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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는 것까지만이다. 더 이상은 안 돼." 품속을 뒤지면 바로 손을 쓰겠다는 엄포다. 동생들의 복수를 위해서 손을 쓰는 것은 인정하지만 비도에 손대는 것은 안 된다는 소리였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확인을 하고 싶었다. 조금 전 저놈의 품속을 뒤지기 위해서 손을 뻗었을 때 자신이 착각했다고 생각했던 놈의 몸놀림, 분명히 눈을 뜨고 있었는데도 움직임을 놓친 것이다. 그리고 놈이 적들의 숫자를 조금이라도 줄여줄 수만 있다면 그것 또한 자신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귀령마제와 한편이 되었다지만 저들의 실력도 만만치 않고, 귀령마제 또한 언제 변심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잘라버린 중지에서 아픔이 밀려왔다. 독기운의 침투를 막기 위해서 내공을 그쪽으로 밀어내고 있는 것도 쉽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그의 눈에 잔독사마라고 했던 인물 중 한 명이 놈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놈! 조용히 있었으면 조금이라도 더 살 수 있었을 텐데…." 잔독사마의 셋째인 신기남(申琦男)이 백산을 향해 다가서면서 하는 소리였다. '최대한 빠르고 간단하게 죽여야 한다. 유령시마와 귀령마제가 보고 있고, 지금은 손을 잡았지만 나머지 저들도 결국은 우리의 적이다. 어설프게 하다가는 저들에게 약점만 잡힐 뿐이다.' 신기남은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잔독마수를 극성으로 끌어올린 그의 양손이 새파란 빛에 싸여 있었다. "애송아, 잘 가라!"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신기남이 양손을 백산의 머리 쪽으로 거칠게 휘둘렀다. 일수에 머리를 으깨버리려는 동작이었다. 산산이 부서진 머리를 상상하고 있던 신기남의 얼굴이 놀라는 표정으로 변했다. 손에 걸리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공격권의 밖에서 조금 전의 표정 그대로 여전히 웃고 있는 놈의 얼굴이 보였다. "놈!" 많은 적들이 보고 있는 데서 공격이 실패하자 창피함이 앞섰다. 이름도 없는 애송이가 전력을 다한 자신의 일장을 가볍게 피한 것이다. 표정이 굳어진 신기남의 움직임이 점점 격렬해지고 빨라졌다. 푸른 강기에 휩싸인 오른손을 이용하여 백산의 머리를 잘라버릴 듯이 휘두르고,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만 젖혀 가볍게 피해버리는 놈을 향해 왼손으로 심장을 비쾌하게 찔러갔다. 한 발짝 뒤로 빠지며 몸을 모로 돌려 피해버리자 이미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찔러가던 동작 그대로 몸통을 잘라버릴 듯이 횡으로 베어나갔다. 역시 고수는 고수였다. 찔러가던 동작을 멈추고 횡으로 베는 과정이 마치 한 초식처럼 너무나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었다. 그것도 상대의 움직이던 발이 땅에 닿기 전에 취해진 동작이었기에 더욱더 위력적이었다. 그 순간 백산의 대응은 더욱더 놀라웠다. 한쪽 발을 허공에 둔 채 그 자리에서 꺼지듯 뒤쪽으로 넘어지며 허공에 있던 오른발이 아주 가볍게 신기남의 단전을 향해 뻗어졌다. "헉!" 신기남의 입에서 다급한 비명이 새어나왔다. 그 순간에 철판교 수법으로 피하는 것도 경악할 일인데 바닥에 닿지도 않았던 놈의 발이 자신의 단전을 향해서 날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피할 여유가 없었다. 다음 공격을 하기 위해서 내공을 모아 두었던 오른손을 내려 재빨리 단전을 방어했다. 자신이 아무리 고수라지만 단전을 가격당하면 잠시 동안 힘을 쓸 수가 없다. 그 잠시의 시간이란 고수들에게 있어서는 수십 번도 죽을 수 있는 그런 긴 시간이질 않는가. 퍽! 손과 발이 부딪치는 소리였다. "으윽!" 놀랍게도 물러난 사람은 신기남이었다. 단순한 발길질과 강기에 휩싸인 손이 부딪쳤는데 강기에 싸여있던 손의 주인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난 것이다. 신기남의 손을 차버린 백산이 거의 땅에 붙을 듯이 누웠던 자세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백산의 동작도 모두 한 초식처럼 연결되어 너무나 자연스럽게 보였다. 몸을 일으킨 다음 동작은 더 가관이었다. 아직도 허공중에 있는 발을 까딱거리며 신기남을 향해서 어서 공격해오라 하고 있었다. "이익!" 