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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을 가리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속을 스치는 생각 하나 등 그 위에 늘 같은 세 가지 자국이 찍혀 있습니다. 머물지 못하고 변하며 홀로 쌓이지 못하고 그것을 알아차린 자리에 공유가 원하는 자국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 세 가지를 두고 온 세상에 두루 통하는 진실이라 이르십니다. 이 도장이 왜 필요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계셨던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로 세월이 흐르면서 그 이름을 빌린 수많은 가르침이 하나 둘 생겨났습니다. 어떤 것은 참된 뜻을 곱게 이었고 또 어떤 것은 겉모습만 닮은 채 기도에 벗어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때 사람들에게 절실했던 것은 무엇이 진짜 부처님의 뜻인지를 가늠할 흔들리지 않는 잣대였습니다. 삼법에는 바로 그 잣대로 세워졌습니다. 화려한 날이든 낯선 가르침이든 2세 도장에 비추어 보면 됩니다. 자태가 굳게 서 있었기에 후대에 아빠가 여럿으로 갈리는 동안에도 부처님의 본 뜻은 흐려지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태연이 저마다 달라도 2세 도장의 나란히 들어맞는다면 그것은 한 뿌리에서 자라난 가르침입니다. 부산과 무화 사이에 일체 개구라는 도장을 하나 더 넣어 무상과 고아 무화의 열반을 더한 넷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법인이라 합니다. 어느 쪽이 옳고 다른 쪽이 그른 것이 아니라 헤아리는 방식이 다를 뿐입니다. 이 영상에서는 한국과 동아시아 불교에서 가장 널리 쓰여 온 무상과 무화와 열반의 상업인으로 정리해 갑니다. 그러니 왜 형태로 곧 코가 빠졌는가 하고 의아하지 않습니다. 고의 자리는 새 도장이 어떻게 하나로 이어지는지 풀어 가는 대목에서 스스로 제자리를 찾아들어낼 수 있습니다. 부상과 무하라는 말을 처음 들으면 어쩐지 쓸쓸하게 느끼실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이 변하고 붙잡을 나조차 없다 하니 마치 삶이 허무해지는 듯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2세 도장을 세우신 뜻은 우리를 허무로 밀어 넣으려는데 잊지 않습니다. 도리어. 복잡으려다 괴로웠던 마음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의 자유에 이르게 하려는 데 있습니다. 새 도장이 가리키는 끝자리가 바로 고요. 곧 열반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2세 도장은 깊은 산 속에서 오래 수행한 이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루하루 일하고 사람을 만나고 마음 상하고 다시 일어서는 그런 평범한 삶을 가르침입니다. 기쁜 일이 될 테고 언제는 일에 무너지기를 되풀이하는 그 자리에서 새 도장은 우리가 무엇에 매여 있었는지를 가만히 일러줍니다. 그 앎이 깊어질수록 같은 일 앞에서도 마음은 덜 휘청이게 됩니다. 2세 도장을 두고 저는 이렇게 새깁니다. 사법이래. 우리를 시험하려면 내 미래는 문제가 아니다. 삶을 잇는 그대로 비추어 주는 맑은 거울입니다. 무상과 무화와 열발은 저 멀리 경전 속에만 갇혀 있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숨 쉬고 나이 들고 무언가를 잃고 또 얻는 이 삶의 결 위에 이미 뚜렷하게 찍혀 있는 도전입니다. 그새 도장을 알아보는 눈에 이 시간 함께 떠 보십시오. 그새 도장 가운데 가장 먼저 마음에 지키는 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모든 것은 베란다는 그 한마디부터 찬찬히 풀어 보겠습니다. 무상이라는 말을 항상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네 그대로 머무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그 한마디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여기에 재행이라는 두 글자를 앞에 놓으십니다. 재행이란 조건에 따라 지어진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홀로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여러 인연이 모이고 얽혀 이루어진 것을 말합니다. 우리 몸이 그러하고 마음이 그러하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과 재물과 이름까지 모두 조건이 모여 잠시 세워진 것입니다. 조건이 모이면 생겨나고 그 조건이 흩어지면 사라집니다. 그러니 한 자리에 붙박이지 못한 채 쉼없이 흐르고 바뀌어 갑니다. 이것이 제 무상 곧 지어진 모든 것은 머물지 못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하나 놓치기 쉬운 대목을 짚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있는 것 전부가 아니라 지어진 것이 변한다고 설하십니다. 조건이 모여 이루어진 것에만 이 무상의 도장은 찍힙니다. 조건에 기대지 않는 자리 곧 번뇌가 닿은 고요의 자리에는 이 변화의 물결이 닿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행이 무상하다 하지 모든 법이 무상하다고는 이르지 않습니다. 