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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3일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제1독서 : 묵시 11,4-12
복 음 : 루카 20,27-40
그때에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28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9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30 그래서 둘째가, 31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32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33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35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36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37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38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39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 하였다.
40 사람들은 감히 그분께 더 이상 묻지 못하였다.
<오늘의 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제1독서에서는 두 증인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이 두 증인은 바로 모세와 엘리야를 가리킵니다.
“예언하는 동안 비가 내리지 않게 하늘을 닫는 권한”(묵시 11,6)은
아합 임금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삼 년 동안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않게 한 엘리야를 떠올리게 하고(1열왕 17,1 참조)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원할 때마다 온갖 재앙으로 이 땅을 치는 권한”(묵시 11,6)을 가진 예언자는
이집트에 열 가지 재앙을 일으킨 모세를 떠올리게 합니다.(탈출 7,14-12,13 참조)
이 두 예언자는 주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며 자신의 사명을 다하였지만,
사명을 마친 뒤 지하의 짐승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도성 한길 가에 내버려집니다.
사흘 반 동안 무덤에 묻히지도 못합니다.
마치 악이 승리한 듯 보이고, 이 예언자들은 조롱거리가 됩니다.
불의한 자들은 예언자들의 죽음에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예언자들을 일으키시고
하늘로 불러올리시어, 그들의 승리를 선언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부활은 공정과 정의를 실현하실 하느님에 대한 희망입니다.
부활은 우리 삶의 마지막에 결국 선이 승리하고 악이 심판받으며
모든 것이, 질서 잡힐 것이라는 희망입니다.
의인이 고통받고 악인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을 해결하실 분은 하느님뿐이십니다.
부활이 없다면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노력은 아무 쓸모가 없을지 모릅니다.
하느님께서 계심과 그분께서 이루실 하느님 나라는 지금의 우리의 노력을 의미 있게 합니다.
부활에 대한 전망은 이 세상에서 정의를 위한 작은 노력이,
비록 큰 열매를 맺지 못하더라도, 완성으로 나아가는 밑거름이라는 것을 보증해 줍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AI를 인간의 새로운 지배자라고도 부릅니다.
어디에 살든 불가해한 알고리즘으로 짜인 거미줄 속에 갇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알고리즘들이 우리의 삶을 관리하고, 우리의 정치와 문화를 재편하며,
심지어 우리의 몸과 마음까지 재설계하면서 힘을 잃게 만듭니다.
이 말을 이해하기 힘들다면, 유튜브를 생각하면 됩니다.
만약 스포츠 관련 영상을 찾다 보면 계속 첫 화면에 스포츠 영상만 나옵니다.
‘보수’ 정치 관련 영상만을 찾으면, ‘진보’ 정치 관련 영상은 전혀 볼 수 없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스포츠만 좋아하고, 보수 정치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이 과정 안에서 스포츠 싫어하는 사람과 충돌을 일으키고,
진보 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과 다투게 됩니다.
이렇게 AI가 우리의 생각을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본 것이 진실이라 생각하지만, 현실을 온전히 담아낸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AI에 의지해서 사는 삶이 아닌 진실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AI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자기가 보고 들은 것만이 진실이라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족한 자기의 머리에서 나오는 생각으로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다양한 방법으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일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 뜻에 맞게, 또 하느님과 함께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몇 사람의 질문이 이어집니다.
질문은 이 세상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어른이 되면, 짝을 만나 혼인을 하는데, 이 복잡한 인연의 고리가
저세상에서 어떻게 정리될 수 있는지를 예수님께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복잡한 인연의 고리는 정리될 수 없기에,
예수님이나 바리사이들이 말하는 부활은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관점으로 하느님을 이해하려고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가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고 하시지요.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십니다.
