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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752
5월6일 [부활 제5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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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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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SyDmyTArN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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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너무도 멀리 돌고 돌아서>
요즘 농부들의 심정과 고초를 많이 헤아리고 있습니다. 농부들이 이른 봄부터 허리가 휘어지도록 땅을 일구고 씨앗을 뿌립니다. 한 여름의 그 뜨거운 뙤약볕 아래 몇 시간이고 서서 구슬땀을 흘립니다.
뿐만 아닙니다. ‘농작물들은 주인 발자국 소리 듣고 자란다’며 수시로 찾아갑니다. 마치 자식 키우는 것 같습니다. 눈만 뜨면 걱정입니다. 잠을 자도 걱정입니다. 온갖 정성을 다합니다.
그분들이 그렇게 애쓰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오랜 노고를 기꺼이 참아내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가장 큰 기대는 무엇입니까? 풍성한 수확입니다. 알찬 결실입니다.
신앙생활에도 똑같이 적용되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들, 왠지 손해 본다는 느낌 드실 때가 많을 것입니다. 억울할 때도 많을 것입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안가면 그만인데도 꿀맛 같은 새벽잠을 포기하십니다. 힘겨운 몸을 이끌고 그 꼭두새벽부터 본당으로 향합니다.
봉헌금도 내야지요, 교무금도 내야지요, 2차 헌금은 또 왜 그리 잦습니까? ‘재수 없으면’ 신축본당으로 떨어져 뭉칫돈을 마련해야만 합니다.
때로 야단맞아가며 내 시간 허비해가며 봉사활동에 전념하지만 그 누구도 칭찬해주지 않습니다. 왠지 손해 보는 느낌입니다.
그렇게 손해 보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언젠가 주님 대전에서 거두게 될 풍성한 영적 수확 때문입니다. 언젠가 그분께서 우리 각자에게 넘치도록 베푸실 영원한 상급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풍성한 영혼의 열매, 신앙의 결실을 맺을 수 있는 비결 한 가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그런데 그 비결은 아주 간단합니다. 너무 쉬워 웃음이 날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라도 할 수 있습니다.
비결은 우리가 그분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분 사랑 안에 머무르는 일입니다. 그분 말씀을 우리 마음 안에 고이 간직하는 것입니다.
너무도 멀리 돌고 돌아서 제 자리로 돌아와서 보니 절실히 와 닿는 깨달음 한 가지가 있더군요.
연약한 우리이기에, 흔들리는 우리이기에 가끔씩 우리가 그분을 떠나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큰 위안으로 다가오는 바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떠나간 순간에도 그분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저 한없이 기다리십니다. 묵묵히 침묵하십니다. 빨리 돌아서기만을 간절히 고대하십니다.
자꾸만 그분으로부터 도망가려는 우리, 자꾸만 엉뚱한 길로 접어드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은혜롭게도 우리의 힘보다 훨씬 더 센 힘으로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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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903ccHHE1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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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궁에서는 항상 부모와 같은 존재가 만들어진다>
오늘 복음도 역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포도나무를 통해 가지에 전달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 따르면 ‘사랑과 계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아버지 ‘사랑’ 안에 머무시는 것처럼 우리도 당신 사랑 안에 머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머물기 위해서는 당신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사랑과 계명은 하나인 듯 둘이고, 둘인 듯 하나입니다.
우선 ‘사랑’에 대해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사랑은 에너지이고 양식이고 생명입니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말은 생존을 보장받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영화 ‘알리타’(2019)는 버려진 기계 인간에게 한 과학자가 자신의 딸을 위해 준비한 몸을 붙여주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뇌만 살아있던 그 기계 인간은 박사 딸의 몸을 입고 다시 살게 됩니다.
허황한 이야기 같지만 사실 우리가 모두 부모의 태중에서 그렇게 태어납니다. 어디에서 온 지 모르는 영혼을 받아 부모는 자녀에게 몸을 주고 자라면서 세상에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자녀가 생명을 보장받으려면 부모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곳에 머물려면 그곳을 만든 이의 법칙을 따라야 합니다. 자녀도 부모의 법을 따라야 부모 안에 머물며 사랑, 즉 생명의 양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부모의 법은 항상 부모처럼 생명을 내어주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쫓겨납니다.
예전에 ‘에일리언’이란 영화가 유행했었습니다. 에일리언은 부모에게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자신의 숙주로 삼아 인간을 먹으며 성장하는 놈입니다. 인간은 자신 안에 들어온 에일리언을 빨리 제거하지 않으면 생명을 잃게 됩니다. 요즘 코로나바이러스도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 몸 안에는 많은 박테리아와 바이러스가 공존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생명을 위협할 정도가 되면 인간을 그것들이 죽이는 방법을 선택합니다.
이런 사건이 에덴동산에서 일어났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주님의 태중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지만, 주님의 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법은 주는 사랑만 받으면 되지 그분의 생명까지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에까지 손을 댄 것은 물론 그런 일은 없겠지만 아기가 탯줄과 부모의 살까지 먹으려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상태라면 그에게 더는 사랑이, 곧 생명이 공급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도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부모입니다. 에덴동산은 하느님의 자궁과 같습니다. 그곳에서 하느님과 같은 자녀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쫓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 품에서 살아야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만약 부모가 원하는, 또 부모가 되라는 법을 어긴다면 어떻게 될까요? 에일리언처럼 바이러스처럼, 혹은 아담과 하와처럼 그분 품에서 쫓겨나 생명의 양식을 얻지 못하고 죽고 맙니다.
영화 ‘터미널’(2004)은 오갈 데 없게 된 이란인 ‘메르한 카리미 나세리’의 실화를 영화화한 것입니다. 영화에서는 공항에 도착한 주인공의 나라가 내전으로 지구상에서 사라져버리는 설정입니다. 오갈 데가 없어진 나세리는 1988년부터 2006년까지 무려 18년 동안이나 프랑스 드 골 국제공항 안에서 살았습니다. 1999년에 프랑스 당국이 난민용 여권을 내주어 정식 이민자로 받아 주었지만, 공항 생활이 익숙해져서 미친 척을 하며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해야 할 2006년까지 공항에 머물렀습니다.
