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전국시대에 살았던 맹자는 인간의 본성이란 원래 선한 것이었다는 성선설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는 우산지목(牛山之木)을 예를 들면서 본성이 착함을 설파하였지요.
우산지목(牛山之木).. 우산(牛山)에 있던 나무와 풀은 도끼로 또 소등의 동물로 인하여 울창하던 숲이 없어져 버렸고 그 결과 민둥산이 되었다는 것.. 원래부터 우산이란 산이 민둥산은 아니었다고 하였습니다. 원래 울창하였던 숲이 처음의 사람의 본성으로 이해하면 되고, 민둥산을 후천적으로 이 풍진세상이 만든 악한 모습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후천적인 악한 모습때문에 인간의 본성을 포기하여서는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본성을 포기하는 것이 자포자기(自暴自棄)입니다.
이제 동양철학의 대가인 박재희 교수가 들려주는 맹자의 성선설에 관한 강의를 소개하겠습니다. 사람을 바라 보는 맹자의 아름다운 시선이 들려오는 듯 합니다.
아래를 클릭하면, 이 강의를 동영상으로 보고 듣고 즐길 수 있습니다. http://www.nethyangki.net/7539
세상을 살다보면 정말 이해 못할 사람들의 이해 못할 행동을 많이 보게 됩니다.
오늘은 맹자의 인간의 본성은 착하다는 논리를 한 번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당신은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믿어야 한다. 당신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원래 선하게 태어난 존재라는 것을! 내용은 이렇습니다.
민둥산인 우산은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인간은 원래 따뜻한 사랑과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산에 도끼가 들어와 나무를 마구 베었던 것처럼 세파의 도끼가 우리의 양심을 찍어댄 것이지요. 우리들의 마음은 하루하루 황폐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하루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가족과 함께하는 저녁이 되면 찍혀지고 상처 난 내 영혼을 다시 추스르곤 합니다.
맹자는 잃어버린 우리의 선한 마음을 되찾아야 한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집에서 기르던 개나 닭을 잃어버리면 그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人有鷄犬放則知求之)
맹자는 또 이런 예를 듭니다.
인간에 대한 믿음과 신뢰. 절대로 포기하면 안 됩니다. 인간은 착하게 살아서는 생존할 수 없다고 자신에게 포악하게 대하는 것을 맹자는 자포(自暴)라고 합니다. 나는 불가능하다고 자신을 버린 사람을 자기(自棄)라고 합니다. 일명 맹자가 말하는 자포자기(自暴自棄)는 인간이 선하다는 신념을 버리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포자기의 상태로 사람들을 대한다면 그 조직은 포기 할 수밖에 없는 조직이 됩니다. 우산은 원래 민둥산이 아니었다. 낮과 밤으로 도끼와 소들이 들어와 나무를 베고 풀을 뜯어먹어 상처를 입고 민둥산이 되었다.
[출처] 넷향기, 동양고전 철학자 박재희 교수.
☞ 박재희님은 누구인가..
국역연수원(3년과정)을 졸업하였고 중국 사회과학원 철학연구소에서 도가철학을 연구하였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를 거쳐 현재 POSCO 전략대학 석좌교수, 민족문화콘텐츠 연구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EBS-TV 손자병법(44회), 고전특강(12회), KBS-TV 아침마당 특강(4회), 등을 진행하였고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신 손자병법(210회)을 강의하고 있다. 매일 아침KBS 제1라디오 시사고전(520회)을 진행 중이다. 저서로는 『손자병법으로 돌파한다(1, 2)』(문예당), 『경제전쟁 시대 손자와 만나다』(크레듀) 등이 있다.
맹자에 대한 참고 내용을 옮겨 와 보았습니다.
☞ 맹자 (孟子 ; BC 372 ~ BC 289) 인의(仁義)의 왕도정치를 주장한 유학자.
실력을 믿고 정벌의 명분으로 인의(仁義)의 이름을 빌리는 이를 패(覇)제후라 하는데, 그러자면 반드시 국력이 강대해야 한다. 덕으로 인의를 행하는 이는 천하를 귀복시킬 수 있으니, 그렇게 하는 데는 반드시 강대국일 필요는 없다. 실력으로 복종시키는 이는, 사람들이 마음으로 진정으로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실력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덕으로 복종시키는 이는 사람들이 기뻐서 진정으로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맹자] 공손추상)
성왕(聖王)의 덕치를 실현할 것을 주장한 이상주의자
맹자의 이름은 가(軻), 자(字)는 자여(子輿), 자거(子車), 자거(子居) 등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생몰 연도도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공자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백여 년’이라는 맹자 자신의 말과, 맹자가 만난 제후들의 재위 연대를 고려할 때 그 활동 시기는 전국 시대 중엽 기원전 4세기 후반으로 볼 수 있다. 생몰 연도에 관해서는 기원전 372~289년 설과 기원전 385~304년 설이 있다.