결국 그 나라는 온전한 기쁨만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단순히 이 세상의 연장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하느님을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기준만을 따르다 보면 하느님을 제대로 알 수 없고,
존재하지 않는 하느님을 만들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뜻인 사랑에 중심을 맞췄을 때,
우리와 늘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제대로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우리는 ‘사두가이들의 부활에 관한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을 통해서,
우리의 부활신앙을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사두가이들의 영적 무지와 예수님의 신적 지혜가 대조를 이룹니다.
곧 영적무지로 인한 속박을, 신적 지혜로 인한 자유와 해방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속박과 자유가 ‘믿음’에 달려 있음을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의 병행 구절인 <마태오복음>에서,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두가이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부활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마태 22,39-40)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들의 영적 무지를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곧 ‘성경에 대한 무지’와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면서 물질만을 유일한 실체로 여긴 까닭에,
내세나 부활과 영적 존재에 대해서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합리적 사고와 이성적 판단 아래 하느님의 권위와 능력을 제한했습니다.
곧 부활케 하시는 하느님의 초월적인 권능을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25장 5-10절에 나오는 ‘수혼법’을 예로 들면서,
합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하여,
하느님의 부활의 능력을 마치 죽은 사람을 원래대로
죽기 전의 생활로 되돌려놓는 정도로 여깁니다.
그래서 부활한 상태의 초월적인 실재인 부활체를
마치 육체를 지닌 존재로 보고서 지상에서의 삶과 동일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영적 존재는
“마치 천사와 같아 시집가는 일도 장가 가는 일도 없고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고 하시면서,
그들이 믿고 있는 <모세오경>의 <탈출기>(3,6)를 인용하여 그들의 영적 무지를 깨우치십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주었다.”(루카 20,37)
이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 비록 죽어 과거의 인물이 되었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살아 있는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루카 20,38)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산 이들의 하느님’으로서,
인간을 ‘새롭게 변화된’ 부활체로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이러한 새롭게 변화된 부활체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인들에게 이렇게 설명해줍니다.
“우리 모두 다 죽지 않고 변화할 것입니다.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1코린 15,51-52)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는 이들입니다.
진정 믿으면, 신적 지혜가 열릴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와 해방이 올 것입니다.
불신은 우리를 끝없이 속박할 뿐이지만, 믿음은 우리를 진리에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곧 믿음이 해방을 가져올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루카 20,38)
주님!
저희를 깨우쳐주소서.
죽음이 단절과 파괴가 아니라 충만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임을!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충만함 속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탄생임을!
생명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이 피어나게 함을!
단지 되살아 난 것만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 안에서
다시는 죽지 않을 새로운 존재로 변화됨을! 아멘.
언제나 생명을 주시는 분
반영억 라파엘 신부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미래를 더 소중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약속해 주신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과거에 묶여 삽니다. 미래가 없는 것처럼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미래에 잘못 집착해서 오늘을 인색하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과거를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미래를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면서 오늘을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약속된 미래가 오늘을 통해서 오기 때문에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오늘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약속된 미래는 여기서부터 완성됩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미래가 없이 오늘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현실에 밝아 자기 잇속을 챙겼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되었습니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1코린2,9)하며
약속된 부활의 삶을 확인시켜 줍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몸소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도 새 생명에 대한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따라서 부활에 대한 희망 안에 있는 사람은
지금 여기서부터 부활의 생명을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활을 믿는 이는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닥치더라도 견디어 냅니다.
그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분의 약속을 믿기에
현세적인 것보다도 영적인 것에 더 마음을 씁니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현세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약속된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희망하십시오. 그리고 씨를 뿌리십시오.
눈물로 씨 뿌리면 곡식 단 들고 올 제 춤추며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것에 마음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고 약속에 충실하신 하느님으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그분께서 명령하시면 뜻하시는 바가 모두 이루어지고
아무도 그분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막지 못한다”(집회39,18).고 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그 약속을 믿고 사는 이에게 언제나 살아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산 사람들의 하느님이라는 말은
결국 깨어 있는 이에게 능력의 하느님으로 다가오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 의지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다만 우리의 마음이 흔들비쭉일 뿐입니다.