나세리는 매일 아침 5시 첫 비행기가 도착하는 시간에 공항 화장실에서 머리를 감고 항상 몸가짐을 바르게 했습니다. 매우 당당하게 행동하고 구걸이라든지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카트 안에 넣어진 동전으로 먹을 것을 사고 주변 청소를 깨끗이 하였습니다. 그래서 공항 직원들에게 호감을 샀습니다. 직원들도 친절하게 대해주고 나세리의 옷을 무상으로 세탁해 주었습니다.
그의 일기가 『The Terminal Man』으로 출간되고 영화 제작이 확정되었을 때, 그는 드림웍스로부터 30만 달러를 개런티로 받았고 공항 직원들에게 한턱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공항에서 살기도 했지만, 공항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나세리 씨가 18년 동안이나 공항이라는 환경 안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오히려 공항이 깨끗하도록 도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공항 직원들에게 좋은 일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먹고 입고 자고 할 수 있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세리 씨만큼 공항이라는 본성과 가까운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곳에 머물며 그곳의 법칙을 따르다보니 그곳의 본성을 닮게 된 것입니다.
내가 살려고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다면 그 사람은 더는 생명을 보장받지 못합니다. 모든 생명은 부모로부터 옵니다. 부모가 자신의 자녀를 해치는 어떤 것을 발견했다면 그것을 집에 가만히 놓아둘 리가 없습니다. 부모의 법은 생명을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법 테두리 안에 머물러야 부모 안에 머물 수 있고 계속 양식을 먹으며 생명을 보존하고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중략)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0.12)
사랑하라는 말은 생명을 내어주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신 다음 생명을 내어주는 것만큼 큰 사랑은 없다고 하십니다.
사랑과 생명과 양식은 하나입니다. 그리고 부모만이 사랑의 법을 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창조자시고 우리 생명을 보장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은 그분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계명이, 부모가 자녀에게 요구하는 계명과 같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주는 부모의 계명이란 생명을 주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그분 안에 머물 수 있고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그분의 본성을 닮아 우리 또한 새로운 창조자가 되어 생명을 내어주는 사람이 됩니다. 생명을 내어주는 사람만이 생명을 보장받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계명 안에서 성장하여 그분이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통해 새로운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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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5,9-11: 너희의 기쁨이 충만하도록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9절) 주님께서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의 관계처럼, 아들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시고 아들은 아버지께 모든 것을 내어 드리는 그러한 사랑으로 우리들을 사랑하신 분이시다.아버지의 말씀을, 아버지의 뜻을 행함으로써, 우리도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에 참여하라고 하신다.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바로 그 사랑을 우리도 실천하며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라는 초대이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10절) 계명을 지키고 실천하는 것이 사랑의 가장 중요한 표지라면, 사랑이 없을 때는, 우리를 완전하게 하는 믿음과 계명들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랑이 없다면 계명을 지키고 의로운 행위를 하더라도 또한 은총의 놀라운 기적을 행하더라도 그 일들은 단지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 되고 만다. 우리가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를 닮으며, 그분과 같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분을 닮으려 노력하는 사람은 교만도 자랑도 없이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에서 참된 영광을 굳게 지키며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순명을 변함없이 드리며 항상 감사한다. 이런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으로부터 더 큰 영광을 받을 것이다. 당신이 가시는 것은 그들을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포도나무와 가지처럼 그들과 결합되어 있음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게을러지지 않도록 항상 깨어있어야 축복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다. 그래서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8절)고 하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11절) 이 말씀은 당신께 힘이 되는 기쁨이 우리에게도 힘을 줄 것이라는 말씀이다. 당신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 때문에 기뻐하신다는 의미이다.그리고 충만하게 하시려 한다는 것은 이 기쁨이 그분과 우리의 나눔이다.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의 기쁨은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이며, 그것은 또한 우리의 기쁨이기도 하다.
그분께서는 영원으로부터, 즉 “세상 창조 이전에 우리를 선택”(에페 1,4)하실 때에도 이 기쁨을 두고 즐거워 하셨다. 그것은 우리가 생겨나기 전에 이미 당신의 지혜로 우리를 보고 기뻐하셨다는 것이다. 당신의 예지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즐거움이었고 그 기쁨은 이미 충만했다는 것이다. 이제는 우리가 기쁨으로 충만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언제나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기쁨을 차지하고 충만히 누리기 위해서는 나 자신과의 싸움을 끝까지 해야 얻을 수 있다. 항상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있도록 나 자신과 끊임없는 싸움을 하여야 한다. 언제나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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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주교회의 사무국장)]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 당신 삶의 마지막 순간에 제자들과 만찬을 드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하느님의 사랑에 자신을 열고, 하느님께 속하는 데 있다.”(제27차 청소년 주일 담화문)라고 하셨습니다.
길 가는 아무개를 사랑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 나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방송이나 여러 매체를 통하여 전쟁과 재해, 기아와 무관심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가난하고 취약한 이들을 돕기도 합니다. 그러나 도움의 손길이 가장 절실한 사람은 어쩌면 나의 가족, 친구 또는 성당 교우나 직장 동료 가운데 한 사람일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따금 익명의 타인에게는 선행을 베풀며 돕고 애덕을 실천하면서도, 정작 가장 친밀한 가족과 형제, 친구들에게는 가깝고 편하다는 이유로 사랑과 도움을 주기는커녕 상처를 주고 미워하며 벽과 담을 쌓아 삶을 지옥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이 지옥에서 어떻게 탈출할 수 있습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내가 쌓아 올린 미움이라는 벽과 담을 부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고 때로는 아픔을 인내하고, 용서하며 용서를 청해야 합니다. 이러한 행동들은 우리를 천국의 삶으로 이끕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고, 또 우리 기쁨이 충만해지게 합니다. 기쁨은 사랑과 밀접하게 이어져 있습니다. 기쁨과 사랑은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는 성령의 두 열매이기 때문입니다.(갈라 5,22-23 참조) 하느님 안에서 기쁠 때 우리는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 머물러 사랑의 기쁨을 누리며 그 사랑 안에 만족하지 말고 다른 이들을 위하여 애덕을 실천할 때, 우리는 ‘주님 계명을 지켜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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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9-11)
여기서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입니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그 사랑은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사랑입니다. 즉 ‘하느님의 사랑’과 ‘같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제자들(신앙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은 ‘같은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사랑하신 것처럼’이라는 말은, 두 사랑의 방식만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라, 두 사랑의 방식도 같고, 성격도 같고, 본질도 같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은 사실상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 ‘예수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3,35-36ㄱ)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아드님 손에 내주셨고, 그리고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드님을 내주셨습니다. 이 두 가지 일을 합해서 생각하면,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내주셨습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모든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 즉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이 바로 그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내주신 일이기도 하고, 아버지께서 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내주신 일이기도 합니다. <그 사랑은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사랑’입니다.(요한 15,13)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일은, 사실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모든 것을 내놓으신 일입니다.> 그 일을 사도 요한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1요한 4,9-10) (여기서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라는 말은, “우리가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기도 전에”라는 뜻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는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어”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라는 말씀은,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라는 고백과 같은 말씀이고,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라는 말씀은, “나의 사랑을 받아다오.” 라는 호소와 같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방법이기도 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사랑 안에 머무른다는 말은, 사랑으로 하나가 된다, 일치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방법’은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0절)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신다는 말씀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심으로써 아버지와 당신이 하나로 일치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인류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전부 다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서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은, 즉 예수님과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고 하나가 되는 것은 우리 자신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라는 말씀은, “내 계명을 지켜서 내가 주는 구원을 받아라.”라는 뜻이 됩니다.