변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연으로 엮인 이 세상의 온갖 것들입니다. 이 경계를 또렷이 그어두어야 무상을 허무와 뒤섞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세상에 이토록 쉼없이 변하는 데도 모르는 눈에는 어째서 모든 것이 늘 그대로인 듯 보이는가? 까닭은 이렇습니다. 변화가 너무 더디거나 너무 익숙하면 우리 눈을 그것을 변하지 않으므로 착각합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같은 사람이라 여기고. 저 산과 바위는 언제나 그 자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단단한 바위도 오랜 비바람에 깎여 나가고 굳센 쇠붙이도 세월 앞에 사가갑니다. 다만 우리 눈이 그 느린 걸음을 미처 쫓지 못할 뿐입니다. 무산히 보이지 않는 것은 무상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이 그대로이길 바라는 마음이 상상함이라는 색안경이 되어 우리 눈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금세 안경을 한번 벗어 보면 변화는 어디에나와 있습니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습니다. 늘 오가던 거리의 낯익은 가게들이 어느새 세간판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굳게 쥐고 있던 물건들도 끝내는 하나 둘 손을 떠나갑니다. 부처님께서는 227을 무상계라는 짧은 개성에 담아 전하십니다. 지어진 모든 것은 덧없어서 났다가는 사라지는 법이라는 말씀입니다. 게다가 이 변화는 눈에 보이는 큰 사건에만 깃들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미처 알아채지 못하는 짧은 순간에도 몸의 낱낱 세포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새 것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 부산의 이치는 지금도 우리 곁에서 살아 숨 쉽니다. 절집에서 세상을 떠난 일을 천도하며 조용히 읊는 개성이 바로 앞서 말한 그 무상계입니다. 삶과 죽음이 갈리는 엄숙한 자리에서 지어진 것은 끝내 머물지 못한다는 진실이다. 바깥 세상만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야말로 한순간도 같은 자리에 머물지 않습니다. 방금 짐이던 화가 어느새 가라앉고 벅차오르던 기쁨도 오래 이어지지 못합니다. 아침에 품은 생각과 저물엿의 품은 생각이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마음은 흐르는 물과 같아서 같은 물결이 두 번 지나가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난 슬픔을 오늘 그대로 붙들어 두려 해도 그것은 이미 흘러가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우리 안이 됩니다. 밥이든 멈추어 고정된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 가르침을 부처님께서는 말로만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스스로의 삶으로 그것을 그대로 보이셨습니다. 더없는 깨달음을 이루신 분이지만 세월이 흐르자 그 몸도 늙고 기력이 쇠하였습니다. 마침내 여드름의 나이에 둥그루 나무 사이에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떠나시기 전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 역시 바로 이 무상이었습니다. 지어진 모든 것은 더덥기에 게으름에 빠지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는 당부였습니다. 무산은 이렇듯 주저앉아 슬슬 슬퍼하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끼어 정진하라는 부름으로 우리 앞에 놓입니다. 자연은 이 무상을 말없이 보여주는 오랜 스승입니다. 벚꽃은 피어난 며칠 눈부시다가 이내 떨어지고 다른 차오르는가 싶으면 어느새 기울어 갑니다.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고 가을이 깊으면 겨울이 뒤따릅니다. 얼핏 보면 계절은 늘 제자리로 돌아오는 듯합니다. 그러나 올해 우리한테 연봉은 지난해 그 봄이 결코 아닙니다. 같은 자리에 다시 핀 꽃도 작년에 진 그 꽃은 아닙니다. 자연은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매번 새로 태어나고 새로 쓰러지기를 되풀이합니다. 끝없는 나고 짐 속에 무상의 진실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든 것이 변한다면 우리 마음은 어찌하여 그 앞에서 아파하는가 변화 그 자체가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작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변하는 것을 붙들고 변하지 말라. 매달리는 마음입니다. 전문이 그대로 머물기를 바라고 정든 사람이 곁을 떠나지 않기를 바라며 가진 것이 줄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 바람과는 아무 상관없이 흘러갑니다. 바라는 마음은 한 자리에 붙박여 있는데 실제 삶은 쉬지 않고 저만치 떠나갑니다. 바로 그 어긋남에서 서러움과 불안이 자라오릅니다. 손에 켜진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가듯 더 세게 질수록 더 빨리 빠져나갈 뿐입니다. 그러니 괴로움의 뿌리는 무산에 있지 않습니다. 