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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2일 금요일(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제1독서 : 묵시 10,8-11
복 음 : 루카 19,45-48
그때에 45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46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47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48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의 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체칠리아 성녀는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하여
어릴 적부터 동정을 서원하였습니다.
집안의 강압으로 혼례를 치르지만,
남편인 발레리아노에게 자신이 동정을 서원하였고,
수호천사가 자기를 보호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발레리아노는 만일 자기에게 수호천사를 보여 주면
체칠리아의 동정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 말에 체칠리아는 남편을 우르바노 1세 교황께 보내어 세례를 받게 합니다.
세례를 받은 발레리아노는 수호천사를 보게 되었고,
체칠리아를 따라서 깊은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그 뒤 발레리아노는 친동생 티부르시오도 세례를 받게 하였고,
그들은 함께 자선 활동에 전념하며 그리스도교를 전합니다.
그들 주위에 있던 막시모는 이 두 형제가 보여 준 굳은 믿음을 보고
감화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 셋은 이교도 신전에 희생제물을 바치라는
강요를 거절하여 같은 날 순교하였습니다.
체칠리아 성녀는 이 세 명의 순교자들의 장례를 치른 뒤 체포되어 순교하였습니다.
체칠리아 성녀의 일화는 신앙인이 증언하는 사람의 삶을 통하여
밖으로 퍼져 나가는 것임을 알려 줍니다.
체칠리아와 그 주변의 순교자들은 입으로 신앙을 전파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선한 행위와 신앙의 삶으로 주위 사람을 감화기켰습니다.
이처럼 신앙은 신앙인들의 삶을 통하여 생명력을 얻고
밖으로 뻗어나가 주위 사람들에게 전파됩니다.
그래서 말로 주님을 선포하는 것보다,
삶으로 증언하는 선포가 더 힘 있는 선교입니다.
우리 주변의 이웃들이 우리의 삶을 통하여 주님을 바라보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삶으로 주님을 세상에 드러내야 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람이 암에 걸리는 이유는
첫째, 유전, 두 번째로는 환경, 세 번째는 음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 가장 중요한 것이 스트레스라고 하지요.
하고 싶은 말 참고, 하고 싶은 행동을 참으면서
스트레스가 더해져 병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회생활 하면서 어떻게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하고 싶은 행동 다 하면서 살 수 있느냐고 하지만,
이해하려 하고 또 삶 안에서 의미를 찾아가면서
본인에게 닥친 문제들을 풀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의 인상 깊은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최후에 웃는 사람이 승자가 아니라, 자주 웃는 사람이 승자더라.’
이를 위해 자주 감동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참는 사람은 감동도 참게 됩니다.
그래서 아무리 재미있는 상황에서도 뚱한 표정을 짓습니다.
어쩌면 감정이 메말라 있는 상태가 아닐까요?
참다 보니 자기감정을 참는 것도 습관이 되었고,
이로써 어떤 상황에서도 감동을 잘 받지 못하게 됩니다.
스트레스만 자기 안에 쌓이는 것입니다.
통증 완화에 도움을 주는 엔도르핀은
모르핀의 약 48배 효과가 있고,
‘감동 호르몬’이라 하는 다이돌핀(didorphin)은
모르핀의 약 200배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미국의 인디애나주 메모리얼 병원 연구팀에 의하면
15초 동안 하하호호 웃기만 해도 엔도르핀이 증가해
수명이 이틀 정도 연장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더 효과가 큰 다이돌핀의 효과는 어떠할까요?
따라서 이 효과를 위해 일상의 작은 순간에서도 감동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면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의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몸은 기도의 집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자리는 보이지 않고 세상의 자리만이 가득합니다.
하느님의 자리가 강도들의 소굴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평화가 있을 수 있을까요?
하느님의 자리가 없으니, 하느님의 일을 통해
작은 순간에서도 감동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서로 공감하고 감동받을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내 마음에 하느님의 자리를 만들어 기도의 집을 만들어야 합니다.
세상의 스트레스를 날려 버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평화와 위로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맨 먼저 찾아가신 곳은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면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루카 19,46)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나의 집, 곧 당신의 집’으로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사야> 56장 7절의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는 말씀을 지칭합니다.