<‘하느님의 뜻’도, ‘예수님의 뜻’도 ‘나의 구원’입니다. 그러면 ‘나의 뜻’은?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것은 단 하나, 내가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것뿐인데, 나 자신은 그것을 바라지 않고 다른 것만 원하고, 다른 것만 찾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랑을 ‘헛일’로 만들어버리는 일이 되고, 그 사랑을 배반하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유를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유는? 사랑 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구원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뭔가 대단한 제물을(물질적인 것을) 바치기를 바라시는 것도 아니고, 또 뭔가 거창한 일을 하기를 바라시는 것도 아닙니다. 나의 기쁨이 곧 하느님과 예수님의 기쁨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내가 구원받지 못해서, 하느님 나라의 ‘밖에서’ 후회하고 절망한다면, 그 모습을 보시는 하느님과 예수님께서는 크게 슬퍼하실 것입니다. 지금 내가 회개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막 살면서, 멸망을 향해서 간다면, 그 모습을 보시는 하느님과 예수님께서는 몹시 안타까워하면서 슬퍼하실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서 멸망을 향해 가는 것은 아니더라도,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을 받기만을 바라면서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기쁨에 대해서는 관심 갖지 않고 살고 있다면, 그것도 역시 하느님과 예수님께 큰 슬픔을 드리는 일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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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경의 땅 이집트’라는 다큐를 보았습니다. 이집트는 상당한 문화와 역사를 지닌 나라입니다. 나일 강은 이집트 문명의 젖줄이었습니다. 이집트의 나일 강은 남쪽에서 시작되어서 북쪽으로 흐릅니다. 나일 강은 남쪽이 상류가 되고, 북쪽이 하류가 됩니다. 성경에서 이집트는 풍요의 땅입니다. 아브라함이 고난을 피해 머물던 곳입니다. 야곱과 가족이 가뭄을 피해 머물던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머물던 곳입니다. 아브라함은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야곱의 가족은 큰 부족이 되어 모세의 인도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다시금 나자렛으로 돌아왔습니다. 모든 것이 풍요롭고, 풍족했던 이집트에서의 생활을 뒤로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곳으로 가야했습니다.
이집트에서 약속의 땅으로 가기위해서는 거칠고 황량한 시나이 반도를 지나야 합니다. 거칠고 황량한 광야는 세상의 것들을 떨궈내는 정화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광야는 악의 유혹을 견디어내는 인내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광야는 부활을 향해 나가는 십자가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금 풍요로웠던 이집트로 돌아가고 싶어 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섬기려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구리 뱀을 만들게 하였습니다. 구리 뱀을 보는 사람은 다시금 하느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만든 구리 뱀을 보고서 치유되었듯이, 하느님의 아들도 십자가에서 높이 들려져야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하는 구원의 표징입니다.”
신앙은 세상의 것과 하느님의 뜻 사이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식별의 과정입니다. 어제 이야기 한 것처럼 초대교회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점차 늘어나는 이방인 공동체들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방인 공동체는 유대인 공동체와는 다른 문화와 전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언어가 달랐고, 음식이 달랐습니다. 그들의 사고와 철학도 달랐습니다. 유대인 공동체는 이방인 공동체들도 유대인들의 문화와 전통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 공동체는 자신들의 문화와 전통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한국교회에서 초기에 박해의 단초가 되었던 ‘제사논쟁’도 비슷한 문제입니다. 사도들은 예루살렘에 모여서 첫 번째 공의회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명학하게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방인 공동체의 문화와 전통을 그대로 인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신앙의 토착화’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전해지는 지역의 풍토와 전통에 맞게 토착화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도들은 이렇게 결정하였습니다.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돌아선 이들에게 어려움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선배 사제들은 이런 말씀을 하곤 하셨습니다. ‘새로운 곳에 가게 되면 먼저 6개월 동안 그곳의 전례와 그곳의 사람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문제점이 있다면 천천히 고쳐나가야 합니다. 새로운 곳에 가서 전임자들이 하였던 일들은 한꺼번에 바꾸려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지 않고 성급하게 자신의 뜻대로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을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삶의 기준을 제시해 줍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남들에게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오늘은 교부이신 그레고리오 교황님의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는 신앙을 통해서 잉태됩니다. 세례를 통해서 태어납니다. 교회의 가르침과 교훈으로 젖을 먹습니다. 성체성사로 자라납니다. 거룩한 생활로 어른이 됩니다. 지혜와 결합하여 혼인을 합니다. 우리의 자녀는 희망입니다. 우리의 집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의 유산과 재산은 낙원의 기쁜 삶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어두운 죽음이 아니라 지복의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들 신앙의 여정을 잘 표현해 주는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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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세형 유스티노 신부님]
이세형 유스티노 신부
오늘 아침에 가족들과 축복기도를 하셨나요? 어색함과 부끄러움을 벗어 던지고 축복기도를 반드시 하셔야 합니다. 이 기도가 우리 가족을 얼마나 사랑의 일치로 이끄는지 그 실례를 들려 들이겠습니다.