이 시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으로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게 되길 기도합니다.
또한, 하느님을 모시듯
하느님의 피조물들을 존중하고 배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본향은 하늘이고, 지금, 이 세상 삶은 소풍입니다.
소풍 끝나는 날 하느님을 대면할 것입니다.
사랑으로 산 삶이 기억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같은 내용이지만 이름에 따라서 의미가 무척 다르게 다가옵니다.
같은 사람인데 ‘개똥이’라고 부르면 왠지 가볍게 느껴집니다. 흔하게 느껴집니다.
같은 사람인데 ‘우주’라고 부르면 왠지 귀하게 느껴집니다. 크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예전에 어른들은 아이의 이름을 정할 때 신중하였습니다.
기업에서도 제품의 이름을 정할 때 막대한 비용을 기꺼이 지출합니다.
그만큼 이름이 매출에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도요타는 성능과 품질에 비해서 저렴하게 취급받았습니다.
도요타는 자동차의 브랜드를 아예 ‘렉서스’로 바꾸었습니다.
같은 도요타의 자동차이지만 렉서스는 미국에서 성능과 품질은 물론
가격에서도 충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이름을 바꾸었을 뿐인데 인식이 바뀐 겁니다.
미국에서 현대도 성능과 품질에 비해서 저렴하게 취급받았습니다.
현대는 자동차의 브랜드를 아예 ‘제네시스’로 바꾸었습니다.
같은 현대의 자동차이지만 제네시스는 미국에서 성능과 품질은 물론
가격에서도 충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이름을 바꾸었을 뿐인데 인식이 바뀐 겁니다.
본당 설정 50주년을 준비하면서 ‘건축위원회’가 발족했습니다.
다양한 의견이 나왔습니다.
‘사제관과 수녀원 건축, 체육관 건축, 교리실 확장,
축구장 설치, 납골당 건축’과 같은 의견이 제시되었습니다.
건축위원회는 ‘왜’라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50주년을 맞이해서 필요한 시설을 만드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왜’ 시설을 만드느냐였습니다.
건축위원회는 두 가지를 제시하였습니다.
하나는 찾아오고 싶은 성당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40년을 광야에서 지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향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땅은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땅이었습니다.
50주년을 맞이해서 만들어지는 시설은
교우들이 언제나 다시 찾고 싶은 성당이 되게 하자는 의미를 담자고 하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후손들에게 물려 줄 수 있는 성당입니다.
타주로 이사를 갔어도, 한국으로 갔어도
다시 올 수 있는 성당이 되게 하자는 의미를 담자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가는 이유는
그곳에 예수님의 발자취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십자가를 지셨고,
그곳에 예수님의 무덤이 있고,
그곳에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취지에서 ‘납골당’에 대한 의견이 있었습니다.
저는 납골당이라는 이름 대신에 ‘추모관’이라고 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납골당이라고 하면 뼈를 모아 놓은 곳처럼 느껴집니다.
추모관이라고 하면 기억이 담겨 있는 곳처럼 느껴집니다.
저를 지탱하는 건 61년 동안 살아온 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를 지탱하는 건 몸이라는 육체와 더불어 61년간의 기억입니다.
기억은 가족과의 관계, 친구와의 관계,
사랑하는 이와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연결해 줍니다.
기억은 절망 중에도 희망을 줍니다.
기억은 두려움 속에서도 담대함을 줍니다.
기억은 슬픔 속에서도 위로를 줍니다.
기억은 어쩌면 존재의 근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의 기록과 나의 작업이 삭제된 컴퓨터는 그냥 컴퓨터이지 나의 컴퓨터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식사를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해서 내어 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성체성사는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기억입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오늘 독서는 구약의 두 인물을 기억해 냅니다.
율법의 상징인 모세와 예언의 상징인 엘리야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율법과 예언으로 시작되었지만,
우리의 신앙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된다고 이야기합니다.
‘부활’은 상태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부활의 상태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저는 부활의 상태도 중요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억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한다면
바로 지금이 부활의 때입니다.