그런데, 성전이 장사와 환전이 행해지는
불결하고 부정한 곳, ‘강도의 소굴’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새롭게 정화하시는 일을 맨 먼저 하십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교회개혁의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교회가 항상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드러내고,
주님의 생명과 사랑에 응답해야 함을 말해줍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쪼개시고,
성전의 장막을 두 갈래로 가르셨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성전에 갇히지 않으시는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하느님 현존의 성전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사실을 잘 깨우쳐줍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6)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은 주님께서 주신 거룩한 품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비록 질그릇 같은 깨지기 쉬운 몸이라 할지라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값진 보화를 간직한 거룩한 몸입니다.
당신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서 현존하시며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 안에 계시고 활동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주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이 ‘강도의 소굴’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몸으로 그분의 영광을 드러냄이란
우리 몸을 잘 보전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몸을 다른 이들을 위해 내어주는 데 있습니다.
이를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그렇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을 때,
곧 우리 자신을 타인과 세상을 위해 내어놓을 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우리 자신은 ‘기도의 집’이 되고,
우리 안에서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루카 19,46)
주님!
기도하게 하소서
제 몸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제 행실로 당신의 성전임을 증거 하게 하소서.
제 영혼이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게 하소서.
제가 당신이 거주하시는 당신의 집인 까닭입니다. 아멘.
성전을 지킵시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태국의 왕궁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많은 관광객에 떠밀려 겉모양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화려한 수공예 작품으로 꾸며진 왕궁을 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며 존중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짧은 치마를 입은 사람은 무릎 밑으로 내리는 긴치마를 빌려 입어야 하고
슬리퍼를 신은 사람은 다른 신으로 갈아 신어야 할 정도로
국왕에 대한 예의를 챙겼습니다.
왕궁의 곳곳에 그려진 벽화는 규모나 섬세함이 대단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벽화를 복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장인 정신을 생각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들락거려 소란스러운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온갖 정성을 들여 붓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몇몇 한국인들이 눈에 뜨여 아주 반가웠습니다.
한국 사람은 사원이나 왕궁 등 역사적인 장소를 찾기보다는
먹고, 마시고 즐기는 곳을 즐겨 찾는다는 말을 들었기에 그들이 달리 보였습니다.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는 만큼 왕궁은 보호되겠지만 관광객으로 넘쳐 나는 왕궁은
아마도 돈벌이의 장소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잘 포장된 과일바구니를 봉헌하고 있었는데
봉헌한 사람이 자리를 비우기가 무섭게 바구니는 치워지며,
이미, 판매되었던 과일바구니를 다시 판매하는 모습을 보면서
봉헌의 의미가 무시되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왕궁의 덕분으로 백성이 사는구나 하는 마음입니다.
모쪼록 왕궁이 돈벌이의 장소가 되지 않고 백성을 살리는 곳,
곧 기도의 집이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가끔은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
마음에 끌리는 것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상충할 때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마땅히 주님을 따라야 함에도 말입니다.
육적인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면 몸은 고달플지라도 마음의 자유를 누립니다.
그러나 육적인 욕망을 따르면 당장은 즐겁고 기쁘지만,
주님을 따르지 못한 안타까움에 마음이 걸립니다.
사실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한 마음이 강도의 소굴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았고,
하느님의 숨을 받았으며 주님을 모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 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상태가 강도의 소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루의 끝맺음에 늘
“허물로 누벼놓은 이날 하루를 주님의 자비로 지켜주소서.” 하고 기도를 하지만,
일관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기엔 여전히 힘에 겹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혀에 감미로운 자는 기도의 집이요,
육의 욕망을 따르는 자는 강도의 소굴이거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애 버릴 방도를 모색하였습니다.
설사 그들의 계획이 성공한다 해도 진리 안에 자유를 누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끝내 ‘강도의 소굴’을 ‘기도의 집’으로
회복시키지 못한 채 죽음을 자초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오늘도 여전히 그들의 전철을 밟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기도의 집을 복구하는 날 되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신 것은
성전은 이익을 남기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을 예배하고 사람을 섬기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이 장터였다면 그들을 쫓아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밑지고 파는 장사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건을 파는 이들은 당연히 이익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셈을 하고 이권이 살아있는 곳이 세상입니다.
성당에서 운영하는 성물방이나 카페가 물질적 이익의 창구가 된다면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실까요?
우리 삶의 자리는 주님을 모시는 성전입니다. 성전을 지킵시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보름달이 주는 상징은 ‘충만하다’라는 의미와 ‘풍요롭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충만하고 풍요로운 건 이웃에게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의 추석과 미국의 추수 감사절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풍요롭게 해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겁니다.
충만하게 해 주셨으니, 이웃에게 나누는 겁니다.
저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충만하고, 풍요로웠던 날이 있었습니다.