어느 날, 한 형제님과 미사 후에 대화를 나누다가 저에게 “신부님, 감사합니다. 신부님께서 시킨 대로 저는 매일 아침 출근하기 전에 아내와 자녀들에게 축복기도를 해줍니다. 간혹 잊어버릴 때는 문자로 축복을 꼭 보냅니다. 3개월 정도 했는데 우리 가정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우선 내 자신입니다. 아주 짧은 축복기도이지만 그 기도를 통해서 내가 주님께 축복받고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집안 분위기입니다. 아침마다 전쟁터처럼 어수선했던 분위기가 차분해지고 따뜻해 졌습니다. 며칠 전에는 감동으로 울었습니다.”
“아니, 왜요?”
그 형제님은 지금도 벅찬 마음으로 말했습니다.
“신부님, 그게 말입니다. 며칠 전에 회사에서 언짢은 일이 있어서 술을 한 잔하고 들어왔습니다. 전에는 제가 기분이 안 좋을 때는 인사만 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아이들이 방에서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화가 더 납니다. 내가 누구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면 서글퍼지기도 합니다. 녀석들이 미워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날 제가 막 잠이 들려고 했는데, 녀석들이 제 방에 들어오는 겁니다. 아마 제가 자나보다 하고 생각했겠지요. 저는 눈감은 채 모른척했지요. 그런데 첫째는 제 오른손을, 둘째는 제 왼손을 살포시 잡고 축복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뜨거워지는데 꾹 참았어요. 아이들이 나가고 난 뒤 감동으로 펑펑 울었습니다. 아! 이것이 가족의 사랑이구나. 그래! 내일 아침에도 기쁘게 하루를 맞이해야지. 주님 감사합니다.”
그 형제는 신명나게 가족자랑을 했습니다. 저도 물론 형제처럼 기뻤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사랑은 표현할 때,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도 끊임없이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표현하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힘은 예수님의 사랑과 가족의 사랑입니다. 항상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러면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
기쁨의 충만으로 가족을 향한 사랑을 축복의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십시오. 그리고 내가 몸담고 있는 일터로 확장시키십시오. 특히 지금 나와 불목의 관계에 있는 형제를 향해서 축복의 기도를 행하십시오.
“주님께 노래하여라, 영광으로 가득 차신 분! 주님은 나의 힘, 나의 굳셈, 나에게 구원이 되셨도다. 알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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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두유 세례자 요한 신부님]
저는 가끔씩 길을 가다가 사람들을 쳐다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만나는 사람이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을 쳐다보는 것입니다.
아주 잠깐이지만 상대방의 얼굴에서 느끼는 점은 아주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무슨 기준으로 생활이 어렵고 힘들게 사는 지에 대한 정답은 없지만 상대방의 얼굴에서 그 사람의 상태를 충분히 느끼게 합니다.
피곤한 얼굴인지, 상쾌한 얼굴인지, 기쁜 얼굴인지, 슬픈 얼굴인지를 느낍니다. 그 중에서도 연인의 얼굴을 쳐다보면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 항상 기쁜 얼굴을 보입니다.
아마도 사랑하는 관계에 있으면 제일 기쁜 얼굴이 아닌가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얼굴 관리를 잘해야 하는데, 상대방의 좋은 얼굴을 기억하고 그대로 쫓아 사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저 또한 기쁜 얼굴을 지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하루를 시작하는데 그것이 뜻대로 잘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처럼 잘 안 되는 경우에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 기쁜 얼굴을 간직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서로 기쁜 것은 상대방에 대한 생각과 상대방이 기쁠 수 있도록 노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은 서로의 모자람을 채워주는 나눔과 일치가 있기 때문에 기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써 기쁜 생활을 하려면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생활을 하면 됩니다. 그 사랑 안에 머무르는 모습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 되셨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계명은 바로 “서로 사랑하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요한 복음 13장 34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떠나시기에 앞서 사랑의 새 계명을 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새로운 계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르시는 것은 세상이 주는 기쁨보다 더 큰 하느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당신의 영원한 삶을 함께 누리도록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사랑은 아무런 차별 없이 개개인에게 맞는 사랑을 베푸시어 사람답게 살도록 해 주셨습니다. 죄인들에게는 사랑과 용서를, 병든 이에게는 마음과 몸의 치료를, 우는 이에게는 따뜻한 위로의 말씀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당신의 사랑을 주셨습니다.
결국 당신 사랑의 최고 표현은 십자가에 당신 목숨을 바치심으로서 우리에게 당신의 살과 피를 남김없이 주신 희생 제사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비천한 인간이 하느님과 함께 살 수 있는 기쁨을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신 주님 사랑에 감사하며 우리 자신도 그분 모범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사랑 안에 머물지 못하면 모든 단절을 가져옵니다.
사랑 안에 머물지 못하는 그 단절은 무관심과 미움을 초래하게 되고 우리 모두를 파멸의 길로 가게 만듭니다.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오늘도 노력하는 우리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기쁜 모습으로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각자가 처해 있는 상황에서 사랑이 없는 생활을 하게 되면 우리의 하느님께서도 기쁜 얼굴로 살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 주님과 우리 이웃들에게 “서로 사랑하는” 기쁜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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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사랑실천과 계명 준수는 동시사건 >
포도나무의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고서 포도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제자들의 관계를 정립하시고, 제자들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예수께 끝까지 머물러 있으라고 당부하셨다.(15,1-8)
오늘 복음에서도 전체의 흐름을 꿰뚫고 있는 모티브는 열매를 맺기 위한 포도나무와 가지의 뗄 수 없는 관계이다. 포도나무인 예수님께 가지인 제자들이 머문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조건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물라고 명하시는 것은 아니다. 스승인 예수님께서 먼저 제자들을 사랑하셨고, 그 사랑은 아들을 사랑하신 아버지께로부터 배운 것이었다. 따라서 스승의 제자들에 대한 사랑은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이 그 기초가 된다.(9절)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무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신다. 그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 또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조건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아들이 먼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을 모델로 제시하신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10절)
예수님께서는 아들로서의 자신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사실을 대단히 기뻐하신다. 제자들이 스승을 따라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문다면 마찬가지로 기쁨이 보장될 것이며(11절), 이 기쁨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제자들에게까지 베풀어주시는 기쁨이다.
