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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5일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제1독서 : 묵시 14,1-3.4ㄴ-5
복 음 : 루카 21,1-4
그때에 1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2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3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인간은 자신이 더 많은 정성을 들인 것일수록 더욱 큰 애정을 느낍니다.
어떠한 것이든 자신의 시간과 노력과 자원을 많이 들일수록
그 안에서 더 많은 것을 느끼고, 더 큰 의미를 가지게 되며,
더 많은 것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내 것을 더 많이 내놓았을 때,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떤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부은 사람만이
그 결과에 만족할 줄 알고, 다른 사람의 결과를 진심으로 칭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얼마간만 사용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노력을 과소평가하고,
다른 사람의 업적을 진심으로 칭찬할 줄 모릅니다.
성실하게 노력한 사람만이 성실함과 노력의 진가를 알고,
자신의 부족함을 알아 참으로 겸손할 수 있습니다.
적은 노력으로 좋은 성과를 내는 효율성을 자랑으로 여기고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지 않는 사람은,
노력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진정한 겸손을 알기 어렵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 온전히 내맡겼을 때, 많은 은총과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기도와 봉사 등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었을 때, 더 많은 체험을 하게 됩니다.
최선을 다한 신앙인이 다른 사람의 신앙을 존중하고 경탄할 줄 압니다.
내가 가진 일부를 봉헌하는 것과 삶 전체를 봉헌하는 것은
그 체험하는 바가 다릅니다.
이웃에게 자선을 베풀 때에 남는 것 얼마를 주는 것보다,
나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떼어 나누어 줄 때 더욱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궁핍한 가운데 모든 것을 봉헌한 과부가,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예물을 바친 부자보다 더 많은 것을 얻게 되듯 말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책에서 미국에 이민하여서 아이들을 잘 키우고,
30년간 부부싸움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노부부의 행복한 결혼 생활 비결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민 오면서 이 부부는 서로 약속했습니다.
남편은 화가 나고 섭섭한 마음이 들면 말없이 산책하러 나가고,
아내는 화가 나고 기분이 좋지 않으면 앞치마를 거꾸로 걸쳐서 설거지를 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고서 상대방의 마음 상태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보이지 않는 마음까지 알아채기란 불가능합니다.
“몇 년을 같이 살았는데, 척하면 알아야지.”라고 말하지만,
상대방은 또 이렇게 항변하지요. “말해야 알지.”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알아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더구나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다면 더 큰 믿음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나약한 인간이기에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서 위 노부부의 노하우를 따르면 어떨까요?
지혜의 삶을 사는 분을 많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그 지혜를 볼 수 있고,
그 지혜를 배워서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지혜를 보려고 하지 않고, 또 보더라도 부러움만을 가지면서
‘내 배우자는 왜 그럴까?’라며 원망하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조금더 관심갖는 삶을 살았으면 합니다.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면서 또 쉽게 단죄하는 어리석은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지혜를 나누고 사랑을 나누며 살라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런 가운데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헌금함에 넣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적은 헌금을 한 이 과부를 우습게 봤을 것입니다.
이 헌금함은 공개되어 있는 곳으로, 주로 부자들만 헌금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과부의 정성 어린 마음만을 보십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생활비 전체를 넣은 과부의 그날 저녁은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에게 하느님이 먼저였고,
그래서 가지고 있는 모두를 헌금함에 넣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께 인정받습니다.
우리도 이 지혜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에게 인정받는 삶이 아닌, 하느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여인이야말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신심 깊은 가난한 과부를 만납니다.
그는 비록 렙톤 두 닢을 예물로 바쳤지만, 그것은 자신이 가진 전부였습니다.
그것은 아들과 함께 먹고 죽을 작정으로
마지막 빵을 만들면서도 엘리야에게 바쳤던 사렙다의 과부(1열왕 17,12)처럼.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일이었습니다.
이토록 전부를 예물로 바침은 주님께 대한 전적인 내맡김이요 믿음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진정한 마음을 바치는 표현이요, 자신보다 주님을 앞세우는 표시였습니다.
마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여관으로 데려가서
여관 주인에게 그 사람을 돌봐달라고 내놓은 그 값진 두 데나리온과 같을 것입니다(루카 10,35).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많은 양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마음으로 바치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중히 여기고, 무엇을 앞세워야 하는 지를 말해줍니다.
