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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4일 주일(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 주간>)
제1독서 : 다니 7,13-14
제2독서 : 묵시 1,5ㄱㄷ-8
복 음 : 요한 18,33ㄴ-37
그때에 빌라도가 예수님께 33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하고 물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네 생각으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하여 너에게 말해 준 것이냐?” 하고 되물으셨다.
35 “나야 유다인이 아니잖소?
당신의 동족과 수석 사제들이 당신을 나에게 넘긴 것이오.
당신은 무슨 일을 저질렀소?” 하고 빌라도가 다시 물었다.
36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37 빌라도가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오늘의 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같은 단어를 써도 사람마다 다른 뜻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잘 살아야겠다.”라고 말할 때,
어떤 이는 이를 신앙적으로 윤리적으로 올바르게 사는 것으로 이해하고,
어떤 이는 물질적으로 풍족하게 사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사랑’이라는 말도 그렇습니다.
누구는 남녀 간의 사랑을 생각하고, 어떤 이는 친구 사이의 우정을 떠올리고,
또 다른 어떤 이는 보편적 인류애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 부여되는 ‘왕’이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이들은 ‘왕’이라는 말에서 최고 권력자, 군림하고 억압하는 자를 떠올리며,
이를 그리스도께 붙이거나 그리스도인의 왕직을 말할 때는 거북하고 불편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당신 스스로 왕이라고 하실 때는
오히려 반대로 사랑과 봉사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르 10, 43)라고 하셨듯이
하느님 나라의 왕은 가장 낮은 곳에서 사람들을 섬기는 이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왕의 권위는 사랑에서 나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큰 사랑을 가진 이인데,
사랑이 가장 큰 사람은 다른 누구보다 낮은 사람입니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늘 더 작아지고, 더 낮아지며, 더 내준다는 것을 압니다.
그 누구보다 사랑이 크신 주님께서는
우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이로 낮은 곳에 오셔서 당신을 내주신 분이십니다.
왕직을 실행한다는 것은 권력을 가지고 군림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하고 봉사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수행해야 할 왕직은 그런 사랑의 봉사직입니다.
더 작고 낮은 이가 되어 더 많이 자신을 내주는 사랑의 봉사직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느 형제님으로부터 텔레비전에 자주 나오는 정치인에 대한 분노로
“때려죽이고 싶어요.”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정치인 때문에 지금 나라가 엉망진창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도 그런 마음이 들었냐고 물으니 그렇지 않은 것 같다고 하십니다.
또 그 사람을 지지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은데,
그 사람들도 모두 죽여야 하냐고 물으니 역시 그렇지 않다고 답하십니다.
생각해 보니 자기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한 것도 아닌데,
왜 이런 마음이 생겼는지 모르겠다며 머쓱한 표정을 지으십니다.
누군가 분노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분노는 숙주의 목숨을 앗아가는 기생충이다.’
분노를 갖게 되면 불행하게 됩니다.
분노를 벗어던지지 않으면 처음 가졌던 분노가 점점 몸짓을 키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대로 생활하지 못하게 하면서 분노에만 집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분노라는 감정을 계속 쌓아두어서, 이 감정에 잡아먹혀 불행하게 됩니다.
따라서 분노라는 감정을 벗어던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분노 등의 부정적 감정은 어디에 집중할 때 흐려지거나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 묵상 등의 신앙생활로 성찰하면서 주님께 집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동시에 땀을 흘리는 운동을 하거나, 또 악기 연주에 집중하는 것도 좋다고 합니다.
하지만 시선을 바꾸지 않고 계속 분노에만 머물게 되면 분명 불행해집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 서게 됩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스스로 ‘유다인들의 임금’이라 했다면서 고발한 것입니다.
‘유다인들의 임금’이란 말은 상당히 역사적인 뜻을 지니고 있는 호칭입니다.
기원전 168년에 마카베오 일가가 시리아의 통치에서
조국을 해방시키는 전쟁을 일으켜 승리함으로써
‘유다인들의 임금’, ‘유다인들의 해방자’라는 명칭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예수님은 로마의 적대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나라는 이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에 군중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했을 때 그 자리를 피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고발합니다. 분노의 감정 때문입니다.
자기들과 함께하지 않으며, 자기들이 강조하는 율법을
사랑이라는 이유로 지키지 않는 모습에 분노한 것입니다. 그 분노가 하느님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도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온갖 부정적인 생각에만, 또 자기만 옳다는 이기심이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우리는 지난 일 년을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왔습니다.