업무상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기어이 그러지려는 우리 소나기에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이 무상은 더 자주 더 깊이 우리를 찾아옵니다. 어느 날 문득 거울 속 흰머리가 낯설고 한때 함께 웃던 이들의 자리가 하나 둘 비어. 갑니다. 몸은 예전만 못 하고 익숙하던 것들이 조금씩 손을 떠나갑니다. 이런 자리에서 무상은 머리로 배우는 이치가 아니라 살갗으로 겪는 진실이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두 갈래의 길 앞에 삽니다. 하나는 흘러가는 것을 붙들려 애쓰며 세월을 원망하는 길입니다. 다른 하나는 흘러가는 것을 흘러가도록 두고 함께한 시간에 고개 숙여 감사하는 길입니다. 앞에 기름 걸을수록 마음이 메말라가고. 뒤에 들은 걸을수록 마음이 넉넉해집니다. 무산의 스승으로 맞아들인 사람은 이름 속에서도 원망 대신 고마움을 길어 올립니다. 떠나보낸 것을 붙잡지 못해 반파하기보다 한때 곁에 있어 주었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새깁니다. 이렇게 보면 무상의 서글픈 소식으로만 들을 이유가 없어요. 도리어 무상은 우리에게 깊은 위로가 되고 새 길이 되어 줍니다. 모든 것이 변하기에 지금 겪는 아픔도 그 자리에 영영 머물지는 않습니다. 꽝꽝 막혀 버린 듯한 형편도 언젠가는 달라지고 돌처럼 굳어 버린 마음도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풀립니다. 만약 변하지 않는다면 마른 씨앗은 끝끝내 씨앗인 채로 굳어 있을 것입니다. 무상이 있기에 그 작은 씨앗이 움을 틔우고. 마침내 꽃으로 피어납니다. 변화는 닫힌 문이 아니라 늘 다시 열리는 문입니다. 모상을 깊이 받아들인 사람은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을 더없이 귀하게 여깁니다. 다시 오지 않을 오늘의 기에 곁에 있는 이 얼굴을 한 번 더 바라보고 나눌 수 있을 때 마음을 다룹니다. 무언가를 붙잡으려 잔뜩 힘주었던 손에 이 자리에서 한번 가만히 펴 보십시오. 움켜쥐고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손에 펴는 바로 그 자리에서 비로소 눈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다른 무엇도 아닌 나 자신에게 돌이켜 비추어 보면 문득 한 가지 물음이 떠오릅니다. 이렇게 온 세상이 쉼없이 변한다면 그 변화의 한가운데 선나는 과연 어떠한가? 이 몸과 마음도 시시각각 달라져 갑니다. 그렇다면 그 속에 늘 그대로인 나라는 것이 정말 있는가? 바로 이 물음에서 두 번째 도장인 제법무화가 열립니다. 우아라는 말을 처음 들으면 흔히 나는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무화를 통해 아니라고 하신 것은 지금 여기서 보고 듣고 느끼는 이 나의 작용이 아닙니다. 부처님 당시 인도에는 변하지 않고 홀로 존재하며 영원히 이어지는 참된 자아가 우리 안에 깃들어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 변치 않는 실체를 사람들은 참나 또는 아트만이라 부르며 굳게 부들어왔습니다. 부처님께서 없다고 하신 것은 바로 그 고정 불변의 실체적 자아입니다. 무활한 내가 통째로 사라진다는 허무의 선언이 아닙니다. 인하 안에 조건과 상관없이 홀로 변치 않는 알맹이가 따로 들어 있지 않다는 불분명한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날아부르는 이것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다섯 가지 무더기로 나누어 살펴보라 이르십니다. 눈앞에 드러난 몸이 있습니다. 그 몸으로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느낌이 일어납니다. 사물을 떠올려 이름 짓는 생각이 뒤따르고 이러이러하게 하려는 뜻이 움직입니다. 그리고 그 모두를 환히 알아차리는 알미 함께합니다. 이 5시 이년 따라 모여. 잠시 나라는 이름을 이룰 따름입니다. 그런데 이 다섯 무더기를 아무리 낱낱이 헤쳐 보아도 이것이 바로 변치 않는 나라고 할 알맹이는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습니다. 옛 병전에 이런 비유가 전합니다. 바퀴와 군대와 나무를 얼그놓고 우리는 그것을 손으로 떠나 떼어 흩어 놓으면 수리를 할 만한 식재료 또한 같아서. 자선 모드기가 모여 나라 불릴 뿐 그것들을 따라 홀로 선 나라는 고정된 실체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실체가 없는데도 우리는 어찌하여 고정된 나가 있다. 이토록 굳게 느끼는가? 그 까닭은 이러합니다. 순간순간에 몸과 마음 워낙 천천히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낮장의 그림들을 빠르게 넘기면 멈춰 있던 그림이 살아 움직이는 하나의 장면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나라고 느끼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찰나마다 새로 일어나는 느낌과 생각이 쉼없이 뒤를 이어가기에 마치 변치 않는 하나의 나가 처음부터 끝까지 앉아 있는 듯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어짐이 만들어낸 그림자일 뿐 그 자리에 붙박인 실체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착각을 부처님께서는 나라는 상 곧 아상이라 이르십니다. 부처님께서 이 무화를 처음으로 자세히 밝히신 자리가 경전에 뚜렷이 전합니다. 깨달음을 이루신 뒤 함께 수행하던 다섯 비구에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물으십니다. 