맹자가 태어난 곳은 당시 노나라와 인접한 추(鄒)라는 소국이었다. ‘성인이 살았던 곳과 가깝다’는 맹자 자신의 말대로, 오늘날 중국 산둥성 쩌우(鄒)현에 있는 맹자묘는 취푸(曲阜)현에 있는 공묘, 공부, 공림 등에서 남쪽으로 약 3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사기]의 ‘맹자순경열전’에 따르면 맹자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제자에게서 가르침을 받았고, 후한 시대 조기(趙岐)의 [맹자제사](孟子題辭)에 따르면 맹자는 직접 자사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연대적으로는 앞의 [사기]의 설이 보다 타당하다.
이른바 맹모삼천지교와 맹모단직지교 이야기는 전한 시대 유향이 편찬한 [열녀전]에 나오는데, 이야기 자체는 사실이라기보다는 전설에 가깝다. 다만 맹자의 어머니가 현모(賢母)로서 맹자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맹자가 어머니의 장례를 유달리 각별하게 마음 써서 지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맹자는 공자와 마찬가지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정치사상을 군주들에게 설파하는 유세(遊說)를 했지만, 정확히 언제부터 얼마 동안 유세를 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양나라 혜왕과 양왕, 제나라 선왕, 송나라 언왕, 추나라 목공, 등나라 문공 등과 인연을 맺었던 것은 분명하다. 맹자는 자신의 정치사상을 실현할 기회를 갖지는 못했지만 대체로 평탄한 삶을 살았다. 말년의 그는 고향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자신의 가르침을 기록으로 남기는 데 전념했다. 사마천은 [사기] ‘맹자순경열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각국들은 바야흐로 합종연횡을 통한 싸움에 힘쓰고, 전쟁만을 능사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도 맹자는 요순(堯舜)과 하?은?주 삼대의 성왕들의 덕치를 주장하고 다녔으므로, 그의 주장은 찾아간 나라들의 실정과 부합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물러나 만장 등 제자들과 함께 시(詩)와 서(書)를 정리하고 공자의 학문과 사상을 천술하여 [맹자] 7편을 지었다.
‘인의’(仁義)를 주창하여 인간론과 정치론의 기초로 삼다
[맹자]에는 ‘인은 사람이 거해야 할 편안한 집이고, 의는 사람이 걸어야 할 바른 길이다’(이루상)라는 대목이 나온다. ‘왜 하필 이익을 말하십니까? 오직 인의(仁義)가 있을 뿐입니다’(양혜왕상)라는 대목도 나온다.
[논어]에서는 인(仁)도 의(義)도 지(知), 용(勇), 신(信) 등의 다른 여러 덕목들과 사실상 동렬의 것으로 등장한다. 또한 인과 의를 대비시키거나 합쳐서 말하는 경우는 없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인은 유교에서 최상의 덕목으로 일컬어진다. 맹자가 유교에 미친 많은 영향들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은 의(義)의 가치와 의미를 중시하여 높였다는 점이다.
사실상 맹자로 인해 유교에서 의가 인에 못지않은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 잡게 되었지만, 의의 중요성은 맹자 시대의 전반적인 사상적 변화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맹자의 논적인 고자(告子)는 이른바 인내의외(仁內義外), 즉 인은 내면적인 것이고 의는 밖으로 드러난 외면적인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장자] 내편과 [묵자]의 십론 가운데에도 인과 의를 대비시켜 표현하는 경우가 나온다. 그러나 인과 의를 나란히 일컬어 ‘인의’로 말한 것은 맹자가 처음이다. 따라서 맹자를 인의의 제창자라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맹자의 사상과 학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왕도론과 성선설이라고 하지만, 인의야말로 그 둘을 뒷받침하고 연결 짓는 축에 해당한다. 인의의 정치를 행해야 할 필요성을 논하는 것이 왕도론이며, 인의의 마음을 모든 사람이 본래부터 갖추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게 성선설이다. 요컨대 맹자의 정치론과 인간론에서 공히 중추를 이루는 것이 인의의 이념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인의’에서 인과 의의 뜻을 나누어 생각해보면, 때에 따라서는 일종의 가족 도덕에 한정되어 각각 효(孝)와 제(悌)를 뜻한다고도 볼 수 있으나, 대체로 인은 연민이나 친애(親愛)를 뜻하고 의는 정의나 도의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인의’는 그 자체로 도덕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사진은 맹자의 모습을 담은 그림 <출처: Wikipedia>]
인간의 도덕적 각성과 수양을 요구하는 성선설
성선설은 인간은 선천적으로 도덕적 소질을 갖추고 있다는 주장이다. 자공은 스승 공자에 대해 말하기를 ‘선생님께서 성(性)과 천도(天道)에 관해 말씀하시는 것은 좀처럼 듣지 못했다’라 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공자의 제자 시대까지만 해도 인간의 본성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맹자 시대에는 인간의 본성에 관한 논의가 성행했다.