곧 봉헌은 자신의 계산에 따라 다 쓰고 남은 조각을 ‘나중에’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먼저’ 바치는 믿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녀는 과부의 딱한 처지인데도 불구하고,
곧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진 전부를 ‘맨 먼저’ 앞세워 바쳤던 것입니다.
대체 무엇이 이토록 그녀로 하여금 그의 전부를 바치게 하였을까?
그것은 소중하고 귀한 분을 만난 까닭이 아닐까요?
전부를 건네주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주군이신 분을 만난 까닭이 아닐까요?
바로 그러한 분을 만나면 자신의 전부를 바치지 않고는 못 배겨나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실 우리는 그 소중하고 귀한 분을 이미 만났습니다.
그러니 여기 이 자리에 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을 향한 사랑이 더 깊어 가는지,
혹은 퇴색되거나 변하지는 않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전부를 바쳐 그분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가난하면서도 전 재산을 봉헌한 이 과부에 대해서
“교회를 나타내는 신비로운 표상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전부를 산 제물로 바쳐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오늘 저는 이 가난한 과부의 봉헌을 통하여
나의 삶이 무엇을 우선하고 무엇을 앞세우는 삶인지를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진정 무엇을 바치고 있는지, 혹은 전부를 바치고 있는지를 봅니다.
나는 오늘 무엇을 봉헌할 수 있을까요?
대체 무엇을 봉헌해야 할까요?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궁핍한 가운데에서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4)
주님!
온 마음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섬기지 않았고, 온 시간과 열정을 다하여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당신보다 제 자신을 앞세우며 살아왔습니다.
기도하면서도 마음을 다하지 않았고, 먼저 바치기보다 나중에 바쳤습니다.
당신은 저의 전부이오니, 저의 전부를 바치게 하소서. 아멘.
부분은 전체보다 많을 수 없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오래전 일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자!’고 말하면서도 비교하였습니다.
본당 사목을 하면서 현 임지에서 최선을 다할 생각은 안 하고 전 임지와 견주었습니다.
추수 감사미사를 봉헌하면서 본당 규모가 큰 것에 비하면,
감사예물과 곡물이 적게 봉헌되었다고 생각하며 서운해한 적도 있습니다.
하느님께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준비하지 못한 자신은 생각하지 않고,
물질에 마음을 빼앗긴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빈곤한 과부를 칭찬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생활비 전체를 예물로 바쳤기 때문입니다.
그에 반해 부자들은 풍족한 데서 일부만을 바쳤습니다.
부자가 바친 예물은 가난한 이의 것에 비하면 훨씬 많은 금액이었지만
예수님은 그보다 가난한 과부의 마음을 헤아리셨습니다.
아무리 적은 돈이라도 인생 자체가 담긴 것이라면 가장 많은 돈이 됩니다.
가장 적은 것이라도 보아주시고 그 가치를 알아주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먼 훗날 잘 되면 크게 돕겠다고 말하는 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는 지금 할 수 있는 만큼 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액수의 많고 적음보다 정성의 마음이 더 중합니다.
우리는 속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때는, 건축 기금을 모으면서 나름대로 모금 액수를 정하고
아무개는 얼마, 아무개는 이 정도는 해 주겠지! 하며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 후 그들을 바라보는 제 마음이 힘이 들었습니다.
각자에게는 남모르는 사정이 있을 수 있으니,
정성을 보고 마음을 보아야 하는데 봉헌금의 많고 적음으로 사람을 보았습니다.
저도 별수 없이 물질에 휘둘렸습니다.
그 후로 저는 더 큰 믿음의 성장을 위해 노력하고,
‘물질의 봉헌 이야기를 줄이자! 고 다짐을 했습니다.
억지로 한다면, 아무리 많은 액수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자기를 선전하고 과시하며 위신과 체면을 생각하는 헌금을
하느님께서는 결코, 기뻐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이 크면 모두가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요,
주님의 것이기에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감사의 마음이 솟아날 것입니다.
속마음을 헤아리시는 주님을 만나시길 희망합니다.
물질보다 주님을 선택하는 지혜로 모든 것을, 차지하시길 기도합니다.