만일 이 몸이 참으로 나이며 나의 것이라면 늦지 말라. 병들지 말라.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몸 하나조차 뜻대로 하지 못합니다. 내 금이 찾아드는 것을 막지 못하고 병이 드는 것 또한 돌려세울 수 없습니다. 느낌도 생각도 마찬가지여서 슬픔이 일지 말라 명령할 수 없고 떠오르는 생각을 오라갈아 부리지도 못합니다. 이렇듯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두고 어찌 이것을 오롯한 나이 나의 주인이라 하겠는가. 이 말씀을 들은 다섯 비구는 다섯 무더기를 향한 집착을 하나 둘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음의 자유를 얻었다고 전합니다. 고정된 나가 없는 까닭은 모든 것이 서로 기대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나는 결코 홀로 뚝 떨어져 존재하지 못합니다. 부모에게서 이 몸을 받았고 수많은 이의 손길 속에서 자라났습니다. 날마다 먹는 곡식과 마시는 물 내리쬐는 햇빛이 모여 이 몸을 이룹니다. 생각과 내뱉는 말조차 배우고 물려받은 것에서 왔습니다. 나를 이루는 그 무엇도 오직 나 홀로 지어낸 것이 하나도 없어. 이렇듯 온통 다른 것에 기대어 이루어졌기에 그 안에 홀로 우뚝 선 고정된 실체가 들어설 자리는 없는 것입니다. 앞서 무상의 도장은 2년으로 지어진 것에만 찍힌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무화의 도장은 지어진 것이든 그렇지 않든 있는 것 모두의 두루 위칩니다. 그 어디를 살펴도 변치 않는 나라고 붙들 실체가 없는 까닭입니다. 제행이 무상하다. 이르고 제법이 무아하다. 이르는 데에는 이렇듯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나라라는 것이 아주 없어져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지금 이렇게 보고 듣고 생각하는 자경은 분명히 지금 여기에 살아 있습니다. 어제 나와 오늘의 나는 똑같지 않지만 그렇다고 아무 상관없는 남남도 아닙니다. 하나의 촛불에서 다른 처로 옮겨 붙는 불꽃을 가만히 떠올려 보십시오. 앞에 불꽃이 뒤에 불꽃으로 이어지지만 그 둘이 똑같은 하나의 불꽃은 아닙니다. 우리 삶도 이 단단히 굳은 물건이 아니라 쉼없이 흐르며 이어지는 하나의 과정으로 바로 포기하는 가르침입니다. 이 위치를 놓치면 사람은 흔히 두 극단 가운데 하나로 미끄러집니다. 한쪽은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 참된 나가 어딘가 따로 있다고 붙드는 생각입니다. 죄송합니다. 모든 것이 아주 끊겨 텅 비어 버린다고 믿는 쪽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두 극단을 모두 여의라 이루십니다. 홀로 변치 않는 나가 있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이어짐마저 뚝 끊겨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리씀과 없음. 그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길 이것이 무화과 딛고 선중도의 자리입니다. 무화를 다뤄보면 나라는 생각만이 아니라 내 것이라는 생각도 함께 헐거워집니다. 우리는 이 몸을 내 몸 이 재산을 내 재산 이 생각을 내 뜻이라 여기며 그 위에 나의 것이라는 표를 단단히 붙여 둡니다. 그리고 그 표가 붙은 것이 흔들리면 마치 나 자신이 무너지는 듯 아파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대목에서 이렇게 비추어 보라. 이르십니다.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붙여두었던 표를 하나씩 떼어내면 그것이 나를 흔들 힘도 그만큼 줄어듭니다. 1일과 조마조마하던 마음이 놓이고 진 것이 적어도 넉넉한 자리가 열립니다. 그렇다면 이 무한은 우리 삶에 어떤 문을 열어 주는가? 고정된 나라는 생각을 단단한 성처럼 쌓아 둔 사람은 평생 그 성을 지키느라 지쳐갑니다. 남보다 높아지려 애쓰고 자존심이 조금만 상해도 오래 앓으며 나는 본래 이런 사람이라는 틀 속에 스스로를 가둡니다. 영화를 깊이 받아들이면 그 성벽이 스르르 낮아집니다. 지켜내야 할 나가 본래 그토록 단단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기에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짐도 한결 가벼워졌음에 느끼실 것입니다. 고정된 내가 어깨에 오늘의 눈은 얼마든지 다시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게다가 나와 남이 본래 따로 떨어진 존재가 아님을 보게 되면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르던 당도 저절로 낮아집니다. 나라는 좁은 울타리를 한 걸음 벗어날 때 마음은 비로소 난 넉넉하게 열립니다. 그 좁은 날을 조금 헐어내는 자리에서 뜻밖에도 더 큰 자유가 찾아옵니다. 그런데 나라는 집착에서 한 걸음씩 노연하다 보면 그 끝에는 무엇이 있는가? 세계의 도장 가운데 마지막 열반 작전이 바로 그 자리를 가리킵니다. 열반이라는 말은 본래 불어서 끈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끄는가? 존재를 꺼서 없앤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 안에서 쉬지 않고 타오르던 불 바로 그 불을 끈다는 뜻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 마음이 세 가지 불로 타고 있다고 설하십니다. 갖고 또 가지려는 탐욕의 불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취미는 성냄의 불 이치를 바로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의 불입니다. 