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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원문보기▶ 글쓴이 : 숲꽃향기
축일:12눨 1일
복자 샤를르 드 푸코
Beato Carlo di Gesù (Charles de Foucauld) Religioso
Beato Charles de Foucauld
Strasburgo, 15 settembre 1858 - 1 dicembre 1916
Born:15 September 1858 in Strasbourg, France as Charles Eugenie de Foucauld
Died:shot on 1 December 1916 at Tamanrasset, Algeria
Venerated:24 April 2001 by Pope John Paul II
Beatified:13 November 2005 by Pope Benedict XVI; recognition celebrated by Cardinal Saraiva Martins at Saint Peter's Basilica, Rome, Italy
샤를르 후코형제(샤를르 드 후코:성바오로출판사)는 회심하자마자
예수를 위해서만 살겠다는 열정으로 그분을 가장 가까이에서 따르기 위해
성지 나자렛으로 떠났습니다.
그후 그는 가장 멀리 있는 사하라의 오지 투아렉 부족들 사이에서 살다가
그들에 의해 피살되었습니다. (1916년)
프랑스의 몇몇 젊은이들이 알제리의 사하라 사막에서 그의 삶을 따라
예수의 작은 형제회를 시작했습니다. (1933년)
샤를르 형제가 살았던 삶과 그가 남겨놓은 기록을 통해 형제들은
공동체 생활의 체험과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의 폐허, 이데올로기와 종교간의 갈등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들을 통해 자극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또한 시대적 요구와 교회의 변화를 함께 겪으면서
샤를르 형제의 "나자렛 삶과 영성"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해왔습니다.
다양한 종교,인종,문화,계급,생활 형태 속에서 그들과 똑같은 삶의 방식으로
260여명의 형제들이 세계 42개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세상속의 사막-분도출판사)
예수의 작은 형제들의 영성
사람들 속에서 겸손하고 가난하게 사셨던 나자렛 예수님의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똑같은 모습으로 살았던
샤를르 형제처럼, 예수의 작은 형제들의 영성은
충실한 제자가 그의 스승이자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완전하게 닮으려는 데 있습니다.
예수의 작은 형제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관상과 성체성사를 통한 그리스도의 경배, 복음적 가난의 실천,
육체적 노동과 가난한 이들의 사회적 조건에 구체적으로 동참하는 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이 나자렛 삶이 우리를 하느님과의 일치와 사람들과의 우정에 이르게 하는 길입니다.
관상과 노동의 일치를 이루는 것은 형제적 사랑에서입니다.
형제들은 샤를르 형제처럼 "우리의 유일한 모델(유일한 모델:성바오로딸)"을
"나자렛 예수"에게서 찿으며, "만인의 형제"라고 불리기를 원합니다.
그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려고 교회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이들 가운데서
그들과 똑같은 처지에서 우정을 나누며 살기를 원합니다. (사람서리에서-분도출판사)
샤를르 드 푸꼬(1858∼1916, 프랑스)
10년 넘게 신앙에 대한 의혹과 불신 속에서 교회를 떠나 있던 사막의 성자 푸코의 회심의 순간입니다.
1886년 10월 27일부터 30일 사이 어느날, 그는 아침 일찍 생오귀스탱 성당으로 갔다.
그에게는 아직 확실한 결심은 없었으나,
자기도 확실히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움직여지고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이 진행되었다.
그는 고해소에 있는 위블랭 신부를 만나러 갔다.
그는 꿇어 앉지는 않았으나 종교에 대해서 가르쳐 주기를 원했다.
"무릎을 꿇으시오. 하느님께 고해를 하시오. 그러면 믿을 수 있을 겁니다."
신부는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하지만…." 하고 푸코는 거부했다.
"나는 그것 때문에 온 것은 아닙니다."
"고해를 하십시오!"
신부는 되풀이 해서 말했다.
푸코는 자유롭게 돌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푸코는 무릎을 꿇고 지금까지의 생활을 숨김 없이 모두 고해했다.
그가 몸을 일으켰을 때는 그리스도의 피로써 모든 죄의 사함을 받았을 뿐 아니라
한 번도 잊어 버린 일이 없는 듯한, 강하고 확고한 신앙을 다시 찾았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때 사제는 그에게 "아직 아침 식사 안하셨지요?" 하고 물었다.
그리고 아직 하지 않았다는 대답을 듣고는 즉시 성체를 영해 주었다.
29세의 샤를 드 푸코는 드디어 운명을 결정짓는 첫걸음을 내디디었다.
즉 교회의 문턱을 넘어섰던 것이다.
그 전에는 어떻게 하면 여기까지 도달할 수 있는지를 몰랐다.
어제까지만 해도 무엇 때문에 이 생오귀스탱 성당 주위를
원망과 불확실성에 주저 하면서 헤매고 있었던가를 오늘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찾아낸 환희는 너무도 강렬했기 때문에 그의 모든 것을 압도하고 말았다.
오직 한 가지 문제는 왜 이렇게 오랫동안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살았는가 하는 것이었다.
단 하루 사이에 그의 생활은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10년 동안이나 신앙생활을 멀리했던 그는 매일 위블랭 신부가 드리는 미사에 참례했다.
그는 매주일 고해성사를 보았으며 거의 날마다 성체를 영했다.
자기 스스로 그렇게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제가 그를 이끌었으며,
그도 또한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대로 응했던 것이다.
푸코는 겨우 회개했을 뿐이다.
회개는 종교에 있어서 마지막은 아니지만,
푸코의 회심은 그의 모든 존재를 진정으로 반역하는 것이었다.
오랫동안의 우여곡절을 겪은 뒤의 이 회심으로 그의 생활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즉 영구적인 혁명의 결정적 전환점이 된 것이다.
12년간의 무신앙과 2년 반 동안의 여행, 이 신비적인 여행을 마친 후에
그는 생오귀스탱의 성당 문을 들어선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에 가까이 가는 길을 발견하는 데는 육신과 영혼이 새롭게 변화해야 했고,
여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1886년 10월 말, 드디어 푸코는 완전히 정복되었다.
하느님께서 존재한다고 믿게 되자마자,
나는 하느님을 위해서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 나의 수도 생활에 대한 성소는 나의 신앙과 동시에 시작된 것이다.
그때 그는 생오귀스탱 성당에서 위블랭 신부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나의 하느님은
이렇게 가장 비천한 자리를 택하셨기 때문에
아무도 하느님으로부터 그것을 빼앗을 수가 없었다."
이 말은 푸코 영혼의 가장 깊숙한 곳을 찌르며 그의 일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그는 이미 하느님을 본받아서 그 시대의 사람들 중에서
가장 비천한 자리를 찾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가 그리스도와 가장 가까이 있을 수 있는 길을 그것뿐이기 때문이었다.
- 성바오로출판사, <사하라 사막의 성자 샤를 드 푸코>에서 -
오랜 방황 끝에 하느님을 찾은 샤를르 드 푸꼬는
예수께서 나자렛에서 하신 가난하고 미천한 노동자로서의 숨은 생활을 본받고자 했다.
그는 43세에 사제서품을 받고 예수의 나자렛 삶을 본받아
사하라 사막에서 가난하게 숨어 살며 민족과 종교의 담을 뛰어넘어
모든 이의 형제로 살다가 58세 때 타만라셋트 원주민들에게 피살된다.
그는 신자라고는 한 사람도 없는 이슬람교 신자들 사이에서 15년을 살며
살아있는 복음으로 하느님께 온전히 삶을 봉헌했다.
*샤를르 드 푸꼬의 회심과 기도:게시판1185번
나자렛 예수의 삶을 산 영성가, 복자품에 올라
'사막의 성자'라 불리는 예수의 샤를 드 푸코(1858~1916)가
2005년11월13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복자품에 올랐다.
프랑스 출생의 푸코는 27살에 회심한 뒤 가난하고 겸손된 예수의 나자렛 생활을 실천하기 위해
봉쇄수도원에 입회하고, 그것도 부족해 나자렛과 사하라 사막에 들어가 은수자적 삶을 산 영성가다.
그의 영성을 따르는 한국 푸코 영성가족으로는 예수의 작은자매들의 우애회ㆍ예수의 작은형제회ㆍ
푸코 재속우애회ㆍ까리따스 사제회ㆍ까리따스 우애회가 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이날 시복식 직후 연설에서 "푸코는 나자렛 은둔생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겸손을 발견했다"며 "특히 (이슬람 교도들이 있는) 사하라 사막에서의 삶은
우리를 보편적 형제애에 대한 묵상으로 이끈다"고 말했다.
부모를 일찍 여읜 푸코는 젊은 시절을 쾌락과 무질서 속에서 보냈다.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교 신분으로 북아프리카 반란군 진압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모로코 탐험 중 이슬람 신자들의 깊은 신앙에서 하느님 현존을 본 후
그리스도교 신앙을 다시 찾기 시작했다.
