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11월 21일 목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제1독서 : 즈카 2,14-17
복 음 : 마태 12,46-50
그때에 46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47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48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49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50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오늘의 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성모님의 관계를 묵상하게 합니다.
예수님과 성모님께서는 특별한 관계를 맺으시고 있지만,
이 관계는 단순히 혈연관계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며,
하느님 뜻에 대한 충실성에 근거한다고 말합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어머니시며,
교회의 본보기로서 특별한 공경을 받으시는 이유는
그 누구보다도 하느님 뜻에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은 우리도 인간적인 혈연 이기주의에서 벗어나도록 요청하는 듯합니다.
많은 부모가 자녀와 관련된 일 앞에서 하느님의 뜻이 뒤로 밀려나는 경험을 합니다.
또한 많은 경우 가족 특히 자식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죄인 줄 알면서도 잘못된 선택을 할 때가 있습니다.
자신은 복음적 삶에 따르는 역경과 환난에 맞설 각오가 되어있지만,
자신의 자녀만큼은 이런 어려움 없이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인 줄 알면서도 가정의 안정과 안락을 위해서,
자녀의 미래를 위해서 옳지 않은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선한 마음이 죄의 동기가 되고 죄의 변명거리로 전락해 버릴 때,
이는 사랑이 아니라 혈연 이기주의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 말씀을 따름으로써 진정한 부모의 사랑이 실현됩니다.
자녀에게 물질적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나 세속적 처세가 아니라,
영적 유산을 남겨 주어야 합니다.
자녀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하느님 뜻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힘입니다.
곧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곧은 마음,
다른 이에 대한 배려와 존중, 고통받는 이에 대한 공감과 연민,
영원한 가치를 볼 수 있는 지혜, 배려와 희생을 아는 성숙함 등입니다.
이 모든 것은,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자라납니다.
신앙의 전달 안에서 부모와 자녀 관계는 거룩해지고,
진정한 의미의 성가정을 이루게 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부부싸움을 안 하는 집이 없다고 말합니다.
하긴 남남이 만나서 서로 맞춰서 산다는 것이 절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부모님께서 살아계실 때 부부싸움 하시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큰 목소리가 날 때가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서로 물건을 부수면서 싸운다는 것도,
말다툼으로 며칠 동안 말하지 않는다는 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부싸움 후 이혼하고 싶어도 자식 때문에 이혼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녀 때문에 억지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이혼해서 한 부모 가정으로 자란 아이의 정서보다
이혼하지 않고 같이 살면서 계속 싸우고 상대를 비난하는 말을 듣고 자란 아이의
정서 문제가 더 심각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아이 때문이라는 말을 하려면, 절대 아이 앞에서 싸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상대 때문이라는 말을 하며 싸우지만, 그때 아이를 위한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이 때문이라면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부모님의 함께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이제야 감사함을 깨닫습니다.
얼마나 좋은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셨을까요?
비록 배우자 없는 저의 삶이지만,
저 역시 좋은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며 최선을 다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함께 살아가는 이 세상에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주위 사람들의 영향을 받는 것처럼, 그들도 제게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 은총을 가득히 채워주신 성령의 감도로
성모님께서 아기 때부터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리는 날입니다.
성모님의 봉헌은 성모님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큰 것은 성령의 감도이지만,
성모님의 부모님이신 요아킴과 안나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오실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이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당신을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을 뒤로 하고,
당신 제자들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되어 주위 사람에게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처럼, 우리가 모두 한 가족이 될 수 있도록 말이지요.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입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께 봉헌된 것을 기리는 날입니다.
곧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 가득했던 그 성령의 감도로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리는 날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성모님은 세 살 때
그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에 의해 하느님께 봉헌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을 문전박대하십니다.
사실 마리아는 이와 같이 아들로부터 냉대당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 잃었던 아들을 성전에서 찾았을 때,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라고 했을 때도 그러했고,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하였을 때,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 하였을 때도 그랬습니다.
이는 마치 옷가지와 음식을 마련하여 찾아오는 어머니를
돌로 쫓았던 성철스님 이야기를 떠올려줍니다.
이는 참으로 불효처럼 여겨지지만, 사실은 진리를 향한 결연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
~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마태 12,48-50)
이 말씀은 언뜻 보기에는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내치신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성모님에 대한 외적인, 가시적인 이해를 뛰어넘도록 해줍니다.
사실 성모님께서는 육적인 혈연으로서만이 아니라,
영적으로 당신의 첫 번째 가족이셨음을 드러내 줍니다.