부활의 진정한 의미는 절망에서 희망으로,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다시 일어서는 겁니다.’
천국에서는 장가드는 일이 없다.
조욱현 토마 신부
사두가이란 보상을 바라고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여,
의로운 자라는 뜻으로 불린 명칭이다.
그들은 부활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것도 하나의 보상 심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두가이들이 한 여인이 일곱 남편을 맞게 되는 경우를 들어 예수께 질문한다.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33절).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35절)
어째서 그럴까? 그들은 두 번 다시 죽지 않는다. 그들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주님께서는 다가오는 세상의 새로운 상황을 알려주신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새로운 모습이란,
부활 자체가 결혼의 목적성을 상실해 더는 자손을 낳을 필요가 없다.
부활 때에는 사람들이 천사들과 같아지기 때문에(36절) 죽는 일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36절).
이것은 우리가 부활하게 되어 있고, 그 부활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에 연결되고 있다.
즉 부활로서 완전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자녀이다.
지금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분의 생명에 결합하여 있으므로
장차 부활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루카는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35절)에 대해서 말했다.
모든 일상의 삶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부활로 가는
진실한 하느님의 자녀임을 체험을 할 수 있는 장이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체험하기 시작한 사람만이
마지막 부활을 믿을 수 있고 또 갈망할 수 있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37절)이라 한 것은
모세는 그 순간에 이미 수백 년 전에 죽은 그 선조들과 생명의 관계에 있고,
신비스러운 친교를 통해 계속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부활은 단순히 육체적인 사실로서가 아니라,
이미 하느님과 우리를 만나게 하는 그분과의 일치된 생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38절).
그리스도인은 현재 이 순간부터 그분과 사랑의 일치 속에 살아가야 하며,
그분과의 사랑의 일치 속에 사는 것이 참으로 살아 있는 사람의 모습이며,
이 살아 있는 인간의 모습이 하느님의 영광이라고 하였다.
항상 살아 있으면서 구원받은 사람의 삶을
이 땅에서부터 살아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더 이상 죽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가이들과의 논쟁에서
부활 이후의 삶에 대한 희망과 위로로 가득 찬 말씀을 우리에게 건네고 계십니다.
언젠가 우리의 수명이 다하는 날, 우리네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는 날,
은혜롭고도 영광스럽게 주님 부활에 참여하게 될 사람들은 천사들과 같아진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게 된답니다.
육신의 허물을 벗은 우리,
모두는 더 이상 혈육에 연연하지 않는 주님의 자녀가 된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하고 은혜로운 일인지요.
위령 성월의 한 가운데를 지나면서 자주 죽음에 대해 묵상하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죽음에 대한 생각과 의식은 철저하게도 차별화됩니다.
주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 죽음은 거부하고 도망치다
어쩔 수 없이 맞이하게 되는 공포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죽음이 다가오면 온몸이 경직되고 살이 떨리며 두려움에 사지를 떨게 됩니다.
끝이요 멸망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죽음은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죽음의 순간은 그토록 간절히 고대해 왔던 하느님을 직접 대면하는 순간이고,
그분과 함께 영원한 생명의 삶으로 들어가는 순간입니다.
다시금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순간이니 기쁨의 순간이요 축제의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로지 당신께만 희망을 걸고 살아왔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천사들과 같아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천사들은 어떤 존재입니까?
천상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결국 우리는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 주님께로 나아가고 나면
천사의 모습으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 곁에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찬미하며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존재로 재창조될 것입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말씀이지만,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더 이상 죽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에서 그분 자비의 품 안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20,38)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건만,
왜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려고 할까요?
인간의 생사生死는, 곧 삶도 죽음도 다 하느님의 생명입니다.
사실 온전히 사는 사람에게는 삶도 죽음도 다 하느님의 생명임을 깨닫게 됩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하느님 생명으로 넘어가는 과정입니다.