신기남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잔독사마라는 자존심이 이름 석자도 알려지지 않은 무명 잡배에게 무참하게 구겨졌다. 이제는 자신에게 들어오라고 하고 있다. 신기남은 비호처럼 돌진하기 시작했다. 등에 무기도 있었지만 잔독마수라는 수강이 있었기에 박투술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등에 있는 무기를 사용하기에는 아직 그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그의 양손이 직선과 곡선을 그리며 찌르고, 베고, 찍고 손으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동작을 이용해서 백산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백산도 그냥 피하지 않았다. 신기남이 공격한 후의 허점을 찾아서 반격하고 있는 것이다. 오른손을 휘둘러오면 머리를 숙여 피하고 가슴을 공격하고, 왼손으로 베어오면 몸을 뒤로 젖히며 다리로 무릎을 공격하는, 신기남의 공격을 피하면서도 백산의 반격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투귀 오구가 이야기했던 팔과 다리를 모두 이용하는 격투술, 신기남이 손만을 이용한 단조로운 공격임에 반하여 백산의 공격은 두 팔과 두 다리 그리고 온몸을 이용하는 싸움기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상했다. 끊임없이 공격하고 있는데도 신기남에게 별반 타격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격투술은 맞는 것 같은데…뭔가 이상해!" 유령시마 예인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산이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은 고도의 기술임에는 틀림없지만 뒷골목의 건달들이 주로 보여주는 그런 격투술에 불과할 뿐이었다. 정권을 뻗었다가 실패하면 팔꿈치가, 그 다음은 어깨가, 전신의 모든 곳을 이용해서 상대를 공격하는 기술. 분명 굉장한 공격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무인들은 이러한 기술을 쓰지 않는다. 장법(掌法)과 권법 그리고 온몸 곳곳에 암기를 숨겨두고 여차하면 발사할 수 있는 그런 무인들의 싸움에서 저런 식으로 몸을 밀착시켰다가는 자신도 모르게 암습을 당하거나 장법이나 지공(指功) 등에 당하기 딱 좋기 때문이다. 그러나 놈의 공격은 너무나 정확했다. 상대와 한 치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도 상대의 모든 공격을 무력화시키고 있었다. "맞아! 저것은 유권(柔拳)이야." 유령시마가 백산이 펼치고 있는 손과 발놀림이 단순한 삼류 격투술이 아닌 또 다른 힘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아보았다. 유권(柔拳) 흔히 격공장(隔空掌), 또는 통배권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무공. 어떤 물체를 가격하여 외부는 멀쩡하게 보이지만 내부만 파괴하는 무공으로 주로 외공 고수와 싸울 때 많이 쓰이는 기술이다. 가장 유명한 격공장으로는 무당파의 면장이 있다. 사실 무당파에서도 면장을 그렇게 대단한 무공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도 익히지 않고 굴러다니던 무공기서로 속가 제자들에게나 전수하던 그런 무공이었다. 체면과 멋을 중요시하는 정파인들로서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무공이 성에 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무공으로 인정하지도 않던 면장을 극성으로 익힌 속가 제자 중 한 명이 외공 중 최고라는 금강상피공을 익혀 도검이 불침하는 피부를 가졌다는 마인을 제압한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각 문파에서는 격공장에 대해서 연구를 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거의 모든 문파에 격공장 종류의 무공이 하나씩은 존재하고 있다. 격공장, 통배권, 면장 등 그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유권이란 것은 손으로 펼치는 것이 대부분이다. 워낙 섬세하고 고도의 기술이다 보니 가장 자유롭고 다루기 편한 손을 이용하여 장이나 권으로 펼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단 한 가지만 빼고. "그래! 저것은 용왕유권(龍王柔拳)이야! 하지만 어떻게…." 