왜냐하면 어머니 마리아는 그 누구보다도 먼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의 방문을 받고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실 때
바로 그렇게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였습니다.
그렇게 성모님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여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그러니 분명 성모님께서도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분으로서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되셨습니다.
이처럼 성모님께서는 어렸을 때부터, 또한 아기를 잉태하는 순간부터,
자신을 봉헌하고 또한 축성 받으셨습니다.
결국 성모님도 예수님도 다 같이 아버지께 봉헌하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과 함께 하루하루를 아버지께 봉헌하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면서 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제 자신을 들여다봅니다.
성모님과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를 향하여 있는지,
그분의 뜻을 실행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오늘의 말·샘 기도>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8)
주님!
당신께서는 당신의 혈통에 저를 입적시키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형제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오니, 제 삶이 당신 신성으로 거룩해지게 하소서!
제 안에서 당신의 말씀이 자라나고, 아버지의 뜻이 실행되게 하소서! 아멘.
하느님 나라의 가족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잘났건 못났건, 경건한 사람이건 죄인이건 상관없이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입을 수 있고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음을 선언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예수님의 행동은 오해를 사기도 했고,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가족과 친지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이 들리자 그를 붙잡으려 나서기도 하였습니다(마르3,21).
예수님께서 의인과 죄인,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거나 거부하지 않으시고
그들과 함께 섞이고 어울렸기 때문입니다.
힘들어 아파하는 곳에 그분이 사랑으로 계셨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모두를 받아들이신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서도 살아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12,48)고 반문하시며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참된 가족에 대한 기준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가족은,
더 이상 혈연관계에 기반을 두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에 기반을 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족 공동체를 형성하고 결속시키는 데 초석이 되는 것은
혈연, 학연, 지연이나 좋은 감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의지입니다.
그러므로 설혹 예수님과 가족관계에 있는 사람들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할 때 비로소 그분의 참다운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아시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내 뜻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내려놓으려면, 그분의 뜻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하고, 그 신뢰가 믿음이죠.
아버지의 뜻이 나에게서 이루어지도록 내 삶을 맡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10,37).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려면 그분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성모님의 삶을 보면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가브리엘 천사에게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하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을 지닌 복된 분으로서 사셨습니다.
마지막 아드님이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는 것까지도,
감당하시면서 흔들림 없는 믿음을 지키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모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참된 가족에 속하십니다.
성모님은 성령의 은총으로 처음부터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된 분이시고.
그 품위를 한 번도 잃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비록 예수님과 혈연관계에 있지 않더라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면 누구든지 그분의 가족이 됩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해를 형님으로 달을 누님으로 고백했습니다.
해와 달은 생겨난 뒤로 하느님을 거역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지구는 우리 공동의 집이고, 하나인 인류 가족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모든 사람을 따뜻하게 맞아들이며 모든 사람을 사랑합니다.
어디서 왔든, 가난하든 부유하든, 어느 민족에 속하든, 사회적 출신이 어떠하든
모두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한 가족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이들은 서로가 형제자매입니다.
많은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행동하는 믿음으로 형성되는
새 가족의 품위를 지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마리아는 성령으로 인한 예수님의 잉태를 하느님께 대한 순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은 어머니이고,
마리아는 초대 교회 사도들과 함께 복음을 선포했던 사도들의 어머니입니다.
초대 교회는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 사도들의 어머니인 마리아,
신앙인의 모범인 마리아를 공경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는 마리아의 역할에 대해서 새로운 교리를 선포하게 됩니다.
성모 마리아의 승천, 성모 마리아의 평생 동정,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교리입니다.
저는 신학교에서 ‘마리아론’을 배웠습니다.
교회에서 성모 마리아의 역할과 성모 마리아의 존재가
신학적으로, 교리상으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학적인 의미와 성모 마리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잘 모르는 일부 개신교회는 가톨릭교회를 ‘마리아 교회’라고 오해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는 ‘마리아론’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을 지내면서
성모 마리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과 성모 마리아의 신앙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교회의 영적 어머니 역할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 이 사람이 이제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분이 이제 어머니이시다.”
교회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근거로 교회가 ‘사도’로부터 이어져 왔음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습니다.
따라서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런 측면에서 성모 마리아의 발현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발현을 통해서 치유와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발현의 현상이지, 발현의 본질이 아닙니다.