이세불이 우리를 안에서부터 지지고 볶습니다. 그리고 그 불길을 쉼없이 지피는 것이 무언가를 향한 끝없는 목마름 바로 가리라는 것입니다. 열반이란 바로 이세불과 그 목마름이 남김없이 꺼진 자리를 이룹니다. 타오르던 것이 꺼졌기에 그 자리에는 들끄름이 멎은 깊은 고요가 찾아듭니다. 열반 적정의 적정이란 이렇듯 번뇌의 불이 사그라든 고요와 맑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불의 가르침을 펴신 유명한 자리가 경전에 전합니다. 깨달음을 이루신 뒤 부처님께서는 오랜 세월 불을 섬겨오던 수행자 무리를 만나십니다. 그들 앞에서 부처님께서는 세상의 첫 모습을 이렇게 드러내 서라십니다. 온 세상이 불타고 있다. 눈이 불타고 눈에 비치는 것들이 불타며 그것을 보고 일어나는 느낌마저 불타고 있다. 무엇으로 타는가? 탐욕의 불길로 성냄의 불길로 어리석음의 불길로 타고 있다. 밖에서 옮겨붙은 불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만난의 불길을 그제야 똑똑히 보았고 마침내 그 불을 끄는 길로 마음을 돌렸습니다. 열반이란 바로 이 안에 불을 꺼뜨려 다시 타지 않게 된 자리를 이룹니다. 여기서 반드시 짚어야 할 오해가 하나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열반에 저 멀리 어딘가에 있는 영원한 낙원처럼 떠올립니다. 목숨이 다한 뒤에야 비로소 건너가는 별천지로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열반은 어느 곳에 자리한 장소가 아닙니다. 하늘 위 어딘가에 마련된 궁전도 아니고 죽은 뒤에만 받아드는 상극도 아닌 것입니다. 열반은 마음의 상태 더 정확히는 타오르던 새부리 꺼진 바로 그 마음의 자리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숨을 거두신 뒤에야 열반에 드신 것이 아닙니다. 젊은 나이에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이루시던 그 순간 이미 번뇌의 불을 끄고 살아 계신 채로 열반에 드셨습니다. 그러니 열반은 죽어야만 가는 먼 곳이 아닙니다. 지금 이 삶 한가운데에서 마음에 불이 꺼질 때 들리는 고요입니다. 그렇다면 반대편의 오해도 함께 풀어야 합니다. 불이 꺼졌다니 열반을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소멸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이 꺼진 자리는 아무것도 없는 캄캄함이 아닙니다. 뜨겁게 타오르던 것이 물러가면 오히려 서늘하고 맑은 평원이 드러납니다. 탐욕이 꺼진 자리에는 넉넉함이 깃들고 성냄이 꺼진 자리에는 따뜻한 자애가 돌아옵니다. 어리석음이 거친 자리에는 사물을 잇는 그대로 비추는 밝은 지혜가 살아납니다. 무엇에도 쫓기지 않는 자유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아논이 그 자리를 가득 채웁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열반을 두고 가장 높은 행복이라 이르십니다. 만약 열반이 그저 텅빈 없음이라면 부처님께서 그것을 더없는 행복이라 이르실 리 없습니다. 열반은 없어짐이 아니라 우리를 괴롭히던 것이 없어져 비로소 드러나는 참된 평안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열반에 한 가지 말로만 부르지 않으십니다. 여러 이름으로 그 자리를 그려 보이십니다. 때로는 거센 물살을 건너가다는 저 언덕이라 하시고 때로는 어떤 풍파에도 잠기지 않는 안온한 섬이라 이르십니다. 다는 목마름이 가신 서늘함이라 하시고 다시는 불타스러지지 않는 자리라 하시기도 합니다. 이름은 저마다 달라도 가리키는 곳은 하나입니다. 그 하나란 바로 번뇌의 불이 꺼져 두 번 다시 타오르지 않는 깊고. 고요한 마음의 자리를 이룹니다. 이렇듯 여러 이름은 말로 다 담기 어려운 그 고요를 이결저결로 비추어 보여 주려는 자비로운 손길인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쉽게 빠지는 오해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열 달에 아무 느낌도 잃지 않는 무감각한 상태로 넘겨짚는 것입니다. 감정이 메마른 돌처럼 되는 것은 아닌가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열반은 느낌의 마비시키는 자리가 아닙니다. 열반에 든 마음이 내려놓는 것은 기쁨과 슬픔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기쁨과 슬픔에 붙들려 함께 타 버리는 사로잡힌 바로 그것입니다. 오히려 쇄불이 거친 마음은 남의 아픔을 더 맑게 보고 더 깊이 보듬습니다. 미움 없이 사람을 마주하고 바라는 것 없이 손을 내밉니다. 열반의 공연은 차갑게 굳은 얼음이 아니라 모든 것을 넉넉히 품는 따뜻한 공연입니다. 이 이치는 거창한 수행 이야기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하루하루의 자리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이를 테면 남이 가진 것을 보며 나만 뒤쳐진 듯 마음이 바싹바싹 타들어갈 때가 있습니다. 그 목마름에 사로잡히면 아무리 손에 쥐어도 늘 모자란 듯 애가 탑니다. 그러나 그 타오름을 한 걸음 물러나 바라보면 부러움의 불길이 조금씩 힘을 잃어. 갑니다. 그러면 더 가져야 한다는 조바심이 슬며시 풀리고 없던 여유가 마음 한켠에 도단합니다. 이미 지닌 것이 결코 적지 않았음을 잔잔해진 마음이 그제야 헤아립니다. 이렇듯 이렇듯 불이 한 뼘 잦아들 때마다 우리 삶에는 그만큼의 고요가 스며듭니다. 