수요일에는 암 환자를 위해서 집으로 찾아가서 세례를 주었습니다.
형제님은 건강을 많이 회복했습니다.
암을 치료하면서 지난날들을 돌아 볼 수 있어서 감사했다고 말했습니다.
세례명을 레오라고 정했습니다.
사자처럼 용맹하게 암도 이겨내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목요일에는 교통사고로 크게 다친 아이를 위해서 집으로 찾아가서 세례를 주었습니다.
4달 전에 중환자실에 있을 때는 의식이 없었습니다.
찾아가서 기도하니, 발가락이 조금 움직였습니다.
아직 말은 못하지만, 지금은 이야기를 듣고 빙그레 웃기도 합니다.
그날 세례를 주면서 함께 했던 분들 모두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이는 요셉으로 세례명을 정했습니다.
아이의 생일이 3월 19일이라서 제가 그렇게 정해 주었습니다.
금요일에는 장례미사가 있었습니다.
4살 된 아들과 임신 중인 아내를 남겨 두고 하느님의 품으로 떠났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날, 아버지가 끓여준 된장찌개를 맛있게 먹었다고 합니다.
어머니와 산책하러 나갔다가, 상태가 좋지 않아서 병원으로 갔다고 합니다.
온 가족이 모여서 고인의 임종을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부모님의 심정도,
사랑하는 남편을 떠나보내야 하는 아내의 심정도 무척이나 가슴 아팠을 겁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4살 아들과 아직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는
태중의 아이를 생각하니 저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장례미사가 있던 날은 ‘모든 성인 대축일’이었습니다.
모든 성인이 세상을 떠난 안드레아를
천국으로 인도하리라 생각하며 장례미사를 봉헌했습니다.
토요일에는 ‘유아세례’가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아기를 위해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동부에서 왔습니다.
아기의 대부는 휴스턴에서 왔습니다.
아이의 세례명은 ‘노엘’이었습니다. 아이의 부모님이 정했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충만한 날이었습니다.
마침 부주임 신부님이 성지순례 중이어서 제가 충만함을 온전히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관해서 이야기합니다.
성전의 고유한 모습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더불어서 성전은 복음을 전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믿는 형제와 자매들이 친교를 나누는 곳입니다.
성전은 이제 예수님께서 당부하셨던 것처럼 나눔이 이루어지는 곳이어야 합니다.
특히 가장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외로운 이들이 머물 수 있는
위로와 치유의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곳에서 희망의 빛이 퍼져나가야 합니다.
우리들 또한 거룩한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를 만나는 사람들이 지친 삶에서 위로를 얻는다면,
우리를 만나는 사람들이 복음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면,
우리를 만나는 사람들이 절망 중에서도 희망의 빛을 볼 수 있다면
세상의 어떤 성전보다도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미사를 통해서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바로 우리들의 몸이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모시는 나의 몸과 마음이 주님의 뜻에 따라
충실하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
너그러운 마음으로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는 곳
그곳이 진정한 성전이고 그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분열과 갈등이 있는 곳, 욕심과 분노가 있는 곳은
아무리 화려하고 아름답게 보여도 주님께서 원하는 성전이 아닙니다.
2024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면 좋겠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내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조욱현 토마 신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성전이 장사치의 소굴이 아니라, 거룩한 집이기를 바라신다.
그분은 사제의 직무가 부정직한 종교적 의무 수행이 아니라,
자발적인 순명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신다.
주님께서는 성전에서 세속적인 교환행위가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신다.
즉 돈 바꾸는 환전상들을 성전에서 쫓아내기까지 하셨다.
주님의 돈으로 이익을 챙기려 하는 자는 바로 환전상이다.
그 주님의 돈은 성경이다. 성경을 가지고 자기 이익을 챙긴다고 한다면,
그는 성경을 파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들은 모두 환전상들이지 참 목자가 아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성경을 가지고 현세의 이익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이제 없어지고, 우리 신앙인들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행실,
흠 없는 삶의 영광, 영광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향기로운 예배가 빛을 내야 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성전 정화이다.
주님께서는 성전의 주인으로서 당신의 권한을 행사하신 것이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비롯하여 유대인 지도자들 모두의 죄가 더욱 크다.
배우지 못한 백성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고,
그 구원의 말씀을 단비처럼 받아 마셨다.
그들의 마음은 열매를 맺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분의 가르침에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지도하는 자들은 주님을 거역하고 살인을 계획하고 있다.
그들은 모퉁이 돌에 걸려 넘어지고 말 것이다.