양적으로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 데 익숙한 부끄러움에서 벗어나길 바랍니다.
많고 적음의 차이는 무엇을 중심으로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부분은 부분입니다. 전체보다 클 수는 없습니다. 모두는 부분보다 큽니다.
먼저 하느님께 바칠 것을 떼어놓고 그다음 나를 위한 계획을 세우면 어떨지요?
물질뿐 아니라 시간이나 공간, 재능, 여행, 모두를 말입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큰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인색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1982년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정부는 ‘졸업정원제’를 채택했습니다.
입학 정원보다 더 많은 학생을 선발했습니다.
정부의 방침에 따라서 입학 정원의 30%를 더 선발했습니다.
신학생 정원이 80명이었는데 30%를 더 선발해서 104명이 입학했습니다.
입학 정원에 따랐으면 24명은 신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에 저를 포함해서 신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은 ‘성소(聖召)’가 있었다고 하느님께 감사했습니다.
졸업정원제는 문제가 있어서 폐지되었습니다.
졸업정원제가 있는 경우 학생들은 졸업에 필요한 성적을 유지하기 위해
과도한 경쟁과 스트레스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학업에 대한 부담을 가중하고 정신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습니다.
졸업 여부가 학문적 성취도나 역량보다는 정원에 따라 결정되는 경우,
실력과 상관없이 졸업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생길 수 있어 불공정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습니다.
남학생들은 졸업정원에 해당하지 못하면 군대에 갈 수 있었지만,
여학생들은 졸업정원에 해당하지 못하면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신학생들은 공부에 대한 부담이나, 졸업정원에 들지 못할 걱정은 없었습니다.
신학생들은 다른 이유로 사제 성소를 포기했습니다.
졸업할 때 이미 입학 정원이었던 80명에 미달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 요한이 보니, 어린양이 시온산 위에서 계셨습니다.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 명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요한이 이야기하는 숫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입학 정원은 아닐 겁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졸업정원도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이야기하는 숫자는 어떤 뜻이 있을까요?
이 숫자는 문자 그대로의 인원수를 의미하기보다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충만함과 완전함을 나타내는 상징적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
144,000은 12(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와 12(사도들),
그리고 1,000(큰 무리를 의미하는 상징적 숫자)의 곱으로, 구약과 신약의 모든 믿는 자들,
즉 모든 시대와 모든 민족에 걸친 하느님 백성의 완전한 수를 상징한다고 해석됩니다.
144,000명은 어린양 예수와 함께 서 있는 자들로 묘사됩니다.
그들은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들’로서,
영적으로 순결하고 하느님께 봉헌된 자들을 나타냅니다.
이는 하느님 앞에서 정결하고 신실한 믿음을 가진 자들의 모습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144,000명은 우상 숭배와 세속적 유혹에 저항하고,
하느님과 예수님께 충성 약속을 지킨 이들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이들은 세상의 혼란과 박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신앙을 지킨 자들을 나타냅니다.
144,000명은 문자적인 인원수라기보다 하느님께 선택되고 구원받은
모든 신자의 완전성과 충만함을 상징하는 숫자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십니다.
예수님 시대에 과부는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보호받아야 했습니다.
그런 과부가 아주 작은 돈이지만 정성껏 봉헌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과부를 칭찬하신 겁니다.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 재물, 학식, 직업이 아닙니다.
능력, 재물, 학식, 직업은 우리의 인격을 감싸주는 옷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겉모습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들의 마음을 보십니다.
그 마음을 이웃과 세상을 향해 나누는 우리들의 정성을 보십니다.
새로운 한 주간을 시작하는 월요일입니다. 일주일은 168시간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시간, 이웃을 사랑하는 시간,
성서를 읽고 묵상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16시간을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 사용한다면 그것이 바로 신앙의 십일조입니다.
예전에 선배 신부님께서 ‘인생은 흑자’라는 강론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루를 살아도, 순간을 살아도 우리 인생은 흑자라는 신부님의 말씀을 다시 생각합니다.
걱정과 근심, 두려움과 절망은 모두 날려버리고,
희망의 날개를 펴고 주님께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거짓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흠 없는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
조욱현 토마 신부
예루살렘 성전에는 나팔 모양의 헌금 궤가 13개가 있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 나팔 궤 가까이 앉으시어 많은 사람이 헌금하는 것을 보고 계셨다.