유령시마가 부지불식간에 외치는 소리였다. 그도 이름만 알고 있을 뿐 실제로 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유권 중 최고라는 용왕유권, 권(券), 장(掌), 지(指)를 포함한 신체의 모든 관절을 이용하여 펼칠 수 있다는 소림의 무상절기, 무당의 면장보다 이전에 만들어졌으나 너무 난해한 무공 구결 때문에 익힌 자도 없었고 수백 년 전에 실전되어 그 이름만이 전설로 전해지고 있다던 그 무공. 지금 저놈이 펼치고 있는 것을 보면 용왕유권이 확실한 것 같았다. "그럼 저것이 소림에서 실전되었다던 그 용왕유권이란 말이요?" 귀령마제 마자광이 놀라는 얼굴로 유령시마를 쳐다보았다. 소림의 제자 같이도 보이지 않은 자가 어찌 소림의 무공을 익히고 있단 말인가. 그것도 실전된 지 수백 년이나 지났다고 알려진 무공을…. 그들이 쳐다보고 있는 사이에 비무의 향방이 정해지고 있었다. 거칠게 몰아치던 신기남의 몸놀림이 현저하게 둔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지켜보고 있는 중인들의 눈에도 확연히 나타나고 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백산을 공격하고 있는 신기남의 표정에 나타난 낭패의 기색을. "등에 있는 무기는 폼으로 들고 다니는 것인가?" 신기남의 가슴을 가볍게 쥐어박고 훌쩍 물러나며 하는 말이었다. 일각 이상을 빛살 같은 속도로 싸운 사람 같지 않게 호흡은 고요했다. "셋째야, 괜찮으냐?" 잔독일마 만효우가 나지막한 비명을 토하며 뒤로 물러서는 신기남을 부축하며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그도 모든 것을 보았다. 아무런 타격도 없을 것 같은 놈의 손과 발놀림에 자신의 셋째가 충격을 받고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형님! 보통 놈이 아닙니다. 합공을 해야 합니다." 더 이상 서 있을 기력도 없었다. 처음에는 별것 아니라 생각했다. 별다른 고통도 없었고 충격도 없었다.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내부가 엉망이 되어 있었다. 무기 한번 꺼내보지 못하고 철저히 당해버렸다. 자신은 이곳에서 죽어갈 것이다. 이 독연 속에서는 운기조식도 할 수 없다. 내부의 상처는 점점 커질 것이고 독 기운까지 침입하게 될 것이다. "용왕유권은 어디서 배웠느냐? 소림의 제자냐?" 그곳에 있던 무림인들의 얼굴이 경악스런 표정으로 변했다. 유령시마가 소림의 문하냐고 물었고 용왕유권이라고 했다. 천년 전부터 내려오는 무림의 불문율, 소림의 문하는 건드리지 마라. 부처의 징벌이 내리게 된다. 모든 면에서 한없이 자비로운 소림이었지만 자파의 제자에 대한 것만큼은 가장 철저했다. 소림의 제자를 핍박하게 되면 그가 마인이건 정파인이건 상대를 가리지 않고 응징해왔다. 자파 제자의 잘못은 소림에서만 다스릴 수 있는 것이지, 결코 다른 이들의 간섭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광오했다. 무림인들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소림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소림의 철칙은 영원히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고 지금껏 지켜지고 있는 것이다. "용왕유권? 아니야, 이것은 광풍유권이라고. 내가 창안한 것이고. 그래서 지금 시험을 하고 있는데 그런 대로 쓸만해."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하는 말이다. 백보신권을 광풍신권, 용왕유권은 광풍유권으로 개명하여 자신이 창안한 무공이라 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다만 소림의 제자가 아니라고 했으니 그것이면 족했다. "선배들! 더 이상은 이곳에서 견딜 시간이 없소. 빨리 해결합시다." 같이 합공(合攻)을 하자는 소리였다. 이 독연 속으로 들어온 지 벌써 한 시진이 넘었다. 더 이상은 버틸 재간도 없거니와 셋째가 죽어가고 있었다. 만효우의 심정은 다급했다. 보물이 주는 유혹은 이래서 무서운 것인가. 아니면 친 혈육이 아니라서 정이 부족해서 그런 것인지 비록 의형제라지만 셋째인 동생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구할 생각은 하지 않고 비도에 더욱 욕심을 내고 있는 만효우였다. "좋네! 나도 소림의 절대 절기인 용왕유권을 한번 견식하고 싶구먼…." 이름도 없는 강호의 젊은이를 합공한다는 것에 약간 찔리는 구석이 있었는지 용왕유권을 견식하고 싶다는 말로 얼버무리며 유령시마가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드디어 그곳에 있던 모든 무림인들이 각자의 무기를 뽑아들고 백산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하나, 서로가 전력을 다할 수 없다는 것이다. 