주님의 집은 하느님과 우리의 형제들을 만나는 장소이다.
이 만남은 사랑의 만남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 하느님의 집이 어느 개인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장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오늘 복음에서 보여 주고 있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몸도 성령의 궁전이라고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셨다.
이 궁전을 인간적인 욕심으로 채우려고 한다면 하느님의 성전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언제나 주님을 모실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그래서 세상을 비출 수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너희가 곧 성전이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
聖都 예루살렘의 불행과 멸망을 예고하신 예수님의 마음은 편치 않으셨다.
그래서 그분은 눈물과 한탄으로 그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러나 눈물이 그분의 발목을 잡을 수는 없는 일,
올리브 산을 내려오신 예수께서는 곧바로 성전으로 가셔서
갖은 商魂으로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신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은 4복음서 모두가 보도하고 있다.
(마태 21,12-17; 마르 11,15-19; 요한 2,13-17)
익히 알고 있는바, 요한복음은 성전 정화 사건을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 시점에 두었고,
공관복음은 공생활 종료 시점에 두고 있다.
그런데 루카는 원전이 될 마르코 복음을 대폭 축소하였고,
정화의 시점도 예루살렘 입성 다음 날인 것(마르 11,12)을 입성 당일로 보도하고 있다.
오늘 복음에 나타나 있듯이 루카는
예수님의 성전정화 사건을 原典에 비해 대폭 축소하여 보도하면서,
마르코와 마태오 복음서에 없는 ‘성전 안에서는 가르침’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도 ‘날마다 가르치셨다.’(46a절)고 한다.
루카복음이 보도하는 예수님의 성전정화 사건과
성전 안에서의 활동 사건을 함께 묶어 생각해 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 예수께서는 참으로 먼 길을 오셨다.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사마리아를 옆으로 둘러, 데카폴리스. 베레아, 유다지방을 거쳐
예루살렘에 도착한 장도의 목적은 우선 예루살렘 성전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당일, 곧바로 상인들이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린
성전을 정화하신 이유는 성전이 예수님의 집이기 때문이다.(루카 2,49)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통틀어 하나밖에 없는 성전,
바로 그 집에 예수께서 드디어 도착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
이사야 예언자도 “나의 집은 뭇 백성이 모여 기도하는 집이라 불리리라.”(56,7)고 했다.
더럽혀진 성전이 상인들을 쫓아내는 것만으로 다시 聖化 되는 것은 아니다.
성화는 기도로 이루어진다.
예수님의 현존과 말씀을 통하여 성전은 자신의 잃어버린 거룩함을 다시 찾는 것이다.
이는 적어도 예수께서 계시는 동안은 가능하다.
그런 다음에는 예수님 스스로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신약의 새로운 성전이요 하느님의 집이 되실 것이다.
성전은 웅장한 벽돌과 아름다운 치장으로만 하느님의 집이 되지는 못한다.
하느님께 드리기 위해 제단에 바쳐진 값나가는 제물이
성전을 하느님의 집이 되게 하는 것도 아니다.
작금에 수십억의 돈을 들여야 땅을 마련하고 그 위에 하나의 성전이 지어지는 것을 본다.
자신은 다 쓰러져가는 판자촌에 살면서도 웅장한 성전 건립을 위해 기금을 내고 약정을 한다.
성당이 분가되어 겨울에 떨고 여름에 찌는 비닐 하우스나 군대막사 같은
가건물을 마련하더라도 신자들이 모이면 그곳은 성전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현존을 체험하려 모여든 공동체가
곧 하느님의 집이며, 성전이기 때문이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1코린 3,17)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가 모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봉헌할 수 있도록 지어진 성전은
우리 공동체가 거룩해질 때 함께 거룩해지는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19,46)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린 인간 의식의 정화이며
참된 성전인 몸과 마음의 정화를 위한 촉구이자 초대입니다.
오늘 복음 성전 정화를 들으면서, 공자와 안회의 「심재」에 관한 논의가 먼저 떠오릅니다.
어느 날 공자의 수제자인 안회가 공자에게 감히 마음의 재계를 물었습니다.(敢問心齎)
그러자 공자께서는 심재를 묻는 안회에게 생뚱맞게도 심재의 반대쪽인 좌치坐馳를 언급합니다.
어쩌면 역설적으로 공자는 좌치를 알고 깨우치면
심재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는 의도로 말씀하신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곧 마음의 재계란,
『날개 달고 날았다는 말은 들었어도,
날개 없이 날았다는 말은 듣지 못했을 걸세.
