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우(草雨)
김광한
나이가 많아지면 그만큼 지나온 이야기꺼리도 많은 것같아요.그 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것들이 꽤 있어요. 1967년 정진우 감독이 만들고 문희와 신성일이 주연한 흑백 영화 가운데 초우(草雨)란 말 그대로 풀비, 즉 보슬보슬 힘없이 내리는 비를 말하지요.그 이듬해 제가 십자성 부대로 베트남의 나트랑으로 파병이 되었는데 어느날 저녁 101군수 사령부 연병장으로 집합해서 영화를 보라는 것이었어요.마침 비가 억수로 쏟아져 화이버에 판초 우의를 뒤집어 쓰고 열에 맞춰 연병장으로 가 부대별로 앉아 초우란 영화를 봤어요.패티 킴이 부른 노래가 이 영화의 주제가였어요. 박춘석씨가 작곡했어요. 패티 킴 참 좋아했는데 저렇게 늙다니.
영화의 줄거리는 일용 노동자이면서 건달인 신성일이 초우속에서 만난 외교관 집 딸을 꾀어서 결혼을 하고 출세를 하자는 음험한 계획아래 여주인공인 문회를 만나서 키스도 하고 손도 잡고 한마디로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됐는데 나중에 문회가 자신은 외교관 집 귀한 딸이 아니라 그집의 식모라고 솔직히 고백하자 화가난 신성일이 뭐 이런 년이 다있어 하면서 귀싸대기를 훔쳐 갈기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단편소설 같은 이야기였는데 당시 식모로 나온 주인공 문희가 참 예뻤어요.
그래서 문희에게 집단적으로 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기다리곤 했지요.그 당시에 윤정희와 문희;, 고은아 그리고 남정임이 트로이카로 영화판을 주름 잡았는데 천연색 영화가 나오기 전이었어요.베트남은 지금이나 그때나 한결같이 여름만 있어서 계절 감각이 없어요.나트랑에서 군수지원부대가 있었고 근처에 백마부대 그리고 퀴논이란 데 맹호부대가 있었어요.베트남 전쟁이 끝날때까지 한국군이 모두 32만명이 파월이 돼 그 가운데 6천명이 전사를 했어요.채명신 사령관은 돌아가실때 전우와 함께 하겠다고 6천명이 잠든 현충원의 사병묘지 6평짜리 터에 지금 잠들고 계십니다.32만명 가운데 그동안 반은 저 세상 사람이 됐고 남은 사람이 고작 17만명 정도가 되지요.
제가 있는 곳은 부대를 방어하기 위해 마련한 오피(op)였는데 당시 유명한 윤정희 배우에게 편지를 매일 보냈어요. 마침내 사진과 함께 수고한다는 답장이 왔어요.저는 그 편지를 어느 놈이 훔쳐갈까봐 손버릇 나쁜 전라도 놈을 항상 경계했지요.그래서 다불백 한가운데 고히 모셔놨고 귀국해서 이 나이먹도록 간직하고있지요.
이제 편지를 보낸 사람들이나 답장을 한 여배우들이나 70중반 객이 됐네요 얼마전에 윤정희가 치매 걸려 죽고 신성일도 죽고, 남정임은 벌써 세상 떠나고 문희를 보니 새삼 인생 허망함을 느끼게 돼요 .흑백 사진속에 든 천연색 얼굴들, 모두가 다 어디로 갔는지.인생 무상이에요.문씨가 베트남 가서 한국군 파견에 대해 사과했다는 말 듣고 참 나쁜 놈이란 생각을 했지요. 다들 그렇게 생각해요 아주 천하에 나쁜 놈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