성모 마리아의 발현은 신앙인이, 교회가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파티마 발현에서는 회개와 평화의 중요성이 강조되었고,
루르드에서는 치유와 신앙의 부르심이 나타났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신앙인에게 “회개, 묵주기도, 단식, 미사참례, 선행”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성모님의 발현을 통해 신앙의 경고와 위로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자신이 변화하고 신앙을 깊게 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서 깊은 성찰을 했습니다.
교회의 학자들이 모여서 하나의 결론을 내렸습니다.
예수님은 온전히 사람이면서, 온전히 하느님이라는 교리가 선포되었습니다.
이런 교리가 선포되면서 성모 마리아의 정체성도 재정립되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인간 예수님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어머니도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교리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는 당연히 죽음의 과정을 거치지 않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초대 교회는 성모 마리아가 죽음을 겪지 않고, 승천하였다고 믿었습니다.
죽음을 거치지 않았으니, 성모님은 죽음의 원인이 되는 원죄를 받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회는 성모님이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교리를 선포하였습니다.
루르드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은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였기에, 평생 동정이었다는 교리도 선포되었습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입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서 성모님의 의견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성자 예수님을 성모님께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자신을 선택하신 예수님을 사랑으로 돌보셨습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신발, 옷, 책, 전자제품, 운동기구, 친구, 가족, 이웃’들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제가 선택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저를 선택해 준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라고 하면 애착이 있을 수 있고, 욕심이 생길 수 있고,
상실에 대해 아쉬움이 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를 선택해 준 것으로 생각하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제 곁을 떠난다고 해도 속이 상하거나, 아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내 것’이라는 틀을 ‘하느님의 것’이라는 틀로 바꾸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선택하셨다고 믿는다면 우리를 가로막는 많은 벽이 사라질 것입니다.
외롭지만 우주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지구는 하느님의 선물이며,
하느님 나라는 바로 이곳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영원하신 성부의 아드님을 잉태하신 동정 마리아는 복되시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축일은 예루살렘 성전 가까이에 세워진 성당의 봉헌을 기념하는 이날,
성모님이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 충만히 내리신 성령의 감도로
성모님이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당신을 바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전승에 의하면, 성모님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는
마리아가 세 살 되던 해에 성전에 봉헌하였는데,
세 살 된 마리아가 성전으로 올라갈 때,
계단에는 성모님의 발자국마다 장미가 피어났다고 한다.
오늘 복음에서 악마는 교활하게, 예수님의 육에 따른 친척들을 등장시킨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눈길을 그 친척들에게 향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47절).
이 말은 인간에게서 태어난 이가 하느님의 아들일 수 없다는 말이며,
땅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 어떻게 하늘에서 왔다고 하느냐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보시며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48절) 하신다.
그리고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49절) 하신다.
그분은 말씀을 따르는 이들을 가리키신다.
말씀을 실천하는 관계로 당신과 맺어진 이들에게 가족관계에 따른 모든 명칭을 붙인다.
당신의 말씀을 실천하며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키신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50절)
신앙으로써 주님의 형제자매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분의 어머니가 될 수 있을까?
바로 복음을 전함으로써 그분의 어머니가 된다.
이것은 주님을 낳아, 듣는 이들의 마음에 그분을 불어넣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삶을 통해 이웃의 마음에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이 생겨나도록 하는 사람이 어머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셨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셨기 때문에 복된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며 육신이시다.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마음속에서 진리이시며, 마리아의 태중에서 육신이시다.
그분의 어머니이신 것은 그 진리를, 말씀을 실천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도 말씀을 실천하며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마리아를 닮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봉헌과 은총
김찬선 리오나르도 신부
은총은 선물입니다.
거저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돈을 주고 사는 것이 아니고,
일의 대가로 받는 것도 아니며,
공로의 상급으로 받는 것도 아니고,
애써 얻는 게 아니라 거저 받는 것이며,
그러기에 능동태가 아니라 완전한 수동태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본래 이런 것인데
오늘 성모 자헌 축일의 봉헌기도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성자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전구를 들으시어,
봉헌하여 은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없게 하시고,
청원하여 응답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없게 하소서.”
그러니까 봉헌하여 은총을 받는 측면도 있다는 말이고,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성모님처럼 자신을 봉헌하여
우리도 은총이 가득한 사람이 되라는 기도입니다.
성모님처럼 아버지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도록
완전한 순종의 수동태가 되는 것도 은총의 길이지만
성모님처럼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림으로써
능동적 사랑의 수동태가 되는 것도 은총의 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능동적으로 수동태가 되게 하고,
사랑은 능동적으로 자신을 봉헌하게 하며,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갈망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사랑의 갈망이 은총을 받기 위한 능동적인 자세입니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이루어지라는 순종보다 더 적극적인 은총의 자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종보다 동정녀가 더 은총에 어울리겠지요?