그렇다면 이 열반이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너무 먼 이야기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온전한 열반이 오랜 닦은 끝에 이르를 자리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고요의 한 자락만은 우리도 살아가는 가운데 잠시 맛볼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향한 미용을 문득 내려놓았을 때 뭉켜지려던 욕심을 한번 잡았을 때 마음이 거짓말처럼 잠잠해지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바로 그 순간이 새부리 잠깐 잦아든 자리입니다. 다만 이 짧은 고요를 완전한 열방과 같은 것이라 역에서는 안 됩니다. 저 큰 고유를 미리 맛보는 한모금이자 그 자리로 이어지는 뒷목에 놓인 이정표일 뿐입니다. 다음에 화가 울컥 치밀거든. 그 불길을 한 박자 늦추고 가만히 지켜보십시오. 불이 잠시 잦아드는 그 틈에서 열반이 어떤 자리인지 아주 작기나마 느끼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의 불을 조금씩 시켜가면 삶에 대한 태도도 서서히 달라집니다. 예전 같으면 크게 요동처슬 앞에서도 마음이 한결 잠잔하게 머뭅니다. 가진 것을 잃어도 이내 무너지지 않고 서운한 말을 들어도 그 미움을 오래 품지 않게 됩니다. 바깥의 형편은 예전과 똑같아도 그 형편에 부딪혀 타오르던 마음만은 한결 가라앉는 것입니다. 열반의 고요는 우리를 둘러싼 세상을 억지로 바꾸어 주지 않습니다. 다만 그 세상에 부딪혀 들끓던 마음에 안에서부터 서늘하게 지켜줍니다. 예전에는 사소한 일에도 온종일 마음이 들끌곤 했다면 이제는 금 들끓음이 오래 머물지 않습니다. 불이 잠깐 붙더라도 이내 사그라들고 마음은 제 본래의 잔잔함으로 어렵지 않게 되돌아옵니다. 돌아올 자리가 있다는 것 그 하나만으로도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되어 줍니다. 그리하여 똑같은 자리에 서 있어도 마음만은 시원한 그늘에 든 듯 고요해집니다. 여기까지. 우리는 2세 도전을 하나씩 하나씩 만나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셋을 한 자리에 놓고 물러나 바라보면 한 가지가 뚜렷해집니다. 모상과 무화와 열반은 제각기 떨어진 세 가르침이 아닙니다. 실은 하나의 길로 곧게 끼어 있습니다. 새 도장이 어떻게 한 길로 이어지는지 그 결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무상을 깊이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 무화과 모습을 드러냅니다. 무화를 끝까지 사무치게 보면 그 끝에서 열반의 고요가 열립니다. 앞에 도장이 다음 도장을 그르고 그 도장이 다시 그 다음 자리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셋은 나란히 세워둔 세계의 팻말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밟아 가는 하나로 이어진 길입니다. 그렇다면 2세 도장 가운데 어째서 무상이 맨 앞에 놓이는가? 무상이 바로 우리가 가장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눈앞에서 꽃이 지고 계절이 바뀌고 얼굴에 주름이 느는 것은 누구나 날마다 겪는 일입니다. 반면 고정된 나가 없다는 무한은 곰곰히 파고 들어야 겨우 눈에 들어옵니다. 그러니 가장 알아보기 쉬운 무상을 실마리로 삼아 그 문을 열고 한 걸음 들어서면 안쪽에서 좀처럼 보이지 않던 무화가 서서히 드러납니다. 부처님께서 무상을 자주 앞세워. 설하시는 데에는 이렇듯 자상한 순서가 담겨 있습니다. 먼저 무상에서 무하로 건너가는 자리를 봅니다. 세상 모든 것이 잠시도 멈추지 않고 흐른다면 그 흐름 한가운데 홀로 변치 않고 버티는 무언가가 있을 수 없습니다. 또 마음도 쉼없이 바뀌어 가는데 그 어디에도 내 그대로인 나를 세워둘 자리란 없는 것입니다. 변하는 것들이 잠시 모여 나라는 이름을 이루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무산을 참으로 사무치게 본 일은 그 안에 고정된 나가 없다는 것을 저절로 알아봅니다. 무상과 무한은 서로 등을 맞든 한 진실에 두 얼굴입니다. 그런데 무산과 무화 사이에서 앞서 잠시 미뤄둔 물음이 고개를 듭니다. 모든 것이 변하고 실체가 없다면 우리는 어찌하여 이토록 괴로운가? 부처님께서는 이 자리를 두고 일책에 골라 이르시느라. 온 삶이 괴로움이라는 말씀을 말씀입니다. 이는 세상이 오로지 고통뿐이라는 어두운 넋두리가 아닙니다. 변하는 것을 변치 말라고 붙들고 실체 없는 것을 내 것이라 움켜쥐는 그 어긋남에서 괴로움이 피어난다는 뜻입니다. 모상과 무화를 바로 보지 못한 채 매달리기에 삶에 고가 되고 많은 것입니다. 바로 이 일체 기고가 무산과 무하에서 열반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됩니다. 괴로움의 뿌리를 똑똑히 보아야 그 뿌리를 놓는 자래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흐름을 조금 더 넓게 바라보면 부처님 가르침에 큰 얼개와 그대로 맞물립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의 첫자리에서 네 가지 진리를 설하십니다. 먼저 삶에는 괴로움이 있다는 것 그 괴로움에는 목마름이라는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원인을 끄면 괴로움도 사라진다는 것 나아가 그리로 이르는 길이 있다는 것을 함께 일러 주십니다. 방금 살핀 일체기고가 바로 첫 번째 진리요. 그 괴로움을 지피는 가래가 두 번째 진리입니다. 가래가 꺼진 열반이 세 번째 진리이며 무상과 무활에 관하는 그 닦음이 네 번째 진리 곧 길이 됩니다. 새 도장을 따라 걷는 이 여정이 트림 멜사. 