그때 가난한 과부가 자신이 가진 돈이라고는 엽전 두 닢밖에 없었는데 그것을 다 넣는 것을 보시고,
“저 가난한 과부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그 돈은 그 과부가 가진 것 전부였기 때문이다(3-4절 참조).
이 과부는 심판 날이 되기도 전에 심판관으로부터 칭찬을 들은 복되고 영광스러운 여인이다.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할 과부가 내놓았으니, 그런 칭찬을 들었다.
가난한 이들도 마땅히 선행을 실천해야 한다.
가난한 이를 돕는 것은 하느님께 예물을 바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선을 행하는 이를 어여삐 여기신다. 이러한 예물이 하느님의 예물이다.
예수님께서는 과부가 하느님의 예물 함에 렙톤 두 닢을 넣었음을 지적하셨고,
가난한 사람을 가엾이 여기는 이는 하느님을 돕는 사람임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과부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과부의 렙톤 두 닢은 그의 전 재산이었다.
그에게는 남은 것이 없었으며, 그래서 빈손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 빈손은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주님께 바친 손이었다.
그 과부야말로 거룩하신 심판관께 최고의 칭찬을 들어 마땅한 사람이다.
마음으로 기꺼이 바쳤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것은 참된 제물이다.
주님께서는 부자의 많은 예물보다 가난한 자가 사랑과 열성으로 바친 예물을 더 즐기신다.
과부의 가난은 신앙의 신비 안에서는 풍요로운 부였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여관 주인에게 그 사람을 돌봐 주라며 내놓은 두 데나리온(루카 10,35)도 그런 돈이다.
가난한 과부는 병자들이 치료받고 주린 이들이 배를 채울 예물을
헌금 궤에 넣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였고
그렇게 하여 교회를 나타내는 신비스러운 표상이 되었다.
친절을 베풀어도 온유해지지 않는 심술궂은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자선은 반드시 열매를 맺고 선행 역시 헛수고로 끝나는 법이 없다.
선행에 낯선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자선이 값지다. 모든 동정이 열매를 맺게 되어있다.
그분은 각기 다른 재산을 주시지만, 똑같은 사랑을 요구하신다. 이 사랑을 드려야 한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지극히 작은 봉헌과 희생을 기쁘게 받아주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언젠가 한 무리의 아이들이 자원봉사 활동을 왔을 때가 기억납니다.
사실 아이들이 자원봉사 활동을 하러 오면,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성가시고 번거로울 때가 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적절한 봉사 활동 거리도 찾아야 되고,
주의 사항을 잘 설명 해야 되고, 옆에 붙어서 관리도 해야 하고 복잡합니다.
그래도 아이들이 뭔가 도와보겠다는 그 마음이 가상하고 기특해서 기쁘게 함께 하며,
큰 도움이 되지 않았더라도, 잘 했다, 고생했다고 칭찬하며,
아이들이 좋아하는 간식을 함께 나누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우리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시선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우리 인간이 그분을 돕겠다고 나름대로 팔을 걷어붙이고, 열심히 뛰어 다닌다 할지라도,
사실 그분 보시기에 웃기는 일이거나 아무것도 아닐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엄청 대단한 것처럼 여겨질지 모르겠지만,
주님 보시기에 별 도움도 안 되고, 오히려 방해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러나 그분께서도 우리의 그 작은 마음, 그 작은 봉헌, 그 작은 노력을 눈여겨보시고, 기뻐하십니다.
감격스러워하시고 행복해하실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헌금함에 렙톤 두 닢을 넣은 가난한 과부를 크게 칭찬하십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 3-4)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그 렙톤 두 닢은 일생에 도움이 안되는 금액입니다.
렙톤은 당대 통용되던 화폐들 가운데 가장 가치가 낮은 그리스 동전이었습니다.
한 렙톤은 당시 노동자들 하루 품삯의 144분의 1가치를 지닌다고 하니,
우리나라 돈으로 5~600백원 정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한 렙톤으로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겨우 자판기 커피 한잔 뽑아 마실 수 있는 금액입니다.