죽음으로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생명의 다른 삶으로 건너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삶도 죽음도 다 하느님의 생명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라고 선포하는 과정에서 그 근거가 되는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은 물론 모든 인류에게 커다란 희망의 근거이며,
모든 인류가 생명이신 하느님 앞에 살아야 하는 존재 이유와도 같습니다.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끊임없이 인류의 역사 가운데서 함께 숨 쉬고 함께 살아계시는 분이십니다.
죽음도 삶도 다 하느님의 생명이기에, 우리 눈에 죽은 이들 또한
하느님의 생명의 다른 쪽에서 되살아나서 참된 생명을 누리고 있다는 겁니다.
인류 역사, 아니 한반도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으로 말미암아 죽어갔던 영혼들,
특별히 최근세의 희생된 영혼들이 역사의 하느님 안에서 되살아난다고
저는 오늘 복음을 들으면서 희망하게 됩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희망입니까?
저는 다음의 고백이 정말 좋습니다.
‘하느님의 생명 안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습니다.’
그가 이 땅에 살아 있든, 아니면 우리가 믿고 바라는 그곳에 살아 있든
하느님의 생명 안에 살아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로부터 지금의 저희까지 이어져 오는 믿음은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라는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저희에게 이 점을 확실하게 선언하십니다.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시다.”(20,37/ 출애 3,6참조)하고
밝혀 주셨다는 점입니다. 하느님은 산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 앞에, 하느님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습니다.
죽은 사람조차도 살아 있는 겁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하느님을 돌아설 수는 있어도 하느님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죽든지 살든지 우리는 하느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영원히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신자들은 이런 믿음을 바탕으로 죽은 이들에 관해
요한복음 2장의 가나 혼인 잔치를 상징하는 물 항아리를 조각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곧 죽음이 끝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의 잔치에 초대받는 것으로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곧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는 사실을 확증해 주었습니다.
사도 바오로처럼 우리 역시도 같은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겪으신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필3,10~11)
우리 모두 지금 여기 이렇게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면서,
참으로 하느님 앞에서 온전히 살아 있는 사람답게
기쁘게 행복하게 살아가는 오늘이 되도록 깨어 살아갑시다.
“주님, 언제가 저희 모두 당신께서 호출하시는 날에
당신이 마련하신 집으로 되돌아갈 겁니다.
당신 집에 되돌아가기 전에 저희가 누구이며, 저희가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아름답게 거룩하게 사는 것인가를 깨어 의식하며 살게 하여 주시고,
지금 주어진 이 시간에 충실히 살아갈 수 있도록 은총을 주십시오.
그리하여 마침내 당신 집에 도달하여
기쁨으로 당신께 새로운 노래를 불러 드릴 수 있도록
지금 생명의 찬가를 여기에서부터 부르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부활신앙, 부활희망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 삶의 시작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 옛 어른의 지혜도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떳떳함은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고자 매사를 삼가는 간절함에서 나온다."<다산>
"그대가 방에 홀로 있을 때, 방구석에서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보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지 마라."(시경)
주님 앞에서 늘 깨어 살라는 말씀입니다.
더불어 요즘 저를 계속 행복하게 하는,
만추의 불암산을 바라보며 애송하는 짧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늘
앞에 있는 산
늘
앞에 있는 당신
이
행복에 삽니다"<2024.10.25>
11월 위령 성월, 얼마 전 만추의 아름다운 단풍잎들 가득 덮인
수도원 뜨락의 황홀한 풍경을 보며 시화詩畫를 만들었고,
많은 분들과 “죽음도 축제일 수 있겠다”란 시를 나눴습니다.
“별들이 땅을 덮었다
땅이 하늘이 되었다
단풍나뭇잎들
하늘 향한 사모의 정 깊어져
빨갛게 타오르다가
마침내 별들이 되어
온 땅을 덮었다
땅이 하늘이 되었다
오!