그리고 이 길은 오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넘어 영원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오늘은 전례력으로 마지막 주일입니다.
교회는 이날을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이 주간을 성서주간으로 지냅니다.
오늘의 이 축일은 일 년의 전례를 종합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전 삶을 종합하고 있습니다.
곧 전 구원사를 장엄하게 압축하고 있습니다.
<제1 독서>는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사람의 아들에 대한 환시입니다.
이 환시에서는 영원한 왕의 다스림 속에서
하느님의 창조계획과 구원계획이 완성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곧 천지창조 이래 펼쳐진 구원의 모든 사건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고백합니다.
곧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그 나라가 주어지고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다니 7,14)고 선언됩니다.
이는 그리스도께 부여한 왕이라는 의미가
한 시대나 한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권자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 우주의 전권을 지니신 하느님의 권능과 천상적 신비를 드러냅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우주론적인 선상에서,
그리고 전 역사를 함축한 종말론적인 입장에서 왕으로 선포됩니다.
<제2 독서>는 요한이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쓴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이 편지에는 그리스도가 왕이라는 것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곧 왕이신 그리스도를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분”,
“성실한 증인이시고 죽은 이들의 맏이이시며 세상 임금들의 지배자”,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피로 우리를 죄에서 풀어주신 분”,
“우리가 당신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신 분”,
“구름을 타고 오시는 분”, “알파요 오메가이신 분”이라고 선언합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하느님이시며, 창조주요 동시에 완성자이시오,
우주의 통치자이시며, 우주공간을 넘어 시간의 왕이심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진정 예수님은 왕이신가? 대체 어떤 왕이신가?
예수님께서는 “랍비, 스승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요한 1,49)라는
나타나엘의 고백을 허용하셨지만,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 후에
군중이 왕으로 추대하려 했을 때는 자리를 피하셨고(요한 6,15),
예루살렘 입성 때는 왕으로 환호하는 것을 허용하셨지만(요한 12,13;루카 19,38),
“당신이 유다인의 왕이요.”(요한 18,33.37;마태 27,11;마르 15,2;루카 23,2)라는 질문에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다.”(요한 18,36)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왕국은 세상의 왕국과는 다르며,
왕이신 당신의 존재는 세상의 왕이라는 존재와는 다름을 선언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단지 예수님을 “왕”이라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왕직”의 신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곧 당신의 통치는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진리에 의한 것임을 말합니다.
그래서 당신께서는 왕으로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요한 18,37)
따라서 당신의 “왕직”은 세상의 왕들처럼 모든 이 위에 군림하는 힘을 행사하는 존재가 아니라,
진리를 증언하는 존재임을 말합니다.
곧 세상의 왕은 힘으로 세상을 자기 아래 복종시키려고 하지만,
“그리스도 왕”은 진리로 세상을 창조하고 다스리고 건설합니다.
세상의 왕은 다른 이들이 자기에게 충성할 것을 요구하고
자기를 위해 생명을 바치기를 바라지만,
“그리스도 왕”께서는 먼저 신뢰로 사람들을 섬기시고 자신을 내놓으셨습니다.
곧 “종”으로서 섬김을 통해 왕직을 수행하십니다. 당신 스스로를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마태 20,28))고 하시면서 말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당신 왕국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참다운 왕의 모습입니다. 진리를 증거하는 왕의 참모습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 그리스도 왕국의 시민들입니다.
나아가서, 섬김으로 진리에 헌신하는 ‘그리스도 왕직의 계승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이 나라는 우리가 이웃을 섬기고 자신을 내놓은 곳에 이미 와 있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진리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될 때, 진정 우리는 그리스도의 왕국의 백성이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왕이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18,36)
주님!
당신의 나라가 세상 안에 있되 세상에 속하지 않듯,
당신께서는 위에 계시되 군림하지 않으시듯,
제가 세상 안에 있되 세상이 아닌 당신께 속하게 하고
섬김으로 세상을 비추게 하소서.
당신의 다스림을 받은 당신 나라의 시민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온 누리의 임금, 사랑의 왕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사랑 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 하십니다.
우리를 위해 외아들을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과오가 아니라 우리의 죄,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려서 돌아가셨습니다. 나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에도 하느님의 사랑이 충만하길 소망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빌라도는 예수님께 “당신이 유다인의 임금이오?”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네 생각으로 말하는 것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이 얘기해준 것을 말하는 것이냐고 하시며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왕이셨지만 이 세상의 왕들처럼
화려한 모습으로 오지 않으셨고, 왕관을 쓰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마굿간을 벗 삼아 오셨고, 조롱섞인 가시관을 쓰셨으며
화려한 궁궐은 고사하고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던 분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8,20).