계명을 지킴으로써 사랑 안에 머문다는 것은 사실상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고 난 뒤 새 계명을 선포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13,34)
이렇게 계명과 사랑은 서로 묶여 있다. 구약성경을 따르는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계명과 사랑이 서로 별개의 것이며, 사랑이 계명에 종속되어 계명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신약성경 후기에 사는 우리에게도 구약의 율법은 있고, 이 율법으로부터 물려받은 십계명도 여전히 효력을 발생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계명들 속에서 사랑을 솎아내어 계명 위에 세우셨고 모든 계명의 골자로 사랑을 제시하셨다.
그래서 모든 율법과 계명 중에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인지를 묻는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5)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7-40)
이렇게 해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동시에 사랑의 이중계명으로서 모든 계명의 핵심이요 골자다.
이제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곧 사랑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하는 사람은 계명의 전부를 지키는 것과 같다는 결론이다. 그런데 사랑이 추상적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사랑의 구체적인 모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한 것처럼’(13,34)이라는 모범 안에 들어 있다. 여기서의 사랑은 낙관주의자들이 생각하는 화사하고 달콤한 로맨스(romance)에 등장하는 낭만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한 모델은 곧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 앞에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 (필리 2,8) 세상에 내어놓은 사랑이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당장 제자들의 목숨까지 요구하면서 사랑하라는 것은 아니다. 우선 ‘스승이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다.
사랑의 교과서는 예수님이시다. 그러나 그 책 안에 들어 있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배워 실천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숙제이다. 숙제를 하면서 늘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규칙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는 황금률이 아니겠는가?
결국 사랑하는 동시에 계명 준수가 이루어진다. 물론 사랑한다는 것이 자칫 추상적인 관념에만 머물 수 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사랑을 실천했을 때 계명 준수가 이루어진다.
만약 사랑의 실천이 잘 되었는지, 그래서 계명 준수가 잘 이루어졌는지 알아보고 싶다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마음속에 기쁨이 동(動)하고 있어야 한다. 기쁨은 곧 만족감이며, 이 기쁨은 바로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기쁨이다.(11절) 이 기쁨으로 자신을 충만케 하려면 사랑의 실천이 일상의 습관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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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요한 15,9)
이는 우리가 이미 사랑을 받았다는 선포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기원이 아버지께 있다는 선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분명, 이미 사랑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아버지께로부터 왔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을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 호의와 자애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곧 선사된 사랑이 베풀어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 사랑 안에 머무르기를 초대하십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여기에는 ‘먼저’ 당신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이 전제됩니다. 곧 선사되는 당신의 사랑을 먼저 받아들여 그 안에 머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당신의 사랑이 우리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먼저 자신을 허용하고 승복하는 일입니다. 그래야 다른 사랑이 아니라, 선사받은 바로 그 사랑 안에 머물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랑 안에 머무는 방법도 함께 가르쳐주십니다.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10)
이미 당신께 선사받은 그 사랑을 지키는 것이 곧 당신 사랑 안에 머무는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그 어떤 사랑이 아니라, 선사받은 그 사랑을 간직하고 준수하는 것입니다. 이는 당신의 사랑은 말이나 생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랑하기를 실행할 때 그 실행 안에 머문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당신의 이 사랑을 실행하는 것이 ‘새 계명’으로 선포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5,12)
그리고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무르게 되면 당신의 기쁨이 우리 안에 들고 우리 또한 기쁨으로 차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 기쁨은 예수님께로부터 선사받은 신적인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쁨은 결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사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의 만족, 나의 성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의 실현으로부터 오는 까닭입니다. 오늘 하루 그 기쁨이 가득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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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요한 15,9)
주님!
저는 분명, 이미 사랑을 먹었습니다.
아무런 자격이 없지만, 당신의 호의를 입었습니다.
먹고서도 먹은 줄을 모르는 무지를 깨우치소서.
더 이상은 그 사랑을 내팽개치거나 무시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제 삶이 온전히 당신의 사랑으로 차오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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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15,9)
그리스도교는 '계시종교'입니다.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이 계시의 중요한 원천인데, 구약성경 46권과 신약성경 27권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그 단어가 바로 '사랑'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사랑은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하느님의 사랑이며, 이 하느님의 사랑이 당신의 외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그 사랑이 바로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육화의 겸손과 땀으로 드러났고, 결정적으로는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요, 극진한 사랑이며, 우리를 끝까지 사랑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랑 안에 머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문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고 또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는데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5,12)
예수님의 이 말씀에 온전하게 순명하신 분이 바로 주님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성모 마리아는 기쁨 중에도 그리고 고통 중에도 언제나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의 모범이신 성모님을 공경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5월 성모성월에 성모님과 함께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치면서 성모님의 모범을 따라갈 것을 권고합니다.
5월 성모성월을 맞이하여 우리의 엄마이신 성모님의 모습을 닮아, 끝까지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무는 자녀들이 됩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지극히 낮아지시고, 땀 흘리시고,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너를 위해 낮아지고, 땀 흘리고, 죽는 밀알이 됩시다!
이 사랑과 순명 안에서 함께 기뻐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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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
요한 15,9-11 (나는 참포도나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사랑>
사랑받는
사랑이
사랑하는
사랑이 되어야
비로소
사랑입니다
사랑만이
사랑을
품습니다
사랑만이
사랑 안에
머뭅니다
사랑받는
사랑보다
사랑하는
사랑이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랑입니다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랑이야말로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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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감정에는 어떤 패턴이 있다고 합니다. 그 과정을 5가지 요소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 생각, 감정, 신체감각, 행동 충동입니다. 이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예로 말해볼 수 있습니다.
사실: 남자 친구가 전화를 안 했다.
생각: 그가 예전만큼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게 분명하다.
감정: 불안하고 화가 난다.
신체감각: 쿵쾅대는 가슴, 달아오르는 얼굴.
행동 충동: 당장 헤어지자고 말해야겠다.