놈을 죽이더라도 다시 자신들끼리의 승부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누구 하나 놈에게 진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 않고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해서 말이 합공이지 그들이 형성한 포위망은 이곳저곳이 순 허점투성이였다. 그런 와중에서도 전력을 다하는 이가 있었으니 이제는 잔독이마로 바뀐 잔독사마의 첫째 만효우와 둘째 정귀상이었다. 자신들의 독문 무기인 잔독겸(殘毒鎌), 농부들이 쓰는 낫처럼 생겼으나 손잡이 부분이 더 길었고, 직각으로 꺾인 부분에 칼날이 하나 더 달려있는 이른바 쌍초겸이라 알려진 무기다. 독까지 발랐는지 퍼런 빛으로 빛나는 잔독겸 두 자루를 백산을 향해서 정신없이 휘두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저돌적인 공세에 나머지 인물들은 뒤로 물러나 포위망을 형성한 채 백산이 허점을 보이면 그곳을 향해서 가볍게 장력을 날리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애당초 합공이란 말 자체가 우스웠다. 서로 죽이려 했던 이들이 조그마한 쥐새끼 한 마리를 잡기 위해 합공을 하다니? 저놈과 싸우다 놈을 죽이면 그것도 괜찮고 공격하던 놈이 죽으면 그것도 더욱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닌가. 누가 죽어도 자신들에게는 하등의 손해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백산의 몸놀림도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자신의 요혈을 향해서 날아오는 네 개의 잔독겸을 피하며 교묘하게 두 사람의 사각지대를 뚫고 들어가 자신이 광풍유권이라고 했던 용왕유권으로 만효우와 정귀상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의 용왕유권은 신기남에게 펼쳤던 것과는 또 달랐다. 무서운 파괴력을 동반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산의 위력적인 공격에 흠칫 놀란 만효우와 정귀상이 재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막무가내로 공격하던 그들의 표정이 심각해지더니, 잠시 후 이인 합격진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들도 백산을 정식 상대로 인정한 것이다. 정귀상이 백산의 하체를 향해 잔독겸을 휘두르고 이를 피하기 위해서 허공으로 솟아오른 백산을 향해 뒤에 있던 만효우가 정귀상의 머리 위로 뛰어넘으며 백산의 몸통을 향해 잔독겸을 휘두른다. 둘이면서도 하나이고, 하나이면서도 둘인 이인 합격진이 무서운 위력으로 백산을 몰아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질풍 같은 합격진에 견디지 못하는지 백산의 발놀림이 어지러워지고 온몸에 허점을 보이며 연신 뒤로 물러나는 것이었다. 백산이 밀려나고 있는 곳은 독각삼수 두 명이 서 있는 위치였다. 계속해서 물러나고 있는 백산을 쳐다보는 독각삼수의 첫째인 방만구의 눈에 악독한 빛이 흘렀다. 바로 그 순간 잔독사마의 공격에 당했는지 그의 바로 일장 앞에 무방비 상태로 다가오는 놈의 등이 보였다. 방만구는 동생인 방만해와 눈빛을 교환했다. 일격에 끝내버리자는 신호였다. "염천장(炎天掌)!"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외침이 터져 나오고 뜨거운 열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자신들의 최고 절기인 염천장, 화공을 익힌 덕에 이 독연 속에서도 그들은 무사하게 서 있었던 것이다. "으악!" 처절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방만구와 방만해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교환했다. 바로 지척에서 공격했으니 온몸이 부서졌을 것이고, 저렇게 처절한 비명소리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전방을 주시하던 독각삼수 방만구와 방만해가 경악스런 표정을 지으며 자신들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자신들의 염천장에 맞아서 죽어있는 자는 앞에서 등을 보이고 있던 놈이 아닌 힘을 합치기로 했던 잔독사마 중 남은 이 인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 모두 가슴팍이 으스러지고 뼈가 산산이 부서진 채 그 자리에서 절명해버린 것이다. "자기편을 죽이면 벌받아, 벌. 