성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면 적어도
5만 원권이나 10만 원, 100만 원짜리 수표 정도는 넣어줘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딸랑 동전 두 개를 봉헌한 과부를 칭찬하십니다.
금액의 크기보다는 마음을 보시는 주님,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는
내면을 중요시 여기시는 주님이심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어 참으로 기쁩니다.
오늘 우리의 보잘것없는 봉헌, 오늘 우리의 아주 작은 희생,
오늘 우리의 티끌만 한 봉사도 크게 어여삐 여기시고,
기쁘게 받으시는 주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그분께 드릴 작은 봉헌을 준비해야겠습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봉헌에 대해 들려줍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루카 21,3)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헌금함에 넣습니다.
당시에는 통 속에 돈이 떨어지는 소리로 봉헌의 수량을 가늠할 수 있었다고 하지요.
앞서 부자들이 냈던 소리와 그 과부의 소리는 사뭇 달랐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녀의 봉헌을 크게 치하하십니다.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4)
그녀는 가진 것이 별로 없이 빈곤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데다, 과부였으니 약자 중의 약자인 셈입니다.
생활비를 주님께 다 드릴 수 있는 건,
그녀가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의탁하는 사람이었기에 가능했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의 봉헌을 다른 부자들의 그것보다 더 귀하게 보시는 이유는,
예물을 받으시는 주님이 숫자가 아니라 마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이 과부는 전 재산인 동전 두 닢과 함께, 주님께 자신의 생사를 던진 것입니다.
자기 살림을 주님 손에 오롯이 되돌려 드린 것이지요.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고, 저도 당신의 것이니
죽이든 살리든 당신 뜻대로 하십시오. 저를 당신께 맡겨 드립니다.' 하는
온전한 의탁과 신뢰의 마음이 읽힙니다.
이 온전한 의탁을 보시고 하느님은 가만히 계실 수는 없으시지요.
그분께서 친히 나서실 겁니다. 반드시 그럴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어린양을 모시고 선 십사만 사천 명의 거룩한 영혼들이 보입니다.
그들은 어떤 이들일까요?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묵시 14,1)
그들은 주님만 생각하는 이들입니다.
오매불망 하느님과 예수님을 그리워하는, 그래서 정결한 이들이지요.
그들은 마음에 다른 우상을 품지 않습니다.
모든 사물과 사람에 앞서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 새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묵시 14,3)
그들은 언제나 주님을 찬양하는 이들입니다.
찬양이 그들이 일상으로 올려드리는 목소리이고, 감사와 찬미는 그 내용입니다.
"그들은 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는 이들입니다."(묵시 14,4)
그들은 주님만을 따릅니다.
세속의 화려한 명예와 재물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고,
그곳이 어디이든 주님이 가시는 것이면 어디라도 그분 뒤를 따라 걸어온 이들입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거짓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묵시 14,5)
그들은 말씀을 품고 진리를 말하는 이들입니다.
말씀이 그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지배하는 유일한 원리입니다.
그들이 사랑하는 말씀은 그들 입을 맴돌고 적시다가 세상으로 흘러나와
어둠과 더러움, 탐욕과 증오를 정화합니다. 진리가 그들을 그렇게 만듭니다.
이들이 세상에서 잘나고 부유한 권세가들이었을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만,
오늘 복음 속 과부처럼 모든 것을 주님께 바친 이들이었던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주님과 사이에 지상 삶에서부터 차곡차곡 사연과 추억을 쌓아온 이들일 것이고,
세상 풍파에 휘청이다 쓰러지면서도 세상 힘이 아닌,
그분 가슴에 기대어 신뢰를 쏟아내던 이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흠 없는 사람들입니다."(묵시 14,5)
한갓 피조물인 사람에게 흠이 없을 수 없지만, 이들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들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믿음과 사랑을 보시고
그들의 영혼을 사랑의 불로 말끔히 태워 흠 없게 해 주셨습니다.
삶의 파도가 묻힌 때와 오염과 얼룩은 어린양의 피와 뜨거운 사랑의 불로 희어집니다.
온전히 바친 이는 온전히 거룩합니다.
