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냐민 지파와 유다 지파
바벨론 포로에서 故土로 돌아온 지파는 유다 지파와 레위 지파와 베냐민 지파였다. 사도 바울도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다(롬11:1, 빌3:5).
창49장을 보면 야곱이 임종 직전에 열두 아들에게 축복기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창49:27을 보자.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이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다. 그런데 야곱은 왜 막내인 베냐민에게 이런 끔찍한 예언을 했을까? 그 힌트는 28절에서 얻을 수 있다.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히브리어 성경에는 “분량”이란 말이 나오지 않는다. 바라크(בָרַךְ)라는 단어를 두 번 반복하여 사용했을 뿐이다. 직역하면 “곧 그들 각 사람의 축복을 따라 축복하였더라”가 된다.
“축복을 따라 축복하였더라”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바라크(בָרַךְ)라는 단어는 아주 묘한 뜻을 갖고 있다. “축복하다”라는 뜻도 있지만 “무릎을 꿇다”는 뜻도 있다. 따라서 28절은 이렇게 번역할 수도 있다.
“곧 그들 각 사람의 무릎을 꿇는 量을 따라 축복하였더라”
무릎을 꿇는 量이란 “하나님께 순종하는 量”을 뜻한다. 그러나 베냐민은 하나님께 순종하기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믿고 살았던 사람이다. 베냐민이 태어난 과정을 보자(창35:16~19).
라헬이 에브랏(베들레헴) 근처에서 아들을 낳다가 산고를 이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게 되었다. 숨을 거두면서 아이의 이름을 “베노니(בֶּן־אֹונִי 벤오니)”라고 지어주었다. “나의 슬픔”이란 뜻이다.
그러나 야곱은 그 이름이 너무나 슬프다고 생각했던지 아이의 이름을 “베냐민(בִנְיָמִין 빈야민)”이라고 고쳐주었다. “오른손의 아들”란 뜻이다. 곧 “능력의 아들”이 되라는 뜻에서 그렇게 지어주었다.
사사기 19장~21장은 “기브온 사건”으로 벌어진 베냐민 지파와 10지파 간의 전쟁을 다루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베냐민 지파의 건달들이 레위인의 첩을 밤새도록 윤간한 후 그녀가 죽는 사건이 터졌다. 건달들이 잘 못 했으니 건달들만 처벌하면 간단히 끝날 일이었으나 베냐민 지파 사람들은 “우리가 남이가” 그러면서 건달들을 감싸고 돌았다. 결국 10개 지파와 베냐민 지파 간에 전쟁이 터지고 말았다.
1차~2차 전투를 통해 10개 지파는 무려 40,000명의 전사했다. 그만큼 베냐민 지파는 싸움을 잘했고 “물어뜯는 이리”의 기질을 잘 보여주었다.
그러나 2차 전투에서 10개 지파는 유인작전을 사용하여 베냐민 지파 600명만 남기고 모두 몰살시켰다. 창49:9을 보자.
“유다는...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야곱은 유다에 대해서 물어뜯는 이리보다 더 혹독한 사자에 비유했다. 유다 지파는 시내 광야를 행군할 때에 길도 없는 광야를 제일 앞장서서 걸어갔다. 다른 지파를 위해 희생한 것이다.
전쟁할 때도 유다 지파는 제일 앞장서서 사자와 같이 싸웠다.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는 기질 면에서 서로 비슷한 점이 많았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전혀 달랐다.
베냐민 지파는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싸우는 이기적인 지파였던 반면, 유다 지파는 타 지파를 위해 싸우는 “희생의 지파”였다. 이미 야곱은 유다에게 그런 성품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렇게 예언했다(창49:10).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유다의 후손에서 다윗 왕이 태어나고, 다시 그 후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