남자 친구가 전화하지 않은 게 사랑이 식어서라고 단정할 수 없는데도, 생각과 감정은 그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감정과 생각을 사실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군다나 신체감각과 행동 충동을 보고 분명한 것처럼 믿습니다.
그러나 이 패턴은 내가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가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뿐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긍정적인 감정의 패턴을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긍정적인 마음을 가질수록 나의 삶 자체를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안에 머물 것을 그리고 당신을 믿음과 사랑으로 바라볼 것을 명령하십니다. 이는 앞선 긍정적인 감정의 패턴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부정적인 마음을 간직하고서는 믿음과 사랑을 가질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의심하면서 사랑할 수 있을까요? 미워한다면서 믿을 수 있을까요? 믿음과 사랑은 절대로 분리되지 않으며, 우리를 부정적인 삶의 반대편에 서게 합니다. 사랑 자체이신 주님이시기에, 그분께 대한 굳은 믿음과 뜨거운 사랑을 갖춘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며 그분처럼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셨듯이 우리도 영광을 받게 되며, 주님께서 이 세상을 이긴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을 이기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충만한 기쁨입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우리가 기쁨 안에 있기를 바라십니다. 따라서 기쁨의 생활을 벗어나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긍정적인 사랑으로 우리와 일치하시는 주님에게 머무르면서, 그분의 생각으로 또 그분의 말로 또 그분의 행동으로 이 세상을 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바닷가에 흩어진 모래알 하나하나는 제각각 다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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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행복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는 분이 있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다루는 뇌의 영역인 변연계가 활성화되지 못할 때 그런 모습을 보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변연계를 자극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 두피 마사지를 하면 될까요? 가장 좋은 방법은 소설책 읽기와 음악 듣기라고 합니다. 소설책에는 감정을 다루는 다양한 어휘가 등장하기에, 그런 어휘를 읽는 것만으로도 변연계가 활성화됩니다.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음악을 들으면 다양한 감정이 풍부하게 일어납니다.
소설책 읽는 것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더군요. 그러나 자신의 정신 건강을 위해 너무나 중요합니다. 음악 역시 자신의 정신 건강을 위해 반드시 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보니,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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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받은 사랑을 기억하라>
무슨 일을 하든 억지로 마지못해 의무감으로 하면 기쁨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나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자발적으로 하면 보람과 기쁨이 큽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명령이나 의무에 의해 한다면 진정한 사랑을 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나 계명을 내리는 분의 뜻을 알기 위해 또 그분과 하나가 되기 위해 지킨다면 그 의미가 풍요로워집니다. 사실 진정한 사랑을 한다는 것은 그만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자기를 먼저 생각하는 부족한 사랑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많은 사랑을 받아야 하고 이미 받은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 안에 머물게 되면 기쁨이 충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사랑 안에 머물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머물러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그들을 위한 당신의 사랑이 선행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신 것과 같은 사랑으로 제자들을 사랑하였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아버지께 받은 사랑은 제자들을 위한 사랑의 기초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아들 예수님께서 받으셨고, 예수님의 사랑을 제자들이 받았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제자들 간에 사랑하는 것에 머물지 말고 이웃 사람에게로 사랑의 손길을 펴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13,35)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 사랑 안에서, 그분의 말씀 안에서 머무르도록 성모님의 도움을 청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랑 안에 머물라고 당부하는 것은 당신의 기쁨을 제자들에게 전해 주고 그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쁨은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사람만이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기쁨은 다른 사람들과 사랑을 나눔으로써 솟아나는 기쁨입니다.
오늘 우리도 충만한 기쁨을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에서 얻게 될 것입니다. 혹 사랑이 순수하지 못하고, 어떤 기대심리나 보상심리가 포함되어있다면 사랑이 말라버릴 것이고, 또 계명을 억지로 지키는 사람은 헛고생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무르면서 아버지의 사랑을 주려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아버지와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사랑의 원천인 하느님아버지를 향할 때 결코 사랑이 시들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속 깊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도 그를 아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채비가 갖추어져 있는 만큼 그는 하느님을 사랑합니다.”(디아도쿠스주교) 그리고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 사랑받는 존재가 됩니다.”(작은 거인들에서) 망설이지 말고 사랑을 위한 사랑을 함으로써 주님의 계명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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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의 학교學校, 사랑의 여정旅程>
-아름다움의 잣대, 분별의 잣대-
60년대 후반 풍미했던 대중 가요가 생각납니다. 당시 고등학생시절 라디오를 들으며 흥얼흥얼 따라 불렀던 ‘사랑을 하면은 예뻐져요’란 가요입니다. 가사 일부만 소개합니다.
-“사랑을 하면은 예뻐져요, 사랑을 하면은 꽃이피네
아무리 호박꽃 아가씨도,
사랑을 하면은 꽃이피네, 사랑을 하면은 예뻐져요
키다리 뚱뚱보 아가씨도”-
어찌 아가씨뿐이겠는지요. 웃는 얼굴은 그대로 꽃같은 얼굴이기에 남녀노소 누구든 웃으면 정말 예쁩니다. 사랑을 하면은 예뻐져요, 정말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사랑은 그대로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사랑의 아름다움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자연만물의 아름다움으로 표현된 어제 5월5일 어린이날은 참 눈부시게 아름다운 사랑으로 충만한 날이었습니다. 늘 찍어도 아름다운 자연 환경에 감동하여 많은 사진을 찍었습니다. 사진은 말 그대로 ‘빛의 예술’임을 깨닫습니다.
수녀원 미사시 망설이던차 강론중 어린이날 노래를 함께 부르니 수녀님들의 꽃같이 피어난 얼굴들에 음성도 그대로 소녀들의 음성이라 몸도 마음도 환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점심식사후 세기중 안토니오 수사가 ‘봄꽃’, ‘이발’이란 시제詩題를 제시하여 짧은 자작시로 응답하니 이 또한 사랑의 표현이겠습니다.