하기야 조금 전까지 서로 죽이자고 싸웠던 놈들이니…." 등 뒤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와 함께 방만구와 방만해는 머리가 아득해짐을 느꼈다. 백산이 두 사람의 머리에 가볍게 손을 대었다 떼는 순간 그들의 머릿속은 이미 가루가 되어버린 것이다. 순식간에 네 명의 고수가 이승에서 하직인사를 하고 말았다. "으음, 금강부동신법(金剛不動身法)!" 이미 죽어버린 사 인을 제외하고 그곳에 있던 모두는 보았다. 독각삼수의 공격이 등에 작렬하려는 순간 환상처럼 사라져버린 놈의 몸놀림을. 그리고 사라졌던 그의 신영이 처음부터 독각삼수의 뒤쪽에 서 있었다는 듯이 나타났고, 그들을 처치하는 장면이 마치 정지된 그림이 지나가는 것처럼 선명하게 보였던 것이다. 쾌에 쾌를 넘어선 무변(無變)의 경지라는 금강부동신법, 그것은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백산이 전개한 신법은 금강부동신법의 모체인 무상신법(無上身法) 이었으니 결코 그들이 알 리가 없는 것이다. "소림의 제자가 맞기는 맞는 모양이군, 금강부동신법까지 사용하는 것을 보면." 본인이 아니라고는 했으나 소림의 제자도 아닌 자가 용왕유권에 금강부동신법까지 펼칠 리는 없는 것이다. 이제는 소림의 제자라 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자비를 근간으로 하는 소림의 제자가 자신들을 헤치려 하고 있는 바에야 그를 죽인다 한들 소림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강호 무림의 최고 신법이라는 유령신법과 소림의 무상신법과의 대결이었다. 두 사람의 몸놀림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평소 고수라고 자부하고 있던 삼절마창 가득오를 비롯하여 뇌음천권 정오 등 그곳에 있는 무림인들은 그 누구도 두 사람의 움직임을 잡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귀령마제만이 흐릿하니 두 사람의 형태만 짐작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놀라움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자신들이 누구인가! 칠십 년 전에도 강호 제일의 고수였다. 고수 소리를 들은 지 일 갑자가 넘었다는 소리다. 그런 자신들과 대등하게 싸우고 있는 저 젊은 놈은 도대체 어떻게 무공을 익혔다 말인가. "으악!" 그가 이런 상념에 잠겨있을 때 또다시 포위망 쪽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유령마제와 장력을 교환하고 뒤쪽으로 날아가던 놈의 손이 앞으로 뻗어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채 뒤로 날아가고 있는 삼절마창 가득오. 그렇게 죽어가는 순간을 본인도 느끼지 못했는지 공격 자세를 취하고 있는 삼절창은 아직도 그의 손에 그대로 쥐어져 있었다. "백보신권(百步神拳)?" 귀령마제의 나지막한 외침이었다. 이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저놈은 분명히 소림의 문하다. 다행히 이곳에 자신들 말고는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귀령마제 마자광의 눈이 악독하게 빛났다. '어차피 죽이려 했던 놈들…조금 일찍 죽는다고 달라질 것은 없겠지….' 자신의 양손에 극성의 귀마조(鬼魔爪)를 운기했다. 그리고 자신의 목표물들을 흘낏 쳐다보니 삼절마창 가득오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는지 유령마제와 같이 싸우는 놈의 행동만 주시하고 있었다. 삼절마창의 죽음을 목격한 그들은 이젠 포위망이고 뭐고 없이 남은 네 명이 한 곳에 모여서 백산만 경계하고 있는 것이었다. "으윽! 컥! 억! 크윽!" "당--신이…왜?" 네 마디의 참담한 비명과 함께 뇌음천권 정오를 포함한 사 인이 지르는 마지막 소리였다. 전방만 주시하고 있던 네 명의 뒤로 돌아간 귀령마제가 자신의 귀마조로 그들의 사혈을 찍어버린 것이다. 너무도 허무한 종말이었다. 천하제일이라는 꿈을 좇아 이곳까지 왔고 독연까지 뚫으며 목숨을 건 도박을 했다. 그런데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상황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된다는 무림의 생리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어차피 제거해야 할 자들인데 시간을 좀 앞당긴 것뿐이오. 그리고 우리가 소림의 제자를 해친 것에 대해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고…." 