세상의 지도자들은 자기를 홍보하고 과시하기에 바쁘고
그것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그 자리를 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정치적인 권력 위에 훨씬 더 큰 권력이 있음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 권력은 인간적인 수단을 통해서 얻을 수 없습니다.
오로지 사랑을 통해서만이 권위를 지킬 수 있습니다.
“역사는 우리에게 무력과 권력남용에 토대를 둔 나라들이 깨지기 쉽고
언젠가는 무너진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당신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고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평화와 자유와 삶의 완성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 나라.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뿌리를 내리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평화를 얻게 되고 자유를 얻으며, 완성될 것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세상의 지도자들은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도 않는데도
자기가 최고의 지도자라고, 스스로 왕이라고 고집합니다. 그리고 권력을 행사하려 합니다.
그러나 참다운 왕의 모습은 권력이 아니라 권위로 인정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왕이라고 내세우지 않았어도 사람들이 이미 왕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고 한 소리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중심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논리나 세상의 ‘왕’의 논리를 따르지 않는 길을 알려 주시고,
의심과 두려움과 매일의 시련에 사로잡힌 존재에게 새로운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왕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고(요한1,14)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습니다.
당신을 낮추어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며
섬김의 본을 보여주시고(요한13,15) 겸손과 봉사의 왕이 되셨습니다.
섬기는 가운데 다스리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린 왕이십니다.
십자가에 죄목을 적은 명패를 보면 ‘유다인의 왕 나자렛 예수’라고 적었습니다.
예수님은 왕좌에 앉은 권력자가 아니라 그와 정반대인 ‘십자가에 매달린 왕’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도 손가락질 하지 않으시고 모든 이에게 두 팔을 벌리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13,34). 하시며
사랑의 새 계명을 주셨고,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면서도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카23,34)하고
기도하시며 용서의 왕이 되셨습니다.
온갖 모욕과 조롱을 당하시도록 자신을 내어 맡기심으로써
우리가 굴욕을 받더라도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위로를 받게 하셨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들딸처럼 느낄 수 있도록 스스로 종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왕,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왕, 온 누리의 임금이 계십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 일어서게 하시며, 항상 왕권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하는 십자가에 매달린 착한 죄수에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말씀 하셨습니다.
십자가 앞에 서서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맡겨드릴 때
우리에게도 같은 말씀을 해 주실 것입니다.
“구원은 그분의 사랑을 받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는 데서 옵니다.”
주님의 사랑은 친밀함과 연민, 온유한 사랑으로
당신의 두 팔을 벌려 위로하시고 어루만져 주십니다. 바로 이분이 우리의 왕이십니다.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이 한마디가 얼마나 소중한 기도인지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 심지어 목숨까지 내놓으시며
백성들을 위한 사랑에 자신을 바쳤습니다. 그야말로 참사랑의 왕이셨습니다.
나는 이분을 믿고 있나요? 이 분이 내 삶의 주인이신가요?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8,31-32).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요한18,37). 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날마다 새롭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가슴에 모시고, 세상이 추구하는 소유와 권력, 지배의 왕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 진리와 정의의 왕, 섬김과 봉사의 왕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섬길 줄 아는 사람만이 다스릴 자격이 있습니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현세적인 것보다 영원한 것에, 마음을 집중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다음 주는 전례력으로 새해가 시작됩니다.
대림절을 잘 맞이하시고 기쁜 성탄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지난 11월 4일입니다. 신부님들과 저녁 식사 하면서 이야기하였습니다.
교회 이야기, 사제 이야기, 세상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던 중 신부님 한 분이 제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신부님은 트럼프와 해리스 중에 누가 당선될 것 같습니까?
신부님은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좋겠습니까?”
어찌 보면 단순한 질문이고, 그저 저의 의견을 듣고 싶어 하는 질문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이 1시간가량 서로의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저는 ‘트럼프’라고 대답했습니다.
순간 신부님은 표정이 바뀌면서 ‘왜 트럼프입니까?’라며 물었습니다.
저는 한국 사람이고, 미국 대통령이 누가 되는지 잘 모르지만,
대한민국의 국익을 위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의 미국과 북한, 북한과 한국의 관계는 긴장과 갈등의 폭이 커지고 있습니다.
트럼프 때는 북한과 미국의 정상이 3번 만났습니다. 싱가포르, 판문점, 하노이에서 만났습니다.