그 네 가지 진리를 하나하나 밟아 가는 걸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길을 좀처럼 걷지 못하는 데에는 깊은 까닭이 하나 있습니다. 어리석음에 가려. 우리는 세상을 거꾸로 뒤집어 보아 온 것입니다. 덧없이 흘러가는 것을 도리어 내 그대로이리라 여깁니다. 붙잡을 실체가 없는 것을 굳건한 나라고 믿습니다. 매달릴수록 괴로운 것을 오히려 즐거움이라 착각합니다. 이렇게 뒤집힌 눈으로 보기에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이 좀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새 도전을 향한 통찰이 하는 일이 바로 이 뒤집힌 눈을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거꾸로 보던 것을 똑바로 돌려놓을 때 흐릿하던 길이 비로소 또렷이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그 뿌리를 어떻게 놓는가? 여기서 반드시 짚어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모상과 무화를 머릿속으로 아는 것만으로는 그 자리에 이르지 못합니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말 고정된 나는 없다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삶의 매 순간에서 몸으로 사무치게 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머리로 색이 남은 돌아서면 흩어지지만 온몸으로 사무친 통찰은 오래 닦는 가운데 뿌리를 내립니다. 부처님께서 무상과 무활을 거듭하느라 이르시는 까닭이 바로 그 길에 있습니다. 안진아 선아 보고 듣고 느끼는 그 자리에서 변의 감과 실체 없음을 몇 번이고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그 봄이 스윙 속에서 무르익을 때 붙잡으려던 목마름이 서서히 풀려 나가고 이치를 가리던 어둠도 조금씩 거쳐 갑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 길에서 괴로움의 뿌리를 끊어내는 힘은 이를 악물고 참아내는 의지가 아닙니다. 그대로의 창모습을 꿰뚫어 보는지에 바로 그 힘입니다. 억지로 욕심을 짓누르려 하면 눌린 욕심은 언젠가 더 크게 되튀어 오릅니다. 그러나 그 욕심의 대상이 본래 흘러가는 것이요. 붙잡을 실체가 없음을 참으로 꿰뚫어 보면 켜지려던 마음. 스스로 힘을 잃습니다. 무상과 무화를 향한 통찰이 그토록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버린 눈이 밝아질수록 매달리던 손은 저절로 느슨해지는 법입니다. 그 닦음이 실제로 어떤 모습인지 잠시 그려보겠습니다. 조용히 앉아 호흡 하나를 지켜보노라면 들이신 숨이 일어났다. 이내 쓰러지는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마음의 한 생각이 떠오르는가 싶으면 그 생각도 어느새 흩어져 사라집니다. 좋다 싫다 하는 느낌마저 잠시 머물다 슬며시 자리를 내어 줍니다. 이렇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는 가운데 머리로만 알던 무상이 어느 순간 가슴으로 내려앉습니다. 아 이것마저 붙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구나. 그 작은 알아차림이 나눌 수 있어요. 부산은 어느덧 지원되지 않는 실명으로 마음에 새겨집니다. 여기서 분명히 해둘 것은 용기를 단번에 뛰어넘는 지름길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남성이 한 번 이겼다 하여 딸의 엄마가 몸에 벳푸기도 어렵고 무화를 알려 하여 그녀로 길이 아니라 이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변해 가는 것을 붙잡으려는 마음을 한번 멈출 때 내 것이라 여기던 것에서 한 걸음 물러설 때 국내 키를 위해 첫발을 디딘 것입니다. 새 도장은 멀리서 우러러 볼 이름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한 걸음씩 밟아 갈 발판입니다. 그렇다면 이 새 발판을 하루하루의 어느 자리에 누워야 하는가? 이제 그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새 도장은 경전 속에 잠들어 있는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사람을 만나고 일을 하고 밥을 먹는 그 평범한 자리에서 살아 움직이는 지혜입니다. 먼저 삶의 변화가 닥칠 때 그것을 원망으로 막지 않는 일입니다. 우리 형편은 늘 옳은 일입니다. 애써 읽은 것이 한순간에 기울기도 하고 막막하던 자리에 뜻밖의 길이 열리기도 합니다. 잘 나갈 때 우리는 이 좋은 날이 언제까지고 이어지리라?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다 형편이 기울면 세상이 남한 등진 듯 억울해합니다. 그러나 오름과 내림이 본디번갈아 찾아드는 것입니다. 좋은 때가 그대로 머물지 않듯 힘든 때도 그 자리에 밀러 앉지 않았습니다. 이 이치를 마음에 두면 잘 될 때 옷줄하여 발을 헛딛이지 않고 안 된다. 주저앉아 스스로를 무너뜨리지 않게 됩니다. 형편이 바뀔 때마다 그저 흐름이 한 고비를 도는구나. 그렇게 담담히 바라보십시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2세 도장은 조용히 스며듭니다. 오래 곁을 지킨 이에게 서운함이 쌓일 때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원래 저렇다 하고 마음속에 못을 박아두면 그 못이 두고두고 나를 찌릅니다. 그러나 그 사람도 나처럼 매 순간 변해 가는 한 사람입니다. 오늘의 서운한 모습이 그 사람의 처음이자 끝은 아닙니다. 