싸움을 멈추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유령시마 예인상을 향해서 하는 말이었다. 천하가 비좁다 하던 이 노 마두 두 명이 소림을 겁내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태산북두라는 소림이 주는 무게는 무거웠다. 아무리 뛰어난 무공을 가지고 있어도 나 홀로 독불장군은 없다. 비록 무공이 고강하다 하더라도 세력이 없으면 언제나 약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 무림이라는 세계다. "이봐! 뼈다귀, 내 밥을 왜 네놈이 처먹어. 새로 창안한 무공을 연습하려면 아직 멀었는데." 그랬다. 지금 백산은 마불신승이 전해주었던 소림의 절기들을 익숙하게 펼치고자 실전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익히기 위해서 연습을 하는 것이 아니고 광견조에게 전수하기 위해서였다. 초식을 일러주는 것으로는 결코 무공을 전수할 수 없다. 일러준다고 해서 이해할 놈들도 아니고…. 소림의 무공을 펼칠 때 몸속에서 움직이는 진기의 변화를 통해서 무공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 다음에 진기의 이동경로를 숙지하여 무공을 전수하는 방법밖에 없다.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다. 몸으로 때워야 하는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네놈이 시험대상이 되어야 해!" 백산이 외침과 함께 귀령마제를 향해 자신의 손을 천천히 밀어냈다. 순간 찬연히 솟아나는 불광(佛光), 나한 모양의 거대한 신장이 천천히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헉! 아라한신권(阿羅漢神拳)." 귀령마제의 입에서 또다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제 더 이상 놀랄 것도 없다고 생각했건만 저놈에게서 나오는 권은 모두가 소림에서 실전되어 전설로만 내려오던 무공들이 아닌가! 마치 산책 나온 나한(羅漢)처럼 자신을 향해서 천천히 다가오는 기세는 그가 피할 수 있는 모든 방위를 차단하고 있었다. 방법은 한 가지 정면대결밖에 없는 것이다. "쇄비장(鎖秘掌)!" 이를 악문 마자광의 일갈이었다. 그의 손을 떠난 검은색의 강기가 거대한 나한상을 향해서 엄청난 속도로 밀려갔고 두 개의 장력은 거칠게 충돌했다. "으윽!" 입안 가득 피를 쏟아내며 귀령마제가 뒷걸음치고 있었다. 단 일초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하고 패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귀령마제와 장을 교환한 백산은 그대로 있지를 않았다. 돌아오는 반탁력에 몸을 싣고 자신을 치기 위해서 기회만 노리고 있는 유령시마를 향해서 양손을 합장하듯 안으로 모았다. 그리고 나오는 자그마한 외침소리. "광풍청강수!" 자기 딴에도 소림사에 미안했나 보다, 엄연히 존재하는 무공 이름을 앞글자만 바꿔서 자신이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지금 펼치고 있는 무공들은 불공 냄새가 너무 진했다. 그래서 나오던 목소리가 줄어든 것이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위력은 엄청났다. 관음보살(觀音菩薩)이 제천대성 손오공을 굴복시킬 때 사용했다는 관음청강수( 觀音靑剛手), 무려 천여 개의 손바닥이 유령시마를 향해서 물밀듯이 밀려오고 있었다. 한 마디로 손바닥의 벽이었다. 그가 가장 자신하는 유령신법으로도 피할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강호를 뒤흔드는 초극 고수들이 소림을 건들지 못하는 이유가 확연히 드러나고 있었다. 아무리 실전 무공이고 절기라고 하나 자신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저 무공에 정녕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령개천공(幽靈開天功)!" 자신을 향해서 밀려오는 천여 개의 수강을 향해서 전력을 다한 유령개천공이었다. 지난날에도 최고였던 그의 독문 무공을 칠십 년 동안 보완하고 또 보강해서 다시 재정비한 무공이었다. "크윽!" 그러나 결과는 너무 허무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수강을 다 막지 못하고 왼쪽을 허용하고 말았다. 왼팔에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겉보기에는 멀쩡한데 이미 팔의 내부가 가루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놀랍게도 놈은 관음청강수에 용왕유권을 섞어버렸다. 