그래야 그래야 비교하지 않고 그 사람의 고유성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제가 받은 달란트는 옆 교회 목사님의 달란트와 다를 거예요. 여러분이 제 달란트를 인정하지 않고 다른 목사님과 비교하면 저도 불행해지고 여러분도 불행해지는 거예요.
목회자와 성도는 서로 서로의 달란트를 격려하고 그 달란트를 잘 사용하도록 독려하고 힘을 줘야 되는 존재인 거예요. 우리 교회가 그렇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달란트로 풍성해지기를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