마지막에 결렬되었지만, 한반도의 평화가 시작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지금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트럼프 때는 그런 전쟁이 없었습니다.
저의 의견을 듣고, 신부님은 트럼프가 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트럼프는 도덕적으로 결함이 많다고 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은 미국의 대통령이면서 세계의 지도자이기에
도덕적인 결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트럼프는 말을 함부로 하고, 거짓말을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대통령은 성직자가 아니고, 대통령은 윤리 선생님도 아닌데
도덕적인 완벽함이 그리 중요한 것 같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대의와 명분도 중요하지만, 형세 판단과 실리도 중요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대통령이라면 국민을 위해서 자존심을 버릴 수도 있어야 하고,
대통령이라면 국민을 위해서 죽을 수도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도 이야기했습니다.
남한산성은 조선의 왕 인조와 그 왕을 보필하는 두 명의 신하 김상헌과 최명길의 이야기가 중심입니다.
김상헌은 대의와 명분을 내세워서 조선의 왕은 청의 황제에게 목숨을 구걸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최명길은 형세 판단과 실리를 내세워 지금은 청의 황제와 타협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세자를 청의 수도로 보내자고 합니다.
세자는 청에서 새로운 나라의 정치와 새로운 나라의 질서를 배울 수 있다고 합니다.
조선의 왕 인조는 고뇌에 찬 결단을 내리면서 병자호란은 끝이 납니다.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그리스도 왕은 어떤 분이셨는지 생각해 봅니다.
권위는 있으셨지만 권위적이지는 않으셨습니다.
힘은 있으셨지만, 그 힘을 남용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섬김을 받으실 자격이 충분하셨지만, 오히려 섬기려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분은 피땀을 흘리면서까지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은 나병환자, 중풍병자, 소경, 세리와 창녀들과도 함께 하셨고
그들을 치유해 주시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권위는 겸손함에서 생겼습니다. 그분의 힘은 사랑함에서 생겼습니다.
그분은 비록 돈과 조직, 엄청난 배경은 없으셨지만,
희생과 봉사 그리고 기도의 힘으로 세상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분은 승리하셨고, 그분은 우리들의 구세주가 되었고,
오늘 우리는 그분을 그리스도 왕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은 풀잎 끝에 맺혀있는 이슬방울 같다고 하였습니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이면 말라버리는 들꽃과 같다고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고통의 바다에서 외로이 떠 있는 작은 배와 같다고도 하였습니다.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주님과 함께 지내면
풀잎 끝에 맺혀있는 이슬방울도 아름다운 보석으로 변하게 됩니다.
저녁이면 말라버리는 들꽃도 천상의 향기를 갖게 됩니다.
고통의 바다에 떠 있는 작은 배도 목적지를 향해서 힘차게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전례력으로 우리는 한 해를 마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나약하기에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걸어온 올 한 해를 돌아 볼 수는 있습니다.
나의 발자국이 누구와 함께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가난한 이, 병든 이, 굶주린 이와 함께한 발자국이었다면
그것은 바로 주님과 함께한 삶이었고, 그 길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내가 왕이라고 네가 말했다.
조욱현 토마 신부
그리스도의 왕권은 십자가의 죽음에서 즉, 그리스도의 나약성에서 나온다.
이것이 ‘희생된 어린양’이라는 상징을 통해 나온다.
그리스도의 왕권이란 패배의 상징인 십자가에서 나오는
보편적인 구원 능력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구원의 은혜는 바로 사랑에서 나왔으며 그 사랑은 절대 패하지 않는다.
그분의 왕권은 사랑과 봉헌과 봉사와 겸손과 화해
그리고 그분을 희생 제물로 만든 모든 불의와 폭력에 대한 항거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런 사랑의 왕국을 원한다.
그러나 너무 이상적이고 어려워 보여서 거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다니엘서에도 이 사고가 드러난다.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왕국이 이 세상의 그것과는 다르다고 하신다.
빌라도의 첫 번째 질문은 신원에 관한 것이었다.
: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요?”(33b).
“그것은 네 생각으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하여 너에게 말해준 것이냐?”(34).
교활하고 경멸적인 빌라도는 “나야 유다인이 아니잖소?”라고 하고,
그 결과에 대한 알리바이를 준비하면서, 재판에 넘긴 책임을 “동족과 수석 사제들”(35절)에게 돌렸다.
예수님은 지금 당신의 왕권을 표명하신다. 그분의 왕국은 천상적이라고 하신다.