이건 차라리 잘린 것만 못하다. 유령신법을 전개하는데 거치적거리기만 할 뿐이다. 잘라버리고 싶지만 시간적인 여유를 주지 않는다. 놈의 신법이 더욱 경악스럽게 변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아예 흔적이 없다. 허공에서 솟아나는 것처럼 그냥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그리고 지금 귀령마제를 향해서 펼치고 있는 저 무공, 아홉 개의 연꽃 모양의 강기가 찬연하게 빛나는 저것, 바로 구련조화인(九蓮造化印)이다. 이제는 놀라고 싶어도 놀랄 수도 없다. 움직이고 싶어도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절대적인 힘 앞에서 더 이상 발악해봐야 자신만 초라해질 뿐인 것이다. 그런 유령시마의 눈에 귀령마제 마자광의 최후가 보였다. 이마에 선명한 연꽃 모양의 인(印)이 찍히며 뒤쪽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유령시마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온몸을 지탱해주던 기력이, 자존심을 키워주던 정신이 나가버린 것이다. 그 자리에서 빌어먹을 소림(少林)이란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너만 살려주도록 할게, 약속은 약속이니까." 넋이 빠져있는 유령시마의 품속에서 주머니를 꺼내며 백산이 하는 말이었다. 주머니를 뒤집어서 그 내용물 중 하나를 유령시마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주먹을 꼭 쥐어주며 그의 볼을 툭툭 치면서 한마디 더 하는 것이었다. "힘내라고! 살다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거지, 이까짓 일로 뭘 그러나. 그럼 잘 가라고." 새파란 놈이 백 살이 넘은 노인네에게 인생이 어쩌고저쩌고 하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는 몸을 돌려 휘적휘적 사라지는 것이었다. 너무나 고요한 적막감에 퍼뜩 정신이 돌아온 유령시마는 가만히 자신의 볼을 꼬집었다. 꿈이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그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이 사실이 꿈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볼을 꼬집기 위해서 손을 펼 때 바닥으로 떨어진 것을 바라보았다. 놈이 힘내라며 자신에게 주고 간 것이다. 그것을 바라본 순간 왠지 모를 설움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구리돈 한 문. 유령시마라는 별호를 얻은 이후 단 한 번도 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노인이 울고 있었다. 며느리에게 구박받고 쫓겨난 노인네처럼 서럽게 울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살았으니까 가야겠지?" 실컷 울고 나니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되었는지 천천히 일어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귀령마제를 포함한 열한 구의 시신에는 피 냄새를 맡은 독물들이 새카맣게 들러 붙어있었다. "내 다시는 강호에 나오지 않는다." 그 약속을 지키겠다는 듯이 놈이 주고 간, 원래는 자기 것이었던 구리돈 일 문을 꼭 쥐어보았다. 그러나 조용히 사라지고자 했던 그의 맹세는 독령곡을 나서면서부터 철저히 무너졌다. 독연 속에서 들려오는 외침 때문이었다. "유령시마 예… 인상이 비도를 탈취…했다!" 죽기 전 마지막 발악을 하듯이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하면서도 독령곡 외부에 있던 모든 무림인에게 전달된 그 한마디, 유령시마의 고난은 이제 시작이었다. 누가 믿어줄 것인가, 소림의 무공을 익힌 놈에게 당했다는 사실을. 그것도 일반 무공도 아닌 전설 속에나 존재하던 무공이었던 것이니….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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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독합니다,
즐독입니다
즐~~~감!
즐감합니다.
즐감하고 감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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