지식으로 사물 이치를 안다는 말은 들었어도
무지로 모든 것을 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겠지.
저 텅 빈 것을 보게나, 휑하니 빈 방이지만 환하게 밝지 않는가.
좋은 것은 빈 마음에 모인다네.
그쳐야 할 곳에 그치지 않으면,
이를 몸은 앉아 있어도 마음은 달린다, 라고 이름하지.(是之謂坐馳)』(장자. 인간세)
좌치란 몸은 그대로 있으나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이익이나 명예, 불필요한 관심, 감당하기 어려운 일로 인하여 생기는데,
이 때문에 본래 마음의 상태가 어지러워지게 되며
결국엔 본성(=장자가 말하는 심재)까지 침해되어 혼란스럽게 된다는 것으로
장자는 이를 매우 경계한 것입니다.
따라서 좌치의 상황은 욕망에 미혹하여 당연히 유지되어야 할 본성을 침해하게 되고
마침내 그 본성조차 잃어버리게 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심재란 좌치’에서 회복을 의미하듯, ‘강도들의 소굴’에서 정화가
‘하느님의 기도하는 집’으로 회복인 이치와 같다고 느껴집니다.
예수님의 최우선적인 관심사는 곧 아빠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며,
자기 말과 행동을 통해 여기 우리 가운데 아빠 하느님이 계시며,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아버지의 구원의 표지이시다, 라는 점을
환기하시고 되돌리시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당연히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맨 먼저 찾아가신 곳은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12살 때, 자신을 찾아 사흘 길을 헤매신 부모님께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2,49)라고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바로 성전이었고,
“아버지의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요2,17)라는
표현에서도 드러나고 있지만, 성전을 다시 찾기 이전부터
예수님은 아버지에 대한 관심과 열정으로 불타올랐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런 예수님이셨기에,
“성전에 들어가시어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린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쫒아내기 시작하시며,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19,46)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돌발적인 반응이나 행동이 아니라
늘 예수님의 마음속에 아버지의 집에 대한 열정에서
성전이 성전으로 회복을 위해 때를 기다렸던 겁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정화하신 성전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성전이나 성지라는 곳이
본래의 역할과 기능을 다하고 있다, 고 말할 수 있는지 감히 묻습니다.
성지순례를 가 보신 분들이라면 공감하시겠지만, 거의 모든 성지와 모든 곳의 성전이
상업화되고 세속화되어 버린 것은 아닌가, 싶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러기에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성전 정화의 본질을 담고 있습니다.
본래 회복! 근본으로 돌아감!
본래本來라는 말은 처음부터, 원래, 근본 등의 의미로서
천성적이고 자연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성전의 본래 기능과 역할을 온전히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참된 성전 정화의 의도일 것입니다.
타락하고 부패한 성전을 바라보시며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 곧 나의 집이라 말씀하신 것은
지금까지 사람들은 성전하면 하느님의 집이었다고 생각했었는지 모르지만,
이제 자신의 강생과 현존을 통해서
사람들은 이제 성전은 바로 당신의 몸을 두고 말하는 것임을
알게 될 날이 올 것임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2,21)
이로써 자신이 있는 곳에 아버지께서 함께 계시고,
아버지 계신 곳에 당신 또한 함께 있다, 는 말씀을 통해
아버지의 집은 이제 당신의 집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전이, 본래 성전의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때 끊임없이 정화를 반복해야 하며,
이는 우리의 과업이며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전 정화는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 본을 보여 주시고 솔선수범하신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19,47)
지금도 예수님은 강도의 소굴이 아닌 기도의 집이 되도록 날마다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이를 본받아 교회는 스스로 자정과 함께 늘 마음의 재계를 위한 반동으로
좌치에서 벗어나 본래의 역할과 기능을 잃지 않도록 삼가 조심하고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성전의 웅장함과 화려함을 즐겨 하시는 아빠 하느님과 예수님이 아니시며
오히려 성전의 본래 몫을 다하지 못함을 마음 아파하시며
안타까워하심을 잊지 않고 마음에 새겨 간직해야 합니다.
성전의 정화, 본래 회복을 부단히 노력할 때,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3,16.17)
“주님, 당신께서 말씀하신 ‘성전을 허물라’는 말씀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날마다 성전을 정화하면 살아갈 수 있도록 저희 육신의 감실에 머물러 주십시오. 아멘,”
(** 성녀 체칠리아 축일 맞는 분들, 모두 축하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