만일 세상의 것이라면, 그분의 부하들이 싸워서 그분을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의 왕국은 이 지상의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신다(36절).
빌라도는 빈정대는 말투로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37a).
예수께서 답하신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37b).
그러나 빌라도는 왕이 무슨 의미에서인지는 잘 알지 못한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진리를 증언하려고”(37절) 태어나셨고 세상에 오셨다(참조: 요한 1,1-18).
로마에 있어서도 진정한 왕이시며, 또한 유다인들에게 그만큼 사랑받은 진리,
즉 무엇보다도 유다인들에게 먼저 천상적 가르침을 가져오신 것이다.
예수님의 왕권은 아버지께서 그분에게 맡기신 진리를 증언하는 사명을 충실히 이행하는 데 있었다.
어떠한 유혹도 협박도 이해관계도 그분을 물러서게 하지 못한다.
그분은 철저히 당신 자신과 모든 사건을 지배하시는 분이시다.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오만불손하지 않으며, 아버지 하느님께 자유롭게 충실하신 분이시다.
여기에서 그분의 왕권이 나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계시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절대 진리이시다.(참조: 요한 14,6)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구원에 이를 수 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진리는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시켜주기 때문에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이 진리를 받아들이는데 구별이 있다.
하느님에게서 나서 하느님의 진리를 사는 사람은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받아들이고 따른다고 하신다(37절).
즉 타협이나 양보를 하지 않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항상 진리 편에 서는 것이다.
그 왕국은 진리의 왕국이고 영원히 실현되고 있고, 성령 안에서 십자가 위에서,
진실한 증언에 있는 피와 물(19,30.34.35-37)에서 실현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왕권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왕권이다.
그러나 언제나 빌라도들이 진리를 밀어내고 있다.
묵시록에서도 그리스도의 왕권은 그분의 십자가상 희생에서 온다고 한다.
십자가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과 당신 자신과 진리에 대해 보여주시는 증거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왕권은 묵시록에서 구원된 모든 이들이 참여한다는 사실을 명백히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한 나라를 이루어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신 그분께
영광과 권능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묵시 1,6).
그래서 교회는 모든 신자가 공통적 왕권을 재인식하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 증거하신 사랑과 진리의 모습으로
사회로 침투할 수 있도록 그 왕직을 실행하도록 초대하고 있다(교회 36).
이 왕권은 쉽게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 실행하는 것도 더 어렵게 느껴진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봉사함으로써 다스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특수성이라고 강조하신다.
“그리스도의 이 태도로 미루어 본다면 왕이 된다는 것은 종이 됨으로써만 가능하며,
종이 된다는 것은 왕이 된다고 할 정도로 고귀한 영적 성숙이 있어야 하는 일이다.
보람 있고 효과적으로 남에게 봉사하려면 우리가 자신을 완전히 제어할 수 있어야 하고
이 제어를 가능케 하는 덕들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왕다운 사명 즉, 그분의 왕다운 직분에 참여하는 일은
그리스도교 윤리와 인간 윤리의 모든 분야와 밀접히 연관된다.”(인간의 구원자 21항).
여기에 우리의 자세가 중요하다.
진리를 밀어내는 빌라도의 모습인가?
아니면 그 진리를 따라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 가는 자의 모습인가?
그리스도의 왕권은 그분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진리를 끝까지 사랑과 봉사를 통하여 증거한 것에서 얻은 것이라고 했다.
그 왕권을 들어 높이는 것은 우리가 모두 그 왕권을
우리의 삶 속에서 사랑과 봉사로 실행하여
세상에 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쉽지 않은 것임을 알지만, 그 왕권을 실행함으로써
하느님의 진리 안에 더 큰 자유를 누릴 수 있음을 체험하며,
그리스도 왕께 찬미를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작고 가난한 사람들 앞에 허리를 숙이는 섬김과 봉사의 왕, 예수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왕이란 존재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어찌 보면 세상 불쌍한 존재가 왕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일 높은 자리에 앉아 있지만, 그것은 빛깔 좋은 개살구나 비슷합니다.
나라 전체를 책임지고 있으니, 그의 머릿속은 수백 가지 근심 걱정거리들로 가득합니다.
나라가 태평성대면 괜찮은데, 세상의 나라가 어디 늘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어떤 때는 오랜 가뭄에 시달리고, 어떤 때는 예기치 않았던 대참사도 벌어지고,
이웃 나라들 지속적으로 찝쩍대고, 차라리 왕이고 뭐고 다 던져 버리고
멀리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도 자주 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왕들이 겪는 고초입니다.