그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은 사건은 나자렛 성지순례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자렛이란 작은 마을에서 가난하고 비천한 목수로 숨어 사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자
그의 마음에서 특별한 성소의 싹이 자라기 시작한 것이다.
푸코는 그때 "비천과 무명 속에서 가난한 장인으로 사셨던 우리 주님이 다녔던 나자렛 거리를 걸으며
나 자신이 예감하고 상상했던 삶을 살고 싶은 갈증에 불타고 있다"(1896.6.24)고 고백했다.
그는 트라피스트 수도회에 입회했으나 더 고독하고 가난한 삶을 살고 싶어하는 나자렛 열정에 몸살을 앓았다.
수도원을 떠나 클라라수도원에서 3년간 허드렛일을 한 그는
1901년 사제품을 받은 뒤 가장 버림받은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결국 사하라 타만라셋에 정착해 유목민들의 친구이자 형제가 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1916년 한 원주민이 쏜 총에 맞아 눈을 감았다.
그가 남긴 '영적 수기'는 현대인의 심금을 울리고 있으며
"금세기에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하느님 사람"이란 칭송을 이끌어내고 있다.
그는 예수처럼 세상 한가운데서 가난한 사람들과 단순하게 살고 싶어했다.
그래서 수도복도 벗어 던졌다. 또 초대교회처럼 작고 단순한 공동체를 원했다.
세속에서 살되 세속에 물들지 말고, 활동을 하되 관상적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하느님 뜻에 단순하게 자신을 내맡기라는 가르침을 삶을 통해 전해줬다.
예수의 작은자매들의 우애회와 예수의 작은형제회 회원들은 이같은 영성을 따라
평복 차림으로 가난한 이들과 어울려 살아가고 있다.
한편 한국 푸코 영성가족은 13일 성골롬반선교센터에서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 주례로
시복기념미사를 봉헌하고 조촐한 축하잔치를 열었다. (평화신문에서)
(사진설명)바티칸시티=CNS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13일 베드로 대성전에서 샤를 드 푸코 등 3위 시복식 후 기도회에서 인사를 하고 있다.
이날 복자품에 오른 샤를 드 푸코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 있다.
예수의 샤를르 작은 형제의 약력
1858. 9.15. 프랑스 스트라스부르크에서 탄생
1886.10.30. 회심
1890. 1.16.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생활
"내가 무엇 때문에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들어 갔을까?
... 사랑, 오로지 사랑때문이었다 ."
1892. 2. 2. 첫 서원
1892. 2. 나자렛 생활을 찾고자 수도원을 떠나
1897 ~1900 나자렛에서의 예수님처럼 ..
1901. 6. 9. 목자없는 양떼를 위해 사제가 되다.
1901.10.28. 사하라 사막의 베니-아베스에 이르다.
1901.12. 1. 베니-아베스에서의 첫 미사.
은둔생활로 들어가나 차츰 '만인의형제'가 되다.
1905. 8.13. 타라만셋에 이르다.
1916.12. 1. 그들속에서 그들과 함께 사시다가 그들 손에 그만 ...
2005.11.13. 시복식. 복자 품에 올려지다.
(예수의 작은형제회홈에서)
스스로를 내어 맡기는 기도
-예수의 샤를르 작은 형제
아버지,
이 몸을 당신께 맡기오니 좋을실대로 하십시오.
저를 어떻게 하시든지 감사드릴뿐,
저는 무엇에나 준비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저와 모든 피조물 위에 이루어진다면
이 밖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내 영혼을 당신 손에 도로 드립니다.
당신을 사랑하옵기에 이 마음의 사랑을 다하여
하느님께 내 영혼을 바치옵니다.
당신은 내 아버지시기에
끝없이 믿으며 남김없이 이 몸을 드리고 당신 손에 맡기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저의 사랑입니다.
예수성심 경당은 반지하층에 있다.
샤를 드 푸코 신부의 자취가 보존되어 있는 곳. 트레폰타네에 있는 예수의 작은 자매회 총원에 있는 예수성심 경당은 나자렛 예수의 마지막 자리를 찾아갔던 푸코 신부님의 삶처럼 낮은 곳에 있다.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에게는 세상 모든 사람이 귀하고 소중할 것이다. 가난하다고 해서 힘이 없다고 해서 혹은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소홀히 대하거나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역시 귀하고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장 낮은 자리에서부터 섬기는 삶이 시작된다.
<예수성심 경당의 입구, 계단 아래 오른편에 있다>
샤를 드 푸코는 나자렛 예수의 가장 낮은 자리를 찾아가는 일생을 살았다. 군사학교의 학생으로 군인으로 하느님과 멀어져 자기만 아는 에고이즘 속에 살았던 그는 방탕한 삶 속에서 내면의 갈증을 느끼기 시작한다. "하느님 저는 악만을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악에 휩쓸리지는 않았으며 악을 사랑할 수도 없었습니다. 당신은 저에게 쓰라린 공허감을 느끼게 하셨으며 저로 하여금 그때 비로소 슬픔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그 슬픔 때문에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벙어리 같이 되었고 사람들이 잔치하며 즐길 때면 그 슬픔은 끈질기게 저를 괴롭혔습니다..." <1897년 나자렛 피정 중에 쓴 묵상에서>
이러한 내면의 갈증으로 24살 되던 해에 군을 그만두고 알제리로 떠난다. 모로코를 탐험하기 위해서였다. 사하라를 탐험하면서 샤를 드 푸코는 매혹적인 사막과 이슬람의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한분이며 위대한 하느님. 무슬림들의 신앙은 그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다. 위대한 하느님과의 만남은 그가 찾게 될 겸손한 하느님, 나자렛의 가난한 예수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탐험 이후 파리로 돌아와 회심하게 될 때(1886년 10월) 그의 회심에 중요한 역할을 한 앙리 후벨린 신부의 말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마지막 자리를 차지하신" 나자렛 예수에게 그는 강렬하게 끌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들어가지만 나자렛을 향한 열망은 그로 하여금 7년 후 다시 길을 떠나게 한다.
"여러분은 내가 충분한 가난을 얻었기를 바라겠지만 아닙니다, 부유한 이들에 비하면 우리는 가난하지만 우리 주님처럼 가난하지는 않습니다..." <1890년 후벨린 신부에게 쓴 편지>
푸코는 나자렛의 글라라 수녀원에서 일하며 3년을 지내고 1901년 프랑스에 돌아와 사제 서품을 받는다. 그리고 성지가 아니라 사하라로 떠난다.
"부제직과 사제직을 위한 피정을 통해 나는 깨달았다. 나의 소명으로 여겨지는 나자렛의 삶을 이렇게 사랑받는 성지가 아니라 더 병든 사람들, 더 버려진 양들 가운데서 살아야 한다고. 성직자가 된 나의 천상식탁은 형제, 친척, 부유한 이웃들이 아니라 사제를 더 필요로 하는 절름발이들, 맹인들, 더 버려진 영혼들에게 차려져야 한다고." <그의 편지 중에서>
모로코의 무슬림들처럼 버려져 있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을 알고 알제리 사하라의 작은 오아시스 베니 압베스에 가기를 청했던 것이다. 당시의 한 증언은 그와 함께 드린 미사에 대한 인상을 간결하게 전하고 있다.
"주일 아침 일곱시에 은둔처에서 우리는 미사를 도왔습니다. 그 은둔처의 작은 집! 경당은 기둥들이 있는 작은 복도이고 지붕은 갈대로 덮여있습니다! 제대는 널판 하나입니다! 장식이라고는 면직물 천 위에 그린 그리스도의 모습과 백철로 된 촛대뿐입니다. 바닥은 모래였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푸코 신부님이 드리는 것 같은 미사는 일찍이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곳이 종착지는 아니었다. 1905년 8월 그는 다시 남쪽 타만라셋의 투아레그인들 사이로 이주한다. 반경 700~800킬로미터 안의 사막에서 유일한 유럽인, 그리스도인이었던 그는 사랑의 삶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마로바트(이슬람의 현자)로 불린다. 많은 사람들이 흉금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하려 그를 찾아왔던 것이다. 1907년부터 이듬해까지 있었던 혹독한 기근 동안 비축식량을 다 나누어준 샤를 드 푸코는 기진하여 심각한 병에 걸린다. 사경을 헤매던 그를 구해준 것은 투아레그인들이었다. 이제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 가장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 투아레그인들의 형제가 된 것이다.