[맹자] ‘고자상편’에는 성선(性善)의 입장을 취하는 맹자와, 인간의 본성은 본래부터 선과 불선 같은 것은 없다고 주장하는 고자(告子) 사이의 한 발치 양보도 없는 논쟁이 실려 있다. ‘고자상편’에 실린 맹자의 제자 공도자(公都子)의 말에 따르면, 맹자의 성선설, 고자의 성무선무불선(性無善無不善)설, 그리고 인간 본성에는 선악의 요소가 혼재되어 있어 본성을 어떻게 기르느냐에 따라 선악이 결정된다는 설, 본성이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은 숙명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설 등이 있었다.
인간의 본성과 마음에 관한 맹자의 주장은 인간의 마음이 인의예지(仁義禮智) 각각의 실마리에 해당하는 측은(惻隱), 수오(羞惡), 사양(辭讓), 시비(是非)의 마음을 본래부터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선설은 논리적 논변이나 구조를 갖춘 학설이라기보다는 맹자의 신념을 밝힌 것에 가깝다. 성선을 주장하는 맹자의 의도는 결국 각 개인에 대해 도덕적 각성을 요구하고, 그것을 위해 부단하게 수양할 것을 요구하는 데 있다. 맹자를 가리켜 유학에서 ‘마음의 본래 이치를 밝혀 도덕 수양을 하는 학문’ 즉 심학(心學)의 사실상의 제창자로 일컫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맹자의 민본주의와 혁명사상 그리고 왕도(王道) 정치
제나라 선왕이 맹자에게 물었다. “탕 임금이 걸을 ?아내고 무왕이 주를 정벌했다는 데,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맹자가 그렇다고 답하자 선왕이 다시 물었다. “신하된 자가 자기 임금을 살해해도 괜찮은 겁니까?” 맹자는 이렇게 답했다. “인(仁)을 해치는 자를 흉포하다 하고 의(義)를 해치는 자를 잔학하다 하는 데, 흉포하고 잔학한 인간은 한 평민에 지나지 않기에, 한 평민인 주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살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맹자] ‘양혜왕’하)
불인하고 불의한 군주는 민심을 잃게 되는데, 민심이야말로 하늘이 맡긴 사명이자 소임, 즉 천명의 소재지이기도 하다. 민심을 잃어 천명이 떠나간 군주는 더 이상 군주가 아니라 한 사람의 평민에 불과하다는 것, 따라서 천명이 떠나버린 군주를 몰아내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 여기에서 맹자의 민본사상과 혁명사상을 엿볼 수 있다. 맹자는 ‘백성이 귀중하고 사직(社稷)은 그 다음이며 임금은 대단치 않다’고 말함으로써 민본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힘으로 인(仁)을 가장하는 것은 패도이다. 패도를 칭하려면 반드시 큰 나라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덕으로 인을 행하는 것은 왕도이다. 왕도를 펴는 데는 큰 나라여야 할 필요가 없다.…힘으로 남을 복종시킨다면 그것은 마음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며 힘이 모자라서이다. 덕으로 남을 복종시킨다면 그것은 마음속으로부터 기뻐서 정말로 복종하는 것이다. ([맹자] ‘공손추’상)
무력으로 영토를 넓히려는 패도가 횡행하던 시대에 맹자는 덕으로 사람들을 감화시켜 인의(仁義)을 실천하는 정치, 이른바 왕도 정치를 꿈꾸었다. 앞서 인용한 사마천의 기록, 즉 ‘요순과 하?은?주 삼대의 성왕들의 덕치를 주장하고 다녔으므로, 그의 주장은 찾아간 나라들의 실정과 부합될 수 없었다’는 기록은, 맹자의 왕도 정치 이상이 현실에서는 받아들여지지 못했다는, 어쩌면 당연한 사정을 알려준다. 그가 꿈꾼 ‘왕도 정치의 군주와 나라’는 이후 유교의 역사를 통해 모든 유학자들의 현실 정치에 대한 이상이 되었고, 때로는 패악한 군주를 비판하는 하나의 중요한 근거가 되기도 했다.
글쓴이 표정훈씨는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뒤 번역, 저술, 칼럼과 서평 집필을 하고 있다. 이를 위해 2만 권의 장서를 갖춘 서가를 검색하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한국 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했으며 [중국의 자유 전통], [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 등 여러 권의 책을 번역하고 [탐서주의자의 책],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출처]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5&contents_id=4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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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황 제 불 도 저 원문보기 글쓴이: 황제 불도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