오늘 복음 속 과부에게서 예수님의 온전한 봉헌을 마주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종의 모습을 취하심으로써 가난하게 되셨고,
사형수가 되어 생명마저 아버지께 올려드리셨으니까요.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아버지 향한 온전한 의탁과 신뢰가
그 어느 누구의 예물보다 귀한 건 믿음과 사랑으로, 전부를, 온전히 다 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허락하신 육적 영적 자원은 다 다릅니다.
재산이나 지식, 신분과 권력의 정도도 다 다르지요.
그러니 우리가 주님께 바치는 영육의 예물을 외적으로 비교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다만, 더 드릴 수 없는 안타까움에 동동거리는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서 아시니 위로가 됩니다.
주님은 수량이 아니라 마음을 보시니까요.
순수한 의탁과 신뢰로 그분께 온전히 자신을 던지는 사랑을 그분은 아십니다.
부족한 우리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며 주님께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가난한 과부의 봉헌을 이어가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헌금의 가치는 마음이 결정한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은 가난한 과부가 자신의 가진 모든 것을,
헌금으로 바친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성전에서 사두가이파 사람들과 부활에 관한 토론으로
그들의 입을 막아버리고,(20,27-40)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경계하라(20,45-47)고 가르치신
예수께서 그곳을 나오셔서 성전밖에 설치된 헌금 궤를 보고 계셨다.
예루살렘 성전 밖 ‘여인의 뜰’에는 각각 다른 명목의 헌금 궤가 13개나 있었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넉넉함에서 얼마씩 헌금하였지만,
어떤 가난한 과부는 작은 동전 두 닢을 헌금하였다.
그 두 닢이 곧 과부가 가진 모든 것이었다.
액수로 따지자면 보잘것없은 돈이지만,
예수께서는 어느 누구보다도 과부의 헌금이 컸다고 하셨다.
가진 것을 몽땅 바쳐버린 과부는 앞으로 어떻게 살까 하는 생각이 우리의 머리를 스친다.
실제로 그랬을까? 아니면 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것일까?
오늘 과부의 헌금이 어떤 헌금보다 큰 헌금이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과부 헌금의 사실유무를 떠나서
헌금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액수의 많고 적음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헌금이나 헌물에서 그 진정한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바치는 사람의 마음 자세이다.
헌금의 액수에 관계 없이 헌금에는 내는 사람의 마음이 담겨있다.
그 마음은 제각기 다르다. 헌금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마음이 담겨있는 경우가 있으니.
달갑지 않고 억지로 내는 마음, 자기의 위신이나 남의 이목 때문에 내는 마음,
넉넉하면서도 인색한 마음, 자기를 선전하고 광고하려는 마음,
마음조차 담지 않고 그냥 내는 마음 등이 그런 것이다.
액수의 많고 적음을 떠나 자신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을 바친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그렇다고 헌금이 가진 모든 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하느님께 예물을 바친다면 정성껏 바쳐야하고,
가진 것 중에 제일 좋은 것을 골라 바쳐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가진 것 중 가장 귀하고 좋은 것은 바로 우리의 생명이다.
이 생명을 차마 바칠 수 없기에 우리는 생명을 대신할 만한 것을 바치게 되는 것이다.
생명을 바친다면 그것은 가진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자신의 생명을, 세상을 위해 내어놓을
예수님의 마지막 죽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사도 바울로는 말한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은혜로우신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부유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이 가난해지심으로써 여러분은 오히려 부유하게 되었습니다.”(2코린 8,9)
하느님이 인간이 된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사실이다.
생각해 보라.
지고의 존재인 하느님이 인간이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하느님의 것을 버려야 하며,
또 얼마나 많은 인간적인 한계를 감수해야 하는지를 말이다.
이런 포기와 감수는 사랑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엄청난 일이 실제로 예수 안에서 일어난 것이다.
예수께서는 인간이 되심으로 가난하게 되셨다.
십자가 위에서 그분은 더욱 가난하게 되셨으며, 죽으심으로써 가진 모든 것을 내어놓으셨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참다운 사랑이 그분 안에서 밝히 드러났다.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이토록 크신 사랑이 드러났다면,
오늘날 예수님의 그 큰 사랑은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가?
확실한 것은 부자들의 ‘가벼운’ 헌금보다는 과부의 ‘온전한’ 헌금 속에
그 모습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