<그가 직접 그린 '성모의 엘리사벳 방문'>
"하느님은 아무것도 아닌 것 위에 세우신다. 예수께서 세상을 구원하신 것은 그의 죽음을 통해서였고 교회를 세우신 것은 사도들의 무능함을 통해서였다. 하늘에 오르시고 믿음을 전파한 것은 아무것도 아닌 인간적 수단 안의 거룩함을 통해서였다." <1916년 1월 18일 비망록에서>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예수와 일치하는 데 있어 우리의 가장 힘있는 수단은 우리들의 무능함이다." <1916년 12월 1일 남긴 편지에서>
1916년 12월 1일 저녁 한 떼의 투아레그 도적들이 그의 은둔처에 도착한다. 그를 붙잡아 손목과 발목을 묶은 뒤 15살 된 소년에게 감시하게 하고 도적들은 물건들을 뒤져 자루에 담기 시작했다. 이때 갑작스레 누군가 오는 소리를 들은 소년은 겁에 질려 총의 방아쇠를 당기고 만다. 조용히 무릎을 꿇고 있던 샤를르는 이렇게 죽는다. 그가 바라던 대로 예수처럼 폭력과 고통 속에서 홀로.
<제대 위에 걸린 예수 성심화, 그가 직접 그린 것이다>
지난 2004년 12월 2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를 복자 위에 올린다는 교서 <성체의 사도들>에 서명했다. 함께 나자렛의 삶을 살 동료들을 열망하던 그는 한 편지에서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나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홀로입니다."라고 고백했지만 지금 그의 정신을 따라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든 대륙 여러 지역에서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또 다른 푸코의 모습을 되살리고 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52】수도회 창설자편(10)-샤를르 드 푸코(상) -가톨릭신문에서
사하라 사막에서 복음을 전하다 피살된 샤를르 드 푸코 신부는
나자렛 예수의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다.
예수님 삶 따른 ‘사막의 성자’ . 한때 쾌락에 빠져 무질서한 생활 . 고해성사 후 신앙 새전환점 맞아
20세기 초반에 이슬람 종교권인 중동지역, 그 중에서도 가장 혹독한 기후조건을 가진 사하라 사막에서 복음을 전파하다 피살돼 「사막의 성자」로 알려진 프랑스 출신의 샤를르 드 푸코 (1858~1916) 신부. 엘 골레아(El Golea)에 있는 그의 무덤 묘비에 적혀있는 구절은 그의 삶을 한마디로 대변해 주기에 충분하다. 「나는 일생동안 복음을 외쳐댔다」
칼(Karl) 형제로 불리기 좋아했다는 그는 무신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보다 깊이 그리스도교적 믿음과 삶의 원천에 접근하면서 실현하려고 애썼던, 예수께서 나자렛에서 살으셨던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글자 그대로 살아가고자 노력했던 인물이다. 무엇보다 그는 종교에 대한 무관심과 적대감이 팽배해 가던 시대 상황안에서 자신의 삶과 영성으로 새로운 통찰들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교회가 산업화로 부상한 노동자 계층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못하고 또 가난한 농민들에 대해 적절한 종교교육을 실천하지 못해 이들이 점차 교회로부터 멀어져 가는 환경에서 『복음서의 가난을 실천해 나가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가난한 교회가 되어 가난한 도구들로 그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새로운 힘을 낼 수 있고 그들이 납득하게 지당하게 받아들이게 된다』고 주장했고, 평신도들이 교회 안에 중요한 위치에 있으며 선교를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새롭게 발견해 냈다. 또 말로서 복음을 전하는 것 보다는 생활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사람들이 책이나 말을 통하지 않고도 믿는 이들의 삶을 바라보기만 해도 복음을 알 수 있도록 해야한다』고강조했다.
샤를르 드 푸코가 나자렛 예수의 삶을 살고자 회심하게 된 데는 한편 여러 과정이 필요했다.
1858년 9월 15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그에서 태어난 샤를르 드 푸코는 5세때 부모를 잃고 외조부모 댁에서 자랐는데 독실한 신앙을 지녔던 외조부모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종교생활을 하면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니던 학교 및 주변 여건의 영향으로 첫 영성체 후 종교적 무관심주의와 불가지론에 빠져들었고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쌩 시르에 있는 육군사관학교를 다녔는데 졸업시험에서 동기생 중 최하위 성적을 기록할 만큼 공부도 잘 해내지 못했다. 사관생도 장교로 살때는 그에 걸맞는 품위를 지키지 못해 가족들에게도 외면을 당했고 친구들에게는 「플레이보이」라는 의미의 「돼지같은 녀석」이라는 말을 들었다. 물려받은 재산을 쾌락을 누리는 데 탕진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이런 가운데 푸코는 알제리로 파견을 받았고 이때 매춘부 미미를 자신의 아내라 속이고 함께 데려가는 무모함을 저질렀다. 그러한 나태함과 무질서한 생활, 또 무능한 지휘 능력은 그를 결국 파면의 길로 몰고 갔다.
군대를 떠난 후 푸코는 이전과는 다른, 새롭게 자신의 모습을 추스르는 계기를 맞게 된다. 자신의 옛 부대가 알제리에서 전투에 휘말렸다는 소식을 들은 푸코는 다시 군에 입대, 반란을 제압하게 되는데 이것은 느슨했던 삶을 새롭게 일으키는 기회가 됐고 군대와 가족으로부터 새롭게 인정을 받는 결과를 갖게 했다. 1883년부터 1884년까지 푸코는 유럽 사람으로서는 첫 번째로 아르메니아의 유대인 옷을 입은 채 모로코로 탐사여행을 떠났다. 「모로코 탐험기」는 이때 나온 것이다. 당시 모로코는 유럽인들의 출입이 금지된 상황이어서 그의 시도는 큰 관심을 모았고 파리의 지리학회는 금메달을 수여하기도 했다.
이후 이슬람 사람들의 종교적 열성을 경험했던 푸코는 특히 사촌 누이 마리(Marie)의 신앙적 영향으로 회심의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후에 마담 드 봉디(Mme de Bondy)가 된 마리는 푸코가 난봉꾼으로 온 가족의 외면을 받던 시절에도 관계를 지속한 인물로서 그의 일생에 어머니와 같은 친구이자 영적 동반자 역할을 했다.
『만약 당신이 계신다면 저로 하여금 당신을 알게 해주십시오』 하느님께 대한 질문을 새롭게 던지기 시작한 푸코는 마리의 소개로 당시의 저명한 영적 지도자 위벨렝 아빠스를 만나게 됐고 1886년 10월 어느날 그에게 고해성사를 보게된다. 아빠스는 성사 후 성체를 모시도록 권했고 푸코는 이를 통해 새로운 신앙의 전환점을 찾았다.
『나는 하느님께 대해 믿음을 갖자마자 하느님을 위해서 사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나의 수도 생활은 나의 믿음을 다시 회복하는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마침내 푸코는 위벨렝 아빠스의 추천으로 네제(Neiges)에 있는 노틀담 트라피스트 수도회에 입회했다.
「단순한 삶과 가난한 삶」에 대한 열망을 지닌 채, 낮은 자로 세상에 오시어 인간이 되었다가 배반당하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하느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이었다.
【53】 수도회 창설자편(10) - 샤를르 드 푸코(하)
참 가난으로 참 사랑 나눠 .약자의 편에 서서 투쟁, 노예제도 철폐에도 노력
네제의 노틀담 트라피스트 수도회에 입회한 후 마리 알베릭(Marie-Alberic) 형제로 불리게 된 푸코는 이곳에서 오래 머무르지 않고 좀 더 가난한 삶을 찾아 시리아의 아크베(Akbes) 수도원으로 떠났다. 그러나 나자렛에서 가난하게 살다간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동경했던 푸코는 이곳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가난한 삶을 실현하기 힘들었고 이런 배경에서 작은 그룹으로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에 동참하는 수도회 창설을 생각하게 됐다.
「참으로 가난과 형제적 사랑으로 함께 하며 누구에게나 열린 자세를 가지는 곳, 또 단순한 정신으로 다가오는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지니는 곳」. 너무나 엄격하고 극단적인 삶으로 구상된 수도 회칙 초안을 두고 위벨렝 아빠스는 이의를 제기, 동의하지 않았으나 그러한 반대 속에서도 푸코는 나자렛 예수의 생활을 구현하기 위한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세부적인 내용들을 수정하기는 했으나 기본적 영성은 그대로 유지시켰다.
1897년 트라피스트회 총원장 허락을 받고 「나자렛에서의 삶」을 위해 수도회를 떠난 그는 그렇게 열망하던 나자렛으로 떠나 현지 글라라 수녀회 사환으로 근무하면서 허름한 옷을 입고 낡은 판자집에서 기거하는 생활을 시작했다. 수녀회의 허드렛일을 하며 나머지 시간은 관상 기도를 하는데 보낸 푸코는 그러한 생활 안에서 나자렛 예수가 보여 주었던 삶을 따르려 노력했다.
