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주 20240712
“나는 왜 달리나”
영화 "탈주"는 주인공의 질주에 초점을 맞춘다. 주인공이 달리는 장면으로 시작해 그가 달리는 모습을 일관된 구도로 반복해서 보여준다. 잠시라도 움직임을 멈추었을 때 그가 느끼는 초조함을 시계 초침 소리를 통해 나타낸다.
주인공은 달린다. 길을 막는 강과 늪에 뛰어들고 지뢰밭 위로도 달린다. 달리기 위해 거짓말을 하며 동료의 죽음에도 멈추지 않는다. 걸음을 멈추지 않는 주인공은 안쓰럽고 처절하며 냉혹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그는 왜 달릴까?
영화는 두 번째로 주인공이 달리는 이유에 초점을 맞춘다. 주인공은 군사분계선 인근에서 복무하는 북한 군인으로 탈북을 시도한다. 영화는 초반에 그가 먹고사는 문제로 탈북을 시도하는 것처럼 비춘다. 말년 병장인 그에 대해 후임이 하는 말을 보자.
“규남 형은 출신성분이 3등급이라서 군대 나가면 탄광행이야.”
관객이 공감할 만한 이유다. 만약 여기서 묘사가 멈추었다면 이 영화는 ‘왜’가 아니라 ‘어떻게’에 큰 비중을 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 극장에 들어가며 예상했던 것과 다르다. 주인공은 어렸을 적 친했던 상관을 통해 높은 계급으로 임명되었음에도 탈북을 시도한다. 그에게 먹고사는 것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며 남한에 부모나 형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왜’라는 질문은 멈추지 않는다.
영화의 절정은 주인공이 뒤로는 추격군들을 두고 지뢰로 뒤덮인 산을 마주했을 때다. 지뢰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는 비가 와 땅이 뒤집어져 소용이 없어졌다. 탈북도 좋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 있는 것이 먼저 아닌가? 친한 상관이 자비를 베풀 수도 있지 않은가? 위기의 순간에 주인공에게 떠오른 것은 죽은 어머니가 남긴 편지였을 것이다. 이 편지는 주인공에게 행복하게 살 것을 부탁한다. 주인공에게 행복은 먹고 사는 것이나 생존이 아니었다. 그가 생각하는 행복이 무엇인지 또 다른 편지를 통해 알 수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의미 없는 삶을 사는 것을 두려워하라.”
이것이 영화가 전하는 ‘왜’이다. 주인공은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마음껏 시도하고 마음껏 실패할 수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달린다. 이것이 주인공이 찾은 삶의 의미이자 행복이다. 그는 누군가 추격하기에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목표가 있기에 달린다.
이때 주인공은 이렇게 외치며 지뢰밭으로 뛰어든다.
“살아도 내가 살고 죽어도 내가 죽는다!”
영화는 돼지라는 상징을 통해 의미 없는 삶은 어떤 것인지 비춘다. 영화 초반, 지뢰를 밟아 죽은 돼지가 등장한다. 주인공과 동료들은 굶주린 배를 채울 생각에 기뻐하며 돼지를 부대로 가져와 굽지만 먹기도 전에 상관들에게 빼앗기고 만다. 주인공을 비롯한 북한 군인들은 돼지와 같다. 인간이 설치한 지뢰에 죽는 돼지들처럼 군인들도 자신들이 설치한 지뢰 때문에 공포에 떤다. 주인공에게 지뢰는 적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 보호막이 아니라 자신이 나가는 것을 막는 벽이다. 돼지가 군인들에게 먹히는 것처럼, 군인 자신들도 정부에게 노동력과 젊음을 착취당한다. 영화가 군대에서나 군대 밖에서나 노동력 제공 수단으로 취급당하는 주인공을 묘사하며 보여주는 의미 없는 삶 이자 탈북 이유 즉, ‘왜’이다.
또한 영화는 부하들에게서 음식을 빼앗아 게걸스럽게 먹는 상관들을 더럽고 시끄러운 돼지들처럼 연출한다. 인민을 인간 취급하지 않으며 돼지 먹듯이 착취하는 그들 또한 사람보다는 돼지 즉 동물에 가까움을 보여준다. 주인공이 승진해 그들과 함께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탈북을 시도하는 두 번째 ‘왜’이다.
지뢰밭으로 뛰어든 순간 주인공은 돼지가 아니었다. 그 순간 영화를 보고 있던 나에게는 그가 그 자리에서 죽거나 남한으로 가거나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영화는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달리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고 있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달리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지뢰밭에서 달리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가 한 번 사는 인생 행복하게 즉, 의미 있게 살기 위해 달리고 있지 않은가?
이 영화는 “이런 삶을 살아라!”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탈북을 위해 사투하는 북한 군인을 통해서 남한 사람들에게 “열심히 하고 있어!”라는 응원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좋은 시도다. 깔끔한 전개와 편집이 보기에도 편하다. 그런데 ‘왜’를 전하기 위해서 ‘어떻게’ 즉, 주제를 전하기 위해서 줄거리의 상당 부분을 희생했다. 또한 자신이 원하는 말을 위해서 북한 군인을 소재로 사용한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다.
이 영화의 결정적인 허점은 응원에서 그친다는 것이다.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달리는 것이 인생의 최선인가? 지각도, 대답도 없는 우주를 향해서 목청껏 저항을 소리치다 죽는 것이 내가 추구해야 하는 가치인가? 진정한 응원과 위로의 메시지는 올바른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인공 또한 목표가 있었기에 달릴 수 있었다.
“탈주”는 몸을 빼치고 달아난다는 뜻이다. 우리가 몸을 버리고 달아나야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무의미한 삶인가, 삶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인가? 우리의 푯대는 무엇인가?
한 영화에서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란 어렵다. 하지만 “탈주”는 우리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전한다. 나에게 “탈주”의 응원은 달리기 위해 살라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위해 달리라는 말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