세상의 왕권이라는 것, 그렇게 부질없는 것이고, 보잘것없는 것이고,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특히 그 왕좌에 앉아 있는 사람의 자질이나 품성이 지극히 결핍될 때 더 그렇습니다.
왕으로서 권세를 휘두르는 사람이 백성을 위한 봉사라는 가장 근본적인 책무를 망각할 때,
그 왕권은 정말이지 비참하고 초라해질 따름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우리가 성대하게 경축하는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은 새삼 각별한 의미로 다가옵니다.
이 땅에 육화 강생하신 예수님께서 그냥 왕이 아니라 만왕의 왕이요, 왕 중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소불위의 힘으로 군림하거나 섬김을 받고 권세를 누리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작고 가난한 사람들 앞에 허리를 숙이는 섬김과 봉사의 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섬김과 봉사의 왕으로 오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쥐꼬리만 한 권력이라도 손에 쥐게 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자신의 본분을 상실하고 군림하고 거들먹거리는 세상의 통치자들을 향해
그게 아님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자신들이 손에 쥔 권력은 잠시라는 것을 망각하고, 남용하거나 오용할 때,
언젠가 치러야 할 대가는 참혹하다는 것을 경고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나는 권력을 지닌 사람이 아니니 나와는 무관한 축일이네, 하고 무시할 일이 아닙니다.
교회 전례력으로 마지막을 향해 가는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부여해 주신 탈렌트와 역량과 에너지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성찰해 볼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조만간 우리 각자가 직면하게 될 신앙 여정의 종착점인 죽음,
곧 새로운 시작, 영원 속으로 들어가는 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해 볼 일입니다.
지금 내가 몸 담고 있는 이 자리에서 확연한 진리,
곧 내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이 큰 결핍에도 불구하고
나를 반드시 구원하신다는 불변의 진리를 나는 진실로 믿고 있는가?
위대한 우리의 성인 성녀들께서 목전에 다가온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거기 있었습니다.
그들은 살아생전, 그 진리,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구원하신다는 진리를 백 퍼센트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살아있는 지금 나를 극진히 사랑하고 계신다면
언젠가 맞이할 우리의 죽음과 심판 때,
그런 태도를 바꾸실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 이 자리에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충만히 현존하고 계심을 굳게 믿는다면,
언제나, 항상, 그리고 영원히, 궁극적으로도 하느님과 함께 있음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바로 구원이요 영원한 생명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 자리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체험은
언젠가 맞이하게 될 또 다른 국면에서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연결될 것이며,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전례력으로 나해 마지막 주간이 시작되는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가 누구를 임금으로 여기는지 물으십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18,36)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냐고 묻는 빌라도에게 예수님께서 답하십니다.
우리 임금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유다인들만의 임금이 아니라,
온 세상 모든 피조물의 임금이십니다.
빌라도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분의 나라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중동의 어느 한 영토나 어느 특정 시대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요한 18,37)
진리이신 예수님은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오셨고,
그분 곁에 머물러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이 바로 그분의 백성입니다.
주님의 백성은 진리를 듣는 이들입니다.
세상의 임금들은 권력을 휘두르며 온갖 호사를 과시하지만,
우리의 임금이신 예수님은 가장 가난하고 비참한 모습으로
재판을 받으시고 사형틀인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어둠의 우두머리와 진리의 수장이 선 자리는 이렇듯 극과 극입니다.
우리는 어느 깃발 아래 머무를 것인지 결단해야 합니다.
제1독서는 사람의 아들께서 온 세상의 통치권을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다니 7,14)
다니엘 예언자는 환시 중에 임금의 대관식과 같은 장면을 봅니다.
사람의 아들께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지고, 모든 사람의 섬김을 받으시는데,
흥망성쇄를 거듭하며 주인이 바뀌는 세상의 권좌와 달리, 그분은 영원히 통치하실 것입니다.
제2독서는 세상 임금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를 알려 줍니다.
"우리가 한 나라를 이루어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신 그분께
영광과 권능이 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묵시 1,6)
주인들의 주인, 임금들의 임금이신 예수님은 하느님 백성인 우리를 사제로 부르셨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존재하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한 나라를 이루어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십니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신분과 소명을 살아가지만,
하느님을 섬기는 보편 사제직으로 불리웠으며,
언제 어디에서든,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충실히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들입니다.
"주님이 영원한 임금으로 앉으셨네.