수도회 설립을 위해서는 먼저 사제가 되어야 한다는 주변 권유에 따라 1900년 프랑스로 건너간 푸코는 서품 준비를 하면서 북아프리카 지역을 떠올렸다. 아직 예수와 그의 복음을 모르는 이들에게 「나자렛에서의 삶」을 알려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 였다.
1901년 사제로 서품된 후 사하라 사막 변경 베니 아베스(Beni-Abbes)라는 지역에서 형제회 설립을 준비한 푸코는 그곳에서 원래 계획했던 나자렛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많은 시간동안 무릎을 꿇고 성체 앞에 앉아 기도했으며 예수가 인류를 위해 기도했듯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다. 작은 오아시스이자 국경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었던 지역 특성으로 이곳에는 그만큼 오아시스에 사는 은수자들,카라반들, 수비대 사병들과 장교들로 북적였고 또 그들은 푸코를 즐겨찾는 단골 손님이 되었다.
『저는 외적인 일에 너무 많이 관여하게 되어 글을 읽을 시간은 물론 묵상을 할 시간도 별로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불쌍한 군인들은 저에게 지속적으로 옵니다. 노예들도 언제나 자신들을 위해 지어 놓은 집을 채우고 있습니다. 여행자들도 다가와 형제애를 호소하고 가난한 자들은 언제나 넘칩니다…』
사하라 사막 남쪽으로 자주 여행을 했던 푸코는 1905년 8월 뛰아레 지역 사하라 사막 한복판 작은 오아시스였던 타망라쎄에 은수 생활을 위한 지부를 설립했고 1910년에는 이곳에서 10km 떨어진 아세크렝 고원 지역에 또 하나의 작은 지부를 만들었다.
기본적으로 관상적인 삶을 유지하면서 몇시간이고 성체 앞에서 예수의 삶의 자세로 깊숙이 들어가는 생활을 해나갔다. 그러한 삶 가운데 그는 또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위해 투쟁했으며 여러 사람들의 묵인 하에 지속되던 노예 제도 철폐를 위해서도 파리에 있는 국회에 탄원서들을 제출하는 등 노력을 쏟았다.
사하라 지역 발전을 위해 기차 전보 천문대 등 새로운 기술들에 관심을 가졌던 푸코는 지역 여성들에게는 뜨개질을 가르쳤고 무엇보다 뛰아레의 언어와 문학적 전통을 발전시키기 위해 눈을 감기 전까지 프랑스-뛰아레어사전을 만드는 작업에 헌신했다.
열정적이고 복음적이었던 생애가 무색하게 그의 마지막은 예상밖의 현실로 어느날 갑자기 다가왔다. 1916년 12월 1일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틈을 타서 리비아의 한 도적떼가 프랑스 식민지 사하라에 폭동을 일으키기 위해 침범해 왔고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성채를 짓던 푸코는 이들에 의해 끌려나와 우연한 총격에 희생됐다. 괴한들을 처리하기 위해 프랑스 군인들이 나타났고 이 와중에 푸코 곁에 있던 한 젊은이가 총을 겨눴던것이다.
아프리카의 이슬람교 신자들 사이에서 순응적인 새로운 포교 방법을 창시한 것으로도 주목을 받고 있는 그의 생애는 삶으로 실천되는 복음이었고 실천적인 가난이었으며 버려진 사람들 가운데 숨어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철저한 사랑으로 설명된다. 나자렛 예수를 닮으려 했던 그의 삶은 사후에도 그를 따르려는 공동체들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예수의 마들렌 작은 자매(Sister Madeleine for Jesus 1898∼1989)는 사막의 유목민들 가운데서 그들의 형제 친구로 살아갔던 푸코의 영성에 따라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1939)를 설립했으며 러네 부아욤(R. Voillaume 1905∼) 신부 등 다섯 명의 사제들은 푸코의 삶에 감화를 받아 1933년 파리 몽마르뜨 예수성심 대성당에서 「예수의 작은 형제회」를 창립했다.
1901년 푸코가 베니 아베스의 유목민들 사이에서 첫 공동체를 만든 이후 공식적인 형제회의 탄생이었다.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는 현재 약 70개 가까운 나라에서 우애의 집을 설립,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세상에서의 관상생활을 하고 있으며 예수의 작은 형제회는 「사람들 사이에 사는 새로운 형태의 관상 수도회」로 인증받은 채 이슬람 국가인 중동 지역을 비롯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를 포함한 40개국에 진출해 있다.
(가톨릭신문에서)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
'가난한 이와 함께' 세상속에서 관상 추구
"하느님께서 내 손을 잡아 이끄시니 나는 눈을 감고 따랐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성체를 중심으로 한 기도의 삶, 즉 세상에서의 관상생활을 추구하는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는 그들의 창설 역사를 이렇게 말한다.
1939년 사하라의 루그르트에 창립된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 수도회 창설자 마들렌 수녀는 1889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군의관으로 일하면서 아랍 소년의 생명을 구했던 아버지의 헌신적인 사랑에 영향을 받아 어렸을 때부터 아프리카와 아랍 사람들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사랑을 가졌다.
유목민들의 삶을 동경했던 마들렌 수녀는 1921년 사하라 사막의 성자로 불렸던 샤를르 드 푸코의 전기를 읽고 그 안에서 자신이 키워온 삶의 이상을 발견했다. 그러나 전쟁이 몰고 온 가정의 시련과 건강의 악화로 꿈을 실현할 수 없었던 그녀는 1939년 그가 앓고 있던 변형성 관절염에 대해 "불구자가 되지 않으려면 비 한방울 내리지 않는 사막으로 가서 사시오"라는 기적과 같은 처방을 받고, 사하라의 알제리, 이슬람 땅으로 떠나게 됐다.
무료급식, 진료, 교육 등의 일에 투신했던 마들렌 수녀는 1938년 성소식별을 위해 찾았던 푸코 신부의 무덤에서 사하라 교구장인 누에 주교를 만났고, 그를 통해 수도회 창설이라는 하느님 뜻을 받게됐다. 그녀는 백의회 수녀회에서 수련을 받으면서 수도회 창설을 준비하고 1939년 첫 서원을 하게됐다. 이로써 '우애의 집'이라는 공동체가 사하라 사막 투구르트에서 태어나면서 수도회가 시작된 것이다.
노동자들과 장애인, 결핵, 나병 환자들 그리고 목동, 집시, 노점상인들 사이 곳곳에 우애의 집을 창설한 마들렌 수녀는 56년 로마에 총본부를 두었고, 64년 교황청 직속 수도회로 인가를 받았다. 보편교회 안에서 수도회의 카리스마를 실현했던 그녀는 1989년 수도회 창설 50주년이 되던 해에 이 세상에서의 생을 마감했다.
소외된 이들과 더불어 살았던 마들렌 수녀는 회원들에게 '반죽 속의 누룩'처럼 대중 속에 섞여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 것을 당부했다. 가난한 이들 가운데 한사람으로 그들을 지도하거나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위치에서 친구나 형제로서 그들을 사랑하며 살도록 했다.
따라서 작은 자매들은 서민들이 사는 지역에서 그들이 하는 공장 노동이나 파출부, 농사일을 함께 하면서, 삶의 현장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기쁨과 아픔, 하느님의 사랑을 함께 나누며 살고 있다.
수도자들은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삶과 아울러 매일의 성체 조배를 통해 인류의 희망과 이웃들의 삶, 특히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을 전달하는 기도인으로서 전세계 각지에서 살아가고 있다.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의 한국진출은 1954년 마들렌 수녀의 한국방문으로 시작됐다. 나환자들 사이에 우애의 집을 짓고자 했던 수도회는 1955년 대구대교구 최덕홍 주교 초청으로 한국에 진출, 2명의 수녀가 경북 왜관 삼청동 나환자촌에 공동체를 마련했다. 이후 수도자들은 나환우들에게 효과적인 의료혜택을 제공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와 연결하는 등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초창기 대구와 서울 명동성당 앞 마당 낡은 응급차 안에서 삶을 이어간 이들은 현재 서울과 대구, 광주, 대전 및 인천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부산지역 진출을 시도하고 있다.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는 한국교회에서 공동체를 꾸려가는 38명의 수도자들을 비롯해 전세계 1300여명의 회원들이 세상 모든 이들의 형제와 친구로서,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함께 사는 삶을 실천하고 있다.