-“봄비/맞으며
봄길/걷다가
봄꽃/만나다
바로/당신이다!”-
-“또렷이/드러나는/얼굴
새롭게/시작하는/날
아/좋다/이발하는 날
이 기쁨/이 행복에 산다
내/이름은/이 행복!”-
저녁식사후 세기중 스테파노 주방 수사와의 정담情談도 생각납니다. 수사들마다 연중 휴가가 있고 너무나 분명한 사실은 긴 듯 보였든 휴가기간이 끝나면 어김없이 귀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 휴가가 끝나면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 날이 바로 죽음의 날이 겠고, 문제는 아무도 아버지의 집으로의 죽음의 귀가 날짜를 모른다는 것이나 분명 그날은 올것입니다. 다음 스테파노 수사님의 다음 말이 저에겐 화두처럼 들렸습니다.
“휴가 기간이 지나갈수록 수도원 집에 돌아가고 싶더라구요.”
우리 인생 휴가도 끝인 죽음이 다가올수록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커진다면 얼마나 좋겠는지요. 신록과 꽃들이 어우러진 세상이 이처럼 아름답다면 아버지의 집은 얼마나 아름답겠는지요. 몸과 마음 잘 관리하여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기쁘게 아버지의 집으로 귀원할 수 있도록 하루하루 날마다 깨어 준비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죽음이 있어 삶이 참 소중한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참 많이도 인용했던 사부 성 베네딕도의 말씀입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라!”(성규 4,47)
어떻게 하면 보람있게 인생휴가 끝나고 후회없이 기쁜 마음으로 아버지의 집에 귀가할 수 있겠는지요. 쏜살같이 흐르는, 강물처럼 흐르는 세월입니다. 과연 우리 인생여정,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하면, 일년사계(봄-여름-가을-겨울)로 압축하면 어느 지점에 와 있겠는지요. 이런 자각이 깨어 사랑의 선물같은 오늘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게 합니다.
답은 사랑뿐입니다. 수없이 나눴던 어느 분의 임종어 세 말도 생각납니다. ‘미안하다, 고맙다, 사랑한다’, 결론은 ‘사랑한다’입니다. 인생은 ‘사랑의 학교’이자 ‘사랑의 여정’입니다. 평생 사랑을 배워가는, 졸업이 없는 평생 사랑의 학인이요, 사랑에는 영원한 초보자인 우리들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사랑뿐입니다. 사랑의 빛이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칠흑의 어둠속에 잠긴 밤도 사랑의 태양이 떠오르면서 만물은 고유의 아름다움으로 빛을 발합니다. 이런 빛이 있어 사진도 찍습니다. 사진이 ‘빛의 예술’이듯 삶은 ‘사랑의 예술’임을 실감합니다. 그러니 심기일전, 초발심의 자세로 다시 사랑 공부에 정진해야 하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며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어제에 이어 ‘머무르다’란 단어가 세 번 연거푸 나옵니다. 늘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정주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먼저 사랑해 주셨기에 사랑할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늘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를 때 우리는 퍼내고 퍼내도 늘 샘솟는 주님 사랑의 샘이 됩니다. 사실 퍼내고 퍼내야 늘 맑은 샘물이듯 사랑도 그러합니다. 마치 매일 퍼내고 퍼내도 늘 샘솟는 제 사랑의 강론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저절로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삶이 아니라 부단히 사랑의 계명을 실천할 때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게 되고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를 때 더욱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게 될 것입니다. 머무름과 사랑의 실천은 함께 가는 역동적 관계임을 깨닫습니다.
저는 사랑의 이중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자연을 더하여 사랑의 삼중계명이라 칭하고 싶습니다. 기후변화, 기후위기, 기후재난이 절박하게 와닿는 자업자득의 중병重病이 든 지구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이대로 가다간 인류의 종말을 피할 수 없다 합니다. 지구나 자연의 종말이 아닌 인류의 종말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사랑의 빛에 이어 사랑의 기쁨, 사랑의 충만입니다. 충만한 기쁨의 삶의 원천은 사랑뿐입니다. 텅 빈 허무를 텅빈 충만으로 바꿔주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어제 읽은 기사는 충만한 기쁨보다 더 중요한 것을 깨닫게 했습니다.
“아이들한테 행복은 ‘기쁨이 충만한 상태’라기보다는 ‘삶이 예측 가능하고 일관성이 지켜지는 안정감이 있는 상태입니다. 한결같이 편안한 마음으로 안아줄 때 아이들은 행복하죠. 아이를 돌보는 부모의 행복은 바로 아이의 행복입니다. 부모의 불안은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옮겨 갑니다. 내재화하는 거죠. 어린 시절부터 아이들이 발달지연이나 문제행동 등을 보인다면 이는 부모의 불안이 어이들한테 내재화한 탓이 커요.”(한겨레5.5; 21면;육아정책연구소;박상희 소장)
어찌 아이들뿐이겠습니까? 어른도 똑 같습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안아 주는 사랑의 공동체가 참 좋은 공동체입니다. 위로와 치유, 평화를 위해 누구에게나 평생 배워야 할 과제가 사랑공부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유일한 처방도 탐욕의 바이러스가 아닌 사랑의 바이러스, 행복의 바이러스입니다. 사랑도 웃음도 기쁨도 행복도 전염됩니다.
사랑을 하면은 예뻐집니다. 아름다워집니다. 아름다움으로 표현되는 사랑입니다. 사랑할수록 아름다워지니 사랑은 아름다움의 잣대입니다. 더불어 사랑은 분별의 잣대도 됩니다. 제1독서 사도행전에서 어제에 이어지는 유다계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극단의 주장에 대한 베드로의 처방과 야고보의 처방이 이를 증명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다 감당할 수 없던 멍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워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 우리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주 예수님의 은총으로 구원받는 다고 믿습니다.”