주님이 당신 백성에게 강복하여 평화를 주시리라."(영성체송)
우리는 진리를 듣고 하느님을 섬기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어좌 아래로 모여든 이들입니다.
하여 아직 재물이 더 좋고 권력과 허세에 더 끌린다면 이 자리가 매우 불편할 겁니다.
겸손하고 가난하신 우리의 임금께서 당신 백성에게 주시는 선물은 "평화"입니다.
세상 권력의 부스러기인 재물이나 권력과 사뭇 다르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임금으로 모시는 이는 가난해도 평화롭고,
모욕과 업신여김을 당해도 평화를 잃지 않습니다.
질병과 고통 중에도, 죽음의 순간에도 평화를 누리지요.
이 평화가 제 것이 아니라 주님의 강복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희로애락에 따라 요동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가 사랑하고 섬기는 그리스도왕을 따라,
우리가 더 선하고 겸손하며 가난하고 진실된 사제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임금님과 백성이 점점 더 닮아가고 있다면,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가 머지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고 감사하며
또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는 은총의 한 주간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녹록치 않은 삶의 현실 속에서
지치지 않고 말씀 곁으로 모여와 진리를 듣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니.
그분은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성규72,11-12)
오늘 연중 마지막 제34주일은
온 누리의 임금이신, 온 세상의 임금이신, 온 인류의 임금이신,
우리 모두의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삶의 중심이자 의미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그리스도왕직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 모두가
참으로 평생 배우고 공부하여 닮아가야 할 유일한 분입니다.
그리스도왕 대축일은 1925년 12월11일 제정됐습니다.
당시 교황이었던 비오 11세는 당시 전쟁 후
무신론과 허무주의, 세속주의가 만연된 세상을 바로잡고자
그리스도 왕직이 온 인류에 미치고 있음을 강조하는 뜻에서
이 축일을 제정하고 공포합니다.
비오 11세 교황은 교서 ‘첫째의 것(Quas Primas)’에서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요 인간으로서 그리고 구세주로서
지상의 모든 것에 대한 주권을 지닌 왕”이라고 천명하며
그리스도의 구세주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대축일이 제정된 지 100년이 지났지만,
반복되는 악순환의 현실에 대축일의 중요성은 날로 증대되는 추세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더욱,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중심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하게 합니다.
“용기란 흐름을 거스르는 굳센 힘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반드시 해내야 할 때 필요한 힘이다.”<다산>
“명命을 아는 자는 굳이 기울어진 돌담 아래에 서지 않는다.
도道를 다하고 죽은 자는 바른 명命이지만,
범죄로 죽은 자는 바른 명이 아니다.”
참된 용기는, 바른 명의 삶은
한결같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을 따라 살 때 주어지는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읽은 위대한 정치지도자, 독일의 제8대 연방총리로 16년간 재직했던
메르켈 총리의 회고록에 나오는 일화가 감동적이라 소개합니다.
온 인류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을 많이 닮은 프란치스코 교황과의 일화입니다.
매르켈 총리는 2017년 함부르크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파리기후협약 탈퇴를 선언한 트럼프 당선인을 설득하기 위해
트럼프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조언을 청합니다.
“굽히고, 굽히고, 굽혀라. 그러나 부러질 정도로 굽히진 말아라.”
교황은 답합니다.
지극히 겸손하고 인내하라는 충고인데 이 또한 지혜이자 사랑입니다.
메르켈 총리는 교황의 조언대로 갈등을 해결하려고 노력합니다.
메르켈 총리의 개인적 일화도 좋은 교훈이 됩니다.
역사책에서 어떤 평가를 받기 원하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노력했다(She tried)”를 원했고,
또 자신의 묘비명으로 “겸손과 품위”를 선택합니다.
누구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을 닮으려 노력한,
참 멋지고 위대한 세계적 정치가 메르켈임을 깨닫습니다.
어제오늘 저녁 성무일도와 아침 성무일도 때
‘마리아의 노래’ 후렴과 ‘즈카르야 노래’ 후렴이 일치했고 이어 부른 내용들도 참 깊고 풍부했습니다.
온 인류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임을 실감할 정도였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나는 받았노라.”
더불어 어제 나눈 깨달음과 대화를 소개합니다.
“왕(王)은 ‘하늘-’과 ‘땅_’ 사이에 십자가(+)가 있는 형상이다.
새삼 십자가의 예수님이 온 누리의 참 왕이라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왕(王)자 위에 점’을 하나 찍으면 주(主)님으로 왕들 위에 계신 예수님이시네!”