(샤를르 영성 가족 카페에서)
바오로딸<사하라의 불꽃>
성바오로출판사 <샤를 드 푸코>
분도출판사<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분도출판사<하느님의 사람들4-예수의 작은 형제 샤를르 드 푸코>
베네딕도 미디어의 비디오 <모든 이의 작은 형제 샤를르 드 푸꼬>
분도출판사<사람 서리에서>와 <세상 속의 사막>
출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원문보기▶ 글쓴이 : 숲꽃향기
축일:12눨 1일
복자 샤를르 드 푸코
Beato Carlo di Gesù (Charles de Foucauld) Religioso
Beato Charles de Foucauld
Strasburgo, 15 settembre 1858 - 1 dicembre 1916
Born:15 September 1858 in Strasbourg, France as Charles Eugenie de Foucauld
Died:shot on 1 December 1916 at Tamanrasset, Algeria
Venerated:24 April 2001 by Pope John Paul II
Beatified:13 November 2005 by Pope Benedict XVI; recognition celebrated by Cardinal Saraiva Martins at Saint Peter's Basilica, Rome, Italy
샤를르 후코형제(샤를르 드 후코:성바오로출판사)는 회심하자마자
예수를 위해서만 살겠다는 열정으로 그분을 가장 가까이에서 따르기 위해
성지 나자렛으로 떠났습니다.
그후 그는 가장 멀리 있는 사하라의 오지 투아렉 부족들 사이에서 살다가
그들에 의해 피살되었습니다. (1916년)
프랑스의 몇몇 젊은이들이 알제리의 사하라 사막에서 그의 삶을 따라
예수의 작은 형제회를 시작했습니다. (1933년)
샤를르 형제가 살았던 삶과 그가 남겨놓은 기록을 통해 형제들은
공동체 생활의 체험과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의 폐허, 이데올로기와 종교간의 갈등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들을 통해 자극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또한 시대적 요구와 교회의 변화를 함께 겪으면서
샤를르 형제의 "나자렛 삶과 영성"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해왔습니다.
다양한 종교,인종,문화,계급,생활 형태 속에서 그들과 똑같은 삶의 방식으로
260여명의 형제들이 세계 42개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세상속의 사막-분도출판사)
예수의 작은 형제들의 영성
사람들 속에서 겸손하고 가난하게 사셨던 나자렛 예수님의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똑같은 모습으로 살았던
샤를르 형제처럼, 예수의 작은 형제들의 영성은
충실한 제자가 그의 스승이자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완전하게 닮으려는 데 있습니다.
예수의 작은 형제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관상과 성체성사를 통한 그리스도의 경배, 복음적 가난의 실천,
육체적 노동과 가난한 이들의 사회적 조건에 구체적으로 동참하는 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이 나자렛 삶이 우리를 하느님과의 일치와 사람들과의 우정에 이르게 하는 길입니다.
관상과 노동의 일치를 이루는 것은 형제적 사랑에서입니다.
형제들은 샤를르 형제처럼 "우리의 유일한 모델(유일한 모델:성바오로딸)"을
"나자렛 예수"에게서 찿으며, "만인의 형제"라고 불리기를 원합니다.
그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려고 교회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이들 가운데서
그들과 똑같은 처지에서 우정을 나누며 살기를 원합니다. (사람서리에서-분도출판사)
샤를르 드 푸꼬(1858∼1916, 프랑스)
10년 넘게 신앙에 대한 의혹과 불신 속에서 교회를 떠나 있던 사막의 성자 푸코의 회심의 순간입니다.
1886년 10월 27일부터 30일 사이 어느날, 그는 아침 일찍 생오귀스탱 성당으로 갔다.
그에게는 아직 확실한 결심은 없었으나,
자기도 확실히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움직여지고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이 진행되었다.
그는 고해소에 있는 위블랭 신부를 만나러 갔다.
그는 꿇어 앉지는 않았으나 종교에 대해서 가르쳐 주기를 원했다.
"무릎을 꿇으시오. 하느님께 고해를 하시오. 그러면 믿을 수 있을 겁니다."
신부는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하지만…." 하고 푸코는 거부했다.
"나는 그것 때문에 온 것은 아닙니다."
"고해를 하십시오!"
신부는 되풀이 해서 말했다.
푸코는 자유롭게 돌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푸코는 무릎을 꿇고 지금까지의 생활을 숨김 없이 모두 고해했다.
그가 몸을 일으켰을 때는 그리스도의 피로써 모든 죄의 사함을 받았을 뿐 아니라
한 번도 잊어 버린 일이 없는 듯한, 강하고 확고한 신앙을 다시 찾았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때 사제는 그에게 "아직 아침 식사 안하셨지요?" 하고 물었다.
그리고 아직 하지 않았다는 대답을 듣고는 즉시 성체를 영해 주었다.
29세의 샤를 드 푸코는 드디어 운명을 결정짓는 첫걸음을 내디디었다.
즉 교회의 문턱을 넘어섰던 것이다.
그 전에는 어떻게 하면 여기까지 도달할 수 있는지를 몰랐다.
어제까지만 해도 무엇 때문에 이 생오귀스탱 성당 주위를
원망과 불확실성에 주저 하면서 헤매고 있었던가를 오늘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찾아낸 환희는 너무도 강렬했기 때문에 그의 모든 것을 압도하고 말았다.
오직 한 가지 문제는 왜 이렇게 오랫동안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살았는가 하는 것이었다.
단 하루 사이에 그의 생활은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10년 동안이나 신앙생활을 멀리했던 그는 매일 위블랭 신부가 드리는 미사에 참례했다.
그는 매주일 고해성사를 보았으며 거의 날마다 성체를 영했다.
자기 스스로 그렇게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제가 그를 이끌었으며,
그도 또한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대로 응했던 것이다.
푸코는 겨우 회개했을 뿐이다.
회개는 종교에 있어서 마지막은 아니지만,
푸코의 회심은 그의 모든 존재를 진정으로 반역하는 것이었다.
오랫동안의 우여곡절을 겪은 뒤의 이 회심으로 그의 생활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즉 영구적인 혁명의 결정적 전환점이 된 것이다.
12년간의 무신앙과 2년 반 동안의 여행, 이 신비적인 여행을 마친 후에
그는 생오귀스탱의 성당 문을 들어선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에 가까이 가는 길을 발견하는 데는 육신과 영혼이 새롭게 변화해야 했고,
여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1886년 10월 말, 드디어 푸코는 완전히 정복되었다.
하느님께서 존재한다고 믿게 되자마자,
나는 하느님을 위해서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 나의 수도 생활에 대한 성소는 나의 신앙과 동시에 시작된 것이다.
그때 그는 생오귀스탱 성당에서 위블랭 신부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나의 하느님은
이렇게 가장 비천한 자리를 택하셨기 때문에
아무도 하느님으로부터 그것을 빼앗을 수가 없었다."
이 말은 푸코 영혼의 가장 깊숙한 곳을 찌르며 그의 일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그는 이미 하느님을 본받아서 그 시대의 사람들 중에서
가장 비천한 자리를 찾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가 그리스도와 가장 가까이 있을 수 있는 길을 그것뿐이기 때문이었다.
- 성바오로출판사, <사하라 사막의 성자 샤를 드 푸코>에서 -
오랜 방황 끝에 하느님을 찾은 샤를르 드 푸꼬는
예수께서 나자렛에서 하신 가난하고 미천한 노동자로서의 숨은 생활을 본받고자 했다.
그는 43세에 사제서품을 받고 예수의 나자렛 삶을 본받아
사하라 사막에서 가난하게 숨어 살며 민족과 종교의 담을 뛰어넘어
모든 이의 형제로 살다가 58세 때 타만라셋트 원주민들에게 피살된다.
그는 신자라고는 한 사람도 없는 이슬람교 신자들 사이에서 15년을 살며
살아있는 복음으로 하느님께 온전히 삶을 봉헌했다.
*샤를르 드 푸꼬의 회심과 기도:게시판1185번
나자렛 예수의 삶을 산 영성가, 복자품에 올라
'사막의 성자'라 불리는 예수의 샤를 드 푸코(1858~1916)가
2005년11월13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복자품에 올랐다.
프랑스 출생의 푸코는 27살에 회심한 뒤 가난하고 겸손된 예수의 나자렛 생활을 실천하기 위해
봉쇄수도원에 입회하고, 그것도 부족해 나자렛과 사하라 사막에 들어가 은수자적 삶을 산 영성가다.
그의 영성을 따르는 한국 푸코 영성가족으로는 예수의 작은자매들의 우애회ㆍ예수의 작은형제회ㆍ
푸코 재속우애회ㆍ까리따스 사제회ㆍ까리따스 우애회가 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이날 시복식 직후 연설에서 "푸코는 나자렛 은둔생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겸손을 발견했다"며 "특히 (이슬람 교도들이 있는) 사하라 사막에서의 삶은
우리를 보편적 형제애에 대한 묵상으로 이끈다"고 말했다.
부모를 일찍 여읜 푸코는 젊은 시절을 쾌락과 무질서 속에서 보냈다.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교 신분으로 북아프리카 반란군 진압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모로코 탐험 중 이슬람 신자들의 깊은 신앙에서 하느님 현존을 본 후
그리스도교 신앙을 다시 찾기 시작했다.