야고보 사도 역시 베드로의 의견에 공감하여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돌아선 이들에게 어려움을 주지 않으려는 사랑의 배려로 준수 사항을 최소화하며 최종 결론은 내일 제1독서에 나옵니다. 참으로 사랑이 깊은 영성의 대가일수록 사랑의 잣대에 의한 올바른 분별을 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사랑의 성체성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루하루 날마다 ‘사랑의 인생 학교’에서 후회없는 ‘사랑의 여정’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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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사랑을 배웁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10)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당부하시는 사랑은 어디서 갑자기 툭 튀어나온 생경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신 성부 하느님과 성자 예수님 사이에 흐르는 유대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지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주님 사랑에 머무르는 이는 사랑에 흠뻑 젖어들어 사랑에 물들어 갑니다. 사랑이신 주님을 닮아가다가 그 자신이 사랑이 되지요. 인위적으로 억지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사랑이 그에게서 자연스레 흘러나옵니다. 사랑 안에 있는 영혼은 사랑밖에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기쁨은 사랑의 증거입니다. 누군가 사랑하고 있다면 침울하거나 부정적이기 어렵지요. 진짜 사랑이라면 그렇습니다. 혹 자기중심적이거나 계산적인 욕정을 사랑이라 착각할 수도 있지만 그건 사랑의 허울만 그럴듯하게 흉내낸 것일 뿐이어서 진정한 기쁨을 자아낼 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사랑 자체이시어서 기쁨의 존재십니다. 아드님도 마찬가지시지요. 그 사랑이 실패만 거듭하는 듯 보이고 번번이 배척과 거부를 당하는 외짝 사랑이어도 그분에게서 기쁨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사랑은 결과로 성취를 가늠하지 않고, 이미 사랑한 만큼이 성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부 하느님도 기쁘시고, 사랑이신 하느님 안에 머무르시는 성자 예수님도 늘 기쁘십니다.
제1독서는 사도들이 신앙의 길에 들어선 이민족들을 위해 어떻게 그 사랑을 반영하는지 보여줍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다 감당할 수 없었던 멍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워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사도 15,10)
그리스도를 믿게 된 이방인들도 이스라엘 백성처럼 할례 등의 전통을 지키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베드로 사도가 담대히 질문을 던집니다. 이 말에는 놀라울 정도로 솔직한 개인적, 공동체적 성찰이 들어 있지요.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가르친 대로 열심히 하느라고 했지만 그것이 늘 버겁고 힘겨웠던 겁니다. 지키느라고 지켰지만 늘 부족과 미완의 불안, 그리고 죄의식을 안고 살았던 게지요. 베드로는 이를 포장하지 않고 자신의 심정에서 출발해 진솔히 토로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길을 받아들여 새롭게 성부, 성자, 성령과의 만남을 시작하는 이들이 굳이 길을 되짚어 죄의식과 불안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습니다. 하느님도 이를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하지요. 그 이유는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돌아선 이들에게 어려움을 주지 말고"(사도 15,19)
이제 야고보 사도가 구약 예언에 비추어 하느님의 뜻을 정리합니다. 중요한 건 이론이나 전통보다 누구나 더 원활하고 기쁘게 하느님께 나아가도록 돕는 것입니다. 기존의 기득권이 텃세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두지 않으"(사도 17,9)신 하느님의 사랑의 의중을 존중하고 따라야 합니다.
"그리스도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네."(영성체송)
주님은 유다인만을 위한 신이 아니고, 구원 역시 한 민족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모든 이를 위한 것이고 구원을 위한 성자의 희생제사도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출신과 인종, 배경과 지위, 가진 바가 우리와 다른 이들 역시 주님 사랑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진정 기쁘고 감사하다면, 우리는 사랑하고 있는 것 맞습니다. 이 기쁨은 사랑이신 주님과 닮아가는 이에게 베푸신 은총이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사랑이신 주님께 머물러 사랑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주님의 기쁨을 공유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아무리 작고 미소해 보이는 사랑이라도 모든 사랑은 하느님을 담고 하느님을 닮아가기에 더할 나위 없이 위대하답니다. 사랑이 되어 가는 벗님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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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그리스도교 신앙은 삶을 ‘집(가정)으로 돌아감’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삶을 ‘집으로 돌아감’으로, 죽음을 ‘마침내 집으로 돌아옴’으로 경험하라고 한다.’ 오늘 이 시대의 괴로움을 한마디로 요약한 단어 가운데 ‘집 없음homeless’ 만한 게 있을까? 이 시대의 가장 심각하고 아픈 현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느낌과 보호받고 사랑받을 안전한 장소가 없는 현실이 ‘집 없음’에 그대로 드러난다.
가정에서 우선하는 분명한 가치는 누가 뭐라고 하든 친밀함이다. ‘여기 있는 게 불안하다.’(I do not feel at home here)를 직역하면 ‘여기서는 집에 있는 느낌이 아니다.’라고 할 때 우리는 친밀한 교제가 허용되지 않는 불편함을 드러내다. ‘집에 갔으면 좋겠다.(I wish I were home.)’는 말은 소속감을 주는 친밀한 장소가 그립다는 뜻이다.
-「살며 춤추며」중에서
♣비록 사람들이 가정에서 갈등을 겪고 많은 고통의 뿌리가 가정에서 시작되며 ‘결손가정’이 수많은 범죄와 질병의 온상으로 비난받는 현실이지만 그래도 ‘집’이라는 말에는 여전히 따뜻한 사랑과 행복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삶을 ‘집으로 돌아감’으로, 죽음을 ‘마침내 집으로 돌아옴’으로 경험하라고 한다.(상동)
그리스도인들에게 본향은 하느님 집인 하느님 나라인데, 원죄로 잃어버린 본향本鄕, 즉 실낙원失樂園인 영원한 에덴동산으로 ‘마침내 다시 하느님의 집으로 돌아옴’을 本鄕이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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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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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UMbDWSYX3H0&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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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내 사랑안에 머물러라."(요한 15, 9)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기쁨을
날마다
우리에게
넘치도록
부어주신다.
예수님의
성체성사가
그렇고
살아계신
말씀이 그렇고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순간순간이
그러하다.
사랑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사랑은
뜨거운
확신이며
사랑은
지금 이 순간
주님과
함께하는
가슴 뛰는
현존이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
하느님께서
주시고
하느님께서
하신다.
걱정을 내려놓는
기쁨이며
하느님만을
바라보는
기쁨이다.
사랑의
기쁨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기쁨의
주님이시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은
기쁨의 사람으로
변화된다.
복음은
기쁨이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뜻이
기쁨이다.
하느님의
기쁨을 닮은
우리들이다.
기쁨은
현실이다.
우리의
현실 안에
기쁨의 주님이
함께 계신다.
기쁨이
우리를
향해 있다.
기쁨을
진실로
믿는다.
더 이상
바랄 것 없는
주님 기쁨에
오늘 이 순간도
함께 머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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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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