땅의 영광
황홀한 기쁨
죽음도 축제일 수 있겠다”<2024.11.20.>
또 11월 위령 성월에 자주 불러보는
11월1일 모든 성인의 대축일 저녁 성무일도 시 마리아의 노래 후렴도 생각 납니다.
“성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하는 그 나라가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흰옷을 입고 어린양을 따라가는도다.”
부활신앙이, 부활희망이 우리를 살게 하는 궁극의 힘입니다.
죽음이 결코 끝이 아니라 새 삶의 시작이라는 고백입니다.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는 죽음입니다.
위령성월 11월 곳곳에서 죽음 소식도 계속 들려옵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사부 성 베네딕도 말씀도 자주 생각이 납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의 새 생명을 이야기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부활 희망의 기쁨 보다는 두려움과 불안중에 죽음을 맞이합니다.
죽음을 체험할 수도 없거니와 죽어서 살아온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새삼 부활의 희망과 기쁨 중에 선종의 죽음을 맞이한다면
남은 이웃에 이보다 더 좋은 선물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논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두가이들은 부활을 믿지 않으나 예수님과 바리사이들은 부활을 믿습니다.
부활이 아니라 죽음이 끝임을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은
예수님께 어려운 문제를 제시하며 답을 요구합니다.
일곱 형제가 한 여자를 아내로 삼아 살다가 모두 후사를 남기지 않고 죽었다
부활한 후 이 여자는 일곱 형제 중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거의 있을 수 없는 가상적 질문을 합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그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니
순전히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이 답임을 분명히 천명하십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이미 현세에서 세례성사로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살아나
파스카의 부활의 삶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이미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의 천상의 삶을 미리 앞당겨 살고 있는 셈이 됩니다.
주님은 탈출기 3장 6절을 인용하여 사두가이들에게 부활의 타당성을 확인시켜 줍니다.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가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사람 눈에 죽음이지 하느님께는 모두가 살아있다는 것이니 바로 부활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제1독서 묵시록의 순교자들을 상징하는 두 증인도 부활로 이어집니다.
“이리 올라오너라.”하고 외치자, 그들은 원수들이 쳐다보고 있는 중에 구름을 타고 올라갔으니
죽음이 끝이 아닌 부활의 새생명이 시작됐음을 보여줍니다.
교회는 미사경문을 통해 부활을 명백히 고백합니다.
“부활의 희망 속에 고이 잠든 교우들과 세상을 떠난 다른 이들도 모두 생각하시어
그들이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뵈옵게 하소서.”<감사기도 2양식>
“성자께서 죽은 이들의 육신을 다시 일으키실 때에
저희의 비천한 몸도 성자의 빛나는 몸을 닮게 하소서.
세상을 떠난 교우들과 주님의 뜻대로 살다가 떠난 이들을
모두 주님의 나라에 받아들이시며
저희도 거기서 주님의 영광을 영원히 누리게 하소서.
저희 눈에서 눈물을 다 씻어 주실 그 때에 하느님을 바로 뵈오며
주님을 닮고 끝없이 주님을 찬미하리이다.”<감사기도 3양식중 위령미사시>
미사 중 위령감사송1양식중 다음 대목도 은혜롭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이 우리에게 부활 신앙을, 부활희망을 선사하며
우리를 위로하고 치유하며 이미 지상에서 천상의 부활을 앞당겨 영원한 삶을 살게 합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도 천상 탄일의 축제일 수 있겠습니다.
여러 번 나눴습니다만,
저는 그래서 장차 있을 저의 장례미사 축제 중 입당성가는 “오 아름다워라”(성가402장)로,
퇴장성가는 성 프란치스코의 “오 감미로워라”를 내심 생각하며 부탁할 마음입니다.
강론 대신에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제 좌우명 자작 고백기도 시를 읽어달라 부탁하려 합니다.
이 또한 좋은 죽음 준비라 믿습니다.
날마다 이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고해 인생을 축제 인생으로 만들어 주며
이미 지상에서 천상의 부활의 삶을 앞당겨 살게 하십니다.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주셨네.”(2티모1,10).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