그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은 사건은 나자렛 성지순례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자렛이란 작은 마을에서 가난하고 비천한 목수로 숨어 사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자
그의 마음에서 특별한 성소의 싹이 자라기 시작한 것이다.
푸코는 그때 "비천과 무명 속에서 가난한 장인으로 사셨던 우리 주님이 다녔던 나자렛 거리를 걸으며
나 자신이 예감하고 상상했던 삶을 살고 싶은 갈증에 불타고 있다"(1896.6.24)고 고백했다.
그는 트라피스트 수도회에 입회했으나 더 고독하고 가난한 삶을 살고 싶어하는 나자렛 열정에 몸살을 앓았다.
수도원을 떠나 클라라수도원에서 3년간 허드렛일을 한 그는
1901년 사제품을 받은 뒤 가장 버림받은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결국 사하라 타만라셋에 정착해 유목민들의 친구이자 형제가 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1916년 한 원주민이 쏜 총에 맞아 눈을 감았다.
그가 남긴 '영적 수기'는 현대인의 심금을 울리고 있으며
"금세기에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하느님 사람"이란 칭송을 이끌어내고 있다.
그는 예수처럼 세상 한가운데서 가난한 사람들과 단순하게 살고 싶어했다.
그래서 수도복도 벗어 던졌다. 또 초대교회처럼 작고 단순한 공동체를 원했다.
세속에서 살되 세속에 물들지 말고, 활동을 하되 관상적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하느님 뜻에 단순하게 자신을 내맡기라는 가르침을 삶을 통해 전해줬다.
예수의 작은자매들의 우애회와 예수의 작은형제회 회원들은 이같은 영성을 따라
평복 차림으로 가난한 이들과 어울려 살아가고 있다.
한편 한국 푸코 영성가족은 13일 성골롬반선교센터에서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 주례로
시복기념미사를 봉헌하고 조촐한 축하잔치를 열었다. (평화신문에서)
(사진설명)바티칸시티=CNS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13일 베드로 대성전에서 샤를 드 푸코 등 3위 시복식 후 기도회에서 인사를 하고 있다.
이날 복자품에 오른 샤를 드 푸코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 있다.
예수의 샤를르 작은 형제의 약력
1858. 9.15. 프랑스 스트라스부르크에서 탄생
1886.10.30. 회심
1890. 1.16.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생활
"내가 무엇 때문에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들어 갔을까?
... 사랑, 오로지 사랑때문이었다 ."
1892. 2. 2. 첫 서원
1892. 2. 나자렛 생활을 찾고자 수도원을 떠나
1897 ~1900 나자렛에서의 예수님처럼 ..
1901. 6. 9. 목자없는 양떼를 위해 사제가 되다.
1901.10.28. 사하라 사막의 베니-아베스에 이르다.
1901.12. 1. 베니-아베스에서의 첫 미사.
은둔생활로 들어가나 차츰 '만인의형제'가 되다.
1905. 8.13. 타라만셋에 이르다.
1916.12. 1. 그들속에서 그들과 함께 사시다가 그들 손에 그만 ...
2005.11.13. 시복식. 복자 품에 올려지다.
(예수의 작은형제회홈에서)
스스로를 내어 맡기는 기도
-예수의 샤를르 작은 형제
아버지,
이 몸을 당신께 맡기오니 좋을실대로 하십시오.
저를 어떻게 하시든지 감사드릴뿐,
저는 무엇에나 준비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저와 모든 피조물 위에 이루어진다면
이 밖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내 영혼을 당신 손에 도로 드립니다.
당신을 사랑하옵기에 이 마음의 사랑을 다하여
하느님께 내 영혼을 바치옵니다.
당신은 내 아버지시기에
끝없이 믿으며 남김없이 이 몸을 드리고 당신 손에 맡기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저의 사랑입니다.
예수성심 경당은 반지하층에 있다.
샤를 드 푸코 신부의 자취가 보존되어 있는 곳. 트레폰타네에 있는 예수의 작은 자매회 총원에 있는 예수성심 경당은 나자렛 예수의 마지막 자리를 찾아갔던 푸코 신부님의 삶처럼 낮은 곳에 있다.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에게는 세상 모든 사람이 귀하고 소중할 것이다. 가난하다고 해서 힘이 없다고 해서 혹은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소홀히 대하거나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역시 귀하고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장 낮은 자리에서부터 섬기는 삶이 시작된다.
<예수성심 경당의 입구, 계단 아래 오른편에 있다>
샤를 드 푸코는 나자렛 예수의 가장 낮은 자리를 찾아가는 일생을 살았다. 군사학교의 학생으로 군인으로 하느님과 멀어져 자기만 아는 에고이즘 속에 살았던 그는 방탕한 삶 속에서 내면의 갈증을 느끼기 시작한다. "하느님 저는 악만을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악에 휩쓸리지는 않았으며 악을 사랑할 수도 없었습니다. 당신은 저에게 쓰라린 공허감을 느끼게 하셨으며 저로 하여금 그때 비로소 슬픔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그 슬픔 때문에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벙어리 같이 되었고 사람들이 잔치하며 즐길 때면 그 슬픔은 끈질기게 저를 괴롭혔습니다..." <1897년 나자렛 피정 중에 쓴 묵상에서>
이러한 내면의 갈증으로 24살 되던 해에 군을 그만두고 알제리로 떠난다. 모로코를 탐험하기 위해서였다. 사하라를 탐험하면서 샤를 드 푸코는 매혹적인 사막과 이슬람의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한분이며 위대한 하느님. 무슬림들의 신앙은 그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다. 위대한 하느님과의 만남은 그가 찾게 될 겸손한 하느님, 나자렛의 가난한 예수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탐험 이후 파리로 돌아와 회심하게 될 때(1886년 10월) 그의 회심에 중요한 역할을 한 앙리 후벨린 신부의 말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마지막 자리를 차지하신" 나자렛 예수에게 그는 강렬하게 끌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들어가지만 나자렛을 향한 열망은 그로 하여금 7년 후 다시 길을 떠나게 한다.
"여러분은 내가 충분한 가난을 얻었기를 바라겠지만 아닙니다, 부유한 이들에 비하면 우리는 가난하지만 우리 주님처럼 가난하지는 않습니다..." <1890년 후벨린 신부에게 쓴 편지>
푸코는 나자렛의 글라라 수녀원에서 일하며 3년을 지내고 1901년 프랑스에 돌아와 사제 서품을 받는다. 그리고 성지가 아니라 사하라로 떠난다.
"부제직과 사제직을 위한 피정을 통해 나는 깨달았다. 나의 소명으로 여겨지는 나자렛의 삶을 이렇게 사랑받는 성지가 아니라 더 병든 사람들, 더 버려진 양들 가운데서 살아야 한다고. 성직자가 된 나의 천상식탁은 형제, 친척, 부유한 이웃들이 아니라 사제를 더 필요로 하는 절름발이들, 맹인들, 더 버려진 영혼들에게 차려져야 한다고." <그의 편지 중에서>
모로코의 무슬림들처럼 버려져 있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을 알고 알제리 사하라의 작은 오아시스 베니 압베스에 가기를 청했던 것이다. 당시의 한 증언은 그와 함께 드린 미사에 대한 인상을 간결하게 전하고 있다.
"주일 아침 일곱시에 은둔처에서 우리는 미사를 도왔습니다. 그 은둔처의 작은 집! 경당은 기둥들이 있는 작은 복도이고 지붕은 갈대로 덮여있습니다! 제대는 널판 하나입니다! 장식이라고는 면직물 천 위에 그린 그리스도의 모습과 백철로 된 촛대뿐입니다. 바닥은 모래였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푸코 신부님이 드리는 것 같은 미사는 일찍이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곳이 종착지는 아니었다. 1905년 8월 그는 다시 남쪽 타만라셋의 투아레그인들 사이로 이주한다. 반경 700~800킬로미터 안의 사막에서 유일한 유럽인, 그리스도인이었던 그는 사랑의 삶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마로바트(이슬람의 현자)로 불린다. 많은 사람들이 흉금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하려 그를 찾아왔던 것이다. 1907년부터 이듬해까지 있었던 혹독한 기근 동안 비축식량을 다 나누어준 샤를 드 푸코는 기진하여 심각한 병에 걸린다. 사경을 헤매던 그를 구해준 것은 투아레그인들이었다. 이제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 가장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 투아레그인들의 형제가 된 것이다.