굳은 하나의 상으로 붙들지 않을 때 다쳤던 관계에도 다시 바람이 드나들 틈이 생깁니다. 가까울수록 기대가 크고 기대가 큰 만큼 서운함도 깊어지는 법입니다. 그 기대마저 한 웅큼 내려놓으면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이 한결 편안하게 다가옵니다. 자식을 대할 때에도 이 위치는 우리를 한결 지혜롭게 이끕니다. 부모는 흔히 자식을 제 삶의 연장으로 여기곤 합니다. 내가 이루지 못한 것을 자식이 대신 이뤄주기를 바라고 내 뜻대로 자라주기를 기대합니다. 부모도 자식도 숨통이 트입니다. 기대의 무게를 덜어낸 그 자리에 돌이어 더 따뜻한 정이 오가게 됩니다. 다음은 나라는 이야기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는 일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안고 살아갑니다. 나는 원래 소심하다. 나는 실패한 사람이다. 이제 나는 늙어 쓸모 없어졌다. 이런 이야기를 굳게 붙들수록 그 좁은 틀 안에 스스로를 올가매게 됩니다. 그러나 나라는 것은 한 자리에 굳어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어제 나와 오늘의 나가 이미 다른데 지난 한 때의 모습으로 남은 삶을 통째로 묶어 둘 이유가 없습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곱씹으며 자신을 벌하고 있다면 그 되새김을 이 자리에서 한번 내려놓아 보십시오. 그때 그렇게 했던 사람과 지금 이렇게 뉘우치는 사람은 결코 같은 자리에 멈춰 선 사람이 아닙니다. 나를 올가매던 이야기가 헐거워질 때 우리는 비로소 오늘을 새로이 살아갈 여지를 얻습니다. 예전 같지 않을 때도 이 지혜는 큰 위로가 됩니다. 어느 날 병이 찾아들면 우리는 어느새 나는 환자라는 한마디로 자신을 통째로 규정해 버립니다. 그 한마디에 갇히면 병이 삶의 전부를 집어삼키고 맙니다. 그러나 병은 잇몸에 잠시 깃든 하나의 조건일 뿐입니다. 아픔이 곧 나의 전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통증이 밀려왔다. 몰려가는 그 오르내림을 한 걸음 떨어져 가만히 지켜보십시오. 아픈 몸을 미워하며 싸우기보다 오늘 이 몸이 견뎌주는 만큼을 고맙게 여길 때 같은 병을 안고도 마음에 짐은 한결 가벼워집니다. 아직 오지도 않은 일을 미리 끌어안고. 애태우는 마음에도 이 지혜가 필요합니다. 종종 벌어지지 않은 앞이를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그려봅니다. 잘못되면 어쩌나. 저 사람이 떠나면 어쩌나 하고 오지 않은 나를 미리 알습니다. 그러나 그 앞일 또한 아직 정해지지 않은 채 흐르고 있을 뿐입니다. 오지 않은 것을 붙들고 난리라. 오늘을 흘려보내고 많은 것입니다. 걱정이 밀려들거든. 그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임을 가만히 짚어 보십시오.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한 가지에 돈을 모으면 안개 같던 불안은 어느새 옅어집니다. 남들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오르렁 내리락하는 자리에서도 새 도장은 우리를 붙들어 줍니다. 칭찬을 들으면 하늘로 솟았다가 험담 한마디에 땀으로 꺼지곤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세상에 바람을 두고 이익과 손실 칭찬과 비난이 번갈아 부는 여덟 갈래. 바람이란 이루십니다. 이 사람들은 잠시 스쳐 갈 뿐 어디에도 눌러앉지 않습니다. 오늘의 칭찬이 내일의 험담으로 뒤집히는 일도 흔합니다. 그러니 남의 말 한마디에 나를 통째로 실어 보내지 마십시오. 흔들리는 것은 바깥에 바람일 뿐 그 바람에 마음까지 휘청여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받은 깊은 상처를 오래도록 가슴에 품고 사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 위험을 놓아 버리면 상대가 이기는 것만 같아. 도리어 더 단단히 끌어안습니다. 그러나 그 미움의 불에 파들어가는 것은 상처를 준 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내 마음입니다. 정작 그 사람은 이미 저만치 흘러가 다른 삶을 살고 있는데 나만 그날 그 자리에 못 박힌 채 어제의 불씨를 날마다 되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미움을 내려놓는 일은 그 사람을 위해 베프는 선심이 아닙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나 자신을 그 불길에서 건져내는 일입니다. 오래 묵은 영광을 한 사람 풀어 버리고 뜻이 되어지던 마음자래에 비로소 서늘한 바람이 스며듭니다. 그 사람을 미워하느라 태워온 세월이 그제야. 온전히 내 것으로 되돌아옵니다. 셋째는 내려놓는 고요를 하루 가운데에서 짧게라도 만나는 일입니다. 고요는 조용한 산사나 한가로운 날에만 깃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두는 자리마다 피어납니다. 특별한 자리를 따로 마련할 것도 없습니다. 차 한 잔을 마실 때 그 따뜻함에 온전히 머물고 길을 걸을 때 발바닥에 닿는 땅의 감촉에 마음을 두어 보십시오. 그릇을 씹는 그 잠깐도 흐르는 물소리에 마음을 맡기면 더없는 쉼이 됩니다. 온갖 생각으로 들끓던 마음이 하는 일 그와 같아서 앞순간이 뒷순간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되 한 덩어리로 굳어 머무는 나는 그 안에 없습니다. 그러니 무한은 나를 지워 없애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나를 단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