그러니 한 형제는 “아래에 점을 하나 찍으면 구슬 옥(玉)가 된다.”고 했습니다.
우연의 일치라 볼 수 없는 한자에 이미 주어진 주옥(珠玉)처럼
귀한 우리의 왕(王)이자 주(主)님이신 예수님의 신원임을 깨닫습니다.
이미 묵시록 계통의 두 독서가 예수님의 신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으리라.”
세상 역사의 흐름이 서서히 이렇게 가고 있는 듯합니다.
종파를 초월하여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만이
유일한 길이자 희망이자 구원의 대안임을 깨닫습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하고 말씀하신다.”
바로 우리 참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들립니다.
오늘 미사 중 감사송은 얼마나 장엄하고 깊고 풍부하며, 고무적이었는지요!
“아버지께서 외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기쁨의 기름을 바르시어 영원한 사제와 온 누리의 임금으로 세우셨으며,
그리스도께서는 몸소 십자가 제대 위에서,
티 없는 평화의 제물로 당신을 봉헌하시어 인류 구원을 이루시고,
만물을 당신 친히 다스리시어,
그 영원하고 보편 된 나라를, 지극히 높으신 아버지께 바치셨나이다.
그 나라는 진리와 생명의 나라요,
거룩함과 은총의 나라이며,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이옵니다.”
이런 참 권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님을 모시고
배우고 닮아가는 삶보다 고귀하고 보람 있고 행복한 삶이 어디 있겠는지요!
도대체 이런 주 예수 그리스도왕이 아니곤 어디서 구원이 행복이 올런지요!
구체적으로 넷의 실천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첫째, 진리입니다.
진리의 왕이신 예수님입니다. 주 예수님은 진리자체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천명하신 주님이십니다.
빌라도를 교육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감동적입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진리가 우리를 거룩하게 합니다.
그러니 시종여일, 한결같이 진리이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진리의 연인으로, 진리의 협력자로 사는 것입니다.
저절로 고귀한 품위의 사람이, 진리의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둘째, 희망입니다.
희망의 왕이신 예수님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궁극의 희망을 두는 사람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희망이, 꿈이 있어야, 비전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살아있다 해도 희망이 없으면 실상 죽어있는 것입니다.
사람만이 희망을, 꿈을, 비전을 지닐 수 있습니다.
무슨 꿈입니까? 꿈도 희망도 비전도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이 궁극으로 추구할 바 꿈이자 희망은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이런 희망이 생생하면 늘 새로운 시작입니다.
늘 새 하늘과 새 땅의 현실을 삽니다.
성 베네딕도는 ‘자신의 희망을 하느님께 두라’(성규4,41) 말씀하시고,
시편 저자는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 희망을 하느님께 두라’(시편131,3) 말씀하십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8,24-25).
하느님을 예수님으로 바꿔 읽어도 무방합니다.
우리가 지향하는바 궁극의 희망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을 통해 만나는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주님의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 평화입니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입니다.
거짓 평화가 아닌 참 평화의 주님이십니다.
주님께 평화를 주십사 기도할 뿐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평화가 되게 해달라 기도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듯 평화를 사랑할 때
우리 존재 자체가 주님을 닮아 주님의 평화가 될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5,9)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만날 때
“평화가 너희와 함께!” 우선적으로 주신 선물이 평화였고
우리가 이웃에게 줄 수 있는 참 좋은 선물도 평화입니다.
넷째, 섬김입니다.
섬김의 왕이신 예수님입니다.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분입니다.
섬김의 권위, 섬김의 직무, 섬김의 사랑, 섬김의 겸손입니다.
섬김을 영성의 핵심입니다.
섬김의 공동체 바로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섬김의 주님입니다.
참으로 섬김의 삶에 충실할 때 섬김의 주님을 만납니다.
참으로 주님을 닮아갈수록 섬김의 사람이 되어 갑니다.
섬김이야말로 영성의 진위를 판가름하는 시금석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진리가 되십시오.
주님의 평화가 되십시오.
주님의 희망이 되십시오.
주님의 섬김이 되십시오.
한결같이 이렇게 살때 참 고귀한 품위의 삶에 백전백승 영적승리의 삶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날로 삶의 중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왕을 사랑하여 닮아가는 것이
우리의 평생 거룩한 과제요,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 은총이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피로 우리를 죄에서 풀어주셨고,
우리가 한 나라를 이루어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신 그분께 영광과 권능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묵시1,5ㄴ-6).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