<그가 직접 그린 '성모의 엘리사벳 방문'>
"하느님은 아무것도 아닌 것 위에 세우신다. 예수께서 세상을 구원하신 것은 그의 죽음을 통해서였고 교회를 세우신 것은 사도들의 무능함을 통해서였다. 하늘에 오르시고 믿음을 전파한 것은 아무것도 아닌 인간적 수단 안의 거룩함을 통해서였다." <1916년 1월 18일 비망록에서>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예수와 일치하는 데 있어 우리의 가장 힘있는 수단은 우리들의 무능함이다." <1916년 12월 1일 남긴 편지에서>
1916년 12월 1일 저녁 한 떼의 투아레그 도적들이 그의 은둔처에 도착한다. 그를 붙잡아 손목과 발목을 묶은 뒤 15살 된 소년에게 감시하게 하고 도적들은 물건들을 뒤져 자루에 담기 시작했다. 이때 갑작스레 누군가 오는 소리를 들은 소년은 겁에 질려 총의 방아쇠를 당기고 만다. 조용히 무릎을 꿇고 있던 샤를르는 이렇게 죽는다. 그가 바라던 대로 예수처럼 폭력과 고통 속에서 홀로.
<제대 위에 걸린 예수 성심화, 그가 직접 그린 것이다>
지난 2004년 12월 2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를 복자 위에 올린다는 교서 <성체의 사도들>에 서명했다. 함께 나자렛의 삶을 살 동료들을 열망하던 그는 한 편지에서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나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홀로입니다."라고 고백했지만 지금 그의 정신을 따라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든 대륙 여러 지역에서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또 다른 푸코의 모습을 되살리고 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52】수도회 창설자편(10)-샤를르 드 푸코(상) -가톨릭신문에서
사하라 사막에서 복음을 전하다 피살된 샤를르 드 푸코 신부는
나자렛 예수의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다.
예수님 삶 따른 ‘사막의 성자’ . 한때 쾌락에 빠져 무질서한 생활 . 고해성사 후 신앙 새전환점 맞아
20세기 초반에 이슬람 종교권인 중동지역, 그 중에서도 가장 혹독한 기후조건을 가진 사하라 사막에서 복음을 전파하다 피살돼 「사막의 성자」로 알려진 프랑스 출신의 샤를르 드 푸코 (1858~1916) 신부. 엘 골레아(El Golea)에 있는 그의 무덤 묘비에 적혀있는 구절은 그의 삶을 한마디로 대변해 주기에 충분하다. 「나는 일생동안 복음을 외쳐댔다」
칼(Karl) 형제로 불리기 좋아했다는 그는 무신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보다 깊이 그리스도교적 믿음과 삶의 원천에 접근하면서 실현하려고 애썼던, 예수께서 나자렛에서 살으셨던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글자 그대로 살아가고자 노력했던 인물이다. 무엇보다 그는 종교에 대한 무관심과 적대감이 팽배해 가던 시대 상황안에서 자신의 삶과 영성으로 새로운 통찰들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교회가 산업화로 부상한 노동자 계층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못하고 또 가난한 농민들에 대해 적절한 종교교육을 실천하지 못해 이들이 점차 교회로부터 멀어져 가는 환경에서 『복음서의 가난을 실천해 나가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가난한 교회가 되어 가난한 도구들로 그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새로운 힘을 낼 수 있고 그들이 납득하게 지당하게 받아들이게 된다』고 주장했고, 평신도들이 교회 안에 중요한 위치에 있으며 선교를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새롭게 발견해 냈다. 또 말로서 복음을 전하는 것 보다는 생활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사람들이 책이나 말을 통하지 않고도 믿는 이들의 삶을 바라보기만 해도 복음을 알 수 있도록 해야한다』고강조했다.
샤를르 드 푸코가 나자렛 예수의 삶을 살고자 회심하게 된 데는 한편 여러 과정이 필요했다.
1858년 9월 15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그에서 태어난 샤를르 드 푸코는 5세때 부모를 잃고 외조부모 댁에서 자랐는데 독실한 신앙을 지녔던 외조부모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종교생활을 하면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니던 학교 및 주변 여건의 영향으로 첫 영성체 후 종교적 무관심주의와 불가지론에 빠져들었고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쌩 시르에 있는 육군사관학교를 다녔는데 졸업시험에서 동기생 중 최하위 성적을 기록할 만큼 공부도 잘 해내지 못했다. 사관생도 장교로 살때는 그에 걸맞는 품위를 지키지 못해 가족들에게도 외면을 당했고 친구들에게는 「플레이보이」라는 의미의 「돼지같은 녀석」이라는 말을 들었다. 물려받은 재산을 쾌락을 누리는 데 탕진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이런 가운데 푸코는 알제리로 파견을 받았고 이때 매춘부 미미를 자신의 아내라 속이고 함께 데려가는 무모함을 저질렀다. 그러한 나태함과 무질서한 생활, 또 무능한 지휘 능력은 그를 결국 파면의 길로 몰고 갔다.
군대를 떠난 후 푸코는 이전과는 다른, 새롭게 자신의 모습을 추스르는 계기를 맞게 된다. 자신의 옛 부대가 알제리에서 전투에 휘말렸다는 소식을 들은 푸코는 다시 군에 입대, 반란을 제압하게 되는데 이것은 느슨했던 삶을 새롭게 일으키는 기회가 됐고 군대와 가족으로부터 새롭게 인정을 받는 결과를 갖게 했다. 1883년부터 1884년까지 푸코는 유럽 사람으로서는 첫 번째로 아르메니아의 유대인 옷을 입은 채 모로코로 탐사여행을 떠났다. 「모로코 탐험기」는 이때 나온 것이다. 당시 모로코는 유럽인들의 출입이 금지된 상황이어서 그의 시도는 큰 관심을 모았고 파리의 지리학회는 금메달을 수여하기도 했다.
이후 이슬람 사람들의 종교적 열성을 경험했던 푸코는 특히 사촌 누이 마리(Marie)의 신앙적 영향으로 회심의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후에 마담 드 봉디(Mme de Bondy)가 된 마리는 푸코가 난봉꾼으로 온 가족의 외면을 받던 시절에도 관계를 지속한 인물로서 그의 일생에 어머니와 같은 친구이자 영적 동반자 역할을 했다.
『만약 당신이 계신다면 저로 하여금 당신을 알게 해주십시오』 하느님께 대한 질문을 새롭게 던지기 시작한 푸코는 마리의 소개로 당시의 저명한 영적 지도자 위벨렝 아빠스를 만나게 됐고 1886년 10월 어느날 그에게 고해성사를 보게된다. 아빠스는 성사 후 성체를 모시도록 권했고 푸코는 이를 통해 새로운 신앙의 전환점을 찾았다.
『나는 하느님께 대해 믿음을 갖자마자 하느님을 위해서 사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나의 수도 생활은 나의 믿음을 다시 회복하는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마침내 푸코는 위벨렝 아빠스의 추천으로 네제(Neiges)에 있는 노틀담 트라피스트 수도회에 입회했다.
「단순한 삶과 가난한 삶」에 대한 열망을 지닌 채, 낮은 자로 세상에 오시어 인간이 되었다가 배반당하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하느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이었다.
【53】 수도회 창설자편(10) - 샤를르 드 푸코(하)
참 가난으로 참 사랑 나눠 .약자의 편에 서서 투쟁, 노예제도 철폐에도 노력
네제의 노틀담 트라피스트 수도회에 입회한 후 마리 알베릭(Marie-Alberic) 형제로 불리게 된 푸코는 이곳에서 오래 머무르지 않고 좀 더 가난한 삶을 찾아 시리아의 아크베(Akbes) 수도원으로 떠났다. 그러나 나자렛에서 가난하게 살다간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동경했던 푸코는 이곳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가난한 삶을 실현하기 힘들었고 이런 배경에서 작은 그룹으로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에 동참하는 수도회 창설을 생각하게 됐다.
「참으로 가난과 형제적 사랑으로 함께 하며 누구에게나 열린 자세를 가지는 곳, 또 단순한 정신으로 다가오는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지니는 곳」. 너무나 엄격하고 극단적인 삶으로 구상된 수도 회칙 초안을 두고 위벨렝 아빠스는 이의를 제기, 동의하지 않았으나 그러한 반대 속에서도 푸코는 나자렛 예수의 생활을 구현하기 위한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세부적인 내용들을 수정하기는 했으나 기본적 영성은 그대로 유지시켰다.
1897년 트라피스트회 총원장 허락을 받고 「나자렛에서의 삶」을 위해 수도회를 떠난 그는 그렇게 열망하던 나자렛으로 떠나 현지 글라라 수녀회 사환으로 근무하면서 허름한 옷을 입고 낡은 판자집에서 기거하는 생활을 시작했다. 수녀회의 허드렛일을 하며 나머지 시간은 관상 기도를 하는데 보낸 푸코는 그러한 생활 안에서 나자렛 예수가 보여 주었던 삶을 따르려 노력했다.