이렇게 비유하면 어떻겠습니까?
종의 순종이 계곡 저 아래에서 은총이 물처럼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라면
동정녀의 사랑은 원천을 향하여 물길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사랑과 은총의 원천을 향해 열정적으로 산을 치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사랑과 은총을 갈망하며
자신을 봉헌한 마리아에게 은총을 거절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우리가 마리아처럼 자신을 봉헌하며 은총을 청하면 우리에게도
거절하지 않고 은총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으로
은총을 갈망하고 청하는 우리가 되기로 결심하며 그 결심을 봉헌하는 우리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은 특별한 기념일을 맞이해서 그동안 루카 복음의 말씀을
차곡차곡 들추어 만나던 흐름이 잠시 끊기었습니다.
어쩌면 끊기었다기보다 말씀께서 어머니의 기념일을 맞아
잠시 그분께 길을 내어드렸다고 보아도 좋을 듯합니다.
오늘은 마리아께서 어릴 때부터 하느님께 봉헌되셨음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오늘은 제1독서를 먼저 보겠습니다.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즈카 2,14).
하느님께서 예언자의 입을 통해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을 위로하십니다.
버려졌던 예루살렘을 다시 선택하시어 옛 영화를 되찾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개인 차원으로도, 공동체적 차원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곧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신부인 예루살렘일 수도 있고,
우리가 모여 이룬 교회 공동체가 예루살렘일 수도 있습니다.
"한가운데"!
중심을 말합니다.
사람은 무엇을(누구를) 중심으로 사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과 방식이 크게 달라집니다.
자기 내면에 어떤 생각을 품고 어떤 가치를 지향하며 사는지도 이 중심이 좌우하지요.
하느님께서 그 한가운데에 들어와 머무르시겠답니다.
우리 존재를 관통해 들어오셔서 차지하시겠다는 뜻이지요.
"모든 인간은 주님 앞에서 조용히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셨다"(즈카 2,17).
주님께서 오신다는 소식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외치던 목소리는 이제 침묵을 명합니다.
오시는 그분을 맞는 영혼에게 지금 필요한 건 고요입니다.
개인이건 공동체건 주님께서 존재 가장 깊은 곳을 뚫고 들어오시는 것은 놀라운 사건입니다.
더 이상 구구절절 변명이나 설명이 필요없는 신비입니다.
이천 년 전 주님께서 나자렛의 마리아에게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몸과 영혼을 관통해 들어와
한가운데에 자리하시도록 터를 내어드리셨지요.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허용하신 분이란 뜻입니다.
이 신비로운 순간, 하느님의 뜻, 말씀께서 그분 안에 심겨지셨지요.
마리아는 이렇게 존재 안에 들어오신 하느님을
열 달은 몸으로, 나머지 시간은 마음으로 품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 관통과 현존은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존재의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으신 순간,
그도 그분 심장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귀하디귀한 신부가 되어 그분을 사로 잡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꽂혀 서로의 한가운데를, 중심을 차지합니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계십니다"(마태 12,47).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실 때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서 기다립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이야기하고 싶어하지요.
"밖에"
분명 공간적으로는 예수님과 제자들 무리에서 소외된 자리입니다.
육으로 맺어진 가족이 그분을 둘러싸고 말씀을 듣는 이들 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그분을 만나고자 다른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49).
이는 물리적인 안과 밖을 초월하시는 말씀입니다.
지금 밖에 계시지만 하느님 한가운데에 자리하신 마리아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예수님의 어머니, 인류의 어머니이십니다.
그분은 영과 육을 통째로 하느님과 그분 뜻에 바치신 분이니까요.
성모님의 봉헌일에 우리 각자의 봉헌을 떠올려 봅시다.
교회 제도 안의 공적 신분으로 자신을 봉헌한 이도 있고,
제도 밖에서 주님과 자기만 아는 봉헌으로 스스로를 묶은 이도 있을 겁니다.
제도적으로야 안과 밖이 분명하지만,
봉헌의 자취는 그 영혼 한가운데에 주님께서 거하심으로 새겨집니다.
기준은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함"입니다.
주님께서 존재 한가운데로 들어오시도록 허용하고,
자기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의 뜻을 행하며
그분의 거룩한 처소로 살아가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귀한 봉헌을 축하드립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