수도회 설립을 위해서는 먼저 사제가 되어야 한다는 주변 권유에 따라 1900년 프랑스로 건너간 푸코는 서품 준비를 하면서 북아프리카 지역을 떠올렸다. 아직 예수와 그의 복음을 모르는 이들에게 「나자렛에서의 삶」을 알려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 였다.
1901년 사제로 서품된 후 사하라 사막 변경 베니 아베스(Beni-Abbes)라는 지역에서 형제회 설립을 준비한 푸코는 그곳에서 원래 계획했던 나자렛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많은 시간동안 무릎을 꿇고 성체 앞에 앉아 기도했으며 예수가 인류를 위해 기도했듯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다. 작은 오아시스이자 국경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었던 지역 특성으로 이곳에는 그만큼 오아시스에 사는 은수자들,카라반들, 수비대 사병들과 장교들로 북적였고 또 그들은 푸코를 즐겨찾는 단골 손님이 되었다.
『저는 외적인 일에 너무 많이 관여하게 되어 글을 읽을 시간은 물론 묵상을 할 시간도 별로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불쌍한 군인들은 저에게 지속적으로 옵니다. 노예들도 언제나 자신들을 위해 지어 놓은 집을 채우고 있습니다. 여행자들도 다가와 형제애를 호소하고 가난한 자들은 언제나 넘칩니다…』
사하라 사막 남쪽으로 자주 여행을 했던 푸코는 1905년 8월 뛰아레 지역 사하라 사막 한복판 작은 오아시스였던 타망라쎄에 은수 생활을 위한 지부를 설립했고 1910년에는 이곳에서 10km 떨어진 아세크렝 고원 지역에 또 하나의 작은 지부를 만들었다.
기본적으로 관상적인 삶을 유지하면서 몇시간이고 성체 앞에서 예수의 삶의 자세로 깊숙이 들어가는 생활을 해나갔다. 그러한 삶 가운데 그는 또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위해 투쟁했으며 여러 사람들의 묵인 하에 지속되던 노예 제도 철폐를 위해서도 파리에 있는 국회에 탄원서들을 제출하는 등 노력을 쏟았다.
사하라 지역 발전을 위해 기차 전보 천문대 등 새로운 기술들에 관심을 가졌던 푸코는 지역 여성들에게는 뜨개질을 가르쳤고 무엇보다 뛰아레의 언어와 문학적 전통을 발전시키기 위해 눈을 감기 전까지 프랑스-뛰아레어사전을 만드는 작업에 헌신했다.
열정적이고 복음적이었던 생애가 무색하게 그의 마지막은 예상밖의 현실로 어느날 갑자기 다가왔다. 1916년 12월 1일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틈을 타서 리비아의 한 도적떼가 프랑스 식민지 사하라에 폭동을 일으키기 위해 침범해 왔고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성채를 짓던 푸코는 이들에 의해 끌려나와 우연한 총격에 희생됐다. 괴한들을 처리하기 위해 프랑스 군인들이 나타났고 이 와중에 푸코 곁에 있던 한 젊은이가 총을 겨눴던것이다.
아프리카의 이슬람교 신자들 사이에서 순응적인 새로운 포교 방법을 창시한 것으로도 주목을 받고 있는 그의 생애는 삶으로 실천되는 복음이었고 실천적인 가난이었으며 버려진 사람들 가운데 숨어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철저한 사랑으로 설명된다. 나자렛 예수를 닮으려 했던 그의 삶은 사후에도 그를 따르려는 공동체들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예수의 마들렌 작은 자매(Sister Madeleine for Jesus 1898∼1989)는 사막의 유목민들 가운데서 그들의 형제 친구로 살아갔던 푸코의 영성에 따라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1939)를 설립했으며 러네 부아욤(R. Voillaume 1905∼) 신부 등 다섯 명의 사제들은 푸코의 삶에 감화를 받아 1933년 파리 몽마르뜨 예수성심 대성당에서 「예수의 작은 형제회」를 창립했다.
1901년 푸코가 베니 아베스의 유목민들 사이에서 첫 공동체를 만든 이후 공식적인 형제회의 탄생이었다.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는 현재 약 70개 가까운 나라에서 우애의 집을 설립,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세상에서의 관상생활을 하고 있으며 예수의 작은 형제회는 「사람들 사이에 사는 새로운 형태의 관상 수도회」로 인증받은 채 이슬람 국가인 중동 지역을 비롯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를 포함한 40개국에 진출해 있다.
(가톨릭신문에서)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
'가난한 이와 함께' 세상속에서 관상 추구
"하느님께서 내 손을 잡아 이끄시니 나는 눈을 감고 따랐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성체를 중심으로 한 기도의 삶, 즉 세상에서의 관상생활을 추구하는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는 그들의 창설 역사를 이렇게 말한다.
1939년 사하라의 루그르트에 창립된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 수도회 창설자 마들렌 수녀는 1889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군의관으로 일하면서 아랍 소년의 생명을 구했던 아버지의 헌신적인 사랑에 영향을 받아 어렸을 때부터 아프리카와 아랍 사람들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사랑을 가졌다.
유목민들의 삶을 동경했던 마들렌 수녀는 1921년 사하라 사막의 성자로 불렸던 샤를르 드 푸코의 전기를 읽고 그 안에서 자신이 키워온 삶의 이상을 발견했다. 그러나 전쟁이 몰고 온 가정의 시련과 건강의 악화로 꿈을 실현할 수 없었던 그녀는 1939년 그가 앓고 있던 변형성 관절염에 대해 "불구자가 되지 않으려면 비 한방울 내리지 않는 사막으로 가서 사시오"라는 기적과 같은 처방을 받고, 사하라의 알제리, 이슬람 땅으로 떠나게 됐다.
무료급식, 진료, 교육 등의 일에 투신했던 마들렌 수녀는 1938년 성소식별을 위해 찾았던 푸코 신부의 무덤에서 사하라 교구장인 누에 주교를 만났고, 그를 통해 수도회 창설이라는 하느님 뜻을 받게됐다. 그녀는 백의회 수녀회에서 수련을 받으면서 수도회 창설을 준비하고 1939년 첫 서원을 하게됐다. 이로써 '우애의 집'이라는 공동체가 사하라 사막 투구르트에서 태어나면서 수도회가 시작된 것이다.
노동자들과 장애인, 결핵, 나병 환자들 그리고 목동, 집시, 노점상인들 사이 곳곳에 우애의 집을 창설한 마들렌 수녀는 56년 로마에 총본부를 두었고, 64년 교황청 직속 수도회로 인가를 받았다. 보편교회 안에서 수도회의 카리스마를 실현했던 그녀는 1989년 수도회 창설 50주년이 되던 해에 이 세상에서의 생을 마감했다.
소외된 이들과 더불어 살았던 마들렌 수녀는 회원들에게 '반죽 속의 누룩'처럼 대중 속에 섞여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 것을 당부했다. 가난한 이들 가운데 한사람으로 그들을 지도하거나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위치에서 친구나 형제로서 그들을 사랑하며 살도록 했다.
따라서 작은 자매들은 서민들이 사는 지역에서 그들이 하는 공장 노동이나 파출부, 농사일을 함께 하면서, 삶의 현장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기쁨과 아픔, 하느님의 사랑을 함께 나누며 살고 있다.
수도자들은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삶과 아울러 매일의 성체 조배를 통해 인류의 희망과 이웃들의 삶, 특히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을 전달하는 기도인으로서 전세계 각지에서 살아가고 있다.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의 한국진출은 1954년 마들렌 수녀의 한국방문으로 시작됐다. 나환자들 사이에 우애의 집을 짓고자 했던 수도회는 1955년 대구대교구 최덕홍 주교 초청으로 한국에 진출, 2명의 수녀가 경북 왜관 삼청동 나환자촌에 공동체를 마련했다. 이후 수도자들은 나환우들에게 효과적인 의료혜택을 제공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와 연결하는 등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초창기 대구와 서울 명동성당 앞 마당 낡은 응급차 안에서 삶을 이어간 이들은 현재 서울과 대구, 광주, 대전 및 인천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부산지역 진출을 시도하고 있다.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는 한국교회에서 공동체를 꾸려가는 38명의 수도자들을 비롯해 전세계 1300여명의 회원들이 세상 모든 이들의 형제와 친구로서,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함께 사는 삶을 실천하고 있다.
(샤를르 영성 가족 카페에서)
바오로딸<사하라의 불꽃>
성바오로출판사 <샤를 드 푸코>
분도출판사<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분도출판사<하느님의 사람들4-예수의 작은 형제 샤를르 드 푸코>
베네딕도 미디어의 비디오 <모든 이의 작은 형제 샤를르 드 푸꼬>
분도출판사<사람 서리에서>와 <세상 속의 사막>
출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원문